“형님, 나를 결혼시킨다 생각하고 미리 땅을 주시요.”
큰형이 땅의 명의를 넘겨주자마자 미리 교섭해 놓았던 이에게 바로 팔아버렸다. 거금 1,200만 원이 나왔다. 서울에서도 좋은 양옥을 살 수 있는 큰돈이었다. 윤한봉을 이 돈을 후배 정상용과 이강에게 주면서 생산자와 소비자를 직거래로 연결하는 상점을 열어보라는 아이디어까지 제공했고 후배들은 광주 농성동, 지산동, 주월동에 ‘꼬마시장’이란 이름으로 점포를 개설했다. 그러나 운영이 잘 되지 않아 모두 망하고 돈만 날리고 말았다. 설사 꼬마시장이 성공했더라도 그는 언제나 거지였을 것이다. 자취방을 정리하러 갔던 날, 황광우는 윤한봉이 속옷 갈아입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상의를 벗으니 앙상한 갈비뼈가 기타 줄처럼 드러났다. 너무나 깡마른 몸에 황광우는 가슴이 아팠다. 이때 황광우가 본 것은 가방 하나가 살림살이의 모든 것인, 무소유주의자의 속살이었다. 무욕의 삶을 지향하지 않고서는 투사의 길, 고난의 길을 걸을 수 없겠지만, 한국의 수많은 민주화운동가 중에서 윤한봉처럼 일관된 무소유주의자는 찾기 어렵다. 황광우는 훗날 술회한다. “큰 산은 가까이에서 산의 전모를 볼 수 없지요. 내가 형과 너무 가깝다보니 한봉 형의 삶을 어떻게 평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의 간디라고 해야 할지, 한국의 호지명이라고 해야 할지… 확실한 것은 그의 일면만 보고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거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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