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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4-국제연대2019-01-01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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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우리가 가면 그들도 온다”


미국과 유럽에는 반전반핵을 위한 수많은 시민단체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또 세계 여러 약소국에서 온 정치단체들이 자국의 문제를 국제사회에 호소하고 있었다. 한청련과 한겨레는 이들이 벌이는 국제적인 평화운동에 동참했다. “우리가 가면 그들도 온다.” 한반도의 평화통일 염원을 널리 알리기 위한 국제 연대 활동의 일환이었다.

한청련은 ‘반전반핵을 위한 국제연대’를 조직하고 주도했다. 이 단체는 한국의 진보운동사에 있어서 기념비적 조직이었다. 일제강점기부터 적지 않은 한국인들이 해외로 망명했으나 다른 민족들과 연대해 공동투쟁을 한 경우는 없었다. 한청련은 처음부터 국제연대를 실천 목표의 하나로 설정했고, 또 이를 실천한 유일한 한인단체였다.

윤한봉은 처음 시애틀에 왔을 때부터 여러 민족들의 활동을 목격한다. 로스앤젤레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여러 민족들은 각자 조국의 민권을 위해서 활동을 하고 있었다. 또 미국에서 겪는 자기 민족의 부당한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활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큰 감명을 받는다. 그는 말한다.

미국에 온 이후 나는 남아프리카공화국, 필리핀, 니카라과, 엘살바도르, 팔레스타인 등 제3세계 민족의 국제연대운동을 보았다. 또 미국인들이 벌이는 제3세계 연대운동에 대해서도 보고 듣게 되었다. 나는 미국 내의 좌파운동, 평화운동, 노동운동, 흑인들의 민권운동에 대해 보고, 듣고, 배우면서 국제연대운동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곧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또 생각을 바꾸는 것은 언어를 바꾸는 것이라고 윤한봉은 생각했다. 그는 국제연대에 관련해서도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냈다. ‘국제외교 연대운동’이란 국어사전에도 없던 단어였다. 윤한봉은 ‘국제외교 연대운동’이라는 새 단어를 만들면서 ‘인류의 공존공영 및 각국의 특수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나라 운동과 상호 지원하고 협력해 투쟁하는 운동’이라는 사전적 정의까지 붙였다.

윤한봉은 국제 외교운동을 위한 원칙과 자세를 다음과 같이 세웠다.

 

- 외교연대 활동을 할 때는 어느 때 어느 곳에서라도 민족의 존엄과 조국운동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일이 없도록 언행을 조심해야 한     다.

- 외교활동은 구체적이고 명확한 과제와 목표를 갖고 당당하면서도 진실하게 해나가야 한다.

- 미국인 형제들과 단체들에 대해서는 조국과 미국의 대등한 관계 정립의 추구라는 사실을 밝히고 당당하나 정중하게 대해야 한다.

 

윤한봉에게 국제연대는 그 자체 운동의 목표였다. 늘 약자의 편에 서서 약자의 이익을 대변하고, 대동 세상을 희구한 그에게 있어서 국제연대는 운동의 목표와 연관된 최상의 운동이었다.

윤한봉은 동시에 한국인이 해결해야할 역사적 과제를 고심했다. 윤한봉은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열정적으로 희구했다. 그런데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은 미국과 중국이 관련된 문제이다.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기 위해선 휴전협정의 당사국인 미국과 중국의 공조가 필수적이다. 따라서 평화 통일 운동은 한반도 내에서만 국한되는 운동이 아니라, 미국과 중국 나아가 전 세계 시민들과 함께 진행해야 하는 운동이었다. 어느 문제와 달리 평화 통일 운동은 사안의 성격상 국제연대를 요구한다.

윤한봉은 이상주의자이자 동시에 리얼리스트였다. 3억 5,000만 명이 모여 사는 미국에서 진보적 운동을 추동하기 위해 윤한봉은 타민족형제들의 지원이 절실하게 필요함을 자각했다. 농부가 농사를 효과적으로 짓기 위해선 이웃 농부들과 품앗이하듯이, 약소민족의 요구를 실현하기 위해선 약소민족 운동가 상호간의 긴밀한 협력체제가 필요했다.

한청련은 의욕적으로 국제연대운동을 시작했다. 한국의 운동권이 진출하지 않은 분야라서 황무지를 개척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우선 한국의 문제들을 홍보하기 위해 영어로 자료를 만드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또 한인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영어로 된 자료들을 한글로 번역했다. 초기에는 데이비드 이스터가 발행한 전단을 손질해서 쓰는 수준이었으나 나중에는 핵 문제, 주한미군 문제, 분단 모순, 인권 상황, 노동 문제 등을 다룬 십여 종의 전단을 영문과 한글로 제작해 집회에서 나눠주었다. 구호를 적은 단추와 스티커도 각각 10여 종씩 만들어 배포했다.

좀 더 전문적인 자료도 만들어 나갔다. 핵 문제, 주한미군 문제를 다룬 슬라이드 ‘파멸이냐 생존이냐’를 직접 제작했다. 국내에서 나온 각종 비디오테이프와 시청각 자료들을 영어로 재녹음했다. 광주항쟁을 비롯한 여러 문제들을 대형 걸개그림과 각종 플래카드, 깃발로 제작해 국제적인 집회 때마다 사용했다.

윤한봉은 한국의 군부독재를 지원하지 못하도록 미국 의회에 압력을 행사할 민간차원의 로비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1986년 워싱턴DC에 ‘한겨레미주홍보원’을 만들기로 했다. 그런데 워싱턴DC는 교민이 거의 없는 도시여서 마당집을 만들 기반이 없었다. 다른 지역에서 회원들과 이사들이 후원금을 갹출하고 인원을 파견해 일종의 특별지부를 만들었다.

없는 돈에 값싸고 넓은 사무실을 찾다가 좋은 공간이 있어 덥석 얻고 보니 홍등가였다. 밤에는 분위기가 이상해서 나다니기도 어려운 곳이었다. 그래도 한국의 민간단체가 얻은 최초의 로비공간이었다. 미주홍보원은 의회에 찾아가서 독재정권의 인권 유린을 알려 나갔고, 백악관 앞에 가서 시위를 했다.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방미했을 때는 백악관 앞에서 수십 명이 시위를 벌였다.


《코리아 리포트》라는 영문 기관지를 발행했다. 이 기관지를 모든 국제단체에 보급했다. 《코리아 리포트》는 민주화투쟁, 통일운동, 노동운동 등 다양한 국내 소식을 심도 있게 다루었다. 이후 7년이나 발간한다. 또 영문으로 된 자료집을 발간해 보급했다. 《코리아 투데이》이다. 각 지역에서 파견되어 온 회원들이 교대로 미주홍보원의 상근자로 일했다. 다른 마당집들과 마찬가지로 무보수 상근이었다. 아니 상근자들이 운영비를 벌어오는 체제였다. 최양일, 이지훈, 이진숙, 서혁교, 홍정화, 서재정, 유정애, 이성옥, 정승은 등 참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의 청춘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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