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미국 도처에 한청련을 세우다
윤한봉의 설득력은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1986년 8월, 시애틀과 시카고, 뉴욕과 필라델피아, 워싱턴DC 등에 한청련 지부와 마당집을 만들었다. 회원의 기준은 엄격했다. 정회원과 예비회원으로 구별했다. 합치면 300명에 이르렀다. 뉴잉글랜드와 달라스, 덴버는 지부를 만들었으나 조직 관리의 어려움 때문에 해체시켰다. 한청련 활동가들에게 맨 먼저 부과된 과제는 마당집 건립이었다. 적으면 7, 8명만으로도 한청련의 지부조직을 만들 수 있었으나 그 힘으로 사무실을 개설하고 운영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필라델피아는 교민이 수천 명에 지나지 않고 유학생도 별로 없는 곳이었다. 세탁소를 운영하던 장광선과 목공으로 일하던 임용천이 몇몇 청년들과 함께 모여 한국의 월간지를 읽고 있었다. 여기에 윤한봉이 나타났다. 몇 달 동안 체류하면서 필라델피아의 청년들도 한청련을 조직한다. 필라델피아 한청련 조직의 과정에는 장광선의 역할이 지대했다. 윤한봉에 반해 버린 그는 지역 선배들의 불신을 해소시켜 나갔다. 본인의 세 동생들부터 회원으로 만들었다. 장맹단, 임용천, 이종국, 신경희, 정승진 등과 함께 마당집 건림 자금을 모으기 위해 뛰어다녔다. 한청련 회원들에게 모금이란 개인들로부터 걷는 기부금이 아니었다. 스스로 일해 돈을 벌고, 번 돈을 아낌없이 내는 헌금이었다. 중고품을 구해 장사를 했다. 전자제품부터 식기도구, 장난감, 가구, 의류, 신발까지 온갖 중고품들을 가져와 깨끗이 닦고 빨아서 길가에 늘어놓고 팔았다. 미국은 인스턴트식품의 나라다. 빈 깡통이 널려 있다. 회원들은 시간만 나면 빈 깡통을 모아다, 일일이 발로 밟아납작하게 만든 다음 고물상에 내다 팔았다. 성탄절엔 크리스마스트리와 꽃을 만들어 팔았다. 이렇게 돈을 벌어 1년 반 만에 마당집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필라델피아의 경우 마당집 이름을 ‘청년 마당집’이라 했다. 필라델피아 마당집은 지역의 특성상 오래 가지 않아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장광선의 동생 장광민은 시카고로 가고, 신경희는 로스앤젤레스로 간다. 홍정화는 워싱턴 디시로 가고, 정승진은 뉴욕으로 간다. 뉴잉글랜드의 경우는 한인 이주민이 거의 없는 곳이어서 필라델피아보다도 더 열악한 조건이었다. 대신 유학생들이 많았다. 이곳에도 정기열, 정민, 최관호, 서혁교, 이난희, 이지훈, 최관호, 김희상, 이성단, 유정애, 권혁범 등 의식 있는청년 15명이 학습모임을 하고 있었다.
광주학살을 목격하고 피가 끓는 젊은이라면 손을 놓고 있을 수 없었다. 조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뭔가 실천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즈음 윤한봉이 나타난다. 2박 3일의 토론회를 하면서 이들은 쉽게 한청련으로 조직화 된다. 당시 대학을 갓 졸업하고 매사추세츠 대학에서 직원으로 일하다가 참여하게 된 유정애는 이렇게 말한다. 그때 처음으로 합수 형을 만난 거죠. 충격적이었어요. 갑자기 시골 사람 같은 남자 하나가 나타나서 청산유수로 말을 하는 거예요. 굉장히 충격적이었어요. 그때까지 제가 접해온 사람과 다른 부류의 사람인거죠, 모든 게. 뉴잉글랜드의 경우 회원들이 각각 여러 도시로 옮겨 국제연대운동의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뉴욕 한청련도 몇몇 유학생들이 윤한봉을 만나면서 조직된 경우였다. 고려대를 나와 뉴욕에서 공부하고 있던 강완모와 권혁범, 유니온 신학대를 다니고 있던 한호석, 김난원 등이 핵심이었다. 강완모는 윤한봉과의 첫 만남을 이렇게 기록한다. 그때 나는 유학생이었어요. 나는 윤한봉을 뉴욕에서 처음 만났지요. 우리는 그럴듯한 차림새의 점잖은 사람을 기대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차림새며 모습이 영 우리가 생각하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서울역 앞의 지게꾼 아저씨 같은 사람이었어요. 뒤에 또 누가 들어오지 않나 하며 주위를 살피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렇게 처음 만난 한봉이 형님은 사정없이 우리를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살아있는 예수, 한국의 레닌이었어요! 그때 같이 만났던 사람들이 하던 말들입니다. 그 뒤 일 년도 안 되는 동안 우리는 뉴욕과 뉴잉글랜드에 한청련을 만들었고 그 후 10년 동안 천둥벌거숭이, 야생마가 되어 한봉이 형님과 시간을 함께했습니다.
정신과 의사 김수곤 역시 윤한봉에게 반한 원로이다. 25년이나 뉴욕의 마당집 이사장을 하고 있는 어른이다. 그는 윤한봉에게서 동학의 지도자 최시형을 떠올린다. 운동화 신고 똥가방 매고 다니는 것이나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힘을 가졌다는 점에서 짚신 신고 전국을 떠돌며 동학의 기초를 닦은 최시형과 같다고 그는 말한다. 한국인이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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