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광주 희생자를 돕기 위한 모금
윤한봉은 민주화운동을 시작한 이래 모든 정열을 오로지 변혁운동에 바쳤다. 단 한 푼 개인 재산을 모으지 않았다. 그는 통장 하나 갖지 않았다. 운동에 뛰어든 순간부터 그가 가진 재산이라고는 오로지 ‘똥가방’ 하나였다. 윤한봉의 똥가방엔 온갖 잡다한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속옷과 양말, 칫솔과 치약, 빗과 손톱깎이를 담은 이 가방 하나를 들고 윤한봉은 동료들의 집을 돌아다니며 살았다. 옷은 돌아다니며 얻어 입었다. 신발 역시 낡은 운동화 한 켤레였다. 술은 체질상 한 잔도 마시지 못했다. 남에게 술값 신세질 일은 없었고 술자리에서 허튼 약속을 할 이유도 없었다. 윤한봉은 직책이나 직위를 고집스럽게 거부했다. 자신이 만든 단체에서조차 공식적 직책을 맡지 않았다. 전라도 촌놈이요, 썩어 없어질 거름이라며 낮추고 다녔다. 하지만 윤한봉은 말에 있어서만큼 자유로웠다. 그 누구의 눈치도 아랑곳하지 않았고, 그 어떤 권위에도 굴하지 않았다. 아니 강자에 대해선 도리어 핏발 세우며 대들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거리낌 없이 주장을 펼치는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그에 대한 반응 역시 호감과 반감으로 나뉘었다. 양심을 찌르고 들어오는 그의 날카로운 비판 앞에서 자존심의 상처를 입은 이들이 생겼다. 반면 솔직하고 담대한 그를 신뢰해 함께하고자 따르는 이들도 생겨났다. 홍기완도 그중 한명이었다. 그는 윤한봉이 미국에 와서 처음 사귄 동갑내기 친구였다. 1970년대 초에 로스앤젤레스로 이민 온 그는 괄괄한 성격을 가진, 정의감 넘치는 다혈질 청년이었다. 결혼해 두 아들까지 두고 목수 일을 하던 그는 윤한봉을 만나 인생이 뒤바뀌어버린 한 명이었다. 가까이에서 가장 많이 언쟁을 했고 서로 악을 쓰며 싸우는 사이였으나 두 사람은 단짝이 되어 독자적인 해외운동을 추진하게 된다. 처음에는 이름도 없이 다섯 명 정도가 모여 시작했다. 나중엔 ‘광주 수난자 돕기회’라는 정식 명칭을 갖게 되는 모임이 그들의 첫 활동이었다. 광주항쟁의 부상자와 유가족들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모금단체인 ‘광주 수난자 돕기회’는 김동건, 홍기완, 이길주, 이인수 다섯 명의 회원으로 출범했다. 1982년 6월부터 매월 한 차례씩 만나 소액의 기금을 거두기 시작했다.
이 모임은 이름도 없이 시작해서 뒤에 우리끼리 ‘광주 수난자 돕기회’라고 불렀지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이 모임은 매달 한번 만나서 일정한 금액을 걷었다. 한 번도 어김없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끝까지 함께 했다. 이렇게 모은 돈이 조금씩 쌓이면 YWCA의 조아라 장로님 앞으로 송금했다. 우리는 조아라 장로님을 만나본 적도 없지만 윤한봉이 추천한 분이어서 믿고 송금했다. 지금도 그 돈을 어떻게 썼는지 모른다. 1988년까지 6년 동안에 3만 불을 보냈다는 윤한봉의 얘기는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다. 윤한봉이 수난자회를 만든 이유는 금전적 지원에도 있지만 광주항쟁의 진상을 미국 동포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함이었다. 수난자회의 회원이라면 작은 돈이라도 회비를 내야하는 만큼 윤한봉도 직업을 갖고 돈을 벌어야했다. 그러나 취업은 쉽지 않았다. 이민국은 망명허가를 좀처럼 내주지 않았다. 대신 노동허가증을 주었는데 윤한봉이 취업할 만한 곳은 없었다. 1982년 10월, 난데없이 슬픈 소식이 들려왔다. 전남대 총학생회장이던 박관현이 군부독재에 항의하는 단식을 하던 중 감옥에서 사망했다는 것이다. 박관현은 윤한봉의 아끼던 후배였다. 1980년 5월 16일 도청 앞 횃불시위를 주도하면서 불같은 사자후를 뱉은 일로 광주 시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젊은 운동가였다. ‘만일 전두환과 그의 군부집단이 계엄령을 발포하면, 저 폭력집단에 맞서 최후의 일인까지 투쟁합시다. 우리의 자유를 위해서, 우리의 평등을 위해서, 우리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5월 18일 광주항쟁이 시작되기 사흘 전이었다. 윤한봉은 다가올 군부의 대대적인 탄압에 맞서 각오를 단단히 하자고 박관현을 격려했다. 그것이 두 젊은이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외롭고 슬플 때면 언제나 그랬듯이, 마당 구석에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며 울고 또 울었다. 윤상원의 죽음만 해도 분했는데, 아끼던 박관현까지 목숨을 잃다니, 윤한봉은 죽도록 자신이 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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