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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꽹과리 치고 상모 돌리는 시카고의 김남훈2018-12-26 10:07
카테고리한청련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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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김남훈 선생님

2016년 2월 4일; 시카고 마당집에서

 

면담자 : 안재성

구술자 : 김남훈

 

구술자 : 언제 태어났어요?

구술자 : 68년 2월 26일생이고요

면담자 : 여기 온 게 언제에요?

구술자 : 13살 때 왔어요. 1980년 5.18 직후였죠.

면담자 : 아주 어렸을 때 온 거네요.

구술자 : 부모님이 이민 온다고 해서 따라왔죠.

면담자 : 정치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구술자 : 여기서 살다 보니까 내 정체성을 까먹었어요. 성숙해지면서 내가 누군가, 김남훈이 누군가 의문이 들었어요. 제 이름이 남훈인데, 남녘 남(南)에 공 훈(勳)이에요. 할아버님이 이름을 주셨는데, 남쪽에 공을 세워야 한다는 거요. 그래서 시카고에 살면서 내가 뭘 좀 해야겠다 해서 주변에 있는 형님들을 만나기 시작했죠. 이선우 목사님이 계셨는데 그분 통해서 마당극을 했어요. 전태일 열사를 다루는 마당극을 통해서 감명을 깊이 받았죠. 그래서 내가 누군지 찾기 위해서 그때 청년 교육 문화원이었거든요? 거기에서 북도 치고 연극도 하고 역사 모임도 하고 그러면서 윤한봉 선배님을 그때 뵀죠.

시카고에 한청련이 있었는데 그게 해체됐다가 재건될 때 저하고 박태훈 선배님 추현락 선배님 김미애 선배님 그리고 한분 더 있었는데 다섯 명이 돼야지 조직을 만들 수 있거든요.

면담자 : 그때가 그럼 몇 년도쯤인가요?

구술자 : 아마 87년이었을 거예요. 시카고 한인 청년 연합에 있으면서 합수형님을 그때 처음 뵀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도 형님이라고 부르라고 하셨어요. 친근감 있었어요. 위대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못 느꼈어요. 모임에서 보면 상말을 잘 하시는데, 제가 우리말을 잘 못하는데도 정치적인 이야기를 해주면 귀에 쏙쏙 들어오더라고요. 저 분은 사람을 흡수하는 능력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면담자 : 그러면 87년, 88년 정도부터 문화원에 다니면서 역사 공부도 하고 실천 활동이 있었을 것 아니에요, 어떤 활동이 있었어요?

구술자 : 필라델피아에서 워싱턴 디시까지 행진을 할 때 백악관에서 미 의회를 갈 수 있었거든요. 제가 거기에 참여한 게 뿌듯했죠.

면담자 : 몇 명 정도로 기억하세요?

구술자 : 300명 정도가 참여했어요.

면담자 : 합수형님도 같이 한 거예요?

구술자 : 선배님들이 기획하고 했는데, 합수형님이 워낙 입 힘이 세니까 그렇게 했다고 알고 있어요. 합수형님이랑 2박 3일인가 필라델피아에서 모여서 어떻게 운동에 움직여야 하는지 많이 들었거든요. 평양에서 제13차 세계 청년 대회가 있었을 때 우리는 백두산부터 판문점까지 세계의 진보적 인사들이랑 행진하죠.

그때 필라델피아에서 미팅이 있었는데, 너무 감명 깊었던 게 합수형님이 동그랗게 모여서 얘기하면 가끔 일어나서 할 수도 있잖아요. 처음으로 남쪽의 사람이 북쪽으로 가서 판문점을 거쳐서 내려오는 거였잖아요. 그냥 가면 안 된다 시간을 끌어야 한다 해서 직접 일어나서 몸동작으로 DMZ라인을 긋고서 왔다갔다 갈까 말까 얘기를 하셨어요. 아는 형님도 시카고에 계셨었는데, 그 형님이랑 같이 갔거든요. 한청련에서 해마다 미주 동포대회라고 해서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공부하던 때였거든요. 저는 그때 일찍 가서 도와주고 거의 막일꾼으로 일했어요. 교회를 빌려 밤 늦게 술 먹고 아침에 콩나물 국 먹고 카레 먹고 그렇게 했어요.

면담자 : 엠티랑 비슷하네

구술자 : 네 그거랑 비슷해요. 합수형님은 민족학교에서 담배 피우고 깊게 생각하는 모습을 기억하고 있죠.

면담자 : 그때는 교실 안에서 담배 피웠을 거 아니에요.

구술자 : 주로 밖에서 폈는데 필라델피아에 있었을 때 2주인가 3주 정도 끊었다고 했었어요. 그분은 청바지를 안 입으셨어요. 미국 바지라고 안 입는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매일 봐도 바지가 똑같아. 운동하는 항상 흰 운동화를 신었어요. 바지는 그냥 베이지 바지 같은 거,

면담자 : 서운한 것도 있었겠네요.

구술자 : 서운한건 없고요. 직접 대화 이런 건 못했거든요. 우리말이 모자란데 1.5세 2세들 하고 많이 얘기를 나누고 그랬거든요. 옆에서 지켜보는 수준이었어요. 한번은 발제를 하는데 준비를 너무 많이 해 와서 이 얘기 저 얘기 하고 그러면 종이를 이것도 보고 저것도 보고.

면담자 : 합수형님이 하신 얘기 중에서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게 있을까요?

구술자 : ‘굳세게 살자’ ‘바르게 살자’ 이런 구호가 있잖아요?

면담자 : ‘굳세게 살자’ ‘바르게 살자’ 또 하나 뭐죠?

구술자 : 마당집에 있잖아요. 그런 내용을 저희한테 주시고 가셨어요.

면담자 : ‘굳세게 살자’ ‘바르게 살자’ ‘뿌리를 알자’ ‘더불어 살자’.

구술자 : 또 하나는 합수형님이 얘기를 하셨을 때 니네 마음이 둥글어야 된다는 얘기를 하셨어요. 사람들은 다 각자 자기 모양이 세모도 네모도 될 수 있는데 우리가 같이 살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이 둥글어야 된다고 하셨어요. 돌을 산 위에서 던졌을 때 땅에 가보면 뾰족한 것들이 없어지면서 사람이 둥글어진다는 그런 얘기를 하셨어요. 저도 지금 그런 마음으로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어디 가서 뾰족한 마음으로 살고 있는 게 아니라.

면담자 : 그럼 합수형님 본인도 그랬나요?

구술자 : 제가 보기에는 그렇게 노력을 하신 것 같아요. 줍는 성격이세요. 깔끔한 분이에요. 주변에 있는 종이를 줍는 성격이었어요. 주변을 깨끗하게 하려는 노력을 하시는 것 같아요. 누구 집에 가면 다 밥 먹고 있는데 설거지 해드리겠습니다. 쓰레기 버리고 어떻게 할까요 이렇게.

면담자 : 여기서 북한으로 사람들을 보냈잖아요. 그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이 거기에 대해서 문제를 삼지 않았어요?

구술자 : 문제를 많이 삼았죠. 이런 일을 하면 주변 단체들이 ‘쟤네 빨갱이야.’ 그랬어요.

면담자 : 부모형제가 반대하지 않아요?

구술자 : 그렇죠. 많이 반대를 했죠. 처음에는 어머니가 ‘거기 가면 안 된다 너 빨갱이 된다’고 말했죠. 어머니랑 대화를 나누게 되면서 어머님도 정치적인 것에 대해 얘기하면 사람인데 피가 끓잖아요.

제가 마당집이나 한청련을 알게 되면서 LA에 있는 김준 선배님이랑 같이 문화 일을 했어요, 해외 동포 대회가 있었을 때 전야제 문화프로그램을 만들어 가지고, 각 지역 사람들이 장기자랑을 했었거든요.

면담자 : 문화 팀 멤버가 김준, 또 누구죠?

구술자 : 뉴욕의 정승진, 산호세의 김범식씨. LA의 김준...

면담자 : 산호세는 큰 도시인가요?

구술자 : 큰 도시는 아닌데 거기서도 있었어요. 그때 풍물패 문화패들이 전야제를 했는데 시애틀에 가서 연습도 하고 1주일 동안 4팀이 모여서 같이 연습했어요. 합수형님이 문화만 생각하고 문화운동가에 대해서 생각을 하라고 그랬어요. 그 이후로 ‘일과 누리’도 번창이 되어 시카고에서 유명한 한국 단체가 되었어요. 열정이 있어서 상모도 돌리고. 네 그룹이 모여서 앞으로 문화 일꾼이 되자, 깃발을 들자 다짐했죠. 시카고로 돌아와서 ‘일과 누리’를 열심히 했죠.

면담자 : 네 문화 동아리가 한청련을 매개로 만들어진 거네요.

구술자 : 네. 지신밟기도 미국에서 저희가 최초였어요. ‘일과 누리’도 그렇고 ‘한누리’도 그렇고 ‘비나리’도 그렇고. LA에서 지신밟기를 처음으로 했죠. 제가 봤을 때는 정승진 선배가 대단한 분이에요. 그 분이 워낙 꼼꼼하고 문화 쪽을 잘 알아서 일을 잘 시켰어요. 후배도 잘 챙기고. 승진 형님이 도와 달라 그러면 오고.

합수형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에도 합수형님의 생각이 계속해서 저희에게 남았어요. 합수형님이 귀국하시면서 시카고에서도 조직 사건이 있었어요. 그때 합수형님을 대신할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었거든요. 선배님들은 통일 쪽으로 가고, 광민형이나 재구씨나 우리들은 지역운동에 투신하구요.

면담자 : 그쪽은 통일 운동 쪽으로 가고 싶다고 그랬구나.

구술자 : 여기 보면 나이 드신 분들이 없잖아요

면담자 : 그래서 그렇구나. 그럼 그분들 이름이라도 알아야죠.

구술자 : 최관호, 강상배, 이원우, 정유미 그 분들 중심으로.

면담자 : 선배들이 갈라지지 않았을 때 가장 절정일 때 회원이 몇 명 정도 됐을까요?

구술자 : 한청년 회원이 큰 지역은 20명도 되었고요, 저희도 10명 정도 됐거든요. 다른 소지역 휴스턴, 달라스, 필라델피아, 버지니아, 캐나다의 회원을 다 합하면 한청년 회원이 250명 정도. 한겨레의 선배님들은 80명 정도.

면담자 : 그분들은 어디로 간 거예요? 북한 시스템이 옳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한호석 같은 분들은 어디로 간 거예요?

구술자 : 한호석 선배님은 윤한봉 선배님 밑에 있으면서 지식적인 일을 많이 한 걸로 알고 있는데 한호석 선배님은 많이 못 뵀어요.

면담자 : 통일 운동이라고 하니까 궁금해서.

구술자 : 그때는 핵심 멤버들이 합수형님의 빈자리를 채우려고 고민을 많이 한 것 같아요. 안 좋은 말을 한 것도 같고.

면담자 : 합수형님이 귀국해서도 5.18 문화재단 만드는데 지도적 역할을 하셨지만 사람을 만들고 조직을 세운 진짜 활동은 미국에서 하셨죠.

구술자 : 진짜 미국에서 중요한 역할 많이 하셨어요. 커뮤니티 센터를 만들어서 일한다는 것은 보통이 아니거든요. 맨 처음에는 1.5세 2세들이 전부 엔지니어 변호사 의사들이었죠.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한다’ 가르치면서 이런 친구들까지 같이 일하게 만든 거죠. 큰 틀을 만들어놓고 가신 거에요.

면담자 : 김남훈씨는 시민권자가 된 지 오래 된 거죠? 북한도 왔다 갔다 할 수 있고.

구술자 : 네. 한번 가 봐야죠. 우리가 그 때 쓴 단어들이 우리는 미국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남부조국 북부조국 그렇게 불렀죠. 만약에 내가 한국에서 남부조국이라고 하면 순식간에 빨갱이가 되는 거죠.

면담자 : 그 말 자체가 합수형님이 만든 말이죠?

구술자 :시카고에서 쌀 한포대기 보내기 운동이랄까. 저희가 직접 나가서 서명 받고 20불 30불 받아서 북한에 주고 그랬으니까.... 뉴욕 대회를 갔죠. 그때 전야제에서 우리가 촛불로 한반도 지도를 그렸어요. 20년 전 이야기잖아요. 지금도 머릿속에 있어서 합수형님 생각이 들어요. 가끔 준이 형이랑 전화하면 그런 얘기 하죠. 대학 교수들이 강연을 하면 안 먹히는데. 합수 형이 이야기하면 신이 났어요.

면담자 : 그때 학생이었을까요?

구술자 : 원래는 타지로 대학교를 가려고 했는데 그냥 시카고에 눌러 앉았죠. ‘일과 누리’하면서 징 하나 장구 하나 꽹과리 하나 들고 이렇게 시작했거든요.

면담자 : 95년 그쯤이겠죠?

구술자 : 그렇죠. 여름에 ‘루비니아 페스티벌’이라고 있어요 시카고에 있는 심포니 오케스트라에 부탁했어요. 저희가 인터네셔널 공연을 하는데 와서 도와줄 수 있냐 해서 ‘일과 누리’와 함께 공연도 했어요.

면담자 : (들리지 않음)

구술자 : 그렇죠. 저희가 지신밟기할 때 다섯 명이었어요. 많은 2세들 1.5세들이 한국에 가서 풍물을 배웠어요. 연세대나 서울대나 풍물 교육 프로그램이 많았죠. 악기 배우기가 쉬우니까 배워 와서 그때 붐이 일었어요. 합수형님이 저희들더러 배워오라고 했죠. 다시 와서 시카고 대학교이니 일리노이 주립대에 풍물 동아리가 많이 생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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