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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필라의 기둥, 장광선의 회고2018-12-20 13:07
카테고리한청련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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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광선 구술 녹취문

□ 개요

○ 구술자 : 장광선

○ 면담자 : 김경택(5·18기념재단 진실조사팀)

○ 구술일시 : 2014년 11월 16일

○ 구술장소 : 미국 필라델피아

 

□ 녹취록

 

구술자 : 저는 1946년에 전라남도 장흥군 용산면에서 태어났어요. 거기에서 초등학교까지 나오고 강진 중학교와 강진 농업 고등학교를 나왔습니다.

면담자 : 고향 생각은 있으신가요?

구술자 : 저희 고향이 외지죠. 산악지대도 아니고 평야지대도 아니고. 노령산맥 끝 부분에서 작은 산들이 빙 둘러싸인 분지 같은 곳이 용산면이거든요. 거기를 지나면 관산면인데. 관산면에는 천관산이라는 아름다운 산이 있죠. 소풍가면 천관산으로 많이 가요.

면담자 : 부모님은 농사를 지으셨나요?

구술자 : 그렇죠, 논 열 마지기를 갖고 먹고 사는 형편이었죠.

면담자 : 형제 관계는 어떻게 되시나요?

구술자 : 저는 6남매 중에 맏이로 태어났었습니다. 제 밑에 세 살 어린 여동생이 있고, 그 밑에 또 세 살 어린 동생이 있고 이런 식으로 세 살 터울로 쭉 6남매죠. 막내가 저하고는 나이가 많은 차이가 나죠.

면담자 : 그 막내 분이 장광민 선생님이신가요?

구술자 : 예.

면담자 :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구술자 : 저희 부모님들은 일찍 결혼을 하셨죠. 어머니가 두 살 위에요, 어머니가 정신대 때문에 차출돼 끌려가게 되니까 다급하게 결혼을 시켜버린 거요. 아버지는 겨우 소학교 졸업을 하셨고 어머니는 소학교도 못 다니셨고. 저희 할아버지가 생각이 특이하신 분이었어요. 가르쳐야 된다는 생각은 가지고 계셨지만 일제 시대에 학교 보내면 일본 놈의 종놈이 된다, 그런 생각을 한 거요. 그래서 자식들 학교 보낼 생각을 안 하신 거예요.

할아버지가 집에서 한자를 가르친 거야. 훈장이라 그러죠. 마을청년들 모아 서당을 하셨어요, 농번기 때는 못하고 겨울철에 서당이 활성화되었어요. 겨울이 되면 저희 집 조그만 사랑방에 한 2,30명 청년들이 모여서 공부를 해요. 그 틈에 껴서 저도 같이 공부하고 그랬죠. 천자반, 소학반, 대학반 나누고 일일이 책을 복사해가지고 나눠주셨죠.

아버지는 해방되기 직전 빨치산 심부름을 하시다가 징용에 끌려가시게 되요. 빨치산 운동하던 분이 귀띔을 해주신 거예요. “엑스레이가 나쁘게 나오면 안 들어가니까 담배를 마셔라. 담배를 물에다 타가지고 마시면 엑스레이 찍을 때 시커멓게 나오면 큰 병이 있는 줄 알고 빼줄 것이다.” 아버지가 담배가루를 엄청 타가지고 마셔버린 거요. 조금만 마셨으면 괜찮았을 텐데. 그때부터 위장병을 앓게 된 거예요. 그때 얻은 병 때문에 평생을 위장병으로 사셨거든요. 결국 위장병을 앓고 계시던 게 암으로 전이됐어요.

면담자 : 장흥 용산에 있는 학교를 나오셨다고 하셨잖아요.

구술자 : 어렸을 때 생각에는 큰 학교였죠. 학교에 조그만 풍금이 있었어요. 노래를 배울 때는 그 풍금을 운반하여 노래를 부른 기억이 나고요. 한 겨울에는 너무 추웠어요. 선생님이 날이 너무 추워서 보낼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교무실에 데리고 들어가셔서 톱밥으로 불을 피우드라고요, 난로에. 그 옆에 앉혀 놓고 불을 쬐게 하시는 거 그 기억이 나고요.

면담자 : 중학교 시절에 기억에 남으실만한 것들은 있으신가요?

구술자 :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가면서 학교에서 문예지를 만들었어요. 그때 5.16 군사 구테타가 일어난 해였는데, 저희 학교에 사범학교를 갓 졸업하고 오신 여선생님이 두 분 계셨어요. 한 분은 영어선생님이고 한 분은 국어 선생님이셨거든요. 국어 선생님이 허숙자 선생님이신데, 학생들을 모아놓고 뭘 했으면 좋겠는가 물었어요. 그때 제가 “우리 문예지 한번 만들어봅시다.” 그랬드니, 아 그거 좋은 생각이라고 그러면서 문예지를 만들게 되었죠. 교실마다 돌아다니면서 애들한테 글을 모집하고 등사판을 밀어서 만드는 거죠. 제가 며칠 밤을 세워가면서 글을 등사지에다 써가지고 문예지를 만들었어요, 너무 기쁘잖아요. 각 교실마다 열권씩 배부를 했지요.

다음날 학교에 갔더니 교장실에서 저를 부른 대요. 교장실에 들어갔더니 허숙자 선생님이 발발발발 떨고 있더라고. 교장선생님이 제가 들어가자마자 지휘봉으로 머리를 막 때리는 거예요, 너무 황당하잖아요. 들어가자마자 얻어맞으니까요. 머리를 감싸 안고 왜 그러시냐고 항의를 했죠. “이 새끼 누구 죽일라고 그러냐”고 그러는 거예요. 문제는 ‘동무’였어요. 교과서에도 ‘동무 동무 새동무’라는 문구가 나왔고. 아무 이상이 없었는데 교장은 일 학년짜리가 동무라는 말을 썼다고 누굴 죽일려고 그러냐고 다짜고짜 화를 내는 거요. 쓰레기 소각장으로 가더니 거기다 쳐넣고 불지르라는 거예요. 내가 태웠었요. “이게 교육이냐?” 어린 마음에 너무 뼈저린 거예요. 그 후로부터는 공부를 안 한 거예요.

면담자 : 선생님 중학교를 들어가신 연도가 기억나시나요?

구술자 : 60년에 들어갔죠. 4.19가 일어난 해에. 중학교 2학년 때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게 됐고. 중학교를 마쳤는데 고등학교 갈 생각이 전연 없었죠. 선생님들이 저를 예뻐하셔 가지고 “고등학교 졸업장은 있어야 된다, 그래야 니가 사회생활을 할 수 있다”면서 억지로 강진농업고등학교에 집어 넣어주신 거예요. 농과, 임과, 축산과, 세 개가 있었어요. 저는 농과에 들어가 가지요.

면담자 : 졸업하신 이후 이민 오시기까지의 활동에 대해

구술자 :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집에서 어머니를 도와 농사일을 좀 거들었어요. 일 년 있다가 군대에 들어가야 되잖아요. 입대하자마자 훈련소에서 월남 지원을 했어요. 논산 훈련소에 들어갔었거든요. 훈련 기간이 6주에요. 논산 훈련소는 보병들은 4주를 연장 교육을 받았어요. 그래서 저희는 10주병이죠. 10주병이면 월남으로 갈 수 있는 지원을 할 수 있었어요. 바로 그 전 월남 구정공세라는 게 있었어요. 구정 때 베트콩들이 한국군 부대를 공격을 해가지고, 막대한 피해를 입힌 사건이 있었어요. 그것 때문에 지원자가 없어져 버린 거예요. 한국 군 내에서 월남에 가고 싶어 하는 지원병이 거의 없어져버린 거예요. 그래서 훈련병까지 모집했어요.

면담자 : 그때 월남에 가면 혜택이 있었습니까?

구술자 : “전쟁터 한번 구경 한번 해보자, 까짓 꺼. 인생 사는 거 뭐있냐 전쟁터라도 한번 구경해보자” 이런 생각이었거든요. 동료들 90퍼센트가 밥이라도 잘 먹기 위해서 간다는 거였어요. 그만큼 당시 군인들에 대한 대우가 엉망이었어요. 정말 배고파서 못 견딜 정도로 엉망이었어요.

두 번째 이유는 안 맞기 위해서 간다는 것이었어요. 잠자기 전에 안 맞으면 불안해서 잠이 안 온다 할 정도로 매일 맞았아요, 전쟁터에 보내는데 때리겠어요? 안 때리죠.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다들 월남 지원을 했어요. 박쥐부대에 배속을 받아가지고 월남에 갔었어요. 그때가 아마 67년 8월인가 됐을 거예요.

하루는 교육 사병이 와가지고 영어 잘하는 사람 손들어봐, 그러는 거예요. 아무도 손 안 들죠. 내 생각에 분명히 무슨 특혜를 주기 위해서 저런 걸 뽑을 것이다 싶어가지고 번쩍 손을 들었어요. 그랬더니 이리 나와, 그래서 딱 나갔어. 시험을 본다고 보는 거예요. 내 앞에 오더니 아미(army)하고 솔져(soldier)하고 어떻게 다르냐고 묻는 거요. “아미는 집단이고 솔져는 개인이다”고 말했죠. 그래서 뽑혔어요.

월남어 교육대를 간 거예요. 월남 민간인들한테 들어가서 심리요원으로서 정보도 수집하고 한국군 홍보도 하는 요원들을 기르는 곳인데 월남 민간인들한테 말을 할 줄 알아야 되잖아요. 그래서 월남어 교육을 삼 개월 동안 시킨 거예요.

면담자 : 월남어 삼 개월 하신 거죠

구술자 : 그러니까 인사만 겨우 할 수 있는 정도만 되면 내보낸 거예요. 거기에서 대한민국의 행정이 얼마나 허약한 것을 뼈저리게 느낀 거예요. 보고를 해야 되잖아요, 마을에서 수집한 정보랄지 우리가 했던 활동을 상부에 보고해야 되잖아요. 전부 앉아서 소설을 쓰는 거죠. 내가 쓴 소설이 위로 올라가서, 정보가 되는 거예요. 군사 정보요. 그러면 뭐가 되겠어요. 그 정보에 의해서 작전을 해야 되는데 그 작전이 뭐가 되겠어요? 그러니까 맨날 민간인이나 죽이고 베트콩 몇 명 죽였다고 보고하고 그러는 거지.

월남이 일 년이잖아요. 일 년 후에는 귀국을 해야 되. 근데 일 년을 연장할 수가 있어요. 내가 연장 신청을 했어. 그랬더니 우리는 특수부대 요원이기 때문에 연장이 잘 되더라고. 이년을 월남에서 지내고 귀국을 했죠. 근무기간이 좀 남네. 7,8 개월인가 남은 것 같애요, 보충대에서 그러더라구요. “너 월남서 돈 좀 모아왔지.” 귀대할 때 탄피를 큰 박스에다가 걷어가지고 와요. 탄피 팔아갖고 논도 사고 밭도 사고 그랬다고 해요. 근데 나는 그런 것에 전연 관심이 없어가지고 탄피 하나를 못 모은 거예요.

면담자 : 월남 파병을 하면 급여가 더 나온다던가, 그런 건 없었습니까?

구술자 : 물론 더 나왔죠. 그 때 당시에 병사들에 대한 지급은 두 가지 종류로 지급이 되요. 하나는 통상 월급이고 또 하나는 위험수당이었어요. 근데 우리는 뭘 받았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일등병으로 파병했을 때는 38불인가. 받았거든요. 근데 실질적으로 미국에서 지급하기는 그보다 곱절이 됐다고 우리가 알고 있어요. 그니까 절반을 정부에서 떼어 쓰고 절반은 직접 사병에게 주고 이랬거든요. 병장이 되니까 54불인가로 오르더라고요. 그래서 54불 정도를 받았는데 그 돈 받아가지고 저녁마다 술 먹고 3,4 개월 모아가지고 돈 백 불 되면 집으로 보내주고 이런 거죠.

저는 돈을 모을 수가 없었죠. 그 보충대 선임하사가 저녁에 찾아 오드니 “탄피하나도 안 갖고 왔어? 이 새끼, 탄피하나도 못 갖고 온 새끼가 있다”고 욕을 하더라고. 그러면서 “이제 날씨 아주 추워지는데 전방 안가고 후방에서 편하게 있다가 제대할 수 있어. 임마, 돈 좀 내놔.” 이러는 거예요. 기가 막힌 거지, 정말. “왜 내가 돈을 주고 후방에 가야됩니까?” 그랬더니 정말 최전방으로 보내버리더라고. 철원 부근이었어요.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하는 인제 원통에 있는 부대로 배속을 받아가지고 간 거예요. 그때가 겨울이 되가지고 엄청 추워가지고...

면담자 : 여기 오셔서 한청련 활동하신 내용을 말씀해주면 좋겠습니다.

구술자 : 그 다음해 일월 달에 제대를 했죠. 제대하고 나와서 집에서 어머니 보살피면서 같이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마침 대한민국 농촌 진흥원하고 미국 4H 클럽 사이에 한국 농업 연수 계획을 맺었대요. 농촌에서 4H 지도 활동을 하던 사람들을 미국에 보내가지고 선진 농업을 배워 와서 한국 농업을 발전시킨다, 이게 취지였거든요. 각 지역 농촌지도소에다가 4H 활동 지도자 중 대표적인 사람을 뽑아 보내라 이렇게 된 거예요. 강진은 물론 4H라는 것이 다 마을마다 있었죠, 4H 클럽이 마을마다 있었는데 마땅하게 뽑아 보낼 만한 지도자를 못 찾은 모양이에요.

우리 바로 이웃집에 농촌지도소에 다니는 분이 계셨는데 그 선배가 하루는 내가 논에 나가는데 “너 미국 한번 가볼래.” 그러는 거예요. 우리 전남에서는 아무도 시험 같은 것도 안 보고 응모한 사람 26명이 다 들어간 거예요. 그래서 전국적으로 80명이 농업 그 연수 계획으로 해서 미국에 오게 됐어요.

면담자 : 미국에 오신 게 20대 초반이었군요. 그때가 언젭니까?

구술자 : 72년에 온 것 같애요. 연수 계획을 총괄하는 본부가 저기 콜롬비아에 있었거든요. 거기서 집결해서 각 농장으로 배치를 시켰는데 저는 화훼 농장에 가게 됐어요. 제가 있던 농장이 캔사스 시티에 있었거든요.

한국에서는 아무리 큰 온실 농장이라고 하더라고 100평이 넘는 건 없을 거예요. 내가 와서 보니까는 2400평이 유리로 덮여 있는 거예요. 상상도 못했죠. 화분에 물주는 거 밖에 배운 게 없어요. 그렇게 20개월을 허송한 거예요, 미국에서는 값싼 노동력을 흡수하는 것이고 한국에서는 탁상 행정 성과로 과시하는 거고. 이것밖에 없는 거예요.

난 여기 와서 2년 동안 연수 생활을 하면서 농장 주인하고 사이가 좋아가지고 계약을 맺었어요. 다시 취업을 해주기로. 이민 허가서, 노동 허가서죠. 노동허가서를 이민국에 제출했어요. 한국에 귀국해가지고 그 생각만 한 거예요. 빨리 미국에 다시 들어간다. 그것만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근데 일 년 반이 걸리더라구요. 결국 76년 4월에 이민 허가가 나왔어요.

면담자 : 그럼 76년 4월에 혼자 오셨어요?

구술자 : 그때는 결혼을 했어요. 일 년 반을 기다리는 사이에 애도 하나 낳고. 부인하고 둘이 와가지고 생활이 막막하니까 애는 같이 못 데리고 들어오고. 자리 잡으면 데리러 가겠다, 그러고 부모님한테 놔두고 왔어요.

면담자 : 미국으로 들어오셨을 때 그 캔사스 시티로 오셨나요?

구술자 : 그렇죠. 계약으로 들어왔었죠. 78년 그 무렵 동일방직 똥물사건이 일어났었어요. 그 소식을 내가 듣고 너무 기가 막힌 거예요.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느냐. 여공들은 다 내 동생 같은 사람들이잖아요, 내 여동생들 입을 벌리고 똥물을 부었다고 생각하니까 분통이 터져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거예요. 내가 이러고 사는 것이 무슨 보람이 있느냐, 뭔가 좀 해야 되지 않겄냐, 자각을 하게 된 거죠. 그 전까지는 사회 운동에 대해서 모르고 살았고 그때 희미한 자각을 한 거예요. 내가 뭘 할 수 있겠는가, 또 누구하고 관계를 맺어야 되겠는가, 이런 걸 찾아 보았어요.

그 당시 미국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하던 것이 뉴욕의 해외 한민보, 그 다음에 로스 엔젤레스의 신한민보. 그 다음에 캐나다에서 전충림 선생이 하시던 코리아 타임즈, 그 다음에 필라델피아 김경재씨가 하던 독립신문. 이런 것들이 조국의 민주화를 지원하는 언론으로서 역할을 했거든요. 그래서 이런 신문들을 제가 구독을 했어요. 투고도 하고 그러고 지냈는데 그 다음해에 5·18 소식이 들린 거예요.

면담자 : 캔자스 시티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 5·18이 일어났나요?

구술자 : 그때는 농장에서 나와 가지고 여행사에서 일을 하고 있었어요. 조국의 독재 상황을 동포 사회에 알려서 우리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인가 찾아보고 싶은데, 동포의 주소를 알 수가 없잖아요, 누가 어디서 사는지 알 수가 없어요. 그걸 알 수 있는 방법이 딱 두 가지 있드라고요. 하나는 교회가 있고. 또 하나는 여행사에요. 그래서 여행사를 들어갔어요, 주소록 받기 위해서. 목사들 친분을 가지면 당신 교회 주소록 얻자 그래가지고. 한 3백 명 정도 주소록을 만들었어요. 제가 손으로 뉴스 레타를 매 월 보내주었어요. 그러고 있는데 광주 소식이 들린 거예요

면담자 : 동포 사회의 분위기는 어땠나요?

구술자 : 제가 뉴스 레터 같은 것을 내보내도 반응이 없는 거예요. 조국 상황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동포가 거의 없었어요. 그때는 동포 사회가 국제결혼 하신 분들로 구성이 됐었거든요, 그 다음 유학생으로 와서 주저앉은 분들. 그 다음에 일반인은 국제결혼 하신 분들이 초청한 형제자매로 구성이 되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국내 정치 상황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학자나 지식인, 명망인들 밖에 없었던 거죠. 무슨 회의를 하면 전부 그런 분들만 모여요. 만나서 얘기하면 따분한 거예요. “그 사람들 따분한 얘기를 길게 하냐. 고만 끝내고 자, 맥주 갖고 와.” 대개 동포 사회 운동이 이런 식이에요. 제가 살던 그 지역에서는 그랬어요. 근데 제가 옮겨와서 보니까 필라 사회도 그렇더라는 거예요.

면담자 : 선생님께서는 80년 당시 광주 5·18을 처음 접하게 된 건 언제인가요?

구술자 : 5월 20쯤 됐을 거예요.

면담자 : 5·18 이후 며칠 후이네요?

구술자 : 그렇죠, 며칠 후에 소식을 접했는데 그때는 우리 마을에 전화가 한 대도 없었다니까, 그러니까 한국에 전화 할 수도 없었고. 일반 동포들이 직접 광주의 친인척하고 통화를 해가지고 정보를 제공해준 분이 한분도 없었다는 거예요. 신문사 같은 데다 정보를 제공한 분도 없었고.

그러면 신한민보나 뉴코리아타임즈나 코리아 타임즈나 해외한민보인가 어떻게 그런 정보를 처음에 입수했겠느냐. 일본을 통해서 입수한 거예요. 그때 당시 일본은 한민통 기관지인 민족신보가 있었거든요. 저는 광주에 아는 분들도 있지만 연락할 방법이 없는 거예요. 발만 동동 구르면서 신문사들한테 독촉하는 거죠. 자세한 정보 좀 구해줄 수 없느냐, 알아볼 수 없느냐, 어떻게 됐느냐, 지금 상황은. 계속 독촉만.

면담자 : 당시 선생님께서 보셨다는 신한민보나 뉴코리아 타임즈에 보도된 광주 상황에 대한 어떤 논조라고 해야 되나요?

구술자 : 전두환이 정권을 강탈하기 위해서 학살했다는 거죠. 어떤 한 지역을 찍어가지고 본보기로 짓밟아버리면 다른 지역이 꼼짝 못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찍힌 게 광주였고. 그래서 이 사람들이 광주에서 무자비하게 죽였다, 이런 거였죠.

면담자 : 사람이 죽었다는 내용들도 나오고 그랬나요?

구술자 : 무자비하게 학살했다는 거예요. 떠도는 얘기로 2천명이 죽었다, 그렇게 들었거든요. 기가 막힌 거죠. 밥을 먹을 수가 없었어요.

2개월 후에 신한민보사에서 NHK에서 만든 테입을 저한테 보내줬어요. 그 다음에 인제 뉴코리아 타임즈에서 맥길대학에서 만든 테입을 또 보내준 거예요. 그래서 그 두 테입을 받아가지고 NHK(일본방송)는 뭔 말인지 모르겠고. 맥길대학에서 나온 것은 화질이 너무 떨어져 잘 보이지도 잘 않고 그러더라고요. 고민을 하다가 선우한 선생을 찾아갔어요. 그때 선우환 선생은 미주리 컬럼비아의 감리교 신학대학에서 정치학 강의를 하고 계셨거든요. 선우환 선생이 일본어를 잘하시니까, NHK에서 만든 테입을 가지고 선우환 선생을 찾아가가지고 우리말로 옮겨주십시오, 부탁을 했어요. 그놈하고 맥길대학에서 나온 거하고 편집을 해가지고 테입을 하나 만들었어요. 질이 아주 엉망이죠, 복사하고 하고 하고 한 놈에서 또 재복사를 했으니까. 그래서 이걸 들고 캔사스 주립대학에 있는 한국 학생, 콜롬비아 대학의 한인 학생들을 만났어요.

면접자 : 선생님 80년 5월 당시에 LA하고 시카고에서는 동포 사회 중심으로 규탄 시위를 현지에서 전개하고 했다고 그러더라구요. 캔사스 시티에서는 활동은 없었나요?

구술자 : 규탄 시위 같은 것은 못했죠. 제가 시도를 많이 했는데 모이지를 않아요, 테잎을 들고 돌아다녔지만, 동포 사회의 의식 상태에 대해 실망을 많이 했어요. 거기서 지내고 싶은 맘이 없어지드라고요,

나는 동포 사회가 많이 모여 있는 지역에 가서 항의 시위도 같이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저는 도시에 대해서 맘이 편하질 않아요. 뉴욕, 도저히 못 가겠는 거예요. 필라는 아주 좋더라고요. 경치도 좋고. 그래서 필라로 가자, 그렇게 집사람하고 둘이 합의를 본 거지. 필라로 오기로 하고 선우환 선생한테 찾아가서 상의를 드렸어요. “동포가 많이 모여 있는 큰 도시로 가서 뭔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야겠습니다.”라고 말하니까 선생이 반대하시는 거예요. ”지금 장선생이 애들은 어떻게 키울 것이냐. 운동이라는 게 누가 돈을 대줘도 하기 힘든 건데 장선생을 도와줄 사람은 없다. 생활부터 안정된 다음에 생각해라.“ 그런데 내가 선생님의 의견을 안 받아들이니까 선생님도 조금 좀 답답해 하셨던 모양이에요. 꼭 가고 싶으면 서정균 선생한테 가라고 그러시드라고요.

면담자 : 누구요?

구술자 : 선우 선생님 말씀에 의하면 서정균 선생이 “겪어보고 관찰해본 바에 의하면 제일 정직하고 성실한 분이다. 그러니까 서정균 선생님 옆으로 가서 배워라.” 그러시드라고요. 근데 서정균 선생이 뉴욕에 계시잖아요.

‘에라 모르겠다’ 필라델피아로 왔어요. 그때 김경재씨가 독립신문을 필라델피아에서 하고 있었어요. 독립신문 사옥이 있었어요. 저렇게 열심히 하시는 분 옆에서 청소만 해줘도 자기가 쓰고 싶은 글을 보다 좀 차분하게 잘 쓸 수 있지 않냐, 이런 생각에서 들어갔어요. 우리 집사람은 세탁소에서 일을 하고. 나는 김경재씨하고 일을 하면서 5·18 제1회 기념식을 맞이한 거예요.

면담자 : 제1회 기념식에서 광주의 실상을 이야기 하셨나요?

구술자 : NHK 필림하고 맥길대학 필림 거기에서 본 것들을 소개한 거죠.

면담자 : 선생님 그 일주년 기념식 식순이라고 해야 될까요, 어떻게 진행이 됐나요?

구술자 : 현황소개라고 그랬든가? 그 다음에 추모사 하고 그 다음에 추모 참배 하고 그 다음에 음악 한곡 듣고, 그러고 헤어졌던 것 같애요.

면담자 : 추모사를 누가 담당을 하셨나요

구술자 : 제가 너무 흥분해가지고 추모사를 누가 했는지 기억이 안 나요,

 

면담자 : 뉴욕의 해외 한민보 일은 언제부터 하셨나요?

구술자 : 81년 11월까지는 독립신문에서 일했고, 81년 12월부터 한 셈이 되죠. 너무 멀어 처음에는 서선생 집에서 다녔어요, 서선생님 집에서 몇 개월 다니다가 집으로 다시 와 가지고 출퇴근하고 그랬었는데 해외 한민보에서 광주 2주년을 맞게 된 거예요. 2주년 기념식을 뉴욕에서 하기로 했는데 이걸 미주민주국민연합이 주최를 해가지고 대학 강당을 빌려가지고 2주 추념식을 했는데 그때 이름을 탈상식이라고 붙였어요.

“우리는 3년을 기다릴 수 없다. 빨리 탈상을 하고 투쟁을 하자.”라고 광고했어요. 저한테 강연을 해달라는 거예요. 할 수 없이 강연을 했지요. “광주 5·18에서 지식인들은 없었다. 과감하게 지적해버렸어요. 학생 중심의 운동에서 노동자의 중심으로 바뀐 게 광주 5·18이다.” 이런 것을 제가 주장했죠.

면담자 : 뉴욕 한청련 이야기를 시작할까요. 뉴욕에서 83년도에 결성이 되나요?

구술자 : 한국에서 일월서각 출판사 사장이 미국에 오셨어요. 그분하고 서정균선생 하고 가까우니까. 뉴욕에 와서 서정균 선생 댁에서 묵으면서 저희들하고 많은 이야기를 했죠. 이분이 “내가 지금 LA로 가서 윤한봉씨를 만나야 된다.” 그러는 거에요. 그래서 애기를 들은 거예요. 그때까지도 우리는 윤한봉 선생이 누군 줄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물어본 거죠. 그분이 어떤 분인데 당신이 여기까지 와가지고 만나려고 하느냐 물으니까 “광주 사태의 실질적인 지도자 중 한분이시다. 지금 밀항해서 와 계신다, 그 분을 꼭 좀 만나고 싶다. LA로 갈 수 있는 준비를 해달라.”며 부탁하시드라고요. 그 후로 윤한봉 선생이 LA에서 민족학교를 설립을 하셨어요. 그래서 우리가 민족학교를 통해서 윤한봉 선생과 연락을 하게 됐는데 83년 5월 제3회 기념식을 여기서 하면서 저희가 윤한봉 선생을 강사로 초청을 했어요, 여기 필라로.

면담자 : 3회 때요?

구술자 : 3회 기념식에. 윤한봉 선생이 필라로 오셨잖아요. 그때 필라에서 활동을 하던 조직체는 ‘수난자 가족 돕기회’라는 조직이 있었거든요. 강연 주최는 수난자 가족협의회로 하고 제가 초청을 해가지고 윤선생이 와서 강의를 하시게 되요. 강의를 하고 난 다음에 저희 집에서 3개월 정도 계시면서 동부 지역을 돌아다니신 거예요. 그래서 뉴욕, 필라델피아에 그 전에 운동하시던 모든 분들 다 찾아다니시고, 그 다음에 뉴욕에 가서 자기가 아는 분들 집에 가보시고. 그 다음에 뉴헤이븐(New Haven) 쪽으로 가시고 하버드 대학 쪽에서 아는 사람들 찾아다니시고 학습 활동을 준비하셨죠.

LA에는 민족학교가 설립돼 있었고 동부 쪽에 와서도 무언가 만들어야 되겠다는 조직준비를 해가지고 가셨다가 뉴욕하고 뉴헤이븐에서 청년모임을 결성해요. 84년이든가, 시카고에서 전 미주지역을 끈을 맺자, 시카고에서 협의체를 만들기로 했어요. 그때 결성된 한청련이 LA하고 샌프란시스코, 그 다음에 뉴욕, 뉴헤이븐. 이 네 군데에요. 이 네 군데는 이미 결성되어 있었고 그 다음에 시카고가 결성을 할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다섯 군데는 정식으로 재미 한청련 이름으로 참석하였고 필라델피아는 그때까지는 조직체를 못 만들고 있었어요. 그때는 제 동생들 셋하고 나머지 청년들 서너 사람밖에 없었지요. 우리는 옵서버(observer: 참관인) 자격으로 참석을 해요. 6개 지역이 시카고에서 모여 재미한청련을 결성하게 됐어요. 그 후부터 본격적으로 광주에 대한 이야기를 대중들에게 전파할 수 있는 조직체를 출범시켰다고 볼 수 있어요.

면담자 : 주로 구성원들이 어떤 분들로 이루어졌습니까?

구술자 : 그때는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했고 그 다음에는 소상인들이 동참을 하고. 학습 모임을 통해서 만나게 된 거죠.

면담자 : 필라델피아에서 그때 몇 분 정도가 필라델피아 지부에 참여하셨나요?

구술자 : 처음에 학습 모임할 때는 열 서너 분이 모였어요. 시카고에서 재미한청련이 조직될 때는 대여섯 분이 있었지요. 제 동생 세 명하고 최재천이라는 분(광주 출신, 전남대 출신)이 있었거든요. 이분하고 같이 인제 저랑 다섯이 시카고를 갔지요. 그 후로 우리도 적극적으로 한청련을 만들어보자 결의했고, 처음 회장을 제 동생인 경단이가 맡게 됐었어요. 그러고 꾸준히 학습하자 그래가지고 필라에 있는 청년들 학습 활동을 하는, 일주일에 한 번씩 공부했어요.

면담자 : 처음 필라델피아에서 한청련이 결성이 됐을 때요 그때 좀 참여를 하셨던 분들을 다 좀 기억을 하시나요?

구술자 : 제가 지금 다들 기억을 제가 못하는데 제일 처음 참여했던 분들은 아까 얘기했든 최재천이라는 분하고 그 다음에 구범서랄지 이런 분들이..

면담자 : 임용천씨는 처음부터 활동 하셨나요?

구술자 : 그런 분들은 조금 있다가 들어오신 분들이고. 필라 한청을 결성해놓고 그 다음에 임용천씨랄지 또 김향미씨랄지... 제 여동생이 여기에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경단이고 하나는 맹단인데 맹단이가 커뮤니티 칼리지에 다녔었거든요. 같이 커뮤니티 칼리지 다니던 학생 중에서 임용천이란 학생과 김향미 학생이 있었고요. 그 외 대여섯 명이 학습으로 들어왔었어요. 그 다음에 이종국씨가 들어왔고, 최종수 목사님이 교회 청년들을 대거 참여를 시켰고. 그래가지고 필라 한청련이.

면담자 : 예. 필라델피아 한청련은 주로 어떤 활동을 했습니까?

구술자 : 저희들이 필라델피아 한청련 결성할 당시 제 동생들이 셋이나 들어가 있어서 제가 편파적이라는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어요. 후로 최종수 목사님의 교회 청년회, 이종국 선생이 들어와 가지고 무마시켰던 것 같애요. 학습 활동을 할 때는 구범서 선생의 가게 2층에서 근거지를 두고 학습도 하고 조직 활동을 많이 했었죠.

그렇게 일 년 반 정도 지난 후 우리도 마당집을 얻었어요. 필라 청년 마당집 이렇게 이름을 붙여가지고 마당집 활동을 했죠. 필라델피아는 동포 활동이 제약돼 있었어요. 필라가 자랑스럽게 담당한 일은 청년들을 발굴하고 훈련을 시켜가지고 타 지역 활동가로 보내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필라델피아에서 뉴욕 가서 활동 중심 역할을 많이 하고. 그니까 뉴욕에 있는 정승진, 지금 시의원으로 몇번 출마하신 정승진 그분도 필라에서 교육받고 뉴욕으로 갔고. 장광민은 시카고 한청 조직의 토대를 만들었는데 필라 출신이죠. 그 다음에 LA 민족학교에서 뼈를 묻어가지고 윤한봉 선생의 부인이 됐던 신소하(본명은 신경희) 그분도 필라 출신이죠. 이런 식으로 우리 필라는 동포 사회활동은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인력 확충을 해주는 역할을 했다고 자부할 수 있어요.

면담자 : 필라에서는 84년도에 결성이 된 거죠, 그래서 85년부터는 필라 한청련 중심으로 5·18 관련 기념식 추모식을 주도했고. 매년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진행을 하셨는지요.

구술자 : 그때는 지금처럼 홍보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잖아요, 일일이 전단지를 만들면 식당에 뿌리고 식품점 같은 데 놔두고 이런 활동을 주로 한 거죠. 회보를 만들어 동포 사회에 돌리고.

면담자 : 뉴욕에서 임용천 선생님을 인터뷰했거든요. “매년 5월 기념식을 하게 되면 영상을 상영하고, 그 영상이 맥길대학에서 나온 영상으로 알고 있다.”고 말씀하시더라구요.

구술자 : 예, 맥길 대학, 기독교 재단 학교였어요. 선교사 한 분이 광주 민중 봉기 현장을 목격하고 촬영한 게 몇 개 있었어요. 그걸 대학 측에서 수집해가지고 영상을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맥길대학에서 제작을 한 거죠. 제작을 해가지고 공급을 했는데 아주 짧아요. 그리고 일본 NHK 방송국에서 방영한 것도 한 40분 정도 분량 정도 되는 걸로 알고 있고. 둘이 합해봐야 한 시간이 될까 말까한 영상이었거든요. 근데 그것을 복사하고 하고 하고 하다본니까 아주 영상이 희미했어요. 영상물이 희미했지만 그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영상을 보여주고 그 다음에 들었던 이야기들을 전해주었어요. 초기에는 참석 수가 한 3,40명 정도 밖에 안 됐는데 한청련이 활동을 하기 시작하면서 참석 수가 굉장히 많았어요. 청년들이 들고 돌아다니면서 전단을 배부하고 홍보 활동을 한 영향으로 많이 모일 때 한 3백 명 정도까지 모였었어요. 강당이 가득차가지고 서서 밖에 까지 서 있을 정도로 모을 수가 있었어요.

면담자 : 추모식은 어떤 방식으로 좀 진행을 했습니까? 사진전도 하구 강연도 하고 민주화투쟁의 열기를 불어넣는 활동들이 많았죠. 장소는 어디에서 했나요?

구술자 : 장소는 학교 강당을 많이 빌렸어요. 고등학교 강당을 많이 빌렸어요. 그 당시 “북쪽도 우리 조국이다. 우리는 남부 조국, 북부 조국 이렇게 부르면서 남북 화해 의식화 활동을 많이 했었어요.” 우리가 분단의식에 갇혀 있어서는, 말하자면 북을 원수로 봐가지고는 절대 민주화를 달성할 수가 없다. 일단 이 분단부터 해소해야 된다 하는 것은 동의가 된 거죠. 우리는 북쪽을 적으로 본 것이 아니라 같은 민족으로 보기 때문에 거기도 내 조국이기 때문에 북부 조국, 남부 조국, 이렇게 부르면서 한 형제. 이 의식을 깨쳐나가기 시작한 겁니다.

결정적으로 그것을 극대화시킨 것이 89년에 있었던 그 백두산부터 한라산까지 국제평화대행진을 하자, 이걸 인제 윤선생이 제안을 하셔가지고 실질적으로 이행에 옮겼어요 7월 27일날 판문점에서 멈췄는데 임수경 학생이, 평화 대행진에 합류를 한 거예요. 근데 모든 스포트라이트는 임수경양이 받아버린 거지. 그래서 사실상 주도하고 백두산에 판문점까지 내려온 그 대장정을 이끈 것은 재미 한청련이었는데 이건 완전히 묻혀 버리고 임수경만 통일의 꽃으로 빛나고 있는 거죠. 그것이 섭섭하단 건 아니고요.

면담자 : 한청련 활동이 나이 제한이 있지 않습니까. 선생님께서는 언제까지 활동을 하셨나요?

구술자 : 저는 처음부터 한청련 회원이 아니었어요. 나이는 40까지로 제한을 했었거든요. 그때 한청련을 조직할 때 제 나이가 39살이었어요. 그니까 나이로는 되는데 제 동생이 셋이나 들어가잖아요. 당시에 한청련에서 제일 막내가 제 동생인데 사람들 정서상으로 아버지뻘 되는 큰형님하고 막내 동생 하고 같은 조직에서 어떻게 말을 자유롭게 할 수 있고. 막말로 하자면 어떻게 그 앞에서 담배필 수 있겠냐 그래가지고 저는 정식 회원은 아니었어요.

면담자 : 아 그래요, 창립할 때까지만 도와주신 역할을 하셨네요.

구술자 : 그렇죠, 아니 그 후 활동도 같이 했지만 회원은 아니었어요.

면담자 : 그럼 그 이후에 한겨례동포연합이 생기는데요.

구술자 : 89년 평화 대행진을 거치면서 나이들이 다 올라가잖아요. 40대 가깝게 되거나 금방 40이 넘는 분들이 계셨고. 평화대행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활동하셨던 분들, 주로는 미주 민련에서 활동하신 분들, 조국 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던 어르신분들이 계시잖아요. 이런 분들이 후원자 이름으로만 계셨죠. 윤선생님께서 “이래선 안 되겠다. 40이 넘은 사람들이 후원으로만 머물러서야 되겠는가. 이 어른들을 중심으로 한, 장년들을 중심으로 한 조직체가 필요하다.”고 말했어요. 그래가지고 국제평화대행진을 계획하는 단계에서부터 청년 운동 중심을 벗어난 장년운동 중심체에 관한 논의를 하셨어요. 여기저기 다니시면서 논의를 하셨는데 참여할 수 있는 인원이 아주 극소수에 불과했잖아요.

저희는 기존의 운동체를 발전적으,로 해산을 시켜 장년 조직체를 만들자 이런 발상을 한 거죠. 그래서 제가 미주민주국민연합의 임창영 의장선생님께 찾아갔죠. 저는 그때 총무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임선생님께 이 조직을 해산하자는 건의를 드렸어요. 제가 윤선생님을 적극적으로 추천했어요. 윤선생님을 모시고 임선생님댁에 찾아가지고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결국은 임선생님이 동의를 해주셨어요. 미주 민련에 소속 돼있던 대부분의 회원들이 이쪽으로 옮겨 오셔가지고, 한겨레 동포 연합을 결성하게 된 거죠.

면담자 : 필라델피아 한청련의 특색 있는 활동을 한 가지 더 소개해주시지요.

구술자 : 정치적인 중심지가 워싱턴이고 뉴욕에 유엔 본부가 있잖아요. 두 중심지의 중간지역이 필라요. 유엔본부 앞에서 시위를 한다거나 투쟁을 할 때 다른 지역에서 올라가야 되잖아요. 워싱턴 지역에서 뉴욕으로 올라가려면 중간지역이 필라이기 때문에 필라에서 모여 가요. 또 워싱턴에서 시위가 있으면 필라에 모여 가지고 가요. 이렇게 중간 집결지 역할을 많이 한 것 같아요.

전국 회의 할 때 모이기가, 가운데기 때문에 좋잖아요. 그니까 필라에서 모이면 뉴욕에서 참여하기도 좋고 워싱턴에서 참여하기도 좋고 시카고에서 오기도 좋고. 필라에서 전국적 모임을 필라에서 많이 했어요.

국제평화 대행진 기간 동안 못 가는 분들은 미국 유엔 본부 앞에서 출발해요. 백두산에서 출발한 날에 유엔본부 앞에서 출발하고 휴전선에 도착하는 날 워싱턴 백악관에 도착해요. 미주 행진도 같이 동시에 진행을 했어요. 역시 필라에 와서 결집해가지고 다시 출발하였죠.

면담자 : 예전의 활동사진을 보니까 그런 내용들이 있더라구요.

구술자 : 그때 당시 윤선생은 뒤에서 모든 것을 지도하시고 지휘하셨지만 갈 수가 없잖아요. 갈 수가 없는 신분이기 때문에 미주 행진을 같이 하셨어요.

면담자 : 선생님의 지나온 삶에 대한 회고를 듣고 싶습니다.

구술자 : 운동하시는 분들이 저한테 자주 질문을 해요. 그럴 때마다 저는 정말 부끄러운 것밖에 없어요. 제가 뭐 했다거나 내세울 만한 게 정말 없어요. 제가 뭐 그런 이야기하면 뭐 겸손 떤다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있는데 겸손해서가 아니고 사실 없어요. 실지로 없어요. 아까 드린 말씀처럼 그 이전에 지식인 명망가 중심 운동 할 때는 저는 철저하게 도외시됐던 존재잖아요. 제가 동포회의에 가서 2,3백 명 모여 앉은 데 끼어 앉으면 고졸은 저 혼자 밖에 없어요. “근본도 없는 놈이 설친다.”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이런 토대를 바꾼 거, 토양을 바꾼 것은 윤선생님이 하신 것이었어요.

우리가 한청련 결성을 해가지고 여기저기 마당집을 세울 때, 선배들이 굉장히 걱정을 하신 거예요. “느그들 마당집 해가지고 어떻게 운영할라고 그러느냐, 한 달에 렌트비가 이천 불 삼천 불 나가면 누가 감당할라고 그그러느냐 걱정을 많이들 하셨어요. 그런 것 때문에 사실상 독립된 사무실을 가지고 있는 단체가 없었어요, 그 전까지는. 아무도. 독립된 사무실이라는 것은 각 신문사들이 본부 역할을 하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한청이 조직되면서 마당집을 세우는 일을 했잖아요.

그 다음에 마당집에서 교육활동을 하고 선전 홍보 활동을 하고 조직 활동을 하고, 모든 것을 하는 중심체 역할을 했잖아요. 저도 사실은 속으로 겁나고 걱정이 된 거죠. 이걸 어떻게 운영할까. 청년들이 자기 먹어야 할 끼니를 매일 한 끼씩 굶어가면서, 또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뒤로 밀쳐놓고 앞장서서 크리스마스 때 같으면 거리에 나가서 꽃을 팔고... 모금을 해가지고. 교회 십일조 이상 십 분의 삼 내가면서 마당집을 훌륭하게 꾸려나가면서 확장해나가는 것을 보면서 선배들이 깜짝 놀라는 거예요. 이 토대를 닦아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윤선생님의 덕택이었죠.

윤선생님이 오셔서 ”조직과 학습 따로 없다“는 거예요. 화장실 들어갔는데 화장지가 다 떨어졌다, 그라믄 나오기 전에 새 화장지를 끼워놓고 나오는 거, 이것이 조직학습이다. 이런 학습을 시켜야 된다는 것이에요. 식사하러 식당에 들어갔다. 먹고 나며는 접시 하나 요쪽으로 옮겨줘서 그 웨이트리스들이 날라 가기 쉽게 해주는 것. 이걸 훈련시키는 것이 조직학습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 말씀을 제가 듣고는 정말 아, 새로운 것을 깨달은 거야, 그렇다. 바로 그것이 대중과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이걸 생각하지 못 했기 때문에 이때까지 대중 활동을 못한 거예요. 운동한단 사람들이 와가지고 그냥 고개 뻣뻣하게 세우고 밥 맛있게 먹고 모든 뒤치다꺼리는 웨이트리스들이 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나가고. 윤선생은 그걸 활 바꿔놓은 거예요, 느그들이 스스로 치우고 밥 먹은 책상 한번 닦아주고. 이것이 조직활동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신 거예요.

면담자 : 혹시 지금 활동하시고 계신 것은......

구술자 : 귀국을 하실 때 제가 우려했던 점이 그 점이었어요. 윤선생님이 들어가시게 되면 미주활동이 어떻게 될 것인가? 구심점을 완전히 잃어버리면 미주 활동이 자연적으로 와해되지 않겠느냐. 이걸 저희가 굉장히 우려한 거예요.

윤선생님 들어가시기 전에 각 지역 한청련한테 의견 수렴을 하셨어요. 그래서 각 지역적으로 의견을 써가지고 팩스로 보내달라, 민족학교로 보내달라 이런 부탁을 하셨었어요. 근데 각 지역적으로 전부다 찬성이죠. 필라델피아만 유일하게 반대 의견을 보냈어요. 윤선생님 들어가시면 안 된다. 그 이유로 두 가지를 들었는데 첫째, 윤선생님 들어가시면 미주운동이 장담할 수가 없다. 미주 운동을 계속 지속시켜주셔야 된다. 두 번째 이유는 윤선생이 10년 동안 미국에 계셨는데 한국에 갑자기 들어가면 기존의 운동체와 마찰할 것이다. 우리는 그걸 염려한다. 이 두 가지를 중점적인 이유로 써가지고 팩스로 보냈어요. 난중에 보니까는 반대 의견은 필라델피아 한 지역이더라고요.

면담자 : 제가 질문 드린 것은 지금 현재 선생님께서 활동하고 계신 것인데요.

구술자 : 예. 죄송합니다. 그래서 그 후로 선생님 돌아가신 후로 정말 조직체가 와해되고. 우리가 활동할 수 있는 것도 빈약해져버린 거죠. 저도 조직적인 활동은 못했어요. 제가 뭐 두서없이 막 떠들었지만 여러분들께 참고가 되가지고 정리할 수 있다면 저는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면담자 : 감사합니다. 예. 이상으로 장광선 선생님의 구술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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