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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내가 본 합수정신---시아틀의 이종록2018-12-20 13:06
카테고리한청련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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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한봉은 1980년 광주항쟁 당시 군부의 수배령을 피해 미국으로 밀항해 온후 씨아틀에서 몇개월 은거해 있으면서 광주영령들 그 동지들을 뒤로하고 혼자 도망나온 죄책감에 죽을 만큼 시달렸습니다. 긴 시간 머리 싸매고 고뇌 하던 끝에 이땅에서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돕기로 결심하고 미국으로의 정치망명을 신청한후 한인들의 최대 거주지인 나성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윤한봉이 나성에 도착해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는데에는 생각보다 그리 큰 어려움은 없었던 듯보입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맨땅에 헤딩하듯 그자신의 존재를 애써 알려야할 만큼의 최악의 조건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나성에 오자마자 그의 출현은 모든 소문이 그렇하듯 더러는 과장되고, 때로는 무슨 무용담처럼 왜곡되고 하면서 알만한 사람들 사이에서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가게 된것입니다.

미국 나성의 한인커뮤니티는 말 그대로 서울시 나성구라고 합니다. 여기는 서울을 그대로 옮겨 놓은것처럼 십년 이십년을 살아도 영어가 필요없는 그냥 한국 그대로 입니다. 그래서 웬만큼의 세상사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당시 한국 군부 정권하에서의 엄혹한 정치사회 현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고 따라서 윤한봉의 출현에 대한 관심도 그만큼 높았던 것입니다.

어느 한가한 자리에서의 윤한봉의 소회입니다.

처음 그가 접촉했거나 그에게 다가온 이들은 유학생그룹 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좀 배운 사람들이었던 겁니다. 그 의식있는 젊은이들과는 말이 통해서 좋았습니다.그들 또한 광주의 만행으로 대변되는 전두환 군부에 대해 같이 분노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그렇다고 보는 관점이나 입장 또는 자세가 같았던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시점이 어려움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들은 배운 만큼의 통찰력과 역사인식에다가 탄탄한 이론까지 갖추고 있었지만 실천함에 있어서는 책상물림의 전형인 경우가 대부분인 잘난 사람들이었습니다. 나름대로 깨어있는 그들의 자존심이 윤한봉과 부딛치지 않을수는 없었고, 윤한봉에게 있어서 실천이 전제되지 않은 이론은 그것이 구체적 실천에 이르는 것이 아닌한 그건 그저 이론일 뿐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설득하고 끌어 안는데 까지는 심각한 논쟁의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논쟁의 깊이가 깊을수록 뜻있는 동지들을 만날 수있었고 이들은 후에 한청년 활동에 상당한 기여를 하게됩니다.

윤한봉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보람같은 것을 느낄수 있을때는 고등학교 갓 졸업한 20세 전후의 젊은이들과의 만남이었습니다. 그들 개중에는 밀항자에대한 호기심으로 다가오는 이도 있었겠지만 설령 그렇다해도 그들은 순수해서 좋았습니다.

미국이나 한국에서의 사회적 부조리에 대하여 구체적인 자기 생각이 정리되지 되지는 않았어도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는데 대한 판단력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의 대화는 언제나 의미있는 결과에 이를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 또한 이후 적극적으로 또는 후원자로 민족학교 활동을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일이 그리 쉬운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당시 총영사관에 나와있는 안기부 요원들과 그들의 사주를 받은

지역 동포들의 감시와 방해로 인해 지역사회에 영향력있는 이들은 오히려 그와의 만남 자체를 꺼려하였고, 심지어는 온갖 모함과 음해로 윤한봉을 아주 부도덕한 파렴치한으로 몰기도 하였습니다.

그 보다 더 어려운 것은 스스로 뭘좀 안다고 자부하는 이들과의 만남입니다. 개중에는 광주항쟁이 신군부의 계획된 탄압에 대한 민중들의 마지막 저항임을 부정하고, 불순한 동기의 반란에 대하여 군부가 불가피하게 진압작전을 편것이라고 심각하게 곡해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설령 나중에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그들의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 이익틀 안에서 사물을 이해하려 들었고 결국 그들과의 논쟁은 대체로 싸움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뒷얘기는 윤한봉은 북한 공작원이라는 황당한 음해이었습니다.

어느날 일부 기독교 목사와 장노등이 모인 시국간담회에 참석하게 되었답니다. 그들은 그런대로 진지하게 발표하고 토론도 하였지만 결론은 하나님께 조국현실에 대하여 간구하고 기도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들어보니 무엇을 기도한다는 건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한다는 건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한마디 했다가 호된 곤욕을 치르고 말았습니다.

그들도 조국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에 함께 모여 고민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한다는, 하겠다는 내용이 빠진 공허함은 참을 수가 없었던겁니다. 가르치는데 익숙한 그들과의 토론은 아예 무의미한 것이어서 그냥 일방적으로 말하자면 훈계만 받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들리는 얘기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지만, 윤한봉은 적그리스도라는 것이였습니다.

북한에 대해서도 아주 다양한 입장을 가진 여러 개인 또는 집단이 혼재합니다.

민족 차원에서 북을 바라보는 입장도 있기는 하지만, 또 한편에는 북의 해외동포원호위원회와 연계된 이들 이거나, 또는 아예 북의 미주 창구를 자처하는 여러 갈래의 개인들이 그들입니다. 처음에 윤한봉은 별 기대를 하지는 않았지만, 이들과 만나 우리 민족의 현실에 관해 함께 고민하고 무언가 뜻을 같이 할수 있는 길을 찾아보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건 사실 처음부터 기대할수있는 사안이 아니였습니다. 해외동포원호위원회 쪽이건 미주창구를 자처하는 이들이건 철저히 자기 이익틀안에서 주도권만을 다투는 이익집단에 불과했습니다.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뒷얘기는 안기부 공작원이라는 유치한 모함이었습니다.

1983년 무렵 신군부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국제 인권단체의 지원으로 감형, 미국으로 망명한 김대중씨 (후에 15대 대통령에 취임)가 신군부와는 노골적으로 맞설수 없는 조건아래서, 미국 전역을 돌면서 인권운동을 펼쳐나가고 있을때 윤한봉은 그와도 회동한바 있지만, 한쪽은 제도권 정치를 지향하는 반면 다른 한쪽은 철저하게 민족 민중문제에 기반한 재야 운동권의 지원에 초점이 맟추고 있어서, 서로 별다른 공감을 나누지 못하고 헤어졌습니다.

1983년 윤한봉은 어렵사리 모은 10여명의 뜻있는 청년들을 묶어 나성 한청년을 조직하고 동시에, 활동의 근거로 마당집 민족학교를 세운후, 본격적으로 민족문제에 기반하여,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지원함과 동시에 미주에서는 동포사회와 타민족 모두를 아우르는 인권운동을 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후 점차적으로 뉴욕, 뉴잉그랜드, 워싱턴 디씨, 필라델피아,시카고, 덴버, 달라스,씨아틀, 상항등 미국의 주요 도시에 준비단계를 포함하여 지역 한청년을 확대해 나가게 됐습니다.

한청년을 결성하고 지역 조직을 다져나가는 데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끈임없는 학습이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그렇지만 한청년은 한국의 어느 모범적인 운동조직도 따라올수 없을 만큼 자나깨나 학습이었습니다.

학습자료는 회원들이 내놓은 책들과 한국에서 공수해온 신간들을 사용했는데, 회원들이 내놓은 책들은 상당히 수준높은

것들이었습니다. 초기에 한청년에 합류한 이들중 상당수는 정치사회 문제를 전공으로 공부하는 대학원생들이거나 공부를 마친 이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중에는 상당 수준의 이론가도 있었는데 윤한봉은 이들과 상의하여 학습방향을 정하고 이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학습을 진행하도록 하였습니다. 윤한봉도 학습에 참여하여 머리 맞대어 토론하였지만,

언제나 결론은 이를 바탕으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할것인가하는 실천의 문제였습니다. 윤한봉은 철저한 실천 운동가였습니다.

윤한봉은 무슨 선동가나 웅변가는 아닙니다.

말을 잘하는 사람을 달변가라고 하는데 그는 달변가는 아니지만 말을 아주 잘합니다. 그의 말에는 설득력이 있습니다.

지역 조직 대표위원 회의나 미주 한청년 총회등에서 공식적으로 “연설”을 할때 그의 태도가 이를 잘 말해줍니다.

처음 단에 오르면 좌중을 압도하는 웅변가 그런 비슷한 모습은 전혀 없고, 다소 쭈볐거리듯 어색함을 보이곤 합니다.

행색 또한 그깐에는 잘차려 입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가 자주 스스로를 표현하듯 전남대 농대출신의 예비 농사꾼 그대로인 촌놈이었고, 따라서 단에 올라 대중을 상대로 연설하는데는 별로 익숙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연설이 진행되면서 점점 듣는이들은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빠져 들게 됩니다. 그의 말의 탄탄한 논리가 대중으로 하여금 그에게 귀를 기울이게 하는 강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국 통일에 대하여 그는 확고한 통일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일관되게 추구하였던 것은 당연한 것이겠지만 “민족의 평화”에 기반한 통일입니다. 어떠한 외세의 힘에도 의지하지 아니하고 어느 일방에의해 흡수되는 통일이 아닌, 남과 북의 평화공존에 기반하여, 남부조국과 북부조국 양쪽의 민중들이 주인이 되어 주체적으로 추진하는 통일입니다. 비록 하루아침에 이루어 지지 않더라도 그러한 환경을 조금씩 만들어 가는데 이바지하는 지원군으로서 역활 하도록 그는 끈임없이 한청년에게 주문하였습니다.

또한 오로지 윤한봉 그 자신만의 구상과 계획으로 몇 않되는 한청년 조직으로 하여금 1989년에 조국의 통일을 위한 평화 대행진이라는 역사적 쾌거를 이루어 내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실로 우리 통일운동사에 길이 남을 대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매사에 그렇듯 무엇을 바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누가 물었습니다. 통일이 되면 뭘하겠느냐고.

그는“당연히 민중운동 해야지”라고 답했습니다.

윤한봉 정신을 한마디로 이야기한다면 아마 “헌신”이 아닐까합니다. 그는 무엇이 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주변에서 모두가 알게모르게 그에게서 배운것은 바로 그 헌신입니다. 민족학교와 마당집은 철저하게 한청년 회원들의 자발적회비와 후원자들의 성금으로 운영되었습니다.

한청년 회원들 중에는 의사나 엔지니어등 전문직 종사자나 비교적 큰 업체를 운영하는 사업가도 있었고 때로는 그들 자신도 버거울 만큼 큰 액수의 특별회비를 내놓을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거의 최저임금 수준의 적은 임금을 받는 일반회원들의 보수를 털어 운영비를 충당하였습니다. 그리고 “돈이 없으면 몸으로라도” 그것이 한청년의 바닥에 흐르는 정서입니다.

여기서 잊을수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민족학교 주변에는 사회적 위치에 관계없이 아주 순수한 마음으로 윤한봉 그가 보여준 언행에 감동하여 물심양면으로 돕는 여러 후원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분들중, 이주영 할머니와 할아버지 (성함을 잊었습니다) 두분의 이야기입니다.

89년 무렵 할아버지는 80세 쯤되시는 노인이었는데 미국에 오시기 전에는 고려대학교 구내이발관의 이발사로 오래 일하셨고 할머니는 무릅이 않좋아서 걸음걸이가 좀 불편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매일 아침에 한인타운 거리와 상가를 뒤지면서 깡통이나 폐지를 주워 팔아 민족학교에 보태셨습니다. 윤한봉을 비롯 주변의 만류에도 그분들은 고집을 꺽지 않으셨습니다. 젊은이들이 고생하는데 늙은이가 뭐 좀 도움이 돼야 되지않겠냐면서.

이글을 쓰는 저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한게 없지만, 윤한봉에 매료되어 한청년 운동 언저리에서 몇년 서있었던 그 기간

참으로 행복하였습니다. 거듭 합수 윤한봉형에게 머리 숙여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미국 씨아틀에서 이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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