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수통신

제목김갑송의 회한2018-12-23 20:01
카테고리한청련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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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김갑송 선생님 (전 민권센터 이사, 전 재미한청년 부회장) 인터뷰; 2016년 2월 6일, 뉴욕 민권센터에서;

면담자 : 안재성

 

김 : 본명은 김종훈이고 김갑송은 가명입니다. 김갑송은 단체에서 지었어요. 완전히 여기서만 쓰는 이름이죠. 제가 시민권을 따면서 갑송을 미들네 임으로 넣었어요. 그래서 제 영어이름은 김종훈갑송이에요.

안 : 젊으신데요?

김 : 아뇨 저 오십이에요. 65년생이에요.

안; 언제 미국 건너왔어요?

김 : 84년도에 유학생으로 LA로 왔어요.

안 : 아 그러면 LA에서 뉴욕으로 넘어온 거예요?

김 : 긍께 제가 미국에서도 네 군데서 살았어요. 한청련 조직부장으로 일하 다 보니, 조직이 무너지면 제가 가는 거죠.

안 : 84년도 오셨다면 몇 살에 오신 거죠?

김 :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왔어요. 저희 사돈 형이 정규상씬데, 민족학교 에 나가고 있었어요. 그래서 한 번 와보라고.

안 : LA 민족학교 처음 들어왔을 때가 86년도라면, 민족학교가 자리 잡았을 때이겠네요?

안 : 일주일에 한 번씩 공부했나요?

김 : 역사학습부터 시작했죠.

안 : 윤한봉 선생이 직접 가르쳤겠네요?

김 : 네 거의 같이 했어요. 한호석씨라고 민족학교 교육부장이 계셨는데 그 분이 진행하고 합수형님은 주위에 아 계시다가, 끝 무렵에 정리를 해주 시고. 반감이 전혀 없었어요. 다 맞는 말이고. 제가 민족학교에 반했던 것은 분위기였어요. 나이 행세를 하지 않는 거요. 한국 사람들은 그잖 아요. 나이 먹은 게 무슨 벼슬도 아닌데 나이 타령이나 하고...합수 형님 은 그러질 않는 거요. 밥 먹으면 합수형님이 먼저 설거지하시고.

안 : 가장 민족적인 분인데. 사고방식은 되게 미국적이네요?

김 :저는 차별이 없다는 거에 반했어요. 다 같이 청소하고 다 같 이 설거지하고, 이런 문화에 많이 반했죠. 민족학교에 가서 거의 살다 시피하면서 학교는 그만뒀어요. 김희숙 씨도 그 때 같이 LA에 있었는 데 제가 USC남가주대학교를 다니다가, 공부도 하기 싫었지만 커뮤니티 칼리지라는 데로 옮겼어요. 그래가지고 거기서 풀빛이라고 학내클럽도 만들고. 한 일 년쯤 있다가 한청련 정식회원이 됐을 거예요. 88년도에 한청련 회원들이 자기가 하던 거 그만둔 사람들이 꽤 있었어요. 특히 유 학생들의 경우, 공부를 그만두고 전업으로 한청련 일에 나선 사람들이 꽤 있었는데 저도 그 중 한명이었죠.

처음에는 제가 오클랜드에 갔고, 산호세 쪽에 한국 사람들이 많아져 서 산호세로 갔구요. 거기도 민족학교가 있었어요. 근데 인제 문규현 신 부가 여기 왔다가 저희를 만나고, 미국에서 5.18기념행사 참석했다가 그 걸로 추방돼서 한국가면 다 구속된다. 불법체류가 아니게 해야 한다 그 래 가지고, 결혼을 해요. 홍정화씨랑...홍정화씨는 11살 때 미국에 왔는 데, 워싱턴DC의 회원이었거든요.

안 : 시민권자와 결혼하면 시민권을 얻죠.

김 : 아니 꼭 그것 땜에 결혼한 거는 아닌데 결혼을 하게 됐어요.

안 : 좋아해서 한건 맞아요?

김 : 아 그럼요.

안 : 조직의 명령은 아니었고?

김 : 아 그건 아니에요. 조직에서 중매를 했죠. 조직에서 불법체류자 누가 있다고 공표를 했어요. 그리고 이 사람들 신분을 구제해줘야 한다고 했죠. 그렇게 해가지고 제가 조직부 차장을 맡고 있을 땐데. 그래서 홍정화씨랑......

안; 당시 윤한봉의 상태는 어땠나요?

김; 합수형님 얘기 많이 해드려야 할 텐데. 제가 처음 민족학교에 다 녔을 때 되게 힘들었어요. 좀 과하다 싶을만큼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 판단에는 합수형님 존재자체가 사람들한테 굉장히 싫었을 거에요. 종교계나 보수적인 운동권에서는 우리를 빨갱이라 그러고 진보 운동권에서는 합수형님을 눈에 가시처럼 취급을 하고.

안 :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책은 구체적으로 써야 읽혀요.

김 : 제가 처음 민족학교에 나갈 때만 해도 합수형님이 어르신들이 이사를 하면 이사까지 도와줘요. 그런 일이 굉장히 많았어요. 합수형님이 미국 에 와서 신세를 진 분이 있어요. 김상돈 장로시라고 옛날 민선 서울시 장 하셨던 그 분 집에 있으면서 장도 보러갔다 오고 화단도 정리하고 그러면서 있었잖아요. 근데 그 은혜를 끝까지 갚으려고 하신 건지 그 쪽에서 부탁이 오면 다 해요 다 해. 뭐 나중에 얼핏 들은 얘기로는 홍 기완 선배님이 합수형님한테 막 화를 내더라고요. 왜 아직도 그런 일을 하고 있냐고. 무슨 화단정리를 해달라고 그랬나 봐요. 근데 또 가서 다 해주고 와요. 혼자 가서 해주시고 왔다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왜 그런 거를 하냐고 홍기완 선배가 막 화를 낸 거를 내가 본 적이 있어요. 그 랬더니 “그냥 아이! 해야 돼!”하시는 거요. 저도 한 번 같이 이사를 도우러 갔어요. 근데 후배들 데리고 가니까 미안하잖아요. 그니까 계 속 미안해가지고..... 한청년이 궤도에 오르고 할 때 퀘이커 교도들 모 이는 집이 있는데 거기 청소 좀 해달라고 바탁이 와요. “아휴, 제가 가가지고 며칠 동안 청소하고. 하여튼 그 때 항상 합수형님이 주장하 셨어요. ”얼마 안 되는 후원자들, 이사들, 후원금을 주시는 어른들인 데 우리가 청소라도 해드려야제.“

그 때는 미국 평화운동이 지금보다 훨씬 쎘을 때였어요. 평화운 동, 평화반전시위, 반핵 그런 행사가 많았어요. 코리안들과 국제연대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으니까 우리가 가요. 가면 우리 인기가 좋아요. 꽹과리치고 재밌잖아요. 그리고 미국 사람들이야 기껏 피켓 들고 나오 는데 우리는 플랜카드를 만들어서 나가고 눈에 띄게 전부 농민복을 입 고 나가고. 그러니까 인기가 좋죠. 행사가 다 끝나면 쓰레기통을 뒤져 요. 깡통을 모아요. 깡통 줍는 일을 한 달에 한 번씩 했어요. 트럭이 한 대밖에 없었어요. 홍기환 선배가 목수시니까 트럭이 있었죠. 거기에 깡통을 다 실으면 한 200백 불 나왔어요. 다 밟아요. 밟아서 꽉 채우니 까 그 무게가 엄청나요. 돌아가신 정만수 씨가 장학금을 만들어서 민족 학교 운영하고.

안 : 이발했던 분이시죠?

김 : 예에. 그 분은 우리가 모은 것보다 더 많이 가져오셨어요. 그 분은 매일 깡통을 주워서 갖다 줬어요. 우리가 모은 것 보다 많아요.

워싱턴D.C에 한겨레 미주홍보원이라고 새로 센터 차리니까. 돈이 있어 야 무슨 책이나 자료를 새로 사가지고 비치를 하죠. 거기가 아마 88년 쯤 생겼을 거예요. 그래서 국제연대운동 하기 위해서 워싱턴D.C에는 동 포는 별로 없는데 국제연대운동 하기 위해서 거기다 세운 거예요. 그게 선견지명이었지. 그때 연대운동을 하면서 미국의 평화운동단체들이랑 연 결이 됐기 때문에 국제평화대행진을 만들 수 있었죠. 그걸 만들어가지고 임수경 씨만 가서 행진을 한 게 아니라 세계의 평화운동가들이 다 같이 가서 행진을 했죠.

한겨레 미주홍보원에서 미국 의회를 상대로 활동을 했어요. 예를 들어 서 김근태 선배님 석방을 촉구하는 미국 의원들을 만나는 거요. 케네디 의원이 주로 도왔어요. 의원들 서명 모아서 보내고요.

임수경 씨가 북한에 갔을 때 저희가 생각했던 게 그거예요. 임수경 혼자가면 이건 두들겨 맞는다. 국제사회가 이걸 쳐다보게 만들어야한다. 국제사회가 이걸 분명히 보도록요. 그래서 외국인들을 다 데리고 대행진 의 주체가 되는 코리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제연대위원회가 만들어 진 거죠.

북한에 처음 갔는데 북한에서 공동주최해야한다 이러고 나온 거예요. 그래서 우리 이건 안 된다, 이거는 순전히 민간이 주체로 해야지 북한 정 부가 끼면 안 된다. 그래가지고 끝까지 협상이 안 되서 저희는 단식하고 임수경 씨는 고려호텔에서 뛰어내리겠다고 그러고. 그래가지고 북한에서 아주 윗선까지 올라가가지고 어떻게 하냐 그래서 니들 맘대로 해라. 북한 입장에서 보면 황당했죠. 아니 외국에서 와가지고 자기들 땅에서 행진을 하는데 자기들은 끼지도 말라고 그러고. 황당했죠. 근데 북한도 몰랐죠. 얼마나 반향을 일으킬지. 임수경 씨 북한주민들이 난리가 났죠.

안 : 그러니까 국제연대를 우리 한청련이 주도해서 사람들을 엮은 거죠. 그 러면 몇 개 나라에서 팀들이 들어왔던 거예요?

김 : 미국에서 정확하게 몇 갠지 기억을 못하고요. 하여튼 인종별로 다 망라 를 해야 한다면 미국 원주민, 아메리카 인디안 단체까지 포함시켜갖고 거기도 대표가 한 명이 갔고. 유럽 쪽에도 많이는 참가하지 못했지만 알 다시피 독일에 재유럽 한청련이 있었잖아요. 정확하게 몇 갠지 기억을 못하겠어요.

안 : 그런데 어떻게 결합이 됐어요?

김 : 제가 알기로는 임수경이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김 : 그 때 몇 명이나 갔어요? 영국이형 그 때 북한에 몇 명이나 갔어요? 기 억이 잘 안 나세요?

안 : 제가 서른다섯 명이라 어디서 본거 같아서

김영국 : 그 쯤 됐을 거예요.

안 : 김영국 선생님이 한청련이 포함된 국제연대를 이끌고 갔던 거예요?

김영국 : 아닙니다. 저는 일진으로 그 쪽이랑 협의를 마치려고 갔었죠. 북쪽 에서도 전례가 없는 사안인데다가 그쪽 실무자 입장에서도 “행진을 우 리가 주도하되 니들은 참여하는 식으로 해야지” 주체를 누구로 할 건 가 제일 난제였어요. 북에서는 계속 우리가 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 땅 에서 하고 니들은 참여하는 식으로 해라 주장했고, 우리는 만일 그러면 대외운동자체가 끝장이다. 우리 다 죽는다. 누가 살아서 올지 모른 다. 저쪽은 땅 빌려주고 행진할 수 있도록 허가 내줬고, 교통편의 봐줬 다. 그래갖고 일진이 옥신각신했는데 처음에는 완전 개무시를 당한 거 예요. 오지도 않고, 연락 좀 해달라고 해도 사람도 안 나타나고. 계속 회의를 왕따시키니까 일진도 지쳐가기 시작했어요. 그때 수경이가 등장한 거죠. 수경이랑 같이 협상을 하는데 마침 제가 들어갔어요. 얘 기를 들으니까 심각한 거요. 합수형님도 그걸 되게 걱정하셨어요. 큰일 났다. 이런 식으로 흘러가면 다 죽는다. 해외운동이 정말로 끝장이다. 우리 올인해서 죽 쒀서 개 준 꼴 돼 버렸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목숨 을 던지는 한이 있더라도 북이 주최가 돼서는 안 된다. 굉장히 살벌했 죠. 해외운동, 진짜 한 방에 말아가지고 개 주는 꼴이 될 판이었어요. 북이 너무 완강해가지고. 그래서 졸지에 고려호텔에서 시위를 했죠.

“야 여기 고려호텔에서 시위하는 게 꼴이 뭐냐. 이 사람들이 적이냐 뭐 냐” 이런 여론이 비등해서 저도 좀 마음이 약해졌고. 근데 그게 정 치적 실수였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가더라도 저는 남아있었어야 했 는데. 저도 마음이 약해져가지고. 이 사람들이 적이 아니잖아요. 왜 자 꾸 시위하느냐? 이런 여론에 딱히 저도 반박을 못 했어요. 그래서 적당 히 하고 끝을 내고 왔는데 그게 불착이었어요. 나중에 합수 형님한테 된통 터지죠. “야, 이 바보새끼야 그러면 너라도 남아서 혼자라도 협상 단이 돌아올 때까지 협상단의 얼굴을 세워줬어야 될 거 아니냐.” 듣고 보니 맞는 말이더라고요. 끝까지 남아서 협상단이 와서 “자 인제 그만 합시다. 올라갑시다.” 이렇게 해야지 왜 니 맘대로 시작해서 니 맘대로 끝내냐.“ 듣고 보니까 아 진짜 그러네. 매 좀 맞아야겠다. 일주일 단 식해 밥도 못 먹고 그런 일이 있었어요. 근데 그날 밤에 새벽이 되도록 결말이 안 나니까 수경이가 고려호텔 12층에서 창문 밖으로 나 죽어버 릴 거야 난간에 매달려버린 거야. 그러니까 북쪽 협상단이 다 놀래자빠 져 가지고 바로 양보한 거요. 난리 났으니까. 원하는 대로 다 해줘. 갑 자기 상황이 정리된 거요. 협상단이 입이 이만큼 찢어져가지고 왔죠. 그 다음날부터 일사천리로.

김갑송 : 근데 그 때 임수경이 북한을 먼저 가기로 했죠?

김영국 : 그 부분은 비사 중에 하난데 저도 디테일은 잘 모릅니다만은 미리 이야기는 들고 왔더라구요. 또 우리가 먼저 가있었죠. 이틀을 먼저 가 있었고 수경이가 나중에 들어왔죠. 그래서 제가 알기론 그래요. 디테일이 약간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쨌든 문규현 신부님이 랑 행진 끝나고 난 뒤에 수경이로 하여금 판문점을 거쳐서 데려오 는 역할을 국내에서도 얘를 많이 써줬죠. 거의 드라마 같은 얘기 죠. 행진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그 쪽에서 하는 얘기가 이건 한국전 쟁 이후에 최대의 대사변이다. 또 다른 사변이 일어났다는 거요. 거기도 ‘땡! 주석께서’는 이잖아요. 이렇게 항상 해왔는데 “땡! 오 늘 행진”으로 시작했어요. “땡! 주석께서”는 “땡! 임수경”는 이래 됬으니까요. 나중에는 눈물이 말라가지고, 눈물이 안 나오더라고 요.

안 : 90년에 조직사건이 있었죠?

김 : 94년도에 워싱턴DC 회원 30명중에 20명이 이가 나갔어요. 시카고에서 제일 많이 나갔죠. 시카고가 한겨레 어른까지 합치면 제일 많이 나갔고 뉴욕은 한겨레는 다 나가진 않았지요. LA는 크게 타격이 없었고. 한호 석씨가 주동을 했는데... 결국 그 사람들이 주장했던 거는 “윤한봉이라 는 사람 자체가 못된 사람이었다. 온갖 폭정을 저질렀다.”는 거였어요.

평소 합수형님에 대해서 유달리 섬기던 사람들이 합수형님이 가니까 확 뒤집어지더라고요. 평소에 시큰둥하던 사람들은 오히려 괜찮아요. 합수 형에 대해서 유달리 섬기고 따르던 분들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거 요.

안 : 독단적이다? 굉장히 심하게 엄격하게 했던 것은 사실이죠?

김 : 그 분들이 유달리 더 섬겼기 때문에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완벽한 사 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윤한봉 선배님도 선배님 나름대로 단점이 있는 거고. 다혈질이죠. 뭐 한번 소리 지르면 사람이 완전히 질리게 소 리를 지르죠. 그게 단점이라면 단점인거고 또 장점이면 장점이죠. 사람 들이 정신을 차리니까. 또 하는 말이 틀리지 않으니까. 하는 말이 틀리 지 않으니까 아무리 기분이 나빠도 맞는 말인데 그래서 받아들였고.

사소한 일들을 다 조합하면서 결론은 그거였죠. 독단적이었다. 이제 원격조종 받을 수 없다. 한국에 가셨으면 한국에 가신 거다. 그런데 정 민 씨가 회장을 하고 집단 탈퇴를 하고 나서 바로 북한에 갔거든요. 바 로 북한에 갔어요 그 사람들이. 그래가지고 그 사람들이 미국 내 친북 단체가 됐어요. 한청련에서 나간 사람들이 친북단체가 됐어요. 그 사람 들 때문에 한청련까지 친북단체가 되버렸죠. 굉장히 폐쇄적인 단체가 되버렸어요....과거의 지도자를 인신공격을 하면서 꽤 많은 사람들이 넘 어 갔어요. 자기들이 존경했던 사람을...그것도 가장 섬기는데 앞장섰던 사람들이 넘어가더라고요?

안 : 그 말에 넘어갔을까요? 그 동안 너무 억압당했다는 거 아닐까요?

김 : 네. 그래서 제가 DC에 있을 때 시카고는 센터고 뭐고 다 날아가게 생 긴 거예요. 그래서 저랑 지금 DC에 있는 전홍준 씨랑 둘이서 가가지고 둘이서... 시카고 회장만 저희 편이었어요. 나머지 100%가 저쪽 편이었 시카고 같은 경우는 마당집을 뺏으려고 그랬어요. 뉴욕에서는 마당집을 뺏을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적자가 나가가지고 렌트가 너무 비싸고. 그래서 자진해서 마당집은 놔두고 나간 거예요. 그래가지고 심인보 씨가 와가지고 회장할 때니까. 샌프란시스코에서 한 거랑 똑같이 역사학습하 고 회원 늘리고 94년에 와서 뉴욕에서도 회장하고.

그랬는데 정민 씨라는 분이 또 조직사건을 일으킨 거요. 또 우리 합 수형님을 공격을 했죠. “원격조종 하지마라.” 합수형님이 오셔서 사과까 지 하셨어요. “안 하겠다” 정민 씨가 보는 앞에서 “안 하겠다. 그런 느 낌을 받았다면 내가 사과한다.” 그렇게까지 했어요. 근데 그러면서 우르 르 나가더라고요. 우르르 나가더니 아무 것도 안 해요.

그래가지고 한 명이 살생이 되가지고 다섯 명이 살아난 건데. 그 때 회장이었던 장광민, 그리고 김남훈, 나머지는 제가 이름이 기억이 잘 안나요. 윤대중. 지금 LA 민족학교하는 윤대중. 대중이가 찾아왔어요 광민이는 본래 우리 편이었고 대중이가 찾아와서 이 식당에서 한두 시 간을 얘길 했는데 무슨 얘길 했는지 기억이 안나요. 하하하하. 그 때 합수형님에 대해서 그렇게 인신공격을 한 거에 대해서 하나하나 반박 을 한 거예요.

안 : 아니, 그런데 시카고 회원이 열댓 명 정도였지 않았어요? 다섯 명 남 고 나머지가 나갔어요?

김 : 한겨레는 다 날라가고. 어른들은 다 날라가고.

안 : 그래서 민족학교까지 넘어간 건가요?

김 : 거기는 마당집이 넘어갈 뻔하다가 결국에는 그 쪽에서 포기했어요. 처 음에는 거의 넘어 갔어요. 마당집 문도 닫을 라는 분위기였어. 저희들 이 다시 싸워서 차지를 했어요. 다시 싸워서. 최영준 씨라고 그 분도 그 때 남았고. 한청련에서 삼분의 이가 나간 거죠. 딱 5명 남았어요.

안 : 아. 다섯 명 남고. 그러면 30명중에 다섯 명만 남은 셈이네요. 엄청나 네요.

안 : 지금 센터가 유일하게 남아있는 건가?

김 : 지금 센터는 세군데만 남아있죠.

김 : 뉴욕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겨레 모임이 거의 없었어요. 그래서 한겨 레는 큰 영향이 없었고. 아예 모임이 별로 없었으니까.

 

안 : 그래도 청년 중에도 30명중 20명, 삼분의 이가 나간 거죠.

김 : 그래서 상근할 사람이 없어서 제가 뉴욕에 올라온 거죠.

...............

김 : 합수형님은 한국에 가서도 힘들었잖아요. 김대중 쪽도 아니지. 그렇다 고 주사파 쪽도 아니지. 그렇다고 정계에 진출하실 것도 아니지. 참 고독하셨겠다 싶었어요.

한국에 가셨다가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오셨을 때 저는 그 때 ...저는 좀 한청련 활동을 하면서 시작할 때서부터 끝까지 나는 북한은 맘에 안 들었거든요. 근데 그 때만해도 ‘북한바로알기’한다면서 저희도 북한 영화를 많이 봤는데. 마지막에 돌아가시기 직전에 오셔서 “땅굴도 북한이 팠다”, “북한이 소련이랑 전쟁 일으키기로 얘기한 것도 다 사실 인 거로 드러났다.” “김현희도 맞다, 우리가 그 때 어떤 부분에서는 잘 못 판단한 것도 있었다.” 그런 얘기도 했어요. 그래서 또 나이 많으신 분들 중에서는 윤한봉이 변절했다 막 그런 분들도 있었고.

안 : 합수 형님이 마지막으로 오셨을 때 했던 얘기 다시 한 번 해주세요.

김 : 그 때 오셔서 우리가 잘못 판단한 것들도 많이 있었다. 땅굴이라든지, 김현희사건이라든지. 합수 형님이 말했어요. “우리는 민중민주주의파 (PD파)를 하고 싶어도 못하고. 한국의 민족해방파(NL파)에 주사파랑 비주사파가 있는데 굳이 우리 노선을 따지자면 우리는 민족해방파의 비주사 계열 쯤 된다.”고요.

안 : 미주운동에서의 세 가지 경향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를 했네요.

김 : 뉴욕에서 처음으로 이민자 권익운동을 벌려요. 뉴욕이민자연맹이 반핵 성명운동에 동참했던 경험이 있었어요. 조그만 코리안 단체도 아니고 히 스페닉단체도 아니고. 왜냐면 이민자들 히스페닉이 절대다수니까. 그 쪼 끄만 코리안 단체에서 이민자연맹을 창립하고 그 다음 사무처장을) 여 기 민권센터에서 뽑았잖아요. 제 부인 홍정화씨를요.(홍근수 목사의 딸) 그 다음번 사무총장도 민권센터 사무총장이 했어요. 두 번을 연속으로 한국 사람이 간 거예요. 어떻게 보면은 한국의 민주화운동의 코 밑으로 옮겨 와가지고 힘을 한 거죠.

안 : 그 때 훈련됐던 사람들로요..

김 : 합수형님이 탁월했던 부분 중 하나였어요. 여기서도 대중운동을 하신 거요. 처음부터 무료법률상담을 해왔으니까 그게 권익운동으로 너무 자 연스럽게 연결된 거죠. 앞을 내다본 분 인거 같아요. 하하하하. 타협을 할 줄도 모르고 저는 그런 아쉬움이 있었어요. 물론 저희들 자신은 당당 하죠. 항상 원칙을 지켰으니까. 근데 너무 타협을 안 하니까 그거가 저 희들한테도 몸에 베가지고.

안 : 확실히 그 단점은

김 : 합수형님의 성격적인 면도 있을 거고. .. 합수형님이 거울이 되잖아요 두 번째 황석영 씨 북한에 갈 때 굉장히 반대했어요. 외부용으로 이용 되는 거다. 결국엔 한국엔 못 들어가고 뉴욕에 왔죠.

북한에 물난리가 났잖아요. 그건 또 엄청 열심히 했어요. 그리고 우 리는 직접 갖다 주지 말자. 여기 교회들 다 북한이랑 연결가지는 걸 목 적으로 하는 거예요. 자기들이 갖다 주면서 생색내고. 그래서 우리는 무조건 UN에 갖다 주자. 그래가지고 UN의 월드풋 프로그램 이런데다 갖다 주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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