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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내가 만난 합수--이종록2018-12-20 13:06
카테고리한청련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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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한봉에 대하여 ( 저는 미국 씨아틀에 사는 이종록이라고 합니다 )

제가 윤한봉에 관한 얘기를 처음 들은건 1984년경 이었습니다. 81년 광주사태때 학생운동 활동가 한명이 미국으로 밀항해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조금 신기했습니다. 밀항하면 일본인데 미국으로의 밀항이라----.그냥 무슨 무용담 처럼 들렸습니다.

그러나 그가 광주 항쟁 무렵 군부정권에 맞서 치열하게 몸 던져 싸우다가 군부에 의해 수배된, 잡히면 죽을 수도 있는

민주화 운동 활동가 라는걸 알게된것은 한참 나중의 일이었습니다. 87년쯤 후배의 소개로 멀끔한 친구 하나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명문 예일대를 다니는 학생이었습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설령 기억난다해도 그건 가명이기때문에

별 의미는 없을 겁니다. 그가 윤한봉을 만난건 1983년경 미국 뉴잉글랜드지역 보스톤에서 였다고 합니다.

그 무렵인 윤한봉은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지원하고 동포사회운동을 이끌 운동조직을 꾸리기위해, 미국의 주요도시를 헤집고

다닐때 였습니다. 처음 그가 본 윤한봉은 꾀죄죄한, 말도 아주 투박한 촌놈이상 아무것도 아니였다고 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미국 아이비 리그 대학에 다니는 대다수의 학생들은 대단한 우월감과 엘리트의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런 그 앞에 나타난 윤한봉에 대한 그의 첫인상이 어땠을지는 않봐도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 어느날밤 그와 그의 유학생 친구 그리고 윤한봉 셋이서 밤샘토론을 하게 되었답니다. 83년 당시 군부정권하의 한국현실에

대해 분노 하는것은 그들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지만 어떤점에서의 시각차로 그들은 밤새 싸웠다고 합니다.

그의 진솔한 고백입니다. 처음에 논쟁을 시작할때는 그와 그의 친구는 엄청 기세등등했다고 합니다. 나름대로 책도 많이

읽고 역사인식에 대한 자부심도 높은데, 그래서 깐에는 말도 유식하게 논리적으로 하는데, 논쟁을 거듭할수록 윤한봉의

그 투박한 말투와 논리전개에 점점 수그러들어 갔고, 드디어 이튿날 아침에는 완전히 굴복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후 보스톤 지역에 한청년을 결성하는데 주도적 역활을 하게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깨달았다고 합니다. 한국의 현실을 포함 모든 사회적 불합리에 대하여, 그들 엘리트들의 한계는 좋게 말하면

사물을 지나치게 객관적으로 남의 일 처럼 본다는 것이고, 반면 윤한봉은 그건 나의 일이고, 문제의 밖에서가 아니라

문제의 중심에서 행동으로 실천하는 민중적사고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것이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윤한봉은 미국의 주요 도시를 다니면서 더러는 잘난척 아는척하는 젊은이들의 의식을 깨부스고 규합하여

한청년 조직을 꾸려나가고 있었습니다.

85년경 씨아틀에서도 몇몇 젊은이들이 모임을 갖기 시작했는데 , 그중에는 저와 친한 후배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를 통하여 그들이 무엇을 추구하는지 듣게는 되었지만, 함께하자는 후배의 은근한 권유를 저는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적당히 자존심만 센 그저 그런 속물이었으며, 그가 말하는 윤한봉에 대해서도 아마 어떤 선동가나 투사이겠지 하고

관심갖지 않았습니다.

그무렵 한청년은 미주 전역에 준비 단계를 포함하여 8,9개 지역 조직이 결성되어 있었는데, 매년 한차례 지역 대표위원 회의를

뉴욕과 나성을 오가며 열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해 회의에 다녀온 씨아틀 대표의 보고회자리에서 윤한봉에 대한 얘기를 듣고 약간의 호기심을 갖게되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매년 대표위원 회의는 한청년 조직의 중심으로 운영되었는데, 저는 89년 부터 윤한봉 귀국때 까지 매년

한겨레 회원 자격 옵서버로 참석하여 강한 감동을 받곤 했습니다.

회의는 대강 이런식으로 진행됩니다.

회의 분위기는 참석자 모두 바짝 긴장하고 있어서 때로는 진지함을 넘어 살벌하기까지 할때도 있었습니다.

우선 각 지역이 돌아가면서 지역사회와 지역조직현황보고, 사업계획등을 보고한후, 미주 한청년 차원에서 몇달전에

지명받은 한 회원으로 부터 국제정세,국내정세,민족문제에 관하여 한두 시간 남짖 보고를 들은후,

질의 토론에 들어 가게 됩니다.여기 까지는 여타 다른 단체나 조직과 별 다를바 없으나, 백미는 그 다음에 있을

윤한봉 지도위원의 평가시간입니다. 그는 메모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는 모든것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먼저 각 지역보고에 대하여 아주 세밀한데 까지 지적 평가하고, 때로는 가혹하리 만치 눈물 쑥빠지는 호된 질책을

가하곤 합니다. 그런데 묘한건 질책받은 사람이 무척 쫄아 있으면서도 그 사실 자체를 아주 감동으로 받아 드린다는

점입니다. 참 신기했습니다.

그는 화를 내지 않습니다. 아니 그렇게 보입니다. 그가 화를 낼때 제게 비친 그의 얼굴은 그냥 진지함 뿐이었습니다.

그에게 호된 질책을 받는 자리에서도 가끔은 킥킥거리는 웃음소리를 들을수 있습니다. 진지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토론할때 윤한봉은 현학적 문자나 미사여구를 좀처럼 쓰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 생활 바닥에서 보통 사람이 쓰는

보편적 언어로 쉽게 비유적으로 이야기합니다. 때로는 조금은 상스러운 비유로 정곡을 찔러 얘기할때 야단맞으면서도

킥소리를 내지 않을수 없는일이 벌어지곤 하는것입니다.

윤한봉지도위원의 평가시간, 이때도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습니다. 참석한 모두는 숨소리 조차 조심하며 귀를

귀울입니다. 여기서 지금은 없는 전설적인 시사평론가 월터크롱카이드가 생각납니다. 아무리 복잡하게 얽힌 국제관계의

실타래도 그의 손에 들어가면 간단히 풀렸다고 하는데, 윤한봉이 그러하였습니다. 어느 땐가 윤한봉이 그랬습니다.

모든 사물은 특히 국제관계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이해관계의 끈을 따라가다 보면 쉽게 보인다고.

대부분의 정치학자나 정치평론가들이 신문이나 잡지에 시론이나 평론을 쓸때 보면, 사전지식이 어느정도 준비 되어 있지

아니하고는 보통 이해가 쉽지않은게 사실 아닙니다. 그런데 윤한봉의 그것은 이해하기가 아주 쉬웠습니다. 그가 쓰는 언어는 쉽고

단순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유식한 문자를 몰라서가 아닙니다. 그는 책상물림들의 현학적 어휘를 체질적으로 싫어 하지

않았나 모릅니다. 국제정세 보고자리에서 윤한봉은 발표자를 나무라거나 평가하지 않습니다. 다만 어느 부분에서 시각적

의문이 있을때 토론하고 바로 잡아줄 뿐입니다. 그리고 이제 모두가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그는 꽤 긴시간 동안 국제정세에 관한 분석, 그리고 우리 민족문제에 대한 고민등 포괄적이지만 구체적인 주제로 아주

쉽게 그리고 진지하게 그의 생각을 풀어 놓습니다. 그의 "강연"은 언제나 민족문제로 귀결되었고, 그리고 참석한 모두는

한결같이 숙연한 분위기에서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습니다.

처음 윤한봉을 직접봤을때 저는 몹씨 혼란스러웠습니다. 비록 이전에 그에 관한 사전지식이 없었던건 아니지만 , 저에게

그는 여전히 달변가, 선동가, 투사 등의 이미지로 덯씌어 있어서, 실물을 접한 순간 몹씨 당황스러웠습니다.

처음 본 그에게서 저는 그 무슨 카리스마나 권위같은 것은 전혀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눈에 비친 그는 참 못 생겼습니다.

시커멑고 꾀죄죄한데다 목소리도 심한 탁음이고 옷차림새 또한 후즐근해서 제가 머릿속에 막연하게 그리고 있던 지도자

상과는 거리가 한참 먼 영락없는 촌놈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그 못생긴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순진하고 친근한 얼굴이

또 그안에 있는 겁니다.그리고 잠깐 대화 하다 보면 어느새 그에게 포위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확실히

"합수"인 것입니다. 그는 저보다 4살 아래지만 "합수형"이었고, 존경하는 선각자였습니다.

나성 민족학교에서의 그의 일상은 그의 말을 빌리면 "소사"입니다. 마당의 쓰레기 줍고 청소하는 글자 그대로 소사였습니다.

실패와 행복

저는 1988년 부터 대강 1993년 까지 한 5년이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1975년에 미국에 왔습니다. 고대 신방과를 1회로 졸업했기 때문에, 행여 미국가서 한 3년 공부해서 석사학위 정도만

따와도 전공자가 부족한 모교에 선생자리 하나 얻는건 일도 아닌줄 알았습니다. 아니면 최소한 매스컴 관계회사에 간부

자리는 아주 쉬울줄 알았던 겁니다. 1회 졸업이 무슨 감투라도 되는줄 알았던 거지요. 게다가 갓 결혼한 간호사 아내의

"미국가면 간호사가 부족하여 일자리는 보장되어 있으니까 당신은 공부만 하면 된다"는 아내의 부추김도 제 착각에 보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그리 간단한 나라가 아니였습니다. 공장 다니면서 학교에 등록, 취소 반복하기를 3년, 끝내는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 3년 사이 한국의 몇몇 동창들은 잘나가고 있었고, 빈손으로 돌아가서 그들과 나란히 할만한 자신이

제게는 없었습니다. 좌절이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세상물정 모르고 주제파악이 않되는 어설픈 자존심의 한심이 였습니다.

그러다가 보잉비행기회사에 어찌어찌 일자리를 얻어 13년 남짖 다니고 있을때 윤한봉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북에서의 평화대행진을 계기로 또 주제파악 못하는 착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북의 기자들 취재수첩을 보고

그 열악함에 눈물이 난것입니다. 손바닥 보다도 작은 그들의 수첩은 제가 국민학교때 오려서 공책 만들어 쓰던 지금은

구하기도 어려운 갱지였습니다. 그리고 아! 통일조국을 위해 나도 뭔가 할일이 있겠구나 싶어 흥분했습니다.

미국에 넘쳐 나는 폐지를 북에 가지고 가서 재생지를 만드는 일, 아이디어는 그럴싸한데 아니였습니다. 채산성이 있다면

왜 아직까지 그러고 있었겠습니까. 한번 바람들은 저는 이번에는 중국입니다.

대행진 하러 평양가는 길에 본 중국은 1960년대 초의 한국이었고, 말 그대로 자본주의 물결이 거세게 밀려드는, 그래서

돈 굴러가는게 훤히 보이는 환상의 신기루였습니다. 세상물정 모르는 저는 또 그 환상에 빠졌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온것도 "노하우"라 믿고 사업경험이 전혀 없으면서도 회사를 그만두고 얼마 되지 않는 퇴직금을

가지고 중국에 갔습니다. 북경에 세계 최대의 맥도날드 햄버거 1호점을 짖는걸 보고 바람이 들었습니다.

북경시와 합작으로 맥도날드에 버금가는 식당을 짖기로 계약하고 , 한 1년 정신없이 뛰어 다녔는데, 중국측에서 건물을

다 지어 놓을때 까지 입금키로한 운영자금을 마련치 못해 홍콩 어느 재벌에게 빼았기고 말았습니다.

직장 잃고 돈 잃고 거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얻은 것도 있읍니다. 세상이 그렇게 간단한게 아니라는 교훈과 비지네스의

메카니즘에 대해 조금은 눈을 떴다는 겁니다. 망했지만 그 4,5년 정말 행복했습니다. 윤한봉을 만나서 그의 지성과 열정에

반하고, 지금은 산산이 깨졌지만 통일조국의 꿈에 부풀어 있었고, 얻은게 꽤 많아서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합수형 고맙습니다)

평화 대행진에 대하여

1989년 7월20일 부터 7월28일 까지 한청년은 북한에서 실로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백두산에서 부터 판문점까지 한반도 통일을 위한 평화 대행진 끝에 통일의 꽃 임수경을 판문점을 통해 걸어서 남쪽으로

귀환 시킨 역사적 사건을 저지른 것입니다. 이것은 그냥 상식적으로는 말이 되지 않는 엄청난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한나라의 국가 차원에서나 할만한 큰일을 사람 몇않되는 작은 조직에서 이루어 낸것입니다.

1989년 7월1일 부터 7월 8일 까지 평양에서는 제 13차 세계 청년 학생 축전이 열렸습니다.

북한에서는 이 대회의 성공을 위해 엄청난 공을 들이면서, 세계 각국의 청년 학생들을 대거 초청하였습니다.

북한의 축전 계획을 들은 윤한봉은 실로 기상천외한 구상을 하게 됩니다. 전대협 대표를 앞장세워 세계 여러 나라의

청년 대표와 함께 백두산에서 부터 판문점까지 한반도의 평화 통일을 세계 머방에 외치는 평화 대행진을 구상한 겁니다.

이 무모하고 어처구니없는 구상이 현실로 이루어 지기까지 윤한봉은 그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을 그 혼자서 비밀리에 실행

하였습니다. 행진단장 정민, 부단장 정기열도 나중에 임무를 받고 나서야 비로서 알았다고 합니다.

모든 계획을 마친 윤한봉은 우선 국내 운동권에 평양축전에 참가할 대표자 선정을 의뢰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전대협

간부급 한사람이 지명되었다가 당국에 노출될것을 우려하여 눈에 덜 띄는 여학생 임수경이 선정되었습니다.

그리고 독일을 거쳐 축전 하루 전날 평양에 들어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대행진에 관한 것은 그 에게도

비밀이었습니다.

6월 20일경 나성 한청년 정민 화원은 단신으로 평양에 들어 갔습니다. 도착 즉시 그는 북측 안내원에게 한청년의 계획을

설명하고, 책임있는 윗선과의 회합을 요청했습니다. 북측 안내원은 몹씨 황당해 하면서 상당히 불쾌해 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것이 열흘후면 있을 청년학생축전을 위해 온 국력을 집중하고 있는 마당에, 웬 서른댓살 애송이 청년이 나타나서

국가차원에서나 할수있는 거창한 행사를 불쑥 제안하는데, 이를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 참으로 난감해 하였을 것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책임있는 윗선과의 회합은 이루어 졌지만 난관은 산넘어 산이었습니다. 북측으로서는 전혀 예상치도 못했고,

경험도 없는 이 황당한 아벤트가 자국 인민들과 국제사회에 어떤 정치적 영향을 미칠지 가늠조차 어려웠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는 분명 거대한 국가적 행사인데 외국의 몇 않되는 젊은이들이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젊은이들의 치기로

의심했을 법도 합니다. 한발 더 나아가 모든 준비와 진행및 통제는 미주 한청년에서 맡고, 북측은 교통 편의와 숙식만을

제공해 달라는 제안에 어안이 벙벙 하였을 것입니다. 더구나 북한시스템의 특수성을 감안하면 이건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

얘기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정민 회원 비지땀의 결과로 북측 당국과 평화대행진에 대한 합의에 도달하게 되얶고,

행진단 진용도 다음과 같이 조직하기로 하였습니다.

선두에는 임수경, 바로 뒤에 외국인형제들, 그 뒤에 북측 행진단, 제일동포, 재미동포, 맨 뒤에 한청년 행진단

외국인 형제들을 조직하는 것은 뉴욕(?)한청년의 정기열목사에게 주어졌읍니다. 윤한봉은 전체 대외적인 행진단장에 정기열,

부단장에 정민, 그러나 행진을 주도하는 핵심인 한청년 행진단장에는 정민, 부단장에는 정기열을 지명하고 그 자신이 마치

현장에 있는듯, 혀를 내두를 만큼 세세한 지침을 내 주었읍니다. 그는 백두산에서부터 판문점에 이르는 전체 노정에 대하여

구체적 지침을 주었을 뿐아니라, 한청년 회원들에게는 아주 엄격한 행동지침을 지시하였읍니다. 정민 단장을 통해 내린

그의 지침은 비록 문서화 된건 아니지만 대강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번 대행진은 결코 놀러가는것이 아님, 조국통일을위해 노둣돌 놓는 자세로 임해야 함.

<행진의 주체는 한청년이다. 주인의식을 잊지 말도록,

<이북 인민들 앞에서 자본주의 냄새를 풍겨서는 안됨. 존경하는 마음과 겸허함을 잃지 말것.

<행진 대열에서 이탈하여 어떠한 개인 행동도 해서는 안됨.

<행진 도중 행사 기록을 위해 지명된 비데오 촬영사 외의 개인 촬영은 금함.

<한청년은 행진단 맨뒤에 위치해야 하며, 선두에 나가서는 안됨.

<언론매체와의 공식적인 접촉은 단장을 통해야 함.

<임수경과의 사진 촬영이나 불필요한 접근은 금함.

청년학생축전이 끝나고 정기열은 부지런히 외국인 형제들의 숫소를 찾아 다니며 행진단 참가자를 모집하였는데,

7월 20일 발대식에는 30여개국에서 약 400명이 참가하였습니다. (이들중 약300명은 백두산에서 부터 평양까지의

행진에만 참가하고 일정상 귀국 하였음.) 행진 일정은 다음과 같았읍니다.

7월20일 평양 출발, 삼지연에서 발대식후, 삼지연 사적지까지 행진

7월21일 백두산에서 출정식

7월22일 무산지구 사적지 까지 행진

7월23일 삼지연에서 군중대회후 평양으로 출발, 평양에서 시가 행진

7월24일 사리원 군중대회, 행진후, 정방산에서 야영

7월25일 신천대회, 행진후 개성으로 출발

7월26일 개성대회

7월27일 판문점대회

7월28일 임수경 귀환

행진단 인원은 대강 외국인형제들 80명, 북측 50명, 재일동포 50명, 재미동포 40명, 한청년 한겨레 25명 정도 였으며,

때마침 우기인지라 오락가락하는 빗속 연도에 늘어서서, 행진단을 향해 조국통일을 울부짖는 이북주민들의 함성이

지금도 귀에 먹먹합니다.(개인적으로는 감히 바랄수도 없는 감격스럽고 영광된 자리였고, 참으로 행복 했읍니다.

합수형께 다시한번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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