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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합수의 육성으로 듣는 한청련의 역사2018-12-30 10:11:31
카테고리한청련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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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수의 육성으로 듣는 한청련의 역사

 

집도 절도 없이 똥가방 메고 이 집 가서 자고 저 집 가서 먹고 그랬을 때니까. 라면 많이 먹었죠. 83년 민족학교 설립해가꼬 기완이하고 둘이서 고추장에다가 멸치 찍어먹고.

 

뉴욕에 가서 효신이 등등 청년들을 만났고. 완모, 희원이, 봉호, 난원이 이런 사람들 만나고 84년 5월 달에 그냥 뉴욕한국청년이라고 결성을 해븟어요.

 

담에 7월 달에 시카고에 가까고 시카고한국청년연합을 결성했어요. 8월 달에 시애틀에 올라가꼬 시애틀 한국 청년연합을 결성했어요. 그담에 8월 달에 시카고에서 재미한국청년연합 제 1차 총회를 개최했어요.

 

첨에 조직 작업할 때 무지막지하게 갈고 다녀 브렀지. 재미한국청년연합 제 1차 총회를 8월 달에 시카고에서 했어요.

 

84년 5월 달에 뉴욕한국청년을 결성하고 9월 달에 뉴욕한국청년연합 회원들이 중심이 되가지고 뉴욕청년봉사교육원을 개설했어요. 10월 달에.

 

그 다음에 11월부터 내가 85년 2월까지 동부지역을 DC, 뉴욕, 필라, 뉴잉글랜드 지역을 똥차 타고 눈길에서 몇 번 뺑뺑이 돌면서 허벌나게 갈고 다니면서 학습을 해가지고 85년 1월 뉴잉글랜드 한국청년연합이 결성됐어요.

 

그 담에 85년 2월에 필라델피아한국청년연합이 결성됐어요. 그 다음에 7월에 달라스를 가가지고 휴스턴하고 달라스 갔는데. 아이고 휴스턴 더워가꼬, 사람도 마땅치 않고 그래서 휴스턴은 포기하고 달라스에 달라스한국청년연합을 결성했어요.

 

그래가지고 8월에 통일과 제3세계 연대를 위한 재미동포회를 상항(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했죠. 통일과 제3세계 연대를 위한 재미동포 회의.

 

그 담에 85년 11월에 뉴욕한인문화패 비나리가 결성됐어요. 그래가지고 창립공연을 했죠.

 

그 담에 86년으로 올라가꼬 7월 달에 덴버한국청년연합을 결성했어요. 그 담에 8월 달에 워싱턴D.C 한국청년연합을 결성했어요. 86년 8월 달에 한겨레미주홍보원(KRC)을 결성했어요. 마찬가지 8월 달에 재미한국청년연합 제2차 총회 및 해외운동발전을 위한 재미동포회의를 개최했어요. D.C에서요.

 

재미한국청년연합 제2차 총회가 뜻 깊은 이야기인데 한 가지만 설명할게요. 여러분들 보시겠지만 미친놈 모심듯이 사방에 갈고 다니면서 누에 알 까듯이 한국청년연합 등등 센타 만들어지고 난리가 났죠. 근데 이렇게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어요. 미국 천지 땅덩어리 얼마나 넓어요. 줄래줄래해가꼬 10군데를 만들어 놓고 나니까 조직생활의 지도에서 한계가 온 거에요. 혼자서 뛰다니기가. 어찌고 저쩌고 하다보면 몇 달 가블제. 정신없이 돌아다녀븐거제. 근데 스스로 꾸려가지를 못하는 거예요. 자기 역량에 맞지 않게 한계가 온 거에요. 그래서 조직 작업을 이걸로 마감한 거예요. 하고 싶은 데가 몇 군데가 있었는데. 더 이상 하는 것을 포기했어요. 이제 조직을 강화시켜야겠고,

 

이때까지만 해도 연합의 임원은 연합회장 하나뿐이었어요. 근데 조직이 커지니까 양적 성장에 따른 질적 변화가 있어야죠. 그래서 강령, 규약을 세밀하게 규정을 했죠. 2차 총회에서. 그래서 오늘의 규약과 강령이 거기서 나온 거요. 그래서 86년 8월 2차 총회를 계기로 해서 한청련의 제2기로 들어간 거예요. 1기에서 2기로.

 

86년 6월에 시카고청년교육문화원이 설립됐어요. 그 담에 미주민련이 한겨레미주연합으로 흡수됐어요.

 

미주민련, 대우 안 해주니까. 너무 우리를 괴롭히는거에요. 헐뜯고 중상모략하고. 지지자들 후원 좀 해달라고 하면 막아불고. 그래서 우리를 감싸주는 어른들 조직을 만들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욕먹기 싫어서 시작을 안 하고 있었는데 미주민련에서 같이 일하자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조건을 제시했죠.

 

임창룡 목사님하고 담판을 했어요. 새로운 조직을 만들기 위해서 미주민련의 간판을 내려줄 것을 요구했어요. 빼인트도 다 벳겨진 간판, 누가 봐요? 몰락한 종가였죠. 너무 가혹하구먼. (웃음) 그래서 “간판을 내려 주십쇼” 요청한 거요. 며칠 있다가 이름이 중요한가 일이 중요하지. 그냥 결단내린거여. 간판 내리기 참 어려운거에요. 바꿔달면 몰라도. 바꿔달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완전히 해체해블라고 했거든. 그랬가꼬 개인 자격으로 들어오라고. 그거 난 참 높이 평가해. 거 결단 내리기 쉬운 거 아니라고. 그래서 조직 작업을 시작해가지고 87년 8월에 LA에서 “민족의 통일과 단결을 위한 해외동포대회”를 개최했어요. 그 자리에서 “한겨레운동미주연합”이 결성이 됐어요.

 

근데 그 전에 7월 말 8월 초까지 나성, 상항, 워싱턴DC, 뉴욕, 필라델피아 이 5개 지역에서 각 지역의 한겨레운동연합이 결성이 됐어요. 긍께 먼저 우리가 지역조직을 먼저 하고나서, (미주민련의) 그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한겨레운동미주연합”을 결성했던 거예요. 상향식 조직을 했던 거죠.

 

그 전에 각 지역에서 어른들 모여가꼬 기초적인 학습을 했어요. 뉴욕, 필라델피아, DC, 상항, 나성에서요. 그리고 8월 초에 미주민련이 발전적 해체를 선언했어요. 공식적으로 해체를 했어요.

 

캐나다 토론토는 내가 못가니까. 우리 동포들이 많이 사는 지역인데 2만 명 정도가 모여 사니까. 그래서 권민지 회원을 파견해 가지고 2달 반 정도 머물면서 거기 청년들과 함께해서 디딤돌을 만들었어요. 이름이 디딤돌이에요. 캐나다청년조직으로 토론토에 디딤돌 모임을 결성했어요. 캐나다에 이제 들어가기 위한 디딤돌을 만든 거지. 디딤돌 모임이 87년 5월에 만들어졌습니다.

 

 

지금으로부터 5개월 전이죠. 88년 8월 달에 재미한국청년연합 제3차 총회을 열어요. 이름이 허벌나게 길지. “8.15 남북청년학생회담 성공 및 조국의 평화통일을 위한 해외동포대회”. 허벌나블지. 이것이 조직 작업의 역사에요.

 

그 사이에 했던 일들을 중요한 것들만 말씀드릴게요. 자질구레한건 허벌나게 많은데 거 빼고. 강연회는 빼블거요.

 

83년 민족학교 설립되면서부터 한반도에서의 핵무기철거운동, 미군철수 이런 구호를 외치면서 제3세계 운동과 연대를 위해 뛰어다녀요. 또 평화운동과의 연대를 위해서 주한미군철수, 핵무기철거를 구호로 걸고 쫓아다니기 시작했어요. 기성 운동단체들은 입으로는 연대 연대하면서 평화시위장이건 제 3세계 운동들 뭐 집회, 시위장에 코빼기를 안보이니까. 자기들 옥내 집회 행사할 때 귀빈으로 초청하고, 시위에는 안가요. 우리가 악을 쓰고 쫓아다녔죠. 사진첩 보면 나올 거에요.

 

한청년은 출발부터 민족학교 설립 이후로 주한미군철수, 핵무기, 남북통일, Korea is one. 영어 못해도 나 다 알아. 하도 외쳐나서. 이걸 외치면서 나갔죠. 그러니 저쪽에서 빨갱이로 안 몰겠어?

 

기성 운동 단체는 사무실이 없어요. 미주에서 운동단체가 사무실이 생긴 것, 우리가 최초였어요. 회장 바뀌면 연락처가 바뀌어. 집이 연락처지. 그니까 민족학교가 설립이 되고 뭐 어쩌고 주한미군철거 핵무기철거가 어쩠고 통일이 어떻고 악을 바락바락 쓰고 다니고 한께, 또 내 신분을 아니까 북에서 밀봉교육을 받고 온 놈이 있다느니 간첩이라느니 북의 앞잡이라고 글지.

 

기독교 쪽에선 적그리스도라고 그러지 김대중이 똘마니들은 반김대중이라고 그러지. 사면팔방에서 쏘아 제끼는 거지. 그 속에서 코 씩씩 불면서 진격 앞으로 한 거죠.

 

우리 한청련은 처음부터 평화운동, 제3세계 연대, 통일운동 쪽으로 힘차게 나갔고 그 다음에 국내운동에 대한 지원, 광주수난자돕기 활동을 하면서... 그 담에 동포사회에서 대중적 지지기반을 확보하기 위해서 마당집 활동을 해요.

 

86년에는 외교운동을 전문화하기 위해서 국제연대를 위해서 “한겨레 미주홍보원”을 만들었던 거죠. 급속도로 막 이제 벌려간 거죠. 그러면서 85년 6월에 일반 동포들도 참여한 연대운동을 하나 했어요. 85년 6월부터 시작했던 “5.18 광주 민중혁명 기념사업 및 희생자 위령탑 건립 추진위원회”라는 것을요. 이름이 너무 긴데 “5.18 희생자 위령탑 건립 추진위원회”라고 줄여서 생각하면 되요. 나성, 상항, 시카고, 필라, 뉴욕 이 5개 지역에 만들어서 주변에 운동 단체 쪼금 참된 사람들, 참한 사람들, 삔들바오들 말고, 사기꾼들 말고. 그 담에 일반 동포들 참여시켜서 대중운동의 기초형태로 이걸 벌렸죠. 그래가지고 전국적으로 모인 것이 한 4만 3천불 모았어요. 고것이 일제 때 빼고는 최고 액수에요. 일제 때 빼고는 최고 액수였어요. 미국운동에서 국내에 돈 보내는 것은 무지하니 인색해요, 어른들은 즈그 돈 내놓기는 죽어도 안하니까. 식당에서 회의할 때는 잘 내놓지만 이놈들 말이야. 하여튼 5.18 희생자 위령탑 추진위원회를 5개 지역에 만들어가꼬 4만여 불을 모금해서 보냈어요.

 

그 담에 국내에서 나온 사람들 순회강연회는 허벌나게 했지. 그런거 빼고요. 86년 2월에서 5월 사이에 “민주개헌추진위원회”를 결성해가지고 시카고, 뉴욕, 상항, 나성 각 지역에 만들었죠. 그래가지고 만 삼천 명의 서명을 받아서 국내에다 들여보냈죠. 이것도 기록입니다. 만 삼천 명이.

 

그 다음에 인제 평화운동에 참여하면서 우리가 동포사회에 핵문제에 대한 홍보 활동을 벌리기 시작했죠. 86년 8월에 최초로 “동포 원폭 희생자 추모의 밤”을 LA에서 열었죠. 그러면서 반핵 슬라이드를 상연한 거여.

 

그 담에 한겨레 미주홍보를 만들어서 코리아리포트라는 것을 격월간으로 발간하기 시작했죠. 코리아리포트, 지금 5천부 정도가 나가죠. 나라로는 13개국에 나가요. 미국 말고도. 최초일거에요. 인기 좋지.

 

그 다음에 86년 5월 10일 날 버클리 시로 하여금 광주 민중의 날을 선포하게 했어요. 이거 외교활동의 한 성관데. 하루 종일 축제부터 시작해서 시위, 저녁에 추모제, 강연회까지 하루 종일 해불었죠. 버클리시 광주 민중의 날 선포. 미국의 도시에서 우리의 운동을 지원하는 날을 선포한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요.

 

그 다음에 87년 11월에 국제 연대, 외교연대활동강화를 위한 상징적인 사건이 뉴잉글랜드에서 공개토론회, 코리아포럼을 열었어요.

 

그 다음에 88년 6월에 미주 전 지역을 망라한 843명으로 “미주한겨레신문 발간 준비 위원회”를 결성했어요. 이게 다 한청련이 주도한 거니까. 이게 최대 규모에요. 이제까지 미주운동사에서는. 일제 때 빼고는. 8백여 명의 조직적인 활동은 최초였어요. 주소, 성명, 전화번호, 직업까지 합법적으로 공개적으로 밝히면서 참여했어요. 미주 전지역에서 딱 20일 걸렸어요.

 

그 담에 88년 6월에 “43년간의 미국의 한국개입”이라는 주제로 해서 LA지역에서, 서부지역에서 최초의 코리아포럼을 열었죠.

 

8월에 8.15 남북학생회담 참가를 위한 미주청년대표 2명을 파견했죠. 한청련에서. 이제 지지시위 집회 차원이 아니라 청년대표를 남쪽에 파견했죠.

 

그 담에 5월부터 10월 사이에 여러분들이 기억 선명하게 날거에요. “한반도 배치 미국 핵무기 철거 요청” 서명운동을 전개해서 미전역에서 3만 약5천매를 받았어요. 외국인 형제들도 받았는데 그 사람들이 받은 것은 한 3천매 정도 되죠. 우리가 받은 게 3만 2천매 정도 되고. 이것이 또 하나의 기록갱신을 한 거에요. 아까 개헌성명 1만 3천명 뛰어넘어서. 일제 때 빼놓고는. 일제 때도 이렇게 많은 성명운동을 한 적이 없으니까.

 

그담에 8월에서 10월 사이에 “민족통일 마당집 한돌 쌓기 추진위원회”. 결성해서 현재까지 얼마를 모았느냐믄 11만 5천 3백 58불 50전을 모았어요. 안 믿어지지? 해놓고도. 11만 불을 모았고, 현재까지 9만 불을 송금했어요. 일제 때 빼놓고 최고 기록이에요.

 

다시 또 빠진 것을 이야기할게요. 아까 82년 6월에 광주수난자돕기가 만들어졌다고 했는데 88년 6월에 해체했어요. 6년 동안 약 3만 불 송금하고 해체를 해요. 88년 10월에 “김현장, 문부식 미주 후원회”가 결성되었고. 89년 1월에 해체를 하고 “고문 피해자 돕기회”로 바뀌어졌어요. 고문피해자들 치료비 같은 거 보태 쓰게 돈 모아서 보내주죠.

 

하나 빠졌구나. 87년부터 황토기금을 설정해가지고 황토기금을 만들어서 87년과 88년 두 해에 걸쳐서 국내에다가 5만 불 정도를 송금했죠.

 

나머지 각종 시위 여기저기 쫓아다닌 것은 밑도 끝도 없고. 이렇게 한청련 역사에 대한 이야기는 마치겠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한청련만 한 것이 아니라 한겨레와 함께 했어요. ...나도 기분은 청년 학생이야. 사실이지. 장가 안 가면 청년인거여. 나는 지금도 10대 같애. (웃음).

 

그 담에 한청련의 강령해설을 내가 했죠. 자기 조직의 강령을 몰라가지고는 어디 가서 사람대접을 못 받는 거에요. 딱 그 소리 들어. 왜냐면 강령이라는 것은 조직의 목적, 입장, 어떤 운동의 활동 방법 등등이 압축돼 들어가 있기 때문에. 딱 강령을 보면 이 단체가 어떤 단체인지 성격을 다 알아버리는 거에요. 근데 강령에 대해 물어 봐가꼬 대답 못하믄 골치 아픈거에요. 학교 다니면서 교훈을 설명을 못 해가꼬 외기만 하면 아무 의미도 없듯이. 자 받으세요 전부. 오래간만에 마음에 든다. 딱 이렇게 준비를 해서 나누어주고. 다 잘하면 좋지.

 

강령 1, 재미한국청년연합은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고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는 미주의 동포 청년들로 구성된 단체이다. 이것의 설명은 필요없죠 잉?

 

두 번째, 재미한국청년연합은 외세와 반민중 세력들에 의한 분단, 억압, 착취 그리고 핵공포와 전쟁의 위험으로 인해 고통당하고 있는 우리 민족의 해방을 목적으로 한다. 해방의 말을 아주 일반적으로 쓴 거에요. 대게 민족해방이라는 말은 상당히 의미가 복잡한데 외세로부터 해방을 주로 민족해방이라고 그래요. 특히 제국주의 침략을 받은 식민지 민중들의 투쟁을 민족해방이라고 그러는데.

 

세 번째, 재미한국청년연합은 미주운동을 민족해방을 위한 하나의 지역운동으로 규정한다. 이제까지 미국에서 운동하시는 어른들은 내가 와서 보니까 지금도 그래 헷갈려요. 그 사람들은 국내운동을 중심으로 생각해가꼬 해외운동을 뺑뺑이 도는 위성운동 또는 종속운동, 심지어는 김대중이 똘마니 같은 사람들은 박수무대, 박수치는 운동으로 해외운동을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도 그래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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