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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시애틀, 김진숙의 애절한 고백2018-12-26 23:30:49
카테고리한청련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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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 김진숙 선생님

 

면담자 : 안재성

구술자 : 김진숙

 

김 : 한국 이름은 김진숙 목사구요. 미국에서는 Jean Kim으로 알려져 있죠. 우리는 1970년에 이민 왔어요. 그래서 미져리 주에 한 9년 살고, 거기서 17살 난 아들을 잃었어요. 그래서 아들을 묻고 내가 너무 우니까, 남편이 못 살겠다 이 도시에서 못 살겠다고 떠나자 해서 온 게 시애틀이에요. 그게 1979년인데 와서 계속해서 울고 사는데, 80년 5월에 광주 사태가 났잖아요. 그니까 우리가 지금 그 뉴스에 난 사진이 우리 애 같은 사이즈야 나이도 청소년들이고 우리 지금 아이 하나 묻고 애간장을 태우고 사는데 어떻게 그렇게 많은 얘들을 죽였나 하고 우리가 환장을 해버렸어, 생명이 얼마나 귀한데. 그래서 아까 얘기한 데에서 추도 예배를 했다고 했잖아요. 광주 애들이 너무너무 안 되갖고, 엎어져 죽은 애들 사진이 전부 하나같이 다 내 아들 사이즈야 나이도 고만해보이고, 너무너무 억울해가지고 그 영혼들을 위로한다고 추도예배를 했는데 목사님들이 한 분도 안 오셨다고 그러잖아요. 그래서 그게 너무너무 서운해가지고 우리 둘이가 신학출신이니까, 우리 둘이서 예배를 인도하자 그래가지고 한국 사람들이 좀 왔어요. 근데 목사님들이 하나도 안 왔단 말이죠. 교포들은 좀 왔어요. 그래서 그날 추도예배를 하고, 며칠 후에 뉴스 레타 편지를 내보내가지고, 저기 한국 인권옹호협회를 만들자. 근데 그 때 내가 누구하고 연관이 있었냐면 하비목사님하고. 그 하비목사님하고 같이 뉴욕에서 인권 그거를 하는 구춘회씨가 있었어요. 구춘회씨가 한국 신학대 선배예요. 그래서 그 선배 또 가깝고 뉴욕에 자주 가니까 영향을 받아서. 하비목사님은 North American for Coalition for Korean Human Rights(3분20초)던가 하여튼 북미주한국인인권협회 그런 거를 만드니까 우리는 여기서 워싱턴 주 한인인권옹호협회를 만들자 그래서 만들었죠. 만들고 거기다가 그 당시에 지금 돌아가신 분 중 몇 분하고 살아계신 몇 분하고 제이칸 박사랑 이렇게 해서 만들었어요. 만들고는 얼마 안 지났는데 그거 만들고 나서 뭐 바빴어요. 데모하고 한국에서 대통령 온다 그러고 김대중씨가 사형선고 받고 막 저 어느 순간에 사형 당할지 모르는 그런 형편이라 여기서 우리는 신문에 내고 거기에 대해서 서명운동을 하고 미국 정부에다가 이 사람 죽이지 말라고 캠페인을 하고 바쁘게 지냈어요. 하여튼 미국 친구들한테 시간이 지나고 있다. 이 시계가 얼마큼 빨리 가느냐에 사형이 집행이 되느냐 마냐 운명이 달렸다고 그래갖고 미국 친구들 동원해서 백악관에다가 편지 보내는 그런 걸 하고 밤이면 모여서 앉아서 그 때 워싱턴 주립대학의 교수 두 분하고 진펄레하고 브루스커밍스라는 유명한 분들이셨어요. 그 분들하고 미국 친구 몇 명하고 또 우리 미국계 목사님하고 우리가 미국교회에 나갔어요. 그 담에 교회에서 여기서 NCC 회장 이런 분들하고

 

안 : 잠깐만 목사님이 따로 교회가 있었던 게 아니고요?

 

김 : 나는 그 때 안수 받은 사람이 아니었어요. 우리 남편도 목사가 아니에요. 우리 남편하고 나는 장로였어요.

 

안 : 그럼 미국 교회에서 예배를 할려고 했던 거예요?

 

김 : 예. 추도예배 장소를 미국 교회에서 했어요. 그래서 그 미국 교회 우리 목사님이 굉장히 노련하시고 우리를 쌍수로 환영하시고 우리가 하는 인권운동에 전적으로 도와주시고. 미국 장로교 목사님인데 그리고 데모할 때는 꼭 같이 나가고 그렇게 해서 그 양반 데모할 때 나간 사진도 있어요. 대법원 앞에서 데모하고 연설하고. 그래서 그 분들 다 모셔다 놓고 한국사람 몇 명하고 미국 사람하고 우리 집에 모셔다 놓고 지금 김대중 씨가 언제 사형 당할지 모른다. 천지에다가 우리가 편지 내야한다고 편지 공세를 하고 그러는 중이에요. 굉장히 바쁘게 편지 내고 전화질하고 난리를 하고 지나는 중인데 하루는 하비목사님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하비목사랑은 뉴욕에 있었어요. 우린 여기 있고. 전화와 갖고 뭐라고 하냐면 윤한봉이라는 사람이 밀항을 들어온다. 벨링헴으로 들어온데. 벨링헴은 여기서 한 시간 넘는 거리에요. 거기 항구로 들어온다는 거야. 그렇다고 가서 이 사람 좀 데려와야 된다는 거야. 그래갖고는 암호를 주는데 진달래꽃이 피었습니다. 뭐 그런 거 몇 마디 가르쳐 줬어요. 그래서 갖다구요. 갖는데 내 주소 명함처럼 해가지고 배에 가는데 우리 미국 목사님 부부하고 우리 부부하고 그렇게 미국 목사님한테 그랬어요. 이러이러한 사람 들어온다는데 좀 같이 가자. 넷이서 차를 타고 1시간 운전해갖고 벨링헴 항구로 갔어요. 가서는 한국 배가 정박해 있더라고요. 그래서 인제 성경 예배 기도를 해준다고 성경 찬송을 들고 갔어요. 배에 올라가도 되겠냐 그랬더니 올라가래요. 그래서 우리 넷이 올라갔어요. 우리가 배에 올라가면 윤한봉이라는 사람이 우리한테로 다가오게 되어있었다고. 그런데 암만 이 사람 얘기하고 있어도 안타나는 거야 아무도. 그리고 또 뭐라고 그랬냐면 제 1기관사인가 제 2기관사가 우리를 만날 거라고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그런데 아무도 안타나나. 그리고 윤한봉이라는 사람도 안타나나. 우리 당신네들 예배 인도해주러 왔다고 그러니까 잘 왔다 그러고. 거기 선원들 모아놓고는 예배를 들었어요. 그러고는 안타나니까 내가 이런 쪽지를 가져간거를 우리 집 주소 적어서 다 줬다. 다 주면서 밥 먹고 싶은 사람 누구든지 오라고 그러곤 다 줬어. 다 주면 본인 손에도 갈 것으로 생각하고 다 주고 예배드리고 그러고는 왔어요. 넷이서 집으로 돌아왔는데 돌아오자마자 30분 이내에 전화가 왔어. 전화 왔는데 윤한봉이래요. 아 어디냐고 왜 아까 갔을 때는 아무도 안타났냐고. 얘기 들어보니까 무슨 밀항을 쓰레기 골방에 라면 열 개 가지고 연명을 하고 있었데요. 나오지 못하고 왜냐면 그 배의 선장이고 뭐고 아무도 몰랐어. 그리고 그 제 2기관사라는 사람만 알았더라고 한 사람만. 그러니까 한국에서 광주의 조아라 장로가 어떻게 주선해가지고 그 기관사하고 통해가지고 거기다 몰래 배 태워서 감춰가지고 사람 안 들어가는 방에 오게 되어 있었데요. 그니까 기관사가 거기다가 감춰놓고는 라면 몇 개 가지고 이 사람이 연명을 하고 여까지 배가 수십날을 온 거예요. 그래갖고는 온다고 전화가 왔어. 빨리 오라고 아까 갔을 때 안타나나서 우리 왔다고. 그랬더니 한 30분 있더니 두 남자가 왔어요. 둘 중에 누가 윤한봉이냐 그랬어. 그랬더니 밥부터 달래. 밥부터 먹고 얘기를 하제. 그랬더니 두 사람이 얼마나 배고파. 수십날을 라면 몇 개갖고 굶었으니. 그래갖고 쪽 말랐더라고. 그래갖고는 밥을 실컷 먹고 나서는 하나가 윤한봉이고 하나는 같이 온 친구고 그렇더라고. 그래서 그 친구는 그날 밤으로 가고. 배로 돌아갔겠지? 그리고 윤한봉이는 우리하고 남은 거예요. 근데 우리 아들은요 그 때가 고등학생인데 한국에서 그렇게 밀항으로 들어왔다고 하니까 얘가 어떤 사람들이 우리를 해하냐고. 왜냐면 영사관에서 죽인다 살린다 그런거 아니에요. 그니까 누가 또 우리 엄마아빠 해하러 왔나보다 그러고 총을 겨눠가지고 부엌에 숨어 있었어. 여차하면은 지가 어떡한다고. 그런 살벌한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그 담에 간 다음에 아니라는 걸 알고 그 중에 윤한봉이라는 사람이 남았어요. 그 때서부터 한 집에 같이 사는 거야. 같이 사는데 우리하고 참 많이 싸웠어요. 무지무지하게. 우리 남편하고는 밤 두세 시까지 내가 잠 좀 자자고 그만 잠 좀 자자고. 왜냐면 우리하고 윤한봉 씨하고 조금 다르더라고요. 우리 남편이나 나는 우리는 하늘 밑에 독재는 다 반대다. 우린 그 때요, 여기서 비율빈 말코스 반대, 남아프리카의 아파르트헤이트(14분25초) 반대. 하여튼 세계 돌아가는 독재는 다 반대하고 시애틀에 있는 세계 독재 그룹들하고 연합을 했어요. 그래서 데모를 하면 다 같이 나가고. 그래서 우리 데모에는 미국 사람들이 더 많았어요. 그 담에 American Friends Service라는게 있어요. 그 사람들도 굉장히 사회 이슈에 많이 관심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그 사람들하고 내가 굉장히 시애틀 바닥이 넓었어요. 그래서 그 사람들하고 같이 연합운동을 하니까 데모해도 다 같이 나오고 우리도 그 데모에 가고 그러니까 우리는 하늘 밑에 있는 독재는 다 포함해서 이북을 포함해서 이남 뭐 할 것 없이 남아프리카할 것 없이 다 반대다. 윤한봉이는 뭐라냐 그러면 이북은 아니데. 이북은 잘하고 있데. 김주석은 잘하고 있데. 그러니까 우리 남편하고 나는 무슨 소리하냐 잘하긴 뭘 잘해. 우리가 이북에서 못 견뎌서 나온 사람들이라고. 우리 피난민이라고. 8.15 해방 후에 우리는 지주였어요. 그니까 다 뺏기고 몽땅 다 뺏기고 거기서 살 수가 없어서 그리고 우리 아버지 친구들은 다 맞아 죽었어요. 근데 우리 아버지는 그래도 동네에 학교도 지어주고 한 일이 좀 있나봐. 그러니까 죽이지는 않았어. 그래서 밤이면은 소작인들이 몰래 쌀 갖다 줘서 먹고 연명하다가 일 년 후에 도망했다고. 오빠들은 또 하나는 일본에서 공부하고 하나는 서울에서 공부하고. 그러니까 못 산다는 거예요. 그렇다고 떠난다고 그러면 맞거덩? 그러니까 목숨을 걸고 넘어온 38선이라고. 그러니까 우리가 거기 있을 적에는 들어와서 때려 죽었어요. 지주들을 때려 죽였다고. 내가 10살에 해방되고 11살에 이북에서 나왔어요. 그러니까 아주 생생하죠. 70년 전 일을 생생하게 기억해요. 그래갖고 떠났다고 그러니까 한이잖아요. 고향을 등지고 빈손으로. 그래서 서울 와서 무지 고생했어요. 춥고 배고프고. 평생 먹어보지 않은 보리밥 먹고. 그렇게 고생했으니까 그런데다가 이북에서 왔는데 우리 큰 오빠가 와세다 대학 출신이에요. 근데 해방되니까 나이가 서른 살 됐죠. 그니까 영어를 잘 해서 미군 기관에 통역을 하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우리는 이북에다가 집을 세 채를 두고 왔어. 겨울에 추운 줄 모르고 여름에 이렇게 살았는데 집이 없는 거예요. 우리 오빠가 서울에서 보성공고를 나왔어요. 그러니까 그 보성공고 친구들 집에 전전한 거야. 이집 가서 살고. 근데 우리가 식구가 다섯 식구였어. 근데 얘가 나중에 둘 나니까 그러니까 우리 식구를 누가 감당 하냐고 어느 친구가. 그래서 이 친구 집에 가서 몇 달, 저 친구 집에 가서 몇 달. 그러면서 우리 오빠가 군에 입대했어요. 군에 입대하면 관사를 준다고. 장교한테 집주니까 그 다음부터 고생 좀 더 덜해도 된다고. 그러니까 그 조그마한 한두 살짜리를 데리고 그렇게 서울에 와서도 피난 살인거야 이집 저집으로. 그래서 군에 들어가서 육사구기생(18분20초)이에요. 우리 오빠 군번이 16339야. 나는 그 때 들은 거 지금도 안 잊어버려. 그래갖고는 관사가 나왔어요. 그 관사에서 일 년 살고 6.25사변 나고. 6.25사변 나니까 우리오빠랑 다 없어지고. 군인들이 다 없어졌어. 우리는 6.25사변 나니까 금방 총소리가 서울까지 오잖아요?

 

안 : 어디 사셨는데요?

 

김 : 서울에 있었죠. 서울에 목정동에. 목정동 동국대학 바로 밑에.

 

안 : 그럼 오빠가 중앙육군본부에 근무하셨구나?

 

김 : 예. 육군본부. 육사특기구기생이라니까.

 

안 : 제가 5.18 때 귀를 맞아가지고 가끔 헛소리를 할 때가 있는데 이해해주세요.

 

김 : 나도 귀가 잘 안 들려요. 난 나이 먹어서. 그러니까 우리 오빠를 찾아서 우리 올케언니하고 총 막 쏘는데도 육군본부 가니까 다 아무도 없어. 그래갖고 와서 보니까는 총소리는 밤낮으로 들리지. 오빠는 간데 군데 없지. 그러니까 울고 사는 그런 세월이었지. 4일 이후에 공산군이 서울에 들어왔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그렇게 겪은 사람들이라고. 혼비백산하고 겪은 사람들. 그리고 6.25사변 겪은 얘기하면 기가 맥혀요. 쫓겨 다니고 막 죽을 고비 몇 번 넘기고 우리 작은 오빠는 잡혀가지고 도망가고 이런 식으로. 그리고 우리 군복을 밤에 몰래몰래 태우고. 이게 군인 가족이다가 이북 피난민이잖아. 그러니까 우리는 죽어 싼 사람들이라고. 그러니까 그 때 같은 그 정말 가슴 졸이면 살았는데. 아 그런데 윤한봉이는 이북은 잘 한다는 거야. 한청련들도 그랬어요. 김주석은 잘하고 있다고. 그래서 우리하고 많이 싸웠어요. 그래가지고 나중에 한청련하고 헤어졌어. 우리는 잘 하긴 뭘 잘하냐. 우리는 하늘 밑의 독재는 다 반대다. 그래갖고는 내가 사흘 밤을 자고 윤한봉씨한테 뭐라고 그랬는줄 알아. 윤한봉씨는 너무 똑똑하니까 너무 아는 것 많고 역사 많이 알고 너무 똑똑하다. 근데 꼭 누구 같은가 하면은 비밀지하에서 훈련받은 사람 같다 그랬어. 그렇게 똑똑하다. 내 눈에 그렇게 비치는 거야. 그리고 너무 정치나 남북관계에서 밝고 그러는 거야. 내가 그런 말을 괜히 했지. 그러니까 그 담부터 윤한봉씨가 우리를 경계하는 거야. 글쎄 칼을 옆에다 놓고 자더라고요. 자기 자는 방에 옆에다 놓고 자. 그런데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렇다는데 그래서 우리 남편이 그랬어요. 당신이 비록 이북에서 보내온 스파이라. 그래도 윤한봉 당신은 손님 아니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당신을 해하지 않아. 공작원이래도 우리 집에 온 손님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절대로 해하지 않아. 우리는 크리스천이고 장로잖아. 우리는 사상적인 게 아니고 기독교 신앙적 입장에서 이렇게 인권을 유리해서 되겠냐. 그리고 그리스도하고는 너무 다르다 그래서 반대하는 건데. 정치사상보다는. 그리고 우리 남편 일본 명치대학(22분41초) 법대 출신이야. 그러니까 정치도 했어요. 서울에서. 국회의원 출마도 하고. 나는 그 영향을 받아서 굉장히 정치성을 띄게 됐지만 그리고 신학을 하니까 신학과 사회에 관심이 있어. 지금도 굉장히 나는 사회주의에 가깝다고 그래요 사람들이. 내가 쓴 글을 보면. 웹사이트에 보면 많은데 거의 다 영어예요. 그 웹사이트에 어마어마한 자료가 있어. 거기 명함 맨 밑에 주소가 있어. www.jeankimhome.com 그게 웹사이트인데 그래갖고는 그 때서부터 우리를 경계하는데 그 담에 우리가 가게 나가는 동안에 이 양반이 우리 집 전부다 뒤져갖고. 우리 남편이 신문을 모아요. 신문이 수백장이 있지 그걸 다 읽더라고. 그리고 우리 집 뒤져갖고 다 봤을 거 같아. 비밀은 없지만은. 그렇게 여러 날을 보냈어요. 그러고는 내가 이 고장에서 그랑지르라고 멀리 궁전에 가는 덴데, 섬인데 거기를 데려가서 내가 사람들 만나게 해주고 최선을 다해서 협력을 했지. 자기하고 우리하고 생각이 조금 달라도 우리 손님이잖아요. 우리가 꽉 맥힌 사람도 아니고 우리가 독재 반대하는 사람이고. 우리는 자기 레벨은 아니래도 그렇게 지났는데 우리가 아까도 얘기한대로 굉장히 고생할 때 왔어요. 우리가 무슨 인권 운동할 때 망하는 때에 왔다고 그래서 윤한봉 씨가 자던 그 집 아주 이쁜 집이었어요. 거기 김대중 씨도 다녀가시고. 그 집을 우리가 은행에 넘어가 뺏긴 거예요. 그리고 파산을 하니까 사업도 다 넘어가고. 내가 변호사 만나는 날 월급봉투 1200불 하나 있었잖아요. 돈이라곤 1200불 월급 수표 하나. 그거 가지고 파산한 거예요. 그래서 아파트로 옮겨났는데 이사할 돈이 없어서 우리 미국 교회 23명이 와서 차를 가져와서 이사를 해줬어. 자동차로 옮겨줬어. 그게 지금도 그 교회에서 내가 예배드리고 전도숙사협도 거기서 해요. 그런데 얼마 후에 얼마 안 되가지고 이민국에서 알아버린 거예요. 이런 사람이 밀항으로 들어와 가지고 우리 집에 있다는 게 어떻게 알려진 거예요. 이민국에서 전화와 갖고 그 들어온 사람을 내놓으라고. 안내놓으면 당신들도 법적인 조치를 하겠다고. 그래서 급해 갖고 미국 목사님한테 갔어. 어떡하냐고 우리까지 다 잡아 간단다고. 그러면 교회로 데려가라. 그래서 교회 안에 여러 날 숨겼어요. 먹을 거 사다주고 숨기고. 그리고는 내가 워싱턴 D.C에 연락한 거예요. 그니까 하비가 캐네디 의원한테 연락해. 그래갖고 시애틀에서 최고가는 이민 변호사를 이 사람들이 샀어. 그 담에 이민변호사가 전화가 왔어요. 데리고 내려오라고. 그래서 내가 윤한봉씨 데리고 내려가서 인제 망명신청을 한 거예요. 망명신청하고 그 담에 노동허가 신청을 하고. 그러는 사이에 6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나갔죠. 그러고 자기는 우리 가게하고 집하고 들락 나락하면서 책 읽고 신문 읽고 가게 와서 도와도 주고. 우리가 제일 힘들 때니까. 그러다가 한 6개월 쯤 있다가 우리 인권 그룹을 소개해줬죠. 그래갖고 여기 김형중 씨니 몇 명. 젊은이들은 나중에 온 사람들이에요. 김형중 씨가 제일 젊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인제 그 사람이 제일 나이가 어리고 그 담에는 다 나이가 많았어요. 여기 지금 온 젊은이들은 그 후에 한청년에 온 사람들이야. 그래서 우리는 데모할 때 한청년이랑 다 같이 했어요. LA에서 한청년이 와서 같이하고 꽹과리 울리면서 같이하고 전두환이 주로 왔을 때, 노태우 왔을 때 데모를 하는데 미국 사회를 포함시키는 건 내가 했어요. 왜냐면 우리 남편이 영어가 짧았어요. 그래서 미국 사회 포함시키는 거는 신문이라던가 텔레비라던가 이런 데 연락하는 것도 내가 해야 되고. 그 담에 미국 친구들. 내가 인제 미국의 에큐메니컬 단체 교회에 관계 많이 했었어요. 그 때 내가 워싱턴 대학에 교목으로 있었어요. 교목으로 있었으면서 여러 교단들이 서포트하는 애큐메니컬 대학목회였어요. 거기서 인제 나는 물론 영적인 예배드리고 이런 거 다 했지만 뭘 했냐면 워싱턴 주립대학 교수들하고 박사과정의 학생들을 데려다가 그 담에 교회를 다 데려오고 교회 다 망라해서 데려다가 미국이 제 3국에 정치적, 경제적으로 미치는 영향 그런 거에 대해서 강연을 시켰어요. 아주 한국 요리로 멋지게 해서 다 대접하면서. 그러니까 내가 거기 있을 때가 정성기라고 하는데 엄청 많은 사람들이 와서 이 강의를 듣고 그랬어요. 주로 한국의 인권문제, 또 미국 정치가 한국 인권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미국 정치가 세계 여러 나라 인권에 미치는 영향, 경제 정치 문화면에서 그런 제목에서 정치학과 교수들하고 경제학과 교수들, 대학원생들 데려다 했다고. 그러면서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알았겠어요. 그 시애틀 바닥에서 총 망라해서 안 거예요. 이런 인권운동 한다, 한국이 이렇다 그러고 텔레비전에 내가 막 나오고 말하고 막 그러니까 우리 친구들이 다 보잖아요. 보니까 데모한다고 그러면 다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데모한다면 길게 줄 서갖고 하고. 어떤 친구는 왜 나왔냐고 기자가 물어보면은 내가 나오라고 그래서 나왔다고 그렇게 대답하는 친구도 있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아주 활발하게 했었어요. 어느 도시도 한국 사람끼리 했지 그렇게 미국 커뮤니티를 참여시킨건 여기 밖에 없어. 그래서 김대중씨가 자기하고 일 안하겠냐고 그런 거예요. 근데 그렇게 해가니까 그 담에 우리 인권옹호협회에다가 윤한봉씨를 소개를 했어. 근께 윤한봉 씨가 김형중 씨를 통해서 젊은이들을 하나씩 둘씩 모였어요. 그러면서 우리 집에서 6개월 살고 그 다음에 LA로 가보겠다고 글더라고. 그래서 우리가 누구한테 소개를 했냐면은 김상돈씨. 옛날 서울시장이예요. 김상돈 씨하고 딸하고 사위가 사위가 장킴이라고 의사였어요. 그 두 사람이 인권문제에 개입을 했었다고. 그래서 거기다 보냈어. 그래갖고 그 집에다 보내서 그 집에서 얼마 있고.

 

안 : 거기 소개해준 것도 목사님 부부가 소개해주신 거네요.

 

김 : 그렇지 않으면 윤한봉씨가 그 사람들 잘 모르죠. 장킴이니 뭐니 여기 사는 사람들인데. 그래서 거기다가 소개를 해서 보냈죠. 거기 가서 또 젊은이들 만나고 한청련 조직하고 그러면서 시애틀 왔다 갔다 하고. 시애틀 오면은 저 왔습니다, 인사를 하고 그러더라구요. 그 후에 한청년하고 우리가 오랫동안 같이 했어요. 하루는 한청련들이 같이 만나서 우리 집에서 회의를 하는데 그 독재에 대해서 얘기를 할 때 김주석 님은 잘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남편은 아주 벌떡벌떡 뛰는 거예요. 우리 두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말하냐. 아무리 우리가 동족이고 통일을 원하고 다 마음은 똑같은데 그렇다 그래서 잘못하는 것을 잘한다고 그럴 수는 없다는 말이지. 그래갖고는 한청련하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그러다가 결국 한청련하고도 헤어졌어. 저 사람들 생각에는 우리가 골동품이야. 그리고 시애틀 사람은 우리가 빨갱이고. 그러니까 이게 참 웃기는 거야. 이게 저 나이 먹은 사람들, 시애틀 교민들 눈에는 우리가 시빨간 빨갱이고. 그리고 젊은 사람들 측에는 우리는 아주 골동품이야. 우리는 인권도 모르는 골동품이야. 그렇게 됐어요. 그렇게 되갖고 어떻게 헤어지게 됐어. 그래도 한고장에 사는 사람들이라 만나면 지금도 반갑고 그래요. 뭐 그런거 다 떠나서. 다 옛날 일이고. 김형중 씨랑 계속해서 상관하고 살죠.

 

안 : 나중에 한청련이 북한 쪽으로부터 굉장히 배척을 받거든요. 근데 왜 그런 거죠?

 

김 : 아니 우리가 이북을 가는데 우리도 좀 고향이 이북이니까 방문할 수 있냐니까 우리는 안 된데요. 우리는 블랙리스트에 올랐데요. 왜냐면 우리가 이북뿐만 아니라 소련이고 무슨 다 비판하잖아요. 독재는 다 비판하잖아. 그러니까 우리를 누군가가 보고해서 우리는 블랙리스트에 이북에 못가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관둬. 안가. 고향 가보고 싶지만 내 열한살에 떠난 고향 한 번 가보고 싶지만 눈앞에 선해요. 고향이 함흥. 근데 안가요. 못가고 안가요. 함흥에 태어나서 열 한 살에 이남으로 피난 왔어.

 

안 : 함흥의 구체적으로 지명도 알아요? 이야기와 상관없지만.

 

김 : 내가 태어난 곳은 함흥시 선청정 삼정목 95번지.

 

안 : 함흥시 외곽이었나보죠? 땅은 딴데 갖고있고?

 

김 : 그런데 땅은 우리 외할아버지가 거기서 50리 밖에 토지를 많이 갖고 있었어. 그래서 우리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니까 아버지가 인계를 맡은 거 같아요. 그래서 우리를 다 데리고 갔어. 거 촌인데 토지가 많은 곳으로. 논, 밭, 산 할것없이 많은 곳으로 우리를 데려갔어요. 그래서 우리 집은 함흥에서 이사 왔다 그래서 함흥집이라고 부르는데 거기는 선덕이에요. 함주군 선덕면 명호리 59번지야. 연포에서 가까운 곳이에요. 연포비행장에서 가깝고. 할아버지는 지주고 부르주아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니까 아버지가 인계를 맡아서 우리 온 식구를 다 데리고 거기로 간 거야. 해방 거기서 맞았어요. 그니까 거기 가가지고 얼마 안살고 내가 두세살 때 간거 같아. 10살에 해방 맞았어요. 분명히 기억해. 그 날 우리 오빠가 옛날 라디오, 뒤에 다바가 보이는. 그걸 놓고서는 천황이 얘기하는 거 듣고는 해방됐다고 그냥 난리를 했더니.

 

안 : 어휴 라디오가 집에 있었으면 부자네요.

 

김 : 아 그 당시에 일본 유학생인데. 요만한거 째깐한거 누런거. 뒤로 다마 이렇게 보여요. 그리고 거기는 전기도 없다가 나중에 전기가 들어왔어요.

 

안 : 그러셨으니 북한의 문제를 직접 눈으로 보셨으니 잘 아시죠.

 

김 : 글죠. 아무리 어렸지만은 트라우마이기 때문에 잊을 수가 없죠. 그리고 거기서 우리 5촌 삼촌은 관룡산에서 총살당했다고 그러고. 그리고 내가 어렸으니까 11살밖에 안됐으니까 내가 아는 친척들은 다 돌아가시고. 내 나이의 아이들은 이름조차 기억할 수 없고. 그러니까 우리는 완전히 고향과 친척을 잃어버린 거예요.

 

안 : 아까 이야기한데로 돌아가서 나중에 북한에 아주 동조하는 그 사람들하고 윤한봉 씨가 주도하고 한청년하고 완전히 막 나눠져요. 그래도 이쪽에서는 한청년도 빨갱이고 전부 빨갱이지만.

 

김 : 거 왜 미국에 왔냐, 이북을 가지. 이북을 두둔하는 말을 하니까 제국주의고 뭐시고 뭐시고 이런 미국을 왔냐. 이북을 가는 게 나을 뻔 했다. 그랬더니 자기는 이북에서도 안 받는다고 그러더라고. 그럼 니는 도대체 뭐냐. 자기는 공산주의자도 아니고 완전 공산주의자도 못되고 자기는 그냥 조국이 살아남기 위해서 그 때같은 입장을 취하는 데에서 후원한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리고 자기는 완전한 빨갱이도 못 된다고. 그리고 이북에서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러더라고. 거기서도 안 받는다고. 왜냐면 말하는게 김주석은 잘하고 어쩌고 그러니까 거길 가야지 여길 왜 왔냐. 여기는 올 곳이 아니다.

 

안 : 처음 도착해서 한 얘기에요?

 

김 : 처음에 와서 한 얘기야. 그거는 우리하고 사적인 얘기에요. 내가 인제 이렇게 자기를 파고드니까. 당신 이북 공작원 같다느니 아주 잘 훈련받은 똑똑하고 정치경제를 너무 많이 아는 그런 사람 같다느니 이러니까 이 사람이 충격 받은 거야. 내가 자기를 보는 눈이 그렇다 그래서. 자기가 그렇게 비췄나 그래갖고는 충격 받은 거야. 그 담에 인제 오픈을 해야지 어떡해. 그러니까는 이북가지 그러니까 자기도 거기는 못가는 데라고 그러더라고.

 

그러니까 공개적으로 김일성이나 북 체제를 지지하는 사람들하고 웬수에요. 그러니까 윤한봉 선생이 그 당시에 운동권이 막 전두환 시대에 박정희로 바꾸면서 그거는 괜찮다는 북한은 괜찮다라는 김일성을 잘한다는 그런 식의 생각을 한 것도 사실인데 본인은 나중에 그 사람들하고 굉장히 싸워가지고 죽인다니 이런 소리도 듣고 그랬어요.

 

김 : 그래갖고 나는 한국에 가가지고는 춘천에 우리 친척이 있는데. 산보하다가 춘천 무슨 대학교 건너편에 책방이 있더라고. 내 거기 들어가니까 주체사상에 대한 책이 수두룩 있어요. 그래서 내가 주체사상이 뭔데 이렇게 대학생들이 좋아하나 한 반쯤 읽고 버렸어. 왜냐하면 내가 가지고 있는 상식은 주체사상 그러면 어디에 살 권리, 말 할 권리, 무슨 직업 가질 권리, 교육받을 권리. 그런 기본 권리가 다 있어야 그게 주체의 권리 아니에요? 난 그렇게 정의를 하는데 아 그런데 이북사람들이 없다면서. 우리 살 때도 없었어. 그러니까 그게 왜 주체사상이냐고. 서울대학교 교수 이광규 교수가 있었어요. 그 분이 시애틀에 와서 나를 인터뷰를 했어요. 나는 한인사회 바깥에서 일하는 사람이다 그래요. 왜냐면 내가 미국사회에서 사회사업하고 정신병원에 오래 일하고 인권운동도 미국사회하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나는 좁은 한국 커뮤니티 바깥에서 한다 그래서 인터뷰를 하고 했거든요. 그 양반한테 내가 물었어요. 왜 한국 대학생들이 주체사상에 반했나. 내가 책 한 권 읽어 봤는데 나는 아닙디다. 그 형편에, 그 형편도 주체가 아니고 대한민국의 노동자, 농민 측에서도 주체사상 맞지 않고.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 사람들이 주체사상에 반했나 나는 이해가 안 돼 그랬더니 거기가 그렇게 설명하더라고. 농촌에서 논밭 팔아갖고 농사 짓는 부모들이 자식을 머리는 좋으니까 서울대학에 입학 한다 그래요. 그래서 와서 학비가 모자라니까 가정교사를 한데요. 그러면 상당한 부잣집에 가정교사로 간다는 거예요. 가면은 그 환경과 자기 부모의 환경이 너무너무 천양지차니까 거기서부터 이북은 모르고 그 책을 읽어보면 모든 사람이 잘 사는 세상 거기에 반한다는 거예요. 아 그러냐고. 근데 나 같은 주부도 그거 읽어보고 이건 아니다인데 전체 한 권 다 읽어볼 필요도 없습디다. 반복도 많고 그리고 기본권이 없는데 난 지금 미국에서도요 가난하고 집 없는 사람들 대변자에요. 그 사람들 섬기는 일을 지금 반세기째 하는데 여기서도 그거 쳐도 되요. 기본권이 없다. UN 헌장에 있는 집 가질 자유, 직업 가질 자유, 행복하게 살 자유 없다는 거예요. 이거 미국 같은 나라에도 없어. 민주주의. 정치는 민주주의일지 모르지만 경제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래. 경제는 독재다. 그렇게 얘기하죠. 어떤 미국 친구들은 싫어해요. 싫어하거나 말거나 아 그거다 말이지. 그러고 나는 내가 섬기는 가난한 노숙자들 목소리를 안고 다닌다. 이 사람들 내 겨드랑이 밑에 끼고 다녀. 그러니까 내가 말하는 거는 이 사람들 목소리다. 그래서 이 사회에서 목소리상, 뭐 그래갖고 81년도에 UN 시애틀 챕터란 게 있어요. 거기서 인권상을 받았어. 우리가 너무너무 박해를 당하니까 위로한다고 준거 같아요.

 

안 : 아까 녹음이 안됐으니까 가게 문에다가 뭘 써붙이고 그랬다면서요. 뭘 써 붙이셨어요?

 

김 : 가게 문에다가 전두환은 머리가 돈 돌대가리라고 써 붙였어. 전 돌 전자에, 머리 두자에 , 돌 환자에 이런 식으로 써 붙이고 김대중 구명 00 이래 써 붙이고. 그러니까 영사관이 달칵한 거지. 영사관 직원들도 원래는 우리 가게 왔었어요. 그러고 붙인 다음부터는 죽이는 운동을 한 거야.

 

안 : 그 뒤로는 교민들이 가게에 오기가 어려워 진거네요.

 

김 : 어려워졌지. 저 집 가면 빨갱이 된다 이렇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인권운동을 해도 아주 직선적으로 미련하게 한 거예요. 얕게 못하고. 북한은 그렇게 증오하는데 북한편이라 그러고. 젊은 층들은 우리보고 골동품이라 그러고.

 

안 : 윤한봉 씨는 북한을 지지하는데 북한에서는 또 욕하고.

 

김 : 그게 참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어요. 그래갖고는 문익환 목사님도 우리 스승이잖아요. 그리고 김대중 박사. 김대중 박사 때문에 우리가 인권 또 발 들여 놓은 거야. 김대중 박사님이 캐나다에 머물면서 북미 쪽 기도학자회부터 시작해가지고 한국 민주화운동 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세인트루이스에서 살적에도 우린 거기서부터 시작해가지고 국제적 모임 있죠. 캐나다에 사는 한국사람, 미국에 사는 사람 우리가 호스트도 하고. 또 워싱턴D.C에서 모이면 우리가 회의 하러도 가고. 그러니까 세인트루이스부터 시작했어요. 김대중 씨하고 우리 남편하고 친해요. 정당 때부터.

 

안 : 언제 돌아가셨어요? 김선생님은?

 

김 : 그러니까 윤한봉 씨하고 같은 해에. 윤한봉이는 한국에서 6월 26일. 우리 남편은 여기서 6월 26일. 같은 날이죠? 날이 여기가 하루가 늦죠? 어떻게 두 사람이 같이. 윤한봉 선생 한국에 돌아가서 통일문제, 북한문제 그런 얘기 한 적은 없구요. 여기서 객지에 나와 가지고 여기는 남북을 저기로 보니까. 거기 가서는 민주화운동만 했어요. 그 전에도 그랬고.

 

김 : 여기 와서 고생했어. 우리 집에 있을 때는 우리가 밥 멕여주고 그랬지만 다른 데서는 모르겠는데 담배를 너무 피워갖고 웬 담배는 그렇게 만날 피우냐고 내가 핀잔줬어. 줄담배를 그렇게 피냐고 건강에 안 좋은데. 결국은 담배를 너무 많이 피우더니 더 살 수 있는데. 그리고 홍근수 목사 알아요? 홍근수 목사는 내 후배에요. 그래갖고 굉장히 가까운 친구에요. 문익환 목사님이랑은 스승이고. 김대중 박사도 우리 스승이고. 그래서 우리가 인권운동 할 당시에는 형사들이 쫓아다녔었어. 어디 다방에 가서 친구들 뭐하면 저기 앉아서 지키고 그랬었어.

 

안 : 그 뒤로 미국에 귀국하고 나서는 보진 못하셨겠네요.

 

김 : 봤어요. 오면은 들르더라구요. 인사하러 왔다고 그러고요. 다른데 가있으면서도 여기 오면은 왔다 그러고. 자기도 고맙죠 뭐. 그래서 우리네는 누구처럼 사상이 다르다 그래서 뱉어버리고 그러지 않았어요. 자기한테 말했어. 당신이 누구라도 우리 집에 들어온 손님 아니냐. 성경에 도피성이라는 게 있지 않냐. 그래서 메이풀 교회가 윤한봉 씨한텐 도피성이었어. 그 때 이민국에서 막 찾을 때. 근데 인제 교회 갖다가 감춰놓으니까. 그 목사님 아직 살아계신데 여기 없고 아리조나 딸집에 있는데 부인은 거의 장님이고 목사님은 귀가 거의 어둡고. 그러고 교회 협의회 회장. 내가 한번은 데모 주동을 했는데 혈압이 높아갖고 응급실가게 됐어요. 그래서 그 교회협의 회장 목사님한테 연락해서 내 대신 데모 주동하라고. 그래서 시내에 나오셨는데 그 분의 추도식을 엊그제 했어요. 그렇게 하셨던 분들 사진은 다 있어요. 우리 집에는 김대중 씨 사진도 쫙 있고. 김대중 씨가 우리한테 써 준 글도 있고. 사진들도 다 보내줄 수 있어요. 그래서 거기 사진에 국민표창상을 탈 때 영사관에서 다 왔어요. 명함에 이메일 주소로 사진 좀 보내드릴게요.

 

안 : 그래도 교민 사회에서 존경 받으시면서

 

김 : 아니에요. 많은 미국인들이 도와줬어요. 우리는 특히 인권협회 이사가 미국사람 반 이상이었어요. 그 양반들이 그렇게 고마웠어요. 그것도 뭐 교수나 대표적인 목사들하고.

 

우리가 그때 좀 괜찮게 살아서. 독방을 줬어요, 윤한봉 씨한테, 침대서 안자고 바닥에서 자요. 왜 그러냐니까. 우리 동료들이 감옥에서 자는데 내가 편안하게 잘 수 없다고.. 그래서 그런 것은 참. 참 검소하고 그때는 장가도 안 갔어요. 욕심 없고 그렇더라구요.

 

안 : 청소는 잘하던가요?

 

김: 잘하고 깔끔하고 강직하고 똑똑해요. 아주 똑똑해요. 오죽하면 내가 그리 이야기했을까? 지금 생각하면 우리가 그때 힘들었지만, 더 잘해줄걸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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