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수통신

제목시카고의 어린왕자, 이재구가 본 한청련의 권력투쟁; “한 손엔 동포사회, 한 손엔 조국” 슬로건의 비밀 2018-12-26 12:14:03
카테고리한청련회고
작성자
첨부파일1-시카고 이재구 선생님.hwp (48KB)

시카고 이재구 선생님

 

면담자 : 안재성

구술자 : 이재구

 

면담자 : 몇 년생이세요?

구술자 : 71년 생이구요.

면담자 : 여기 온 것은?

구술자 : 1989년도죠. 시카고로 이민을 왔습니다. 열여덟 살 때요. 저는 89년도에 고3때 이민을 와서, 친구소개로 청년교육문화원이라는 커뮤니티단체가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역사모임이라든지 철학교실을 열었어요. 마당집을 알게 됐고, 그 다음에 한청련도 알게 됐어요. 그래서 90년 여름 때부터 여러 가지 자원봉사도 했구요.

면담자 : 한청련에서 무슨 일을 했나요?

구술자 : 그때는 새내기였으니까 풍물 같은 경우 남훈 형한테 북을 배웠고, 5.18행사하면 도와주고, 그런 일을 했어요. 그러다가 92년도에 LA 나성에서 해외동포대회가 있었거든요. 각 지역에 있는 한청년, 한겨레 선배들 같이 2년에 한 번씩 열었죠. 92년도에 LA 나성에 처음 가게 됐어요. 아는 선배들이랑 또래 친구들이랑 함께 갔죠. 92년도 8월 달에 해외동포대회를 했었을 거예요, 근데 아시겠지만 92년도 4월에 흑인폭동이 일어났어요. 4개월 후 나성에서 해외동포대회를 한청련, 한겨레 주관으로 열었죠. 거기에서 윤선배님을 처음 뵀어요.

면담자 : 음, 거기서?

구술자 : 그때 2박 3일로 행사가 진행이 되는데, 윤선배님 같은 경우 정세 분석에 관한 발제를 해요.

면담자 : 그때 어떻든가요?

구술자 : 윤선배님의 경우 본인이 정세 분석을 하기 시작한 게, 조국 관련된 정세에 대해 누구한테 똑부러지게 듣고 싶었었는데, 다 만족스럽지 못했던 거에요. 맞지도 않고. 그래가지고 본인이 정세 분석을 시작을 하셨대요. 본인이 신문을 읽으면서 직접 정세 분석을 하기 시작하셨다고 얘기를 들었어요. 일단은 신문을 비롯한 자료를 방대하게 수집을 하시고서 퍼즐을 맞추듯이 자료들을 분석해나갔대요.

그런 얘기들도 하시고. 미국에 있는 해외 청년단체인 한청련은 남부조국, 북부조국 그렇게 불렀거든요. 해외동포는 남과 북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의식적으로 제3자, 중간자의 역할을 하자는 거였죠. 해외동포운동은 중간자의 역할로서 올바르게 조언해줄 수 있고, 지원해줄 수 있는 그런 거를 많이 강조를 했어요. 그래서 한국의 모 운동단체에서 이렇게 하자고 하면 저희들이 ‘옳소’ 그러면서 따라가고 그러지 않았어요. 옳고 그른 걸 판단해가지구 해외동포로서 제3자의 역할을 했어요. 포괄적으로 도와주구 그랬던 기억이 나요. 재정적으로도 힘든 노동자들 도와주기도 하고, 미국의 제3세대 운동단체들 같은 경우에도 물질적으로도 도와주고, 연대 활동을 함께 했던 기억이 나요. 무작정 한국 운동단체에 묶여 가지구 따라가지 않았어요. 북한에 대해서도 비판할 건 비판하고, 남한도 또 비판하고. 똑같이 하려고 노력했어요.

면담자 : 북한이 잘 하고 있다, 북한은 맞다. 이런 소리는 한 적은 없구요?

구술자 : 윤선배님 있을 때는, 좀(웃음) 예…. 근데 그 와중에 더 그런 쪽으로 애정을 가진 선배들은 있었겠죠?

면담자 : 그러니까, 북한 노선이 옳다고 보는 선배들이 있었던 거죠?

구술자 : 저는 모르겠어요.

면담자 : 윤한봉 선생이 계시는 동안에는 갈등이 없던 거죠?

구술자 : 예, 그렇죠.

면담자 : 본인이 또 그런 식으로 편향된 주장을 한 적도 없고?

구술자 : 예, 예. 리더로서 확고한 게 있으시기 때문에 다른 선배들 같은 경우에 다른 생각이 있더라도, 잘 이끌어왔었던 거 같아요.

면담자 : 그럼 이선생은 어려서, 중앙위원회에 끼질 못했겠네요?

구술자 : 저는 평회원이었죠. 광민 형 같은 경우 지역의 회장 역할을 했었고, 또 광민이 형보다 몇 살 많았던 한익수 선배라든지, 채관우 선배 같은 경우에는 중앙위원 역할도 하고 그랬죠.

면담자 : 그러면 윤한봉선배님 에피소드랄까 장점과 단점에 대해 얘기해주세요.

구술자 : 윤선배님은 미국에 있었을 때는 주로 LA에 계셨죠, 나성에. 저는 시카고에 있으니까 평상시에 접할 기회가 없었고. 해외동포대회에 가더라도 개인적으로 뵐 기회가 없었구요. 90년대 초 시카고에 수련회 있었을 때 윤선배님 모시고서 수련회 했던 기억은 나요. 그때 정세 분석에 관해 발제를 하셨어요. 우리에게 맞춰가지고 잘 풀이해주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우리를 대하는 게 정(情)이 많으셨던 것 같아요. 옛날에 LA에 갔을을 때 해외동포대회가 끝나고 나서 디즈니랜드에 놀러갈 수 있도록 배려해주시고, 윤선배님 93년도에 한국 들어가신 후, 한청련 멤버들 중 몇 명이 한국을 방문해서 노동자단체, 이주이민자단체를 방문하는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그때도 저희가 윤선배님 통해서 숙소를 마련할 수 있었어요. 망월동 국립묘지도 가보고. 윤선배님이 설명도 해주시고. 집에 가서 곶감도 얻어먹고. 본인이 좋아하시는 곶감을 먹어보라고 했어요. 곶감을 되게 좋아하시더라구요.

면담자 : 속이 그 말랑말랑한 거.

구술자 : 네, 되게 좋아하셨어요. 막 스페셜티라고 막 먹어보라고. 어쩌면 97년 아니 98년이었을 수도 있어요. 제게 사진도 있고 그러는데. 그러고 나서는 5.18 재단에서 하는 5월 행사 때문에 또 두 번 갔었어요. 그때 김찬호씨라고 5.18 재단에서 일하시고 있었거든요. 저랑 나이가 똑같은 분인데 지금 일 안 하실 거예요. 그분 계실 때 5.18 재단 행사 참여하고, 포럼 같은 데 참여하고 그랬던 기억이 나요.

면담자 : 한청련에서 주로 하신 활동은?

구술자 : 92년도 해외동포대회 갔다 오고 나서….

면담자 : 잠깐만, 해외동포대회를 자세히 얘기해 줄래요?

구술자 : 각 지역에 한청련, 한겨레 조직이 있지요. 시카고 한청련, 시카고 한겨레, 뉴욕도 똑같이 있구요. 시애틀, 샌프란시스코, 필라, 토론토에도 있었어요. 달라스에도 있었던 거 같아요. 각 지역에 있었는데, 학습은 자체적으로 하는데, 정세 분석은 같이 만나 공부해요. 전국에 있는 한청련, 한겨레 회원들이 모여서 발제도 듣고, 학습도 하고, 앞으로 어떤 활동을 해야 될지 계획하는, 그런 성격의 모임이었어요. 92년도 전에는 1년마다 하다가, 92년도 이후로는 2년마다 했을 거예요. 92년도에 제가 처음 참여했었고요. 그때 나성사태가 있고 나서 여기 미주동포들이 여기서 살아야 되고, 커뮤니티에 더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커뮤니티를 더 신경쓰자고 했어요. 동포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활동하자고 했죠. 50대 50으로 “한 손에는 동포사회, 한 손에는 조국을” 돕자고 했어요.

50대 50으로 해서 공부도 하고, 마당집 활동을 더 강화하여 동포 커뮤니티에 뿌리를 내리자고 했던 기억이 나요. 92년 이후로는 마당집에서 동포의 권익옹호 활동을 위해서 저희가 더 공부를 하고 더 노력을 했죠. 그러다가 94년 해외동포대회에서 저희가 마당집 전국 협의체, 나카섹을 결성하게 돼구요. 그러니까 92년도 같은 경우 시카고는 한인교육마당집, 필라는 필라청년마당, LA는 나성민족학교, 산호세 같은 경우에는 산호세 마당집이 있었는데, 연학체로는 존재하지 않았죠. 그러다가 94년도에 우리의 권익을 대변하기 위해서는 협의체가 필요하다고 그래서 마당집 협의체가 ‘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라는 게 94년도에 해외동포대회를 하면서 그때 만든 거죠. 그래서 그때 본부가 LA에 있었나? 그랬던 거 같아요. 그래서 94년도에 본격적으로 각 마당집 협의체가 생기면서 때마침 미국 정치사회에서 반이민 정서가 조장되던 때예요. 그래서 노인 분들의 웰페어를 막 없애버리려는 정서가 있었어요.

면담자 : 이주민들이 뭘 받았다구요?

구술자 : 웰페어. 그니까 사회보장혜택. 노인분들 같은 경우 정부에서 보조금 받아서 생활하시구 그러는데, 영주권자, 시민권자 같은 경우 다 받을 수 있게 됐는데 시민권자는 괜찮더라두 영주권자 같은 경우는 주지말자 그런 내용이 담긴 법안이 통과되려는 움직임이 있던 때였어요. 공화당의 보수적인 하원의원 의장이 주도해가지고 반이민법안을 통과시키려고 했어요. 그래서 그런 분위기 속에서 마당집 협의체가 94년도에 생기게 됐고, 저희들도 마당집 활동을 강화하게 된 거였어요. 당시만 해도 그런 활동을 하는 단체들은 복지단체였어요. 권익옹호를 위한 단체가 아니었고요.

92년도에 나성사태를 겪고 나서 2년의 준비를 거쳐서 94년에 마당집 협의체가 구성이 된 거죠. 본격적으로 “한 손에는 동포사회, 한 손에는 조국”. 두 깃발을 들고 활동을 계속했어요, 지금까지도 해오고 있는 거죠. 한청련 같은 경우 세월이 지나 해체되요. 언제 됐더라? 2000년대 중반쯤 발전적 해체를 하죠. 한겨레도 그렇고. 그렇지만 지금은 마당집 위주로 활동을 해요. 한청련과 한겨레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죠.

면담자 : 마당집도 지금은 LA와 뉴욕, 시카고, 세 군데만 남은 거죠?

구술자 : 지금 뉴욕청년학교를, 민권센터라고 그러는데, 94년도엔 필라청년학교가 있었어요, 그런데 재정적으로 어려워서 문을 닫았어요.

면담자 : 윤한봉 선생님이 떠난 뒤의 일이긴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해서 거리낌 없이 얘기 좀 해줘 봐요. 조직사건이라고 해서 몇 사람 나가고 끝인 줄 알았는데, 서로 엄청 많은 공방을 했네요. 뭐 이런 분들이 탈퇴서를 썼는데 신영로, 신영후. 김주연, 박희수, 한호석. 한호석은 제명됐나요?

구술자 : 예. 중앙위원회 차원에서 제명을 시킨 거예요. 그랬다가 광민이 형이랑 제 나이또래 다섯 명이 그냥 나왔죠, 시카고 한청련의 이름으로 해가지고. 선배들하고 의견이 안 맞으니까. 나와서 있다가 95년도에 지금의 마당집을 만들게 됐고.

면담자 : 황주식 한겨레 연합회장 이 사람이 강력하게 그런 걸 주장을 했네. 지금도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지금 우리 이 선생님이 보기에는 어떤 거 같아요?

구술자 : 그러니까 노선차이로, 윤선배님 93년도에 들어가고 나서 헤게모니 싸움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북한에 대해서 애정을 갖는 분들, 통일운동을 하고 싶어 하는 선배들이 있었는데, 조직을 주도하기 위해서 이거를 구실삼아 분란을 일으켰으나 결국 다 넘어가진 않았고, 저희가 제명시켰죠. 그러고 94년 이후로 이분들은 다른 단체를 만들어가지고 시카고에서 활동을 하고 그랬어요.

면담자 : 94년 1, 2월이네.

구술자 : 94년도. 그러고 나서 94년도 8월 달에 해외동포대회가 있었던 거네요. 통일 운동을 그 선배들은 하고 싶었던 거죠. 또 선배들 사이에서도 통일 운동을 더 하고 싶었는데, 그런 걸 구실삼아가지고 조직사건이 있게 됐어요. 이게 정리되고 나서 저희는 94년도 8월 달에 한청년, 한겨레가 “한 손에는 동포사회, 한 손에는 조국”. 그런 슬로건을 걸고 활동하였죠.

면담자 :‘윤한봉이 독재한다.’ 이런 얘기를 아주 자세히 많이 써놨는데요. 그런 부분은 어때요? 그 부분 읽어봤어요? 그러니까 “윤한봉만 보면 다들 쩔쩔 매고, 회의에서 다들 결정해도 윤한봉이 ‘아니야.’ 그러면 그냥 아닌 것이 돼버리고. 얘기하고 싶어도 어차피 윤한봉한테 당할 건데 뭐. 이래서 말을 못하고. 이게 조직이냐? 그래서 나간다.”라고 한호석씨가 이렇게 써놨어요. 그 부분은 어땠어요?

구술자 : 저는 한호석 선배는 잘 몰라요. 그 선배는 아마 뉴욕에 계셨을 거예요. 쓰는 그런 거 좋아하고, 통일 운동에 관심이 많으셨던 거 같아요.

윤선배님 같은 경우, 사람이니까 치우칠 수도 있겠지요. 독단적으로 하신 경우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한청련은 조직이잖아요. 중앙위원회가 있고요, 윤선배님은 지도위원이셨구요.

면담자 : 윤선배님도 중앙 위원이었어요?

구술자 : 아니요, 중앙 위원은 아니고 지도위원으로 계셨죠.

면담자 : 그래요.

구술자 : 강완모선배 같은 경우에는 뉴욕청년학교에 관여하시다가 어떤 일인지 모르겠는데, 관계가 안 좋아지셔 가지고 뉴저지에서 계시면서 저희랑 같이 활동을 하셨죠. 강완모 선배 같은 경우에 93년도에 윤선배님 한국 모시고 가셨을 때, 그때, 한청련 회장이었요. 그래서 윤선배님 한국 모시고 갔었고,

94년도에 권민지, LA에 계시고, 정민, 산호세에 계시고, 심인보, LA에 계시고, 정승진 뉴욕에 있고, 강완모 뉴욕. 그런 선배들 쭉 있었는데 94년 이후로 권민지, 임소영이 제명돼서 저희 그룹에서 나가게 되요.

 

97년도에 정민 선배 같은 경우 산호세 그쪽에 사시는데, 94년 당시에 한청련 회장이었고 그래요. 그분은 동포사회운동을 2세 위주로 끌어나가려고 했어요. 더 이상 조국의 민족민주운동에 관여하지 않고요. 길게 보고 2세 운동 을 해야 되지 않냐 생각을 하셨던 거 같아요. 그런 게 조직 안에서 의견이 제대로 안 걸러져서 또 조직사건으로 불거졌지요. 산호세에 있던 정민 선배 같은 경우가 떨어져 나갔죠,

그러다가 뉴욕청년학교, 시카고 마당집, LA나성학교가 있었는데 뉴욕청년학교가 동포사회운동을 하는 데 있어서 정치활동을 추구하자는 주장을 해요. NRI 같은 경우 총기 단체잖아요. 걔네들 같은 경우에 논프로픽 파이브온시 같은 비영리단체가 있고, 또 로비를 위한 파이브온시포인가 하는 또 다른 종류의 단체가 있고 그래요. 그러니까 로비를 할 수 있는 단체를 따로 가지고 있어요. 우리 마당집 같은 경우 비영리 단체로서 정치활동을 못 하는 단체로만 있는데, ‘우리가 이민자의 권익옹호 운동을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선 파이브온시처럼 라비 활동이 가능한 마당집이 되어야 한다.’ 그걸 강력하게 주장했던 분이 정승진 선배였어요. 그러다가 의견이 안 맞아서 뉴욕청년학교가 이제 마당집 협의체 나카섹에서 떨어져 나가게 된 거죠.

면담자; 서로 안 맞으면 투표를 해서 4:0으로 내가 졌으면 “그래, 그럼 너네 노선대로 하자”하는 것이 원칙이잖아요? 근데 의견만 틀리면 다 갈라지고…,왜들 그래요?

구술자 : 그 옛날 합수형님이 얘기한 게 기억이 나는데(웃음) 보수단체들 같은 경우에는 한 목적을 위해서는 의견이 달라도 잘 뭉치는데, 이긴 쪽이 다 피스(‘몫’을 의미하는 듯)를 주니까. 그런데 진보단체들은 사정이 데스피릿(절망적) 하기 때문에 그럴 여유가 없다고 얘기를 했던 기억이 나요. 저는 개인적으로 마음이 아프죠. 친구도 있고, 선배도 있고 그러니까(웃음) 저도 이제 두루뭉술했으면 좋겠는데,

면담자 : 편협한 사람들이 많아서 그러나? 자기주장만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건지. 이게 무슨 대단한 권력도 아닌데, 사소한 것에 그렇게.

구술자 : 그래서 각 지역에 마당집이 있었는데, 지금은 관계가 소원해졌어요.

면담자 : 마당집끼리도?

구술자 : 예. 지금 뉴욕하고는 그렇죠.

면담자 : 그러면 시카고는 어디하고 가까워요?

구술자 : 시카고는 LA와 가깝죠.

면담자 : 나성민족학교도 활동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던데?

구술자 : 똑같아요. 같아요. 그러니까 뉴욕도 그렇고 저희도 그렇고 다 똑같다고 생각하면은(돼요.) 하는 일들은 다 비슷해요.

면담자 : 민권센터도 결국 비슷한 거 아니에요? 근데 왜 그래?(웃음) 나성에 서 김준씨가 운전을 했기 때문에 거의 하루 종일 별 얘길 다 들어봤는데, 이렇게 구체적인 건 아니었고, 특히 이런 얘기는 처음이고.

구술자 : 이런 조직사건 이야기는 안 해요. 전 참조하시라고 말씀드린 거에요.

면담자 : 기본적인 것은 소하누님한테도 들었어요. 난 지금 아직도 이해가 안 되네. 이것까지는 평전에서 쓸 건 아니에요.

 

 

 

 

 

 

 

 


댓글
자동등록방지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입력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