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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끝까지 한 길을 간 서혁교, 그의 가슴 애리는 회고2018-12-25 09:17:11
카테고리한청련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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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서혁교 선생님

2016년 2월 8일 워싱턴 D.C 서혁교,

면담자 : 안재성

구술자 : 서혁교

 

안 : 서 선생님은 언제 미국에 오셨나요?

서 : 저는 71년도 가족과 함께 이민 왔어요. 60년생으로 11살 때, 초등학교 6학년 때 왔으니까요. 그때 뉴욕에 왔다가 그 후에 워싱턴으로 왔어요. 아버님은 언론인이었어요. 동아일보 기자였고 민주화운동을 계속 하시고 아버지의 영향도 있었지만 저 같은 경우 여기서 공부했기 때문에 여기서 주로 활동 기반을 잡았죠. 광주학살 그 때 제가 콜롬비아 대학을 다녔는데 충격 받아가지고 ‘뭔가를 행동으로 해야 되겠다’ 마음먹었죠. 정의와 민주 관심을 가지고 연대활동도 하고 그리고 남아프리카 문제, 남미 문제, 중미문제 등등 관심을 두고 했지만 한반도 문제에 집중적으로 관심을 안 뒀어요. 그러다가 광주가 터지니까 “정말 이거는 현실이구나. 우리 조국 한반도에 이런 어두운 현실이 있구나 우리가 행동하지 않으면 재발할 가능성이 있으니까 우리가 해외에서 뭐라도 해야겠다.”싶었어요 그 때는 개인적으로 학교에서 글 써가지고 동료들한테 ‘광주를 잊지 말자’고 뿌렸어요.

그 당시 청년들의 움직임이 있었어요. 뉴욕과 시카고 사이에 교류가 있었어요. 방학 때 만나 스터디도 하고. 한청년이 결성되기 이전에 소규모의 움직임들이 있었는데 윤한봉 씨가 밀항해가지고 서부에서 새롭게 바람이 불고 있다. LA에는 민족학교도 세우고 청년들을 조직을 하고 있다. 그래가지고 샌프란시스코에서 84년도인가 창립대회를 하는데 우리도 가자해서 갔어요. 그 당시 윤한봉 씨는 주로 서부, 캘리포니아, 시애틀을 생각하신 거 같아요. 우리가 갔으니까 인원은 적지만 뉴욕 대표 몇몇, 시카고 대표 몇몇이었지만 전국적인 조직을 만들자. 그래서 이름도 재미한국청년연합이라 하여 같이 함께 만들었어요. 그래서 시카고와 뉴욕에 돌아가서 더 많이 만들자. 그래가지고 그 때 윤한봉 씨를 인상 깊게 보고 해서 그 때부터 함께 조직 활동에 들어간 거죠. 뉴욕에서도 우리 동포 학생들, 청년들이 함께 모여가지고 스터디 모임하고, 모여서 공부하다가 점점 확장된 거죠. 문화 활동하고 LA처럼 뉴욕에도 마당집을 건설해가지고. 봉사활동, 문화 활동하고. 판화 같은 거 전시하고 풍물도 가르치고 마당굿도 하고 그런 식으로 해서 점점 확장한 거죠. 그게 뉴잉글랜드 쪽으로 퍼져가지고 보스턴 지역도 같이 함께 하고 필라델피아, 워싱턴 이렇게 세력이 커진 거죠.

안 : 뉴욕 지부 처음 멤버들이

서 : 강한모 씨, 김난원 씨, 돌아가신 김효신 씨.

안 : 김효신이란 분은 돌아가셨으면 나이가 많았나요?

서 : 나이가 많지 않아요.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그 분도 나 같은 1.5세여서 같이 활동을 했고. 그 때 유학생인 강한모 씨도 같이 합류했고 한호석 씨, 정기열 씨 다 같이 했죠.

안 : 한호석 씨는 어디 다녔어요?

서 : 유니온 신학교요. 강한모 씨는 그 때 콜롬비아인가? 그래서 그 때 유학생들은 공부를 포기하고 한청련 활동에 몰두했어요. 또 저희들도 다른 학교를 더 이상 안가고 활동에 전념하게 된 거죠.

안 : 서혁교 씨는 한청년에서 직책이라던가?

서 : 여러 가지 했죠 뭐. 학습부장, 대표위원도 하고. 워싱턴 지역 대표위원을 했어요. 제가 워싱턴 온 계기는 이래요. 그 때 뉴욕 지부가 생긴 뒤에 워싱턴도 하나 있으면 좋겠는데 그 당시에는 인원이 많이 없었고 동포들도 많이 없어서 파견하기로 했어요. 영어를 잘 해야 되고 외교활동을 할 수 있는 분들을 추천한 거죠. ‘한겨레 미주 홍보원’이라고 여기다 세웠어요. 최초로 우리 민간인이 만든 홍보, 교육, 외교 활동하는 기관이죠. 사무실은 87년도에 우리가 후원금, 이사비, 주로 우리들 돈이죠 뭐. 또 각 지역에서 후원도 해주고. 왜냐면 이게 중요하니까. 다른 지역보다는 이게 정치활동을 해야 하니까 특별하게 후원해주고 인원도 지원해주고 했어요. 여기 사람이 필요한데 지원자를 모집했어요. 제가 딱 적합하잖아요. 오래 살았고 영어도 잘하고 관심도 있고 글도 쓰고 했었으니까. 제가 지원했어요. 가겠다 그랬죠. 그래서 와이프하고 같이 갓난아기 있는데 무작정 온 거죠. 무작정 와가지고 여기 정착을 하게 되고 저는 무보수로 직원들 없고 홍보원 스태프로 일하게 된 거죠.

안 : 두 분만 일했던 거예요?

서 : 아뇨. 몇 분 같이 있었죠. 또 다른 지역에서 온 분도 있다가 또 떠난 사람도 있었기 때문에 제가 오래 있었죠. 다른 분들은 왔다가 가는 경우가 있었죠. 학생들은 가는 경우가 있었는데 저는 여기서 정착을 하게 된 거죠. 그래서 홍보원에서는 활동을 많이 했어요. 영문 간행물도 만들고. 코리아 리포트라는 간행물을 만들었어요. 그 당시에는 인터넷 전이니까 한반도에 대한 뉴스가 없었거든요. 우리도 우리 소리를 내겠다. 우리의 민주화 투쟁, 통일운동, 노동운동 여러 가지 운동을 알려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 기관지가 필요하다 그래가지고 영문 잡지를 만든 거예요. 꾸준히 7년 동안 만들었어요. 만들고 홍보하고 배부하고. 의회나 연구소 뭐 학교 한반도 문제에 관심이 있는 여러 분들한테 보내고.

안 : 코리아 리포트의 필자는 주로 어떤 분이 있었어요?

서 : 주로 한청련 멤버들이죠. 워싱턴이 아니더라도 다른 지역에서도 편집위원들이 같이 활동하고. 주로 필자는 여기죠. 여기 홍보원에서 일하는 스태프들, 제가 편집을 하고 글도 쓰고 여러들분이 같이 글을 썼죠. 가끔 관심 있는 미국인들도 써주고, 학자들도 써주고 그게 주 활동이 됐죠. 그리고 의회 가서 홍보하고 찾아가서 한반도 문제를 알리고. 어떤 정책을 펴나가야 되니까 알리고 활동하고. 구미에서 오시는 분들 있으면 같이 백악관 앞에서 시위도 하고 FTA 같은 문제도 시위하고. 89년도에 우리가 큰 시위를 했었죠. 북한에 가서 평화행진한 것도 한청련이 같이 한 거고. 더불어서 미국서도 했거든요. 동부를 횡단해가지고 뉴욕에서부터 워싱턴까지 걸으면서 행진해서 반핵 서명지를 받아 의회에 전달하는 활동도 하고. 여러 가지 그런 활동을 했어요.

안 : 북한에 갈 때도 같이 갔어요?

서 : 같이 갔어요. 그 때 여기서 국제평화대표단 만들어 가지고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많은 분들을 함께 대표로 만들었어요. 한청련과 같이 조직해가지고 갔고 임수경은 따로 조직해가지고 왔죠. 그래서 합류해가지고 행진도 같이 하고 판문점까지 같이 내려가고 거기서 농성도 하고.

안 : 그러면 백두산에서부터 판문점지 걸어갔어요? 며칠 동안 걸었어요?

서 : 백두산서 평양까지 비행기로 내려왔고, 평양에서 거리를 걷다가 또 개성서부터 걸었죠. 다 걷기에는 오래 걸리니까. 그 때 행진할 때 왔다하면 함성소리가 아주 크죠. 시민들의 열의적인 반응들. 특히 임수경이 갔으니까 아주 큰 환영을 받았죠.

안 : 그러면 한청련에서 참여한 인원은 얼마 정도?

서 : 한청련 자체요? 거의 한 6,70명 될 거 같아요.

안 : 임수경은 따로 팀이 있었던 건 아니잖아요?

서 : 그래도 해외로 갔으니까. 우리는 국제대표단 조직해가지고 한청련과 함께 갔죠. 딱 거기서 합류가 되가지고 한 사람이 된 거죠.

안 : 워싱턴에 시위를 하러 온 횟수나 이런 거는?

서 : 뭐 그냥 계속 한 거죠. 전두환 때도 하고 노태우 때도 하고.

안 : 그 때 에피소드는 뭐 없었어요?

서 : 그 때 노태우 때인가? 한 번은 숙소에 가서 시위했어요. 숙소가 대사관저거든요. 그 땐 거기서 한 거 같아요. 국빈으로 오면 워싱턴에서 머물지만은 국빈이 아니면 다른 데에서 자거든요. 한 번은 아닌 거 같아요. 노태우가머문 데가 대사관저였어요. 거기까지 가서 우리가 시위하고. 어떤 사람들은 계란 던지고. 여기서 한 20분 걸리는데 시위도 많이 했죠.

안 : 윤한봉을 통해서 통일운동을 처음 접한 것이 아니죠?

서 : 윤한봉 선배님의 조직 스타일이 기존 활동가들을 처음에는 비판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가지고 민주화운동 하는 분들이 좀 보수적이다 비판했었고, 통일 운동하는 사람들 보고는 동포사회로부터 고립되어있고 젊은 층과의 관계가 없다. 그래가지고 하신 게 청년조직을 만든 거잖아요. 성과를 얻었죠. 여러 가지 비판도 받고 했는데 차츰 세월이 가니까 아는 분들은 인정하고. 잘 연대했어요. 또 한겨레를 조직해가지고 어르신 분들도 많이 동원되고 했죠. 그런데 갑자기 바뀌니까 허무한 거죠. 어른들도 허무하고 우리도 허무하고. 그러면 10년 동안 해온 게 물거품이 되냐 이거죠. 왜 아직까지 분단 상황인데 잘 나가다가 갑자기 딱 중단하냐 이거죠. 그러니까 이해가 안 되고. 솔직히 안 된 거예요. 김영삼이 남북화해를 위해서 크게 전환한 것도 아닌데. 김대중, 노무현 때면 몰라요. 그 때 햇빛정책이 나왔을 때 이랬으면 이해가 되죠. 왜 하필이면 김영삼 정권 초기 때, 딱 그때 했냐 이거죠. 그래서 이해가 안 되는 거죠. 아직까지 일은 남아 있는데 왜 중단하라는 지시를 하고 정책 전환이 생기냐 이거죠. 그게 큰 퀘스천 마크에요. 납득이 안 되고. 나머지 개인적인 갈등, 이것은 부차적인 문제고 다 있을 수 있는 일이니까 그건 뭐.

안 : 이것도 비판받을 수 있겠네요. 아무리 리더였다 하더라도 그건 굉장히 독재적인 거 아니에요?

서 : 그니까. 한청련 회원들은 10년 동안 함께 삶을 살았거든요. 같이 생활하고 같이 공부하고 서로 결혼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의 삶이었어요. 큰 기둥을 가진 삶이었고 거기에 합수 형이 큰 역할을 한 거죠. 큰 지도자, 큰 형님. 아주 큰 역할을 한 거예요. 절대적 역할을 한 거죠. 그 분 없이는 이게 다 함께 모이고 유지가 안 되죠. 다 뿔뿔이 뛰쳐나가 조그만 조직을 만들고 하겠죠. 합수형님이 세력을 하나로 모아 10년 동안 유지하고 활동을 크게 할 수 있도록 한 장본인이거든요. 장본인이기 때문에 그 분의 말씀이 큰 그거였죠. 우리가 무슨 회의를 하건, 뭐를 하건 간에 그 분 말씀은 큰 영향이 있었어요. 예를 들어 정책 방향 같은 거, 우리가 계속 정세분석하고 학습하고 대표자회의도 하고 중앙위원 회의도 하면서 주로 그런 걸 논의 했었거든요. 내부에서 논의해가지고. 그럴 때마다 합수형의 정세분석, 판단력, 방향제시 이것이 큰 역할을 했거든요. 큰 역할을 했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활동을 해왔고. 그런데 갑자기 이게 바뀌니까.

안 : 한청련이 10년이나 되면 조직이었잖아요. 윤한봉이라는 사람이 아무리 지도자라 할지라도 대표자회의를 통해서 “아니다, 우리는 계속 통일운동을 해야 한다”고 제기하고 표결하면 되잖아요. 그런 절차는 없었어요?

서 : 그런 논쟁이 있었죠. 중앙위원회도 있었고, 그런데 대부분 남아있는 분들은 합수형 말씀대로 하자. 그런 거였고. 우리 같은 경우는 합수형님에 대한 끈끈한 끈은 있었지만 그러나 이건 아니다. 이건 아니니까 우리는 나가자. 물론 싸웠죠. 내부에서 그런 과정이 있었죠. 그랬는데 저 쪽에서는 나가라는 식으로 한 거죠. 왜냐면 합수형 말씀을 모욕하네? 이런 식으로 막말하면서 화를 내고. 우리 같은 경우는 감정보다는 객관적으로 봤을 때 이것은 큰 문제다고 생각한 거고.

안 : 합수형님이 미국에 있을 때였나요? 한국으로 돌아간 다음이었나요?

서 : 돌아가 버린 다음에도 논쟁이 있었죠. 남아있는 사람들도 계속 하다가 또 논쟁이 있어가지고 갈라지고 그런 경우가 있었어요. 근데 귀국이 큰 저기인 거였고 그 전후에 정책적인 논쟁이 있었죠. 결국은 안 되니까 나오자고.

안 : 그래서 나오게 되었고, 나온 사람들이 통일 운동 계속했고. 근데 정말로 북한에 아주 저기한 사람도 있지만 또 원래 한청련의 성격대로 남북을 객관적으로 어느 편들지 않고 통일을 얘기하는 이런 분들이 아마 이게 다수였겠죠?

서 : 그렇죠. 그쵸.

안 : 귀국하고 나서 94년도에 생긴 문제까지는 평전에서 다뤄야 하니까. 그럼 지금 통일운동을 한다고 하면 어떤 것들을 하나요? 북한에 돕기 운동, 돈 보내고 그런 건가요?

서 : 아니죠. 그런 건 아니고. 북민 관계에서 평화협정이라던지, 평화체제로 가는 길은 어떻게 할 수 있는지 거기에 집중했죠. 왜냐면 미국정부와 관계된 일이니까. 우리는 미국정부한테 호소하고. 그래서 평화체제를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그리고 북한 핵문제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핵문제, 평화협정문제, 북미대립문제, 둥북아 평화체제 문제 그런 거를 다루죠.

안 : 그러면 지금은 어떤 경로로 해야 해요?

서 : 백악관 앞에서 시위도 하고 의회에 가서 공식 방문해가지고 우리 의사를 전달하고. 여러 가지 활동하죠. 의회 활동을 꾸준히 해요. 수시로 방문해가지고 우리가 상하원 외교위원에 방문해가지고 자료 전달하고 거기서 포럼도 하고. 그래서 우리가 그런 이벤트도 많이 했어요. 한청련 후에 나아간 것이 남북한이 함께 모여야 된다. 삼자회의 개최를 주장했어요. 남북미 삼자회담을 미국 의회에서 포럼을 했어요. 그래가지고 북한에서는 대표부에서 대사가 오고, 남한에서는 남쪽 국회의원이 오고, 미국 측에서는 상원의원. 그 때는 존 캐리가 참석했었고요. 이런 식으로 최초로 대화를 해보고. 6자회담의 공식적인 대표가 아니라 NGO라던지 민간 대표들이 만나는 행사도 하였고요. UN 근처에서 큰 포럼을 해가지고 헨리 키신저도 참석하고 북한 대표도 오고 그런 시도를 했죠. 계속. 뭔가는 정책, 교육, 홍보 그런 거를 꾸준히 활동을 해요. 그런 활동이 한청련에서 했던 활동을 이어가는 거죠.

안 : 두 갈래로 하고 있는 거네요. 옛날에는 같이 했던 거를. 그러면 지금 북핵이 만들어 지고 있는데 앞으로 어떻게 얘기해요 여기는.

서 : 그니까 저희는 그런 입장이죠. 핵무기 문제만 가지곤 논의할 수 없다. 왜냐면 핵무기 반면에 북미대결이 있으니까 풀리지 않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포괄적으로 다뤄야 한다. 평화협정, 핵문제, 군사대결완화문제. 이것을 다 접근을 해야지 안 그러면 계속 핵무기 논쟁만 해봤자 안되잖아요. 북도 그거를 반대하니까. 미국은 계속 핵무기 제거를 요구하고, 북은 북미관계의 완화를 요구하고. 그니까 안 풀리니까 이거를 총괄적으로 접근을 해야 한다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북미 대화가 필요하고요. 이란과 쿠바가 미국과 협상을 해가지고 미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한 것처럼 정상화해야 된다. 정상화를 해야지 이게 풀리지 정상화 없이 어떻게 풀려요. 그러니까 계속 군사대결, 핵무기, 사드배치. 점점 더 악화되지 풀리진 않는다는 거죠.

안 : 힘들지는 않아요? 그렇게 애썼는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되고. 핵은 계속 만들고. 북도 미국 팔아서 먹고 살고, 미국도 북한은 언제든지 쓸 수 있는 카드로 계속 관리하고. 여기서 그렇게 애를 써도 한국에서는 여기를 종북단체라고 그러고. 북에서는 직접 오더를 받지 않는 조직에 대해서는 별로 달가워하진 않고.

서 : 그렇죠. 근데 우리는 양심이 있으니까 우리는 양심은 버리지 말고 해야 된다. 우리 민족의 문제고, 모국의 문제인데 그냥 방치할 순 없잖아요. 여기서 사는 이상은 계속 그걸 알리고 홍보하고 해야죠. 우리는 양심세력이에요. 오늘도 밤에 회의가 있는데 정신대 문제를 다루거든요. 최근에 귀향영화도 봤고. 그런 걸 통해가지고 3월 달에 큰 행사를 여기서 할라고 해요. 3월 여성의 달쯤 해가지고 정신대 한 분 초청해서 큰 세미나도 갖으려구요. 한일협정 했지만, 그것이 아니다 홍보하고. 계속 싸우는 거예요. 통일문제도 싸우는 거처럼 계속 누군가는 계속 말을 해야 살아있지 안 그러면 사라지고 잊혀지고 하기 때문에.

안 : 아주 어렸을 때 미국에 온 거잖아요. 그로부터 자녀들은 미국에서 아예 태어났고. 그런데 지금도 한국문제에 엄청 관심을 갖고 그러는데 다른 교포들도 그러나요?

서 : 많지는 않죠. 그래도 생각하는 분들은 SNS를 통해서 많이 활동하고 있어요. 한국의 선거에도 많이 관심을 두고 있고. 특히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을 때 또 많이 생각을 공유하고. 다음 주엔 한홍구 교수가 와요. 강연도 하고. 역사문제도 다루고 의식을 공유하면서 또 한반도 평화 문제도 같이 생각하고. 여러 가지 할 일이 많죠.

안 : 그 때 삼분의 이가 나왔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한겨레를 포함하면 그 동안 한청련 같이 했던 사람들의 삼분의 이가 나왔다고.

서 : 그건 너무 많이 평가한 거 같은데요.

안 : 너무 과대평가한 건가요? 그렇게 까지는 아니고?

서 : 그 후에 나왔던 것까지 합하면 그 정도 되겠죠. 제가 보기에는 반반 나온 거 같아요.

안 : 거기까지가 윤한봉 선배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일이죠.

서 : 윤한봉 선배와 같이 활동한 거에 대해서는 좋은 추억도 많아요. 그거는 변함이 없고. 선배가 한 성과는 다 인정하고 다 좋은 평가 하죠. 아직도 서로 만나면 추억이 남아있죠. 다만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갔으니까 그런 에러가 있고. 지금은 세월이 지났으니까 인정할 거 인정하고. 서로 만나면 옛날 얘기 하고 그러죠. 앞으로 미래를 봐야하니까 미래를 보고 우리의 다음 세대가 뭐 해야 할 것인가 생각하면서 그런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어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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