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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뉴욕에 떨어진 밀알 하나--정승진의 회고2018-12-24 15:14:02
카테고리한청련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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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정승진 선생님(뉴욕 민권센터 전 회장)

 

면담자 : 안재성

구술자 : 정승진

 

안 :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정 : 64년생이니까 한국나이로는 53세이죠.

안 : 이민은 언제 오셨어요?

정 : 1986년에 왔죠. 그러니까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왔구요. 87년 에 합수형님을 처음 만났죠. 필라델피아에서 윤한봉 선생님을 처음 만 나고 2년 있다가 뉴욕으로 이사왔어요. 뉴욕에서 28년을 지냈죠.

안 : 유학 올 때 한국 사회의 현실을 모르지 않았겠네요.

정 : 아, 그렇죠. 제가 한국에서 82학번이니까 82년도에 캠퍼스가 항상 정치 적 이슈로 휩싸여 있던 그런 시기였죠.

안 : 미국 올 때 이미 정치적 의식은 있으셨는가요?

정 : 아 그런 케이스가 아니에요. 82학번 같은 경우는 광주항쟁 직후 세대니 까 사실 거의 매일 캠퍼스에서 최류탄과 화염병이 날라다 다니고 그럴 때 아닙니까? 제 친구들이 학생운동하고 감옥에 잡혀가고 그런 일들을 옆에서 목도하면서 굉장히 충격으로 다가왔지만 저는 정치적 이슈에 관심이 있는 학생이 아니었어요. 저랑 고등학교 때 굉장히 친했던 친구 가 서울대학을 갔는데 그 친구가 미문화원을 점거해서 신문에 나왔더 라고요. 신문을 딱 펼쳤는데 이 친구가 창문에 서서 소리 지르는 사진 이 크게 나왔어요. 너무 충격을 받았죠. 미국에 올 때 너무 궁금한 거 예요. 왜 저럴까. 궁금하니까 책도 사서 읽어보고 그 정도였죠.

안 : 필라델피아에서 학교를 다녔던 거죠?

정 : 필라델피아에 이민와서 처음에 랭귀지스쿨 다니고 그 과정에서 어느 분 이 소개를 해서 윤한봉 선생님을 처음 만나게 됐죠. 87년도 초죠.

안 : 87년도면 한청년이 이미 활동을 한지 2,3년 된 땐데, 필라델피아 모임에서 만났나요?

정 : 필라델피아 한청련 모임에 일주일에 한 번씩 역사학습도 하고 토론도 하고...제가 미국 온 지 몇 개월 안됐으니까 친구도 없고 그래서 좋은 모임인 것 같다 나갔죠. 나가서 알게 되었고 한청련 활동에 점점 참여하게 되고 다음 해에 저는 뉴욕에 이사를 왔어요. 뉴욕으로 오자마자 민권센터에 참여했죠. 그런데 제가 민권센터 활동을 열심히 하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고요. 자원봉사자로 도와야겠다 그 정도였어요.

안 : 그래도 그 때부터 뭔가 달랐겠죠?

정 : 예. 민권센터 통해서 윤한봉 선생님을 자주 뵙고 여기서 하는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정치적 이슈에 눈을 뜨게 되고 “아, 이렇게 세상이 돌아가고 있었구나. 퀘스천 마크가 풀린 거죠. 아 한국에서 내 친구가 이래서 그런 일을 했던 거구나.”

처음부터 사회정의에 대한 사명감을 가지고 이 일을 내가 평생 해야겠다고 결의한 사람은 전혀 아니었고요. 양심의 가책이죠. 와서 보니까 뜻있는 일을 해야겠구나 생각이 든거요, 특히 윤한봉 선배님에 대한 존경심이 생겼고요. 가까이에서 뵙게 되니까 너무 경이로웠어요.... 그 때만 해도 민권센터가 조그만 할 때였거든요. 지금은 저희 일 년 예산이 150만 불(15억원) 정도이고, 상근하는 스텝이 20여명이지만 그 때만 해도 아주 조그만 할 때였어요. 그때는 청년학교였죠. 처음에는 뉴욕청년봉사교육원이었구요. 근데 이름이 너무 어렵고 길어, 청년학교로 바꿨죠. 청년학교 이름으로 오래 활동을 했어요. 제가 회장을 오래 했는데 어디가면 저를 교장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근데 청년이라는 말이 가면 갈수록 안 맞는 거예요. 저부터가 나이가 50이 넘어가니까 이게 안 맞잖아요. 그래서 민권센터로 바뀌게 됐죠. 저는 민권센터 초창기 때 와가지고 양심의 가책 때문에 “조금 도와야겠다. 여기에서 자원봉사자들 조금 도와야겠다”하는 마음으로 참여했어요.

터닝 포인트가 89년도였어요. 그 때 저는 문화 활동을 많이 했었어요. 풍물패 활동, 연극 활동, 대단한 재주는 아니지만 그 쪽에서 많이 활동했는데 89년에 ‘아시아의 울음(Cry of Asia)’라는 프로젝트가 있었어요. 그게 뭐냐면 필리핀의 아시아민중문화협의회가 주최를 하고, 아시아 각국의 문화예술가 2명씩을 초청을 해요. 중국, 스리랑카, 일본 문화예술가들이 다 필리핀으로 가서 연극을 만든 거예요. 그 연극의 제목이 ‘아시아의 울음Cry of Asia)’이죠. 그래서 그 연극을 가지고 7개월 동안 유럽 각국을 순회하고, 한국에도 호암아트홀에서 공연을 했죠.

한국에서는 민예총에서 김명곤씨를 한국 대표로 보냈고, 민예총에서 이쪽 한청련에 연락을 해서 우리 쪽에서도 한 명이 왔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저한테 주문했고, ‘제가 한 번 가보겠습니다’고 했죠. 저는 뛰어난 기량은 없었지만 가게 됐죠. 그래서 한 7개월을 유럽과 각국을 돌아다녔어요. 굉장히 재미있는 연극이었어요. 아무도 서로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어요. 배우들이 저마다 자기 말을 쓰거든요. 일본 사람이 일본말 쓰고 한국 사람이 한국말 쓰고 미리 대사를 맞추는 거죠. 그래서 뜻이 뭔지는 대충 우리는 아는 거죠. 그러나 아무도 이 언어를 이해할 수 없도록 장면을 양식화해서 연극을 만들었는데 김명곤 선배님이 큰 역할을 하셨죠. 아무래도 이 분은 우리 문화에 서양 연극까지 아우르시는 분이고 또 연출가로서 뛰어난 능력이 있다 보니까 각국에서 모인 사람들이 이런 종합적인 마당극 형식을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하셨어요.

순회공연을 하고 돌아왔는데 돌아오니까 민권센터에 상근할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지금은 그래도 유급직원을 하지만 그 당시에는 상근자에게 봉급이 없었어요. 사무실에서 먹고 자고 했죠. 이제 한 6개월 정도만 해야겠다 하고 시작했는데 이후 상근을 4년 반 정도 하게 됐죠. 그러면서 더 적극적으로 활동에 가담하게 되었고요. 민권센터 사무총장을 하면서 한청련의 중앙위원을 또 하게 됐어요. 재미한청련의 문화부장을 맡았고요. 또 중앙위원회 회의에 들어가 윤한봉 선배님한테 가장 많이 배울 수 있는 황금 같은 시간을 가졌죠.

안 : 중앙위원회면 몇 명쯤 됐던 거죠?

정 : 뭐 연합부장하고 조직부장, 문화부장, 외교연대부장 그러니까 한 6,7명 정도였어요. 중앙위원회 하면서 뉴욕 회장을 하였고요. 그러다보니까 아무래도 합수 형님께서 가진 놀라운 지도력과 카리스마를 옆에서 많이 보고 배울 수 있었죠. 많은 감동도 받고 깨달음도 얻는 참으로 감사한 시간을 가졌죠.

안 :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어떤 게 있을까요?

정 :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는 󰡔운동화와 똥가방󰡕이라는 책에 너무나 잘 정리가 돼어 있어요. 제가 그 분한테 보고 느낀 것만 몇 말씀 드릴께요.

첫째는 이분은 언행일치를 위해서 정말 치열하게 자기와 싸우시는 분이었어요. 사람을 볼 때는 품성을 위주로 보고요. 운동을 시작할 때에는 순수하게 시작했다가 자기도 모르게 명예를 0게 되고 권력을 0게 되는 거잖아요. 그것을 처음부터 경계하셨던 분이에요.

합수 형님께서 즐겨 쓰시던 단어 중 하나가 ‘날 좀 보소’가 있는데 ‘날 좀 보소’가 되면 안 된다. 그리고 ‘삔들바우’가 되면 안 된다. 삔들삔들...그 말에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잖아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말만 하는 게 아니라 본인이 먼저 행하거든요. 그게 놀랍죠.

민족학교에서 한 번은 변기가 막혔는데 아무리 해도 안 뚫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본인이 딱 손을 걷어붙이고 손을 집어넣어 파내는거요. 사람을 볼 때 품성을 위주로 보시고 철저하게 명예나 권력에 매몰되지 않도록 경계하셨어요.

사실 이 일이 돈이 생기는 일은 아니잖아요. 그리고 제가 이 활동을 쭉 하다보니까 합수형님을 더 깊게 이해하게 되요. 사람이 돈은 쉽게 포기하고 내려놓을 수 있겠더라고요. 권력도 내려놓을 수 있고. 근데 사람에겐 뿌리 깊은 욕망이 있어요. 자기를 드러내려는 욕망 말이어요. 왜 그 분이라고 이런저런 내적 유혹이 없었겠습니까? 다 있었겠죠. 저도 그렇고 누구나 인간이라면 이런 욕구를 갖고 있는데 하여튼 합수 선배님은 굉장히 경계하셨죠. 조직이 개개인의 올바른 품성 위에 설 수 있도록 기초공사를 튼튼히 하셨던 분이고요. 그거를 몸소 실천하신 거죠. 저는 그게 합수정신이 아닌가 저는 생각을 하죠.

합수형님은 광주항쟁 때 먼저 간 후배들과의 약속을 지키시고 싶었던 거 아닙니까? 정말 ‘이름도 없이 명예도 없이’를 지키려고 하시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참 놀라운 게 처음부터 끝까지 그 많은 조직들을 만드시면서 명함 한 장 만들지 않았잖아요.

옛날 합수형님 계실 때 전성기에 비하면 지금 저희의 역량이란 보잘 것이 없어요. 어느 운동, 어느 정치 세력, 어느 조직도 리더 없이는 뭉칠 수가 없더군요. 리더 없이는 안 된다고 봐요. 윤한봉 선배님의 강력한 카리스마가 없어지니까 지금도 그 공백을 못 메꾸는 거예요.

지금 저희가 외형적으로는 성장을 했거든요. 합수형님 계실 때보다 상대가 안 되게 컸어요. 일 년 예산이 150만 불(15억원)이니까 15배로 외형적인 성장을 했죠. 사회봉사활동도 엄청나게 많이 해요. 그러니까 더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고 있지만 정치세력으로서의 견고함과 파워는 합수형님 계실 때가 더 강했다라고 봅니다. 하나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밀알이 썩을 때만 열매가 맺히지 않습니까? 합수형님은 별명도 합수에요. 거름. 나는 거름이다. 나는 거름이 되고 지게꾼처럼 일하겠다고 했어요. 그 약속을 누구한테 한 거냐면 5.18 광주 항쟁 때 먼저가신 후배들에게 한 거죠. 평생 그걸 지켰죠. 지금 민권센터가 증거하는 것이고 민족학교가 증거하는 것이죠.

놀라운 것은 그 많은 시절 동안 회장 타이틀을 가져본 적이 없어요. 민족학교의 본인 직함은 소사였잖아요. 소사는 공식 직함도 아니죠. 민권센터는 하나의 밀알이 썩어서 열매가 맺힌 거요. 후배들에게 명예를 탐하지 마라, 삔들바우가 되지 마라. 날 좀 보소가 되지 마라. 그게 제 귀에 박혀 있어요.

또 하나, 이 분에겐 뛰어난 리더십이 있었죠. 민권센터에 한 번도 공식적인 직함을 가진 적이 없어요. 이사도 아니었어요.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민족학교에서는 하나 있었죠. 소사말이어요. 주로 거기서 시간을 많이 보내셨어요. 해외 한청년은 유럽에도 있었고 호주에도 있었고 캐나다에도 있었는데각 지역의 어느 조직에도 직함이 없었어요. 공식적으로 가지고 계신 거는 재미한청년 고문 그 정도죠. 그런데도 막강한 지도력을 행사하셨거든요. 하하하. 놀라운 얘기에요 사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민권센터의 회의에 들어올 자격도 없는 분인데 막강한 정치적인 리더십을 발휘하셨어요. 모든 사람이 그 분을 존경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죠,

모든 사람이 그 분을 존경하였고 카리스마가 넘쳤고, 놀라운 지적인 능력이 있으셨어요. 대단한 암기력, 분석력, 정세분석 같은 것을 하게 되면 저녁 6시부터 하시면 새벽 2시까지 하세요. 근데 7시간 8시간 얘기를 하시는데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아요. 지금도 전 잊을 수가 없어요. 합수형님이 국제 정세에 대해서 분석하고 미국 정세에 대해서 분석하고 한반도 정세를 분석하면 전 세계가 살아 움직이는 거예요. 남의 얘기가 아닌 거예요. 그리고 끝에 가서는 분석이 끝나고 나서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행동해야한다고 말하니까, 모두가 그의 말에 설득이 되고...

그니까 그분의 말을 듣고 나면 마음이 뛰는 거죠, 심장이 뛰는 거죠, 내가 저 일을 해야겠다. 그 분이 무슨 돈이 있었습니까. 돈이 있어서 나에게 밥을 사줬습니까. 그 분이 무슨 파워가 있어서 회장이라서 이사장이라서 그게 아니거든요. 놀라운 리더십인거죠.

본인이 먼저 앞장서 실천하는 리더십이었기 때문에 모두가 거기에 귀를 기울이고 따라갈 수 있었던 거죠. 합수형님은 제가 봤을 때는 참 특이한 분이었어요. 이런 사람이 이 세상에 살고 있구나, 처음 뵀을 때는 몰랐었어요. 처음 봤을 때는 시골 농부 같아요.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이야기를 해요. 저 분 꼭 만나 얘기를 들어봐야 한다고, 근데 저는 잘 모르겠더라고요, 무슨 농부 같은데 학습하고 회의하면서 그 분 말씀을 듣고 정말 놀라게 됐죠. 그래서 “역사의 위인은 이러한 분이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제가 그 분을 신격화하자는 게 아니고요.

제가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 분이 더 존경스러워 지는 것이 그 분도 분명히 내적인 갈등이 있었을 것이고 힘든 것도 있었을 터인데, 본인이 흐트러질 수 도 있고 무너질 수도 있었을 텐데 그 싸움을 매일매일 한 거요. 주무실 때도 혁대를 안 푸시고. 침대에서 안자고 항상 땅바닥에서 자고. 옷 입은 그대로, 자기는 수배자고 도망자다 이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 항상 치열하게 싸우신 거 아니예요. 저도 나이가 들고 활동을 해보다 보니까, 이분이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을 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 다음에 한 가지 감히 덧붙이자면, 그 분은 정치적으로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좌파, 우파로 가를 수 없는 거예요. 제가 봤을 때는 굳이 얘기하자면 민족주의자인데, 굉장히 합리주의적이었어요. 그리고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계신 분이죠. 가난하고 어려운 분에 편파적인 애정을 가지고 계시죠. 무조건 그들 편을 드는 거죠. 그러나 굉장히 논리적인 분이었거든요. 그 분 말씀하실 때 느껴지는 것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같이 가지고 계세요. 아주 치밀한 논리력과 예술성을 같이 가지고 계시거든요. 굉장히 예술적인 분이었어요.

안 : 단점은 없었어요? 지금 말씀 하신 내용으로 책을 쓰려고 하거든요. 저는 사실 그대로 기록해야하기 때문에 보다 더 자연스러운 인간을 그려야 하는데 합수의 단점이랄까 그런 것도 말씀을 해주셔야.

정 : 그 분도 인간이었어요. 보통 사람이 갖고 인간이 갖는 한계를 그대로 가지고 계셨구나 하는 것을 나중에 알았어요. 제가 젊었을 때 그 분이 신처럼 보였어요. 20대, 30대에. 어떻게 저런 사람이 있을 수 있지? 했는데 합수 형님 하늘나라에 가시고 나서 제가 인생을 살다가보니까 제 내면을 드려다 보고 사람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니까 그 분도 사람으로서의 한계를 갖고 있었구나, 그 한계를 두고 부단히 싸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요.

저는 이 분이 마지막 폐 이식 수술을 하셨던 것도 그거라고 생각해요. 폐 이식수술이 성공할 확률이 제가 듣기로는 15%밖에 되지 않는데 왜 수술대에 올라갔냐 이거요.

제가 합수 선배님을 모시고 같이 가까이 다니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게 되었어요. “저는 있잖아요. 골골 하면서도 오래 살 것 같아요.” 하니까, “그러면 안 되지 너는 오래 살아서 좋겠지만 너 옆에 있는 사람이 힘들잖아.” 저는 합수 형님 폐 이식수술하고 하늘나라가시고 나서 딱 그 말이 떠오르더라고요. 우리 김수곤 박사님이 아시죠? 너무 가슴을 치시는 거예요. 자기가 뜯어 말렸어야 했는데, 그거 절대로 하면 안 된다고 뜯어 말렸어야했는데, 근데 그런 거죠. 칼 같은 거죠. 내가 이 상태에서 폐기종을 가지고 점점 호흡이 짧아지고 이 상태에서 몇 년 더 살아 봤자, 주변사람들에게 폐만 준다. 그런 칼 같은 것이 자신에게도 적용되었던 거죠.

보통사람들은 그 칼을 남한테만 적용하고 자기에 대해서는 관대하잖아요. 근데 이 분은 그렇지 않았어요. 마지막 미국에 오셨을 적이었어요. 무슨 말씀을 하시냐면 국제 정세 얘기하고 테러 얘기하시면서 “마음에 있는 미움은 현실화되지 않은 폭력이다. 마음에 미움을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 폭력으로 들어난다.”는 거예요. 그런 말씀을 들으면서 이 분이 사람에 대한 이해가 점점 깊어지시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세상을 어떻게 바꿔야 하냐? 궁극적으론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바꿀 것이냐가 문제잖아요. 사실은 제가 그동안 노력해왔던 일도 세상의 시스템을 바꾸고자 하는 건데, 사실은 아무리 세상의 시스템이 바뀌어도 사람의 마음이 안 바뀌면 어렵거든요.

마지막에 만났을 때 사람의 내면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시면서 저는 굉장히 안타까웠어요. 이 분이 더 좀 오래 계셨으면 경험을 많이 하면서 더욱 깊어지고 넓어지잖아요. 조금만 더 사셨으면 더 많은 지혜와 통찰이 나왔을 텐데 안타깝죠.

그 때 한청련 마지막 대회가 있었어요. 마지막으로 오셨었거든요. 모임이 끝난 다음에 제가 차로 모시고 여기 호텔에 모셔다 드렸어요. 조그만 호텔에 소아누님이랑 모셔다 드렸는데, 제가 호텔 앞에 차에서 내려드리고 꾸벅 절을 하고 들어가셨어요. 엘리베이터가 있었어요. 전 창문으로 밖을 보고 있는데, 딱 들어가시는데 발길이 안 떨어지잖아요. 또 언제 뵐지 모르잖아요. 밖에서 앉아서 지켜보고 있는데, 엘리베이터 앞에서 서서, 소아누님 옆에서 우시더라고요. 그 분이 그런 분이 아니거든요. 사람들 앞에서 울고 그런 분이 아니라니까요.

엘리베이터 앞에서 어깨가 들썩들썩 하시더니 엘리베이터를 타시고 올라가시더라고요. 자기에 대한 지나친 철저함이 단점이었어요. 그런 철저함, 그런 칼 같은 게 단점이었어요. 하지만 그 분은 자기에게도 칼을 적용했고 남에게도 적용했어요,

너무 칼 같은 때도 있었죠. 특히 항상 조직을 먼저 생각하시니까. 조직을 앞세워서 일하시다 보니까 칼 같이 비판하셨죠. 워낙 논리적이니까 시쳇말로 말싸움에서 이길 수가 없어요. 그 누구도 이길 수가 없어요. 진짜 일 대 일로 붙잖아요. 저는 말싸움으로 이긴 사람 아무도 못 봤어요.

근데 그분을 저는 이해해요.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엘리베이터 앞에서 우는 걸 봤잖아요. 그분이 우리를 책망할 때, 그 책망 아래에는 애정이 있었던 것이고 저 사람이 바로 섰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던 거죠. 집중 포화를 당하면 정신이 날아가요. 제일 용납 못하는 것이 명예욕이에요.

조직에서 분란이 일어나면 노선싸움이라는 핑계를 가지고 싸우는데 다 아니에요. 제가 몇 번 경험했는데, 저도 노선 싸움인줄 알았어요. 그리고 공식적인 역사책에는 그렇게 기록될 겁니다. 저도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그렇게 얘기 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면 다 노선을 가지고 싸웠거든요. 근데 가장 밑바닥에 있는 것은 노선 싸움이 아니고 내가 대장 되려고 하는 싸움이에요. 내가 대장되려고 싸움을 한다고 말 할 수 없으니까, 노선을 앞세우는 거죠. ‘너와 나는 이게 같다’라는 걸 강조하지 않고, ‘너와 나는 이게 틀리다’라는 것만 강조하는 거요. 그런데 노선 싸움이 있었을 적에, 합수 선배님은 칼 같으셨어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어요. 그게 선배님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선배님의 칼같은 엄격함이 있었기 때문에 조직이 이나마 유지되지 않았을까요? 그게 없었으면, 지금 어떻게 남아 있습니까. 한 개인이 세운 단체가 이렇게 오래 가는 것을 본 적 있습니까.

한 알의 밀알이 썩어졌다는 게, 윤한봉 선배가 이 민권센터를 세운 사람이라는 거를 동포들은 몰라요. 민권센터를 통해서 유명한 사람은 저예요. 사람들은 다 우리가 한줄 알아요. 본인은 공식적인 직함을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고, 대중 행사 할 때 앞에 나선 적도 없구요. 내부 회의할 때, 직함이 없으니까 회의할 적에 참관인으로 오는 거요. 처음부터 말도 못해요. 처음부터 앉아 계시다가 왈가왈부하잖아요. 결국 끝에 가서는 다 합수형님을 쳐다보는 거예요. 그럼 그때 마이크를 잡으시는 거죠. 잡으시면 몇 시간 가시는 거죠. 그런데 그게 강압이 아니고, 설득이 되는 거죠. 설득이 된다니깐요.

말로만 하는 스승이었으면, 그런 설득이 안 되지만 스스로 행동을 하시니까 설득이 된 거죠. 논리적인 설득만 되는 것이 아니라, 심장이 뛰게 만들어요. 그니까 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고요.

이건 제 개인적인 의견이에요. 저도 조직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제가 민권센터 사무총장이었거나 아니면 회장이거나 하면서 그 한 가운데 서 있었고 또 중앙위원이었기 때문에 다 보았어요. 마지막에 회의를 했을 거 아닙니까? 처음엔 합동회의를 열어 일반 회원들한테도 개방을 했어요. 마지막 시시비비를 가리는 회의를 할 때엔 일반 회원들의 참관을 불허했어요. 왜냐면 그 분들의 말도 안 되는 언행이 다 드러나는 거예요.

안; 인간의 본성을 바꾸는 것은 정치적 영역의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정 : 예. 결론은 저도 그래요. 인간의 본성을 바꾸는 일은 정치적 활동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그건 한계에요. 인정을 해야 돼요.

선배님이 귀국하실 때 제가 강한모 선배님 모시고 들어갔다가 잠깐 다시 나오셨잖아요. 두 번째 귀국하실 때는 제가 모시고 들어갔거든요. 공항에 내리니까 바깥에는 버스 와 있고 난리였어요. 공항에 내리니까 안기부 사람들인 것 같은데 딴 데로 데려가는 거요. “아니 이것밖에 없어? 빤스, 난닝구 몇 장 밖에 없어?” 짐 검사 하면서 놀래는 거야.

소련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수많은 회의가 있었어요. 윤선배님은 정치적인 지도자이지만 무엇보다 조직가잖아요. 조직적 감각이 대단하시거든요. 본능적인 감각을 가지셨어요. 지금 우리 조직이 어느 상태에 있고 조직이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본능적인 감각이 있는 사람이에요. 조직이 커지면 커질수록 방향을 바꾸는 게 어렵지 않습니까. 작은 배는 팍 틀 수 있지만 큰 배는 갑자기 틀면 쓰러지거든요. 그러니까 오래전부터 논의가 돼서 운동의 방향에 대해서 고민을 시작한 거예요. 동구 무너질 때부터 시작하신 거예요. 그리고 결론적으로 저는 그분이 옳았다고 봐요.

사람들이 착각을 하는데 합수형님이 통일운동가 아니라니까요. 그 분은 소수와 약자를 위해서 일하시는 분이에요. 어떤 말에서 드러나면 우리는 어디를 가서라도 거기에 있는 소수와 약자를 위해서 일을 해야 한다. 그래서 만약에 한반도에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미국에서 코리안이 다수가 되고 백인이 소수가 되면 여기 백인을 위해 일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죽어서도 어딜 가던지 소수와 약자를 위해 일애야 한다 그거거든요.

그러니까 그 분이 보셨을 적에는 정세가 이제 어떻게 변하냐면 첫째, 한반도 문제는 급격한 변화를 겪게 돼 있고 그리고 운동권이 정치권에 진출하는 것도 다 내다 보셨고요. 운동권의 역할이 축소될 수밖에 없다고 보셨고 또 통일문제가 가지는 의미도 많이 바뀐다는 것도 보셨고. 이제는 정부가 주도를 해서 논의를 하고 그 와중에 해외동포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은 점점 더 줄어든다고 했어요.

합수형님이 처음에 우리 운동을 해외운동으로 규정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초창기 때 얼마나 싸움이 있었냐면 초창기 때 만난 사람들이 지금 민권센터가 하는 활동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대부분의 활동을 여기 있는 해외 동포를 위해서 일을 하고 20-30%를 한반도를 위해서 일을 해야한다고 했어요. 한청련 초창기 때 벌어진 논쟁이에요. 그거를 합수형님이 우리는 해외운동이라고 정리를 하신 거죠. 해외동포운동이 아니라 해외운동인 거예요. 무슨 말이냐면 우리는 한반도에 있는 민족민주운동의 한 부분이다는 거죠. 근데 그 운동을 해외에서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의 주 타겟은 조국의 민주화라는 거죠.

그러면서 논쟁이 잠재워지고 한반도의 통일, 자주, 민주를 위해서 해외에서 일하는 운동이 된 거죠. 그러면서 일부 역량을 해외동포사회를 위해서, 동포들의 문제를 위해서 민권센터도 만들고 이렇게 한 거죠.

그런데 동구가 무너지면서 한반도의 정세가 변화하면서 더 이상 해외운동으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보신 거예요. 저는 그게 정말 동의가 되거든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더 근본적으로는 언제 어디서나 소수와 약자를 위해서 일을 해야 하는데 그럼 이 역량을 어디다 쓸 거냐 이거죠. 우리가 계속 해오던 그런 식의 역할을 계속 할 거냐. 아니라는 거죠. 이 역량을 오히려 여기에 소수민족으로서 어려움을 겪는 이민자를 위해서 써야한다. 그게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게 아니고요 점진적으로 서서히 이루어진 것이고요.

안; 통일운동 쪽으로 간 회원들이 수적으로는 절반이 넘잖아요.

정 : 절대 아니죠. 제가 모든 회의에 다 있었기 때문에 제 양심을 걸고 말합니다. 그분들이 소수였어요.

합수형님은 주사파가 아니거든요. 아직도 오해하는 분들이 있는데 친북이다고 해요. 무슨 친북이에요. 친북 아니고요. 모든 거를 있는 그대로 보려는 객관적인 사람이었어요. 합수형도 완벽할 수는 없겠죠. 사람이 누구나 주관적이지 않습니까. 편견이 있을 수밖에 없고 거기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모든 거를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하신 분이었어요.

합수형님이 얼마나 사고가 자유로우신가를 그 분들이 모르셨어요. 제가 봤을 때 그 분들은 주사파였고 합수형님은 주사파가 아니었던 거예요. “난 당신과 생각이 다르다.”고 말하는 게 좋았어요. 사람은 다 생각이 틀린 거고 꼭 민권센터 같은 운동만 있어요? 세상에 누구든지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실천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 분들은 통일운동을 하고 싶은 거예요. 근데 그 얘기를 못하고 엉뚱하게 합수형님의 도덕성을 끄집어낸 거죠. 본인들이 우리 조직 안에서 영향력이 없었던 거예요. 보세요 그 분들이 나갈 때 민족학교를 갖고 나갔습니까, 민권센터를 갖고 나갔습니까. 하나도 못 이겼잖아요. 다 졌잖아요. 주사파가 소수였다는 거죠. 그걸 반증하는 거 아닐까요? 그것도 합수형님이 여기 없을 때, 합수형님이 귀국하고 시간이 지났을 때, 합수형님이 간섭을 할 수 없을 때였지 않아요?

합수형님은 처음부터 대중성을 강조하셨어요. 원칙을 지키면서도 대중성을 잃지 않는 운동 말이요. 미국에는 공산당도 있고 좌파 정당 다 있어요. 근데 무슨 의미가 있어요. 매번 선거 때마다 대통령 후보도 냅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구요. 자기들끼리 모이면 뜨거워요. 난리가 납니다. 그런 운동이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을 굉장히 강조하셨거든요. 그런 말씀도 하셨어요. ‘성명서 운동’이 돼서도 안 된다. 자기들끼리 모여서 아무도 읽지 않는 성명서 하나 발표하고,...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놓고 보면 합수형님께서 회의 때마다 서서히 방향을 틀어가셨어요. 그 과정이 몇 년이 걸렸어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게 아니에요.

제가 한국에서 결혼식을 하면서 제 결혼식 주례를 서주셨고 그 담에 또 한 번 더 들어갔구나. 그 때 제가 굉장히 큰 고민을 했어요. 활동 방향에 대해서 말씀드렸죠.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말씀드렸어요.

2009년도에 뉴욕 시의원 선거가 있었는데 주위에서 시의원 선거에 나가라는 권유가 있었어요. 굉장히 고민이 되더라고요. 왜냐면 제가 자신이 없었어요. 그래서 한국에 가서 합수형님 만나서 얘기한 적 있어요. 가장 인상 남는 이야기가 있어요. 본인이 한국에 와서 보니까 다시 한국에서 민권센터 만들고 한청년 같은 조직을 만들 염두가 안 난다. 가진 에너지를 여기다 쏟아부어버린 거 같대요. 건강이 한 꺼풀 꺾였잖아요. “한국에서 시작할라니까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나는 모든 내 인생의 에너지를 여기다 쏟아 넣은 것 같다”는 거요.

안; 긴 시간 소중한 말씀 해주시어 감사합니다.

정;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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