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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호기 선생 회고--합수가 미국에 오기 전2018-12-20 18:29
카테고리한청련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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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호기 구술 녹취문

□ 개요

○ 구술자 : 은호기

○ 면담자 : 김경택(5·18기념재단 진실조사팀)

○ 구술일시 : 2014년 11월 8일

○ 구술장소 : 미국 LA 민족학교 사무실

□ 녹취록

면담자 : 선생님 언제 어j디에서 태어나셨습니까?

구술자 : 1939년 10월 30일, 전라북도 고부에서 태어났습니다.

면담자 : 그럼 언제까지 한국에 계시다가 미국으로 오시게 된건가요?

구술자 : 1970년까지 있었죠.

면담자 : 무슨 국민 학교, 이름, 기억나시나요?

구술자 : 고부국민학교죠. 대강대강 이야기 합시다. 고등학교는 전주에서 나 왔고, 대학은 서울에서 나왔고.

면담자 : 한국에 계시다가 미국으로 넘어 오시게 된 계기가 어떻게 되나요?

구술자 : 뭐 공부하러 왔죠. 대학을 다 마치고 왔죠.

면담자 : LA에 머무시게 된 이유가 있으신가요?

구술자 : 먹고 사는 데 정신이 없었지. 잡다한 일을 했죠. 그때만 해도 미국 만 오면 모든 것이 풀린다는 통념을 가지고들 와서 고생들 많이 했지.

면담자 : 한국의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가 있으셨나요?

구술자 : 내가 한국에 있을 적에는 학생 운동이나 사회 운동을 하지 않았어 요. 다만 박정희 정권에 대해서는 굉장히 비판적이었지. 그때만 해 도 여기에도 박정희 반대 운동이 있었는데 그때는 김상돈 선생님 을 중심으로, 어른들을 중심으로 했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이 낄 자 리가 별로 없었어요. 그 무슨 조직도 있었던 게 아니고, 김상돈 선 생이나, 차상달 선생 원로들, 다 돌아가셨지마는. 연줄도 없고 낄 틈도 없고 그러다가 기웃기웃 하던 차에 10.26 사태가 일어났다고. 10.26 사태가 났는데, 전화로 박정희가 피살됐다고 그래.

면담자 : 5·18이 일어났던 것은 어떻게 접하게 됐습니까?

구술자 : 미국 테레비도 나오고 주위에서 전화를 하고. 우리는 고향이 호남 이기 때문에 더 관심이 많았지. 그런 일은 제3세계에서나 일어나는 일로 생각을 했어요. 한국 사람들은 자기네들이 선진적이라는 자부 심이 있다고. 한국도 제3세계인데 그런 일이 일어나니까 어처구니 가 없지. 『뉴스위크』(Newsweek)의 주간지에 사진까지 생생하게 다 나왔다고. 열불이 나지. 그래서 규탄대회를 한 것이 호남 사람 들이야.

면담자 : 당시에 호남 향우회가 조직되어 있었나요?

구술자 : 없었어요. 그 전에 호남 향우회를 만들자고 나한테도 연락이 왔는 데 내가 노 했어. 여기까지 와서 그런 것을 맨들 필요가 있느냐. 우리가 분단되고 했는데 폭 넓게 살아야지, 지엽적인 뭐라 난 반대 를 했다고. 그러던 차에 광주 사태가 일어나니까 호남 사람들은 기가 막힐 거 아니요. 부랴부랴 몇이서, 차철이네, 장경희네, 박완 철씨네, 김수근씨. 이런 사람들이 연락을 해서 호남향우회라는 명 칭으로 6월 1일 규탄대회를 했다고,

그 뒤에 이거 안 되겠다. 우리라도 뭉쳐서 문제에 대처해 나가자 고 해서 호남향우회가 만들어졌어, 이제 시카고 호남 향우회, 워싱 턴 호남향우회가 조직돼서 내가 축사도 하고. 이렇게 해서 호남향 우회가 결성이 됐지. 그러니까 그 호남향우회는 상당히 역사적이 야. 무슨 지방적인 게 아니라. 그 선언문에도 있고 향우회 규약 전문에도 쓰여 있지만, 지역성보다도 역사성을 강조한 거라고. 그 래서 그 뒤 운동권에서 광주 규탄대회하고 기념식을 하면 호남향 우회에서 돈을 많이 대고 그랬죠. 6월 8일날 대대적으로 규탄대 회를 했죠. 영빈관이라고 식당이 있었어. 그 주차장에서 대회를 열었는데 아마 LA에서 최대 인파가 모였지.

면담자 : 규모가요?

구술자 : 김대중씨가 왔을 때도 그렇게 크지 않았어. 김대중씨 2차 망명 때 와서 강연할 때 내가 사회를 봤는데 그때도 그렇게는 안 모였어. 그때 굉장히 모였어. 1000명 정도가 모인 거야. 그때는 모두가 흥 분했어. 여기에 있는 동포들 모두가 궐기대회에 참여한 거지. 그때 주축이 됐던 게 국민회의라고 있어. 김상돈 선생이 하던 조직인데. 그리고 신한민보라고 일본 식민지 때 교포 언론이었는데, 조선일보 김운하씨가 인수하면서, 반정부 신문이 됐지. 국민회의와 신한민보 가 주축이 됐다고 봐야지. 그때만 해도 전부 흥분 상태야.

운동적 측면에서는 두 가지를 이야기할 수 있어. 첫째는 영빈관 대회에 모인 단체가 30여개였어. 그 대표들이 모여서 민주화운동 협의회를 맨들었다고. 그러니까 최초의 통합 단체야. 둘째, 서부는 동부와 달리 진보 세력이 거의 없었어. 조직적 운동이 태동한 거지

면담자 : 선생님, 6월 1일 처음으로 규탄대회를 했는데 6월 1일은 어디에서 규탄 대회를 했나요?

구술자 : 아드모어 공원(Ardmore Park)이라고 있어요. 저, 올림픽 한국 타 운.

면담자 : 그때도 호남 향우회라는 명칭으로 모인건가요?

구술자 : 호남사람들이 주로 했어. 한 이 백 명 은 됐을 거야.

면담자 : 미국인들의 반응이 있었나요?

구술자 : 6월 8일 날 영빈관 대회를 할 적에는 『LA타임스』(LA Times)에서 크게 보도했어. 여기 언론은 전두환 쿠데타 세력에 대해서 굉장히 비판적이었어. 전두환이가 대통령이 돼서 여기서 왔을 적에도 여기 텔레비 방송국에서도 항의 데모하는 우리를 더 취급해줬다고.

면담자 : 81년 전두환이 방미해서 LA로 왔을 때도 엄청난 시위가 있었던 것 으로 알고 있는데요.

구술자 : 매일 했으니까. 전두환이 따라다니면서. 경찰들도 여기서 시위하는 법을 다 가르켜 줘. 밤 10시 넘으면 소리 지르지 말라고 하고. 호 텔 투숙객들이 항의를 하면 곤란하니까 폴리스 라인을 쳐놓고 우 리를 많이 보호를 해주더라고. 전두환 방미를 계기로 해서 조직이 굳어지고, 운동이 조직화되는 계기가 됐지. 젊은 층들도 많이 참여 를 하게 됐고. 그러다 일 년 후에 우리가 민주화 운동 협의회를 열 심히 할 적에 윤한봉 선생이 나타났지. 82년 11월 달에 여기를 왔 지. 그래서 갈등이 많았지.

면담자 :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민주화운동협의회가 중심이었나요, 아니면 호 남 향우회가 중심이었나요?

구술자 : 호남 향우회가 나서 쓰겠습니까? 모양새가 안 좋고. 그래서 후원을 많이 했죠. 그래서 민주화 협의회하고 신한민보, 김상돈 선생이 중 심이었지. 김상돈 선생은 제일로 어른이셨지. 한국에서 민선 시장 도 하고 국회의원도 하고 대단하신 분이야. 그분한테는 무서운 사 람이 없지. 정치적인 경력으로 보나 뭐로 보나. 민청학련사건이 난 다던지 인혁당 사건이 난다던지 그러면 박정희 화형식을 했어. 그 김상돈 선생 중심으로….

좀 더 조직화되고 동포 사회에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은 광주 항쟁 이 계기가 됐지. 광주 항쟁을 놓고 어느 누구도 전두환 세력을 변 호할 수는 없잖아요. 윤한봉씨가 오면서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전 략과 새로운 방식으로 운동을 하면서 윤한봉 세력과 기존의 세력 으로 운동권이 양분되지.

면담자 : 윤한봉 선생님 처음 오셨을 때 선생님과 갈등관계가 있지 않았었나 요?

구술자 : 나는 성격이 무슨 조직에 들어가서 무슨 장을 하는 사람이 아니야. 그저 공동의장은 많이 했지. 그런데 윤한봉씨가 와서 김상돈 선생 댁에 있었는데 김상원이라는 가명을 쓰고 있으니까 수군댈 거 아 니야. 밀항했다는 것이 도대체 믿기지 않고. 그래서 말이 많았다 고. 윤한봉씨가 와서 원로들을 찾아가서 얘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인제 그 사람들로 볼 적에는 불쾌하지. 어떤 놈이 왔다는데 뒷조사 나 하고 다니니까. 그래서 내가 윤한봉씨를 우리집에 불렀어요. 너 살아온 과거를 얘기해보라고. 그니까 쭉 말하더라고요 그래서 기존 운동권에서는 최진한 선생하고 내가 제일 먼저 윤한봉을 지지하고 나왔지. 근데 최진한 선생은 성격이 모나. 그래서 갈등을 많이 일 으키고. 나는 두리뭉실한 사람이니까. 어떤 조직에 깊이 개입하지 않는 사람이야. 최진한씨가 윤한봉씨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어요. 윤한봉 선생이 여기 오면서부터 윤한봉 선생의 청년 운동을 서포 트 해주고 강연해달라면 강연해주고.

면담자 : 선생님, 미주 지역에서 민족운동을 계속 진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후배들에게 당부해주고 싶은 말이 있으시면...

구술자 : 역량이 많이 줄었어. 군부정권에 대한 대립각을 세울 적에는 힘도 나고 그랬는데. 통일운동도 6.15 남북정상회담 이후 긴장이 없는 운동이 됐잖소. 그런 점에서 좀 더 공부를 하고 구체적인 이슈를 찾 아서 해외에서 독자적으로 해야 하는데 그걸 못하고 있어. 평화와 교류 협력, 이걸 착실히 해야 하는데 그걸 가로막는 게 뭐야? 미국 은 북한하고 평화협정으로 휴전 체제를 끝내야 한다고, 윤한봉 선생 을 중심으로 했던 큰 조직이 없어져버리니까 나로서는 힘이 없는 거야. 또 그렇다고 해서 큰 이슈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정쩡한 상 태가 되었어요,

면담자 : 그런 점이 좀 아쉽다는 말씀이시죠?

구술자 : 그 정도면 됐지?

면담자 : 예 알겠습니다.

구술자 : 애쓰겄다. 이 오랄 히스토리 정리가 쉽지 않애.

면담자 : 이렇게 소중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 은호기 선생님의 구 술을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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