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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민족학교의 나무 위에서 지저귀는 꾀꼬리, 이길주 여사2018-12-20 13:04
카테고리한청련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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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학교의 꾀꼬리 이길주 여사

이길주는 1945년 만주 길림성에서 태어났다. 이듬해 서울로 왔다. 아버님이 항일운동을 하였다. 동경의대를 다니면서 지하 운동을 하였다. 졸업을 하고 서울 대학 병원에 인턴으로 일했으나, 형사들이 계속 주목을 하였다. 아버지가 결혼을 하고 서울에서 자식들을 키울 수 없겠다 싶어, 만주로 망명을 하신 거다. 길림에서 병원을 개업하시면서도 독립운동에 자금을 댔다.

면담자: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요?

구술자: 아버지는 의사이면서 사회사업가였어요. 아버지는 정의감이 강했어요. ‘자네는 너무 물이 맑아서 고기가 끼지 않는다.’고 친구들이 말했어요. 아버지가 어렸을 때 동자승으로 해인사에 들어가 자랐어요. 해인사 지주 스님이 어느 날 탁발을 나오셨다가 어린 애가 뛰어 댕기니까, 그 스님이 보시고 “아 이놈이 가야의 정기를 받았다. 내가 저 애를 데리고 가겠다”고 말씀하셨대요. 저희 할아버지께서 선듯 내주셨나봐요. 그래서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해인사에서 자라셨고, 국민 학교 같은 것도 안 다니셨죠. 해인사에서 한문을 공부하셨죠. 나이가 되어 “나는 의술을 배워서 사람들을 돕겠다.”고 하시고 일본으로 가셨던 거예요. 고학으로 동경 의대를 졸업하시고 졸업 후 한국에 오셨다가 불편하시니까 만주로 가신 거예요.

면담자: 초등학교를 어디에서 다니셨나요?

구술자: 한국전쟁으로 마산에서 초등학교 2학년을 다니다가, 서울 방산 국민 학교로 왔어요. 저희 집이 을지로였거든요. 이후 서울 사대부중과 부고를 다녔구요.

면담자: 61년도에 고등학교를 들어가셨군요. 아버님께서 의사생활을 하셨으니 가정환경은...

구술자: 그렇지도 않아요, 아버지가 절에서 자라셨잖아요. 그때까지 큰 스님이 살아계셨어요. 아버지가 병원을 하고 있는데 부르셨어요. “니가 사회에 나가서 공부를 했으니까 이제 보답을 해라.” 그래서 개업하시다 말고. 어버지는 해인사 주지스님이 되셨어요. 큰 스님이 절을 넘기셨어요. 아버지가 졸지에 대처승이 되셨죠. (웃음) 국민 학교 때 아버지가 해인사 주지스님을 하시면서 집에 없으셨어요. 그래서 어머니가 굉장히 힘드셨죠.

면담자: 선생님께서는 성악을 전공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구술자: 어렸을 때부터 저는 춤을 좋아했어요. 어디를 가더라도 춤을 추었어요, 노래도 하구요. 그런데 어머니가 생계 때문에 방을 렌트를 줬는데 피아노를 치시는 분이 렌트를 들어오셨어요. 내가 막 노래를 하고 댕기니까, 피아노를 배웠죠. 국민학교 때 근데 제가 손이 작아요. 제가 피아노 레벨이 올라가니까 피아노가 안 되요. 손이 작아서요. 그래서 성악과를 간 거죠. 선생님이 성악하라고 했고, 고등학교 때부터 레슨 받고 서울 음대를 들어갔죠. 64년에요.

면담자: 대학을 졸업하시구 바로 미국으로 가셨네요?

구술자: 졸업하구 다음 해 일월에 왔죠. 69년에 졸업했으니 70년 1월에요 69년에 제가 학교 댕길 때 선배 언니들이 영어도 배우고 용돈도 쓰고 그런다면서 미군 부대의 성가대에 나갔어요. 미국 사람들 위한 교회가 있잖아요. 따라 가서 나도 성가대를 했어요. 그러면서 남편을 만난 거예요. 남편이 결혼하자, 뭐 어쩌구 하니까 나는 일본 사람하고 결혼을 안 한다고 했어요. 그랬드니 남편이 월남전에 자원을 했어요. 남편이 덴티스트에요. 우리 어머니는 남의 귀한 아들이 우리 딸 때문에 전쟁터로 나가게 생겼다고 밥이라도 먹이자고 했어요. 그렇게 점수를 따가지고 결혼을 하게 됐죠.

면담자: 결혼을 하시고 들어가신 건가요?

구술자: 네 8월 달에 결혼을 하고 다음해 1월에 미국으로 온 거죠. 와가지고 살림 했죠. LA에 저희 시부모님들이 사셨어요. 그래서 이제 LA로 왔죠. 70년대에는 아무도 없었어요. 길거리에도 한국 사람은 없고. 혹시 지나가면 쳐다볼 정도였도였어요.. 한국 음식점이 한 개 있었는데 남편이 한국 음식 먹고 싶어 한다고 냄새 맡고 찾아갔더라구. (웃음)

면담자: 그, 그 민족학교 초반부터 꾸준히 활동해 오신 걸로 이렇게 알고 있는데 계기가 있었나요?

구술자: 미국에 70년도에 와서 71년에 애기를 낳고 십년 동안은 살림만 맡았어요. 시댁도 있으니까. 80년대부터 제가 노래를 하기 시작했어요. 교회 다니면서 교회 음악을 했죠. 80년에 교회가 산타모니카(Santa Monica)에 있었어요. 홍동근 목사님이라고 통일문제에 대해 관계하는 분이었어요. 이 LA에 유일한 정치적인 교회였어요.

김상돈 장로님이라고 계셨어요. 그분이 서울 시장하다가 쫒겨오신 분인데 장로님이셨구요. 이제 김상돈 장로님의 댁에 윤한봉 선생님이 오신 거죠. 김상돈 장로님이 윤한봉을 거두어주셨죠. 일요일 날 윤한봉 선생이 교회에 오셨어요. 장로님 댁에서 모임이 많이 있었어요. 김상돈 댁에서 윤한봉 선생이 좌담회를 열었어요. 초대를 받아가지고 갔지요. 그때부터 눈을 뜨게 됐죠. 그때부터 제가 사회활동을 시작한 거예요.

면담자: 그럼 80년 5월에 광주 문제가 일어났을 때 그 소식은 전해 들으셧나요?

구술자: 유니테리안 처치(Wilshire Unitarian Church)라는 게 있어요. 유니테리안 처치에 대해서 좀 아세요? 그 사람들은 목사도 없고 그냥 모여 참선하고 얘기하고, 그러고 북한에도 많이 도움을 주고 그랬어요. 오픈된 거예요. 5·18 전시회도 거기서 했고

면담자: 그 전시회는 언제 했던 건가요?

구술자: 윤한봉 선생 오시고 난 다음이니까 82년 정도. 이제 시작이 된 거예요. 민족학교가 83년에 세워졌잖아요. 나는 순전히 노래만 하는 여자였어요. 3.1절, 4.19 행사가 열리고 나에게 노래해달라 하면 가서 해주고. 제가 노래를 하면서부터 동포사회에 연계가 됐는데, 윤한봉 선생님이 5·18 광주 혁명에 대해서 강연을 여러 번 했어요. 그때 마다 난 노래해야하니까 가서 들었죠. 들으니까 귀가 뚫리잖아요.

면담자: LA에 83년도에 민족학교를 세우게 된 계기라고 해야 되나요, 이런 걸 만들고자 했던..

구술자: 내가 만들고자 했던 건 아니죠. 저는 그런 건 없었죠. 윤한봉 선생이 일요일날 와서 나를 봤을 거 아니에요. 내가 소집당한 거죠. 그래서 한봉씨가 직접 주도하지는 않았지만 과정들을 죽 지켜보았잖아요. 민족학교를 처음 설립하고자 했던 목표라든지. ‘우리 민족의 뿌리를 알아야 된다. 훌륭한 미국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뿌리를 알아야 된다."고 했어요. 그때 내가 통일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거죠. 6명의 이사가 선임되서 하는데 그때 제가 끼게 된 거죠. 그때부터는 정식으루 역사강의라든지 뭐 정치적인 교육을 받게 된 거죠.

면담자: , 민족학교가 해년마다 5월 관련 기념사업, 정신 계승, 관련 어떤 활동들을 꾸준히 진행해온 것으로 알고 있거든요.

구술자: 88년이었던 것 같애. 88년에는 미국 전역에 여러 지부가 있었어요. 시카고래라든지 뉴욕이라든지 필라래든지. 많이 있었는데 한봉선생이 계신 관계로 그 모든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정치에 대해서 깨우쳐졌잖아요. 이렇게 정의롭지 못한 일이 있을 수가 있나 그러구, 미국과의 관계, 그때부터 알게 된 거죠. 광주 혁명에 관계됐던 사람들이 계속 오시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굉장히, 뭐라 그럴까, 흥분을 한 상태라 그럴까. 썸씽 이즈 해프닝(Something is happening: 뭔가가 일어나고 있어) 매일 매일이 신나는 날들이었어요.

면담자: 5월 관련활동이 있으면 소개를 해주세요

구술자: 윤한봉 선생이 나라가 하나 되야지 된다는 거를 주장했어요. 근데 우리가 통일, 통일 말만 했지, 구체적인 뭐가 없었죠. 어느 날 합수 선생이 날더러 "남북 가곡의 밤을 한번 해보시오?" 그래요. 그러면 뭐 좀 도와줄테니까 그거를 해보래요. 남북 가곡의 밤을. 그래서 88년에 했던 것 같아요. 남북 가곡의 밤을 굉장히 성대히 했어요.

면담자: 어디, 남북 가곡의 밤이라는 이름에서만 보면 남쪽 뭐 이렇게..

구술자: 북에서 노래하는 사람들이 와서 하는 줄 알았죠. 우리가 북한 노래를 구입했어요. 북한 노래를 구입해가지구. 윤한봉 선생이 다니면서 우리가 브랜치가 많았다 그랬잖아요. LA에서 했죠. 자리가 없어가지고 늦게 오신 분들은 돌아갈 정도로 성황리에 했어요. 남한 노래 하고, 북한 노래 하고, 이렇게 같이 해서 역사상 처음으로 북한 노래가 나갔어요. 그때 래디오 코리아(Radio Korea)가 있었거든요. 굉장히 역사적인 일이었죠. 그때는 북한 노래를 방송하는 것은 뭐 말도 안 되는 소린데 그 때 처음 브로드캐스트(broadcast)를 했어요.

이제 그거를 하고 나서 89년에 4월에 북한을 방문을 했죠. 4월 축제에 동남아시아, 유럽, 예술인들이 한 4백명이 와요. 내가 소집된 거죠. 김일성 주석의 생일을 축하하는 예술인들의 축제였어요. 여기 백악관에도 그런 걸 해요. 근데 남한 사람이 간 것은 제가 처음이죠. 제가 가서 그렇게 얘기를 했어요. “난 노래를 잘해서 온 거 아니다. 나는 통일에 대한 노래를 부르고 그 통일에 대한 염원을 북조선 사람들하고 함께 하기 위해서 내가 온 거다.”고요.

에브리씽 퍼스트(Everything First). 뭐든 게 첫 번이었어요. 제가 89년에 갔다 오니까, 90년에 미주 민족문화예술인 협의회라는 게 생겼어요. 제가 그 통로를 뚫어놓으니까 문학하는 사람들, 음악하는 사람들이 모여 미주 민족문화 예술인 협의회가 발족됐죠. 우리가 처음으로 통일예술에 관한 책을 세권이나 발간했어요.

민족 예술인 협의회가 생겼으니까 우리도 조직이 생긴 거죠. 그래서 그 이름으로 북한을 방문했어요. ‘정치나 이념에 관계없는 재료로써 교류를 하자.’ 이렇게 얘기됐어요. 통일의 염원과 이산가족의 아픔으로만 교류를 하자고 했어요. 북쪽에서 내건 조건도 우리와 같았어요, 그래가지구 그때 가서 재료를 가져왔죠 제가. 가져온 걸로 책을 맨들었죠 저희가. 그걸 인쇄를 해서 책이 세 권째 나왔고 ...

예술인 협의회가 생기면서 음악을 맡아보니까 함께 노래할 곡이 하나도 없더라구요. 남한 가곡 같은 거는 북에서 노여요. 우리는 북한 곡을 알지 못하고. 그러니까 어떻게 우리가 아이디어를 냈냐하며는 북한의 이념이 없는 시를 가져와서, 재미 해외 작곡가들이 작곡을 하는 거요. 그렇게 공동 창작을 한 거죠. 또 여기 있는 시를 가지고 북한 음악가들이 작곡을 하고요. 그런 곡을 여러 곡 만들었어요. 그거를 가져가서 그 다음 해에는 중창으루 제가 데리구 갔죠. 정말 뜻 깊었어요. 첨으로 음악에서 통일이 됐어요. 음악인들이.

면담자: 또 재미있는 이야기 없나요?

구술자: 주민 토론회라는 게 처음으로 열렸어요. 제가 토론회에 나가 국가보안법, 그거 재정비해야 한다고 말했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철부지 없이 말하는척 한 거요. 미국에선 이런 경우 덤블론드(dumb blonde)라고 해요. 멍청한 미녀 노릇을 한 거죠. 그런데 재향군인회 사람들이 와가지구 나를 때리려고 지팡이를 들고 덤볐어요. 굉장히 획기적인 사건이었죠. LA에서. 그게 라디오 코리아로 생중계가 되서 나갔거든요. 우리 사회에서 처음으로 국가보안법 개정 이야기를 정식으로 퍼블릭하게 제기한 거죠. 그때는 민족학교가 빨갱이 취급받던 시절이었지요. 야단법석이 났지만 그것도 참 좋은 전환점이었어요. 이제 한국 커뮤니티도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어주는 그런 분위기가 이루어져야 된다는 이야기가 돌았어요.

면담자: 어떻게 잘 마무리가 됐나요?

구술자: 주최 측에서는 야단이 났잖아요. 이거 내가 한대 얻어맞으면 어떻게 해요. 지팡이를 휘두르면서 노인들이 나와 가지고 그러니까. 내가 그냥 웃었어요, 주최측은 날더러 자꾸 내려오라는 거예요. 나보고 피하라는 거예요. 그 정도로 살벌했어요. 사람들도 나를 보호해야 된다고 그러는데 나는 다 내려가라고 했어요. 나의 의견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마저 들어달라고 했죠. 그랬더니 사람들이 놀래가지고 (웃음) 여자가 통도 크대요. 한 대 맞으면 그거보다 좋은 효과가 어디 있어요. 그러면 정말 여론화가 되는 거잖아요. 강연 연설자가 나가서 말을 하는데 '자기네들 의견과 다르다고 테러를 했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에요? 내가 하도 태연하게 웃으니까 이 할아버지들이 놀래가지고 때리지 못한 것 같아요.

김대중씨, 김대중 선생님 오셨을 때도 우리가 시국 강연의 자리를 단들어 드렸죠. 정치 강연을 처음으로 한거요. 그때 민족 학교에서 강연회를 준비를 했어요. 합수씨가 강연회를 열어드려야 한다고 그래가지고. 그래서 뭐 다 우리가 해줬죠. 제가 그때 통일 노래를 부르고. 반응이 굉장히 좋았어요. 그때는 민주화 운동이 집회를 열면 강연만 했는데 음악이 들어가고 시 낭독이 들어가고 색다른 시국강연회가 됐죠.

면담자: 앞으로 필요한 부분은 무엇이 있을까요?

구술자: 통일에 관한 거라면요, 제가 가서 절실히 느낀 것은 같이 부를 노래가 있어야 되요. 그때 작곡했던 노래를 좀 더 보완해가지고 출판을 하고 싶어요. 우리가 부른 건 통일 자장가와 같은 거였어요. 북한은 하나만 보여주잖아요. 하루 종일 그 노래를 틀어주는 것에요, 그러다보니 한번 방영되면 사람들이 노래를 다 외우는 거예요. 제가 가서 부른 문병란씨의 ‘직녀에게’ 같은 노래도 뭐 다 외워요. 사람들이 그냥 길에 댕기면서 아무 집에나 들어가고 그랬어요. 들어가 노래해주고, 우리가 가져간 통일 노래를 프린트해서 많이 돌렸어요. 그게 계속이 됐으면 참 좋았을 텐데 저희가 힘이 모자랐던 거죠. 중창단 가고 한 번에 끝났죠.

우선 음악적으로는 같이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있어야 되요, 거기서 하는 게 고작 '우리의 소원은 통일'하고 '나의 고향'하고 그거밖에 없는 거예요. 저도 그때까지 의식이 없었어요. ‘그리운 금강산’을 가서 막 부른 거예요. 거기 가사를 보면 짓밟여진 지가 몇 년인가, 완전히 반공 가사잖아요. 통일이 되면 정치적으로는 통일이 되겠지요. 그렇지만 사람들이 통일된 건 아니죠. 통일이 되기 전에 먼저 우리 마음이 왔다갔다 해야되요. 북한을 대접할 줄 알아야 해요. 이퀄로 대접을 해줘야지. 북한에 갔다 온 사람들 하는 이야기가 옆에 앉아있기가 미안할 정도의 발언을 해요. ‘하 거지같이 살더래’는 둥 뭐 어쩌대라는 둥. 예의를 지켜야 되는 거예요. 학교에서 애들한테 가르쳐야 할 것이 뭐에요. 자유와 평등, 그리고 서로에게 예의를 갖추는 것 아닌가요? 상대에 대한 배려와 존중 그거 없으면 통일이 안 돼요.

면담자: 80년부터 활동하시고 인제 34년 됐는데 나름대로 보람도 물론 있으셨을 거고 힘든 부분도 제일 좀 많이 있을거라고 생각이 되는데 그래도 가장 좀 기억에 좀 남는 사건이나 일 같은 게 있으면 소개를 좀 해주십시오.

구술자: 동포 사회 토론회를 함으로써 반공 사상, 반북 사상을 많이 순화했다는 거. 우리가 남북 가요의 밤 했던 거, 굉장히 큰 사건이었죠. 그것도 사건이었고. 북한에도 ‘휘파람’ 같은 노래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죠. 제 사회생활은 민족 학교를 통해서죠, 다. 민족학교는 제 인생의 전환점이었죠.‘

면담자: 현재 민족학교 이사장님 역할을 수행하고 계시는데 지금 민족학교는 무슨 활동을 주로 하는가요?

구술자: 이제는 동포사회의 인권 향상, 권익 향상에 많이 초점을 두고 있죠.

면담자: 앞으로 민족학교가 좀 이렇게 발전해갔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시는 부분들이 있으시면..

구술자: 글쎄요, 저기 있잖아요, '바르게 살자.' '굳세게 살자' '더불어 살자.' 더불어 산대는 것은 인종차별 같은 거를 없애는 거죠. 모든 사람이 다 정의로운 사회에서 사는 거죠. 그전에는 우리가 힘이 부족하니까 한인 동포 사회만 이웃했지만 벌써 시카고나 이런 데는 비한국인들이 많이 동조를 하고 있고. 여기도 그래요. 왜냐면 여기 청소년들이 친구들이 있으니까 좀 많이 봐요. 한국 사람 아닌 청소년들을 많이 봐요. 민족적인 것을 떠나서 전 세계에 어느 인종이라도 평화롭게 더불어 사는 것 그게 목적이죠. 그런 사람들의 인권을 위해서 우리는 봉사를 하는 거죠. 이사 중에서도 1.5세가 있어요. 한국말을 잘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치만 한국말을 할라고. 너무너무 노력해요. 그리고 한국에 대한 거 일고 싶어하고요.

면담자: 그, 지금까지 선생님께서 살아오신 좀 일대기라고 얘기를 해야겠죠.

구술자: 내가 너무 나이가 많이 먹었어요. (웃음) 그냥 제가 지나온 것을 보면 저는 참 행복했어요. 그러고 정말 신나게 살아왔어요. 지난 30년. 정말 그 윤한봉 선생님과 5·18. 그런 게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거에 대한 각성을 하는 거잖아요. 만약에 5·18이 없었으면 또 얼마나 몇 십 년을 그냥 뭉개고 민주화래든지 뭐 그런 게 그렇게 됐을 거 아니에요. 근데 그런게 이러나주잖아요? 그게 그때그때에. 쌓여가지구 일어나죠? 그게 지금은 또 흐려지고 있는거 같지 않아요? 그게 강도가 어떤 면으로 저기 한지 모르지마는. 저는 정말 합수, 윤한봉 선생님 만나서 정말 어떻하다가 정말 운 좋게 내 인생에, 일생에 처음 되는 일을 많이 해봤잖아요. 제가 북한에도 제일 먼저 가봤고 뭐 이런 것도 해봤고. 처음으로 책도 출간해봤고, 그죠? 우리 미문예협. 여러 이런 것들이 민족학교를 통해서 된 거고 저는 참 합수씨 아니, 윤한봉 선생님 계셨을 동안에 참 행복했어요. 정말 사는 것 같았고. 그리고 여기 지금 가시고 없으시지만.

면담자; 마지막 바람이 있다면?

구술자; 5·18 재단에 대해서는 참 고맙고 제가 한번 5·18 그때도 갔었어요. 한봉씨 계셨을 때는 저희가 5·18 재단에 많이 참여를 많이 했었죠. 무슨 모금 활동도 많이 했구, 저희가 많이 성의를 보였고 그랬었는데 가시고 없으시까 또 뜸해지고. 여기 일이 바쁘니까 허리가 휘니까 경제적으로도 도움이 못 되고. 그치만 5.18 정신은 민족학교의 뿌리죠. 그니깐 저희에게 제일 중요한 거, 민족학교의 앞날의 기로는 후배들을 양성하는 거요. 지금까지는 윤한봉 선생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있는대, 그분이 기어댕기면서 청소하고 그랬으니까. 정말 사심 없는 사명감을 가진 분이었죠. 여기서 일하시는 스태프 멤버들, 직원들은 돈 받을라고 하는 사람들이 없어요. 아주 그냥 정말 최저대우를 하고 있거든요, 여기서 일하시는 분들은 돈 안 줘도 와서 일하실 사람들이에요. 걱정은 윤한봉 선생님 가시고 나니까, 그 옛날의 그 알찬 마음들이 없어지는 것 같애요. 정신이 흐려지는 거죠, 그죠? 저희 민족 학교도 그래요. 요 다음 제너레이션은 정말 봉사 정신을 갖고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게 걱정이어요. 나카섹(NAKASEC: The National Korean American Service & Education Consortium)이라는 걸 우리가 십년 됐을 때 했었거든요. 그게 인제 20주년 됐어요. 로비단체죠. DC에 있어요. 총무? 총책임자를 뽑는데 아, 놀랬어요. 수십불, 수백불 이상씩 돈을 내고 어떻게 봉사활동을 해요? 윤한봉 선생이 그렇게 저희에게 그런 정신을 줬어요. 우리한테요. 과연 그 정신을 이어갈 사람들을 우리가 키울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왜 이렇게 힘든 일이 있을 때만 이런 거를 맡는지 모르겠어 (웃음) 다들 은퇴했잖아요. 제가 지금 벌써 70이잖아요. 그러니까는 남은 사람들이 많지 않다(Not too many of us left)인거요. 아마 광주도 그럴 거예요, 그죠? 한국두. 그 직접 겪은 사람들이 점점 작아지잖아요. 정신이 자꾸 흐려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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