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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문화패의 짐꾼, 최용탁2018-12-25 01:27
카테고리한청련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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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탁 선생님 구술 녹취록

 

□ 개요

○ 구술자 : 최용탁 (한청련 활동)

○ 면담자 : 황광우 / 정리 : 임명규 / 참관 : 오수종

○ 구술일시 : 2016년 1월 14일

○ 구술장소 : 오월의 숲

 

 

구술자 : 90년대부터 활동했어요. 합수형이 성공한 짐꾼이라고.. 84학번 중앙대학교에서 학생운동을 하다 갔기 때문에 뉴욕에 갔을 때는 한청련을 몰랐어요. 가서 첨에는 장사를 했어요. 남의 집에서 일도 하고 그러다 킨스칼리지 거긴 9월 달에 입학하잖아요. 10월 달에 남북영화제를 상영했어요. 그때 당연히 보러갔죠. 갔더니 도라지꽃이라는 영화가 나오는데 맨 뒷자리에 한 청년들이 갑자기 노래를 “조국은 하나”고 외쳐요. 거기서 들으니까 감격스럽더라구요. 유인물을 나눠주는데 UN에서 단식을 하고 있다구요. 그 분들은 가시고 전단지를 보니까 동포들에게 알리는 유인물이었는데, 밑에 주소가 ‘뉴욕청년학교’ 한청련이라고. 당시 단식하는 내용이 남북유엔분리가입반대하는 유인물. 그 다음날 주소를 보고 찾아갔어요. 그때는 한청련 청년학교사무실이 마당집이라고 불리는데, 그 사무실이 우범지역에 있었는데, 마침 워낙 바쁠 때니까 두 세 사람 있었어요. 그 때 있었던 사람이 아마 정승진. 한호석 그런 사람들 있더라구요. 가서 제 이야기를 쭉 하고 일단 학생운동 경험이 있고 그러니까 바로 한청련 예비교육을 간단하게 해서 바로 가입하고 뉴욕 한청련 교육부장을 했어요 바로. 합수형님 이야기는 계속 이야기는 들었죠. 당시 저는 자유로웠죠 혼자 살았기 때문에 거의 매일 한청련 사무실에 있었는데, 그러니까 계속 합수형님 이야기를 들었죠. 그래서 3, 4달만에 뵙어요.

면담자: 당시 본거지는 LA에

구술자: 다들 알겠지만, 반하게 만들잖아요. 차도 있고 시간도 자유로워서 합수형님 모시고 다녔죠. 저는 90년도에 시작했으니까 많이 뵙고 그런 것은 없고. 대회할 때

면담자: 91년 92년 93년 뵌 거죠?

구술자: 저는 95년도에 귀국했구요. 저는 원래 농촌출신이고 거기 살고 싶지 않았어요. 실은 한청련 안 만났으면 바로 왔을 거에요. 한청련 만나면서 바로 학교 안 다니고 한청련을 했죠.

면담자: 미국사람 만나면 한봉형이 대화를 어떻게 해요?

구술자: 통역이 따라 다니죠. 주로 두 분이 김난원 형수랑 이성옥씨가 통역을 했죠. 워낙 어릴 적부터 미국에서 사신 분이시라.

면담자: 예컨대 2세 어메리칸을 만날 수 있을 거 아니에요?

구술자: 그 친구가 한국말을 전혀 못하면 통역을 하고, 어느 정도만 하면 가급적 직접 한국말로 소통을 하려했죠.

면담자: 원칙적으로 한국말을 쓰더라도 필요한 경우 영어를 쓰셔야 할 텐데.

구술자: 쓰지 않은 것 같아요. 거의 알아듣고 해석하는 건 어느 정도 하는데, 영어로 말씀하는 건 안하신 것 같아요. 서부는 엘에이 동부는 뉴욕이 거점이죠. 뒤에 필라가 있고, 프린스턴이 있고. 규모로 봤을 때는 LA가 컸고고, 그 다음이 뉴욕. 당시 뉴욕에 한청련 대표는 강완모씨. 완모 형이 뉴욕을 대표하면서 미주 부대표를 맡았고, LA의 정민씨가 대표를 맡았고.. 완모형님은 원래는 고려대 나와서 공부하러 오신 분인데 한청련 만나면서 공부를 중단하고 10년 넘게 활동하셨죠. 합수형님 한국 오시기 직전 그 대회에서 “혁명은 끝났다. 운동과 생활을 병행해야한다. 공부를 병행하라”고 해서 이후에 법 공부하셔서 미국에서 변호사를 하고 계셔요. 저는 전혀 그렇게 생각 안하는데, 지금 완모 형님이 굉장히 유명한 변호사가 됐어요. 삼성이나 대기업 일을 많이 하나 봐요. 일부가 잘 모르고 대기업 변호사가 됐다고 하는데 겉보기에 그런 것 같구요. 어쨌든 지금 굉장히 유능한 국제변호사로서..

면담자: 그럼 문유성씨는 무슨 일을 하고 있었을까요?

구술자: 유성씨는 합수형님 귀국하실 무렵에 뉴욕에 상근활동가로 왔어요. 부인이 김희숙인데 두 부부가 같이, 지금껏 거의 20년 가까이 뉴욕에서 가장 고생하신 분이 완모형이었죠. 뉴욕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고생을 많이 하셨고, 재정적으로 도움이 되신 분이 강병호. 병호 형님은 맨하탄의 중심가에서 델리 야채가게를 했어요. 굉장히 사업을 오래 크게 많이 했어요. 저희가 크리스마스 트리 팔았었는데, 병호형님 가게 앞에서 진을 치고 팔 수 있었어요.

면담자: 강완모, 강병호...

구술자: 김수곤 선생은 완전 원로시죠. 거의 80이 넘으셨을 것 같은데.. 나중에 사건이 있어서.. 실은 나이 많으신 분들이 한호석 쪽으로 가셨는데, 김수곤 선생님은 한 번도 저기 안하시고 늘.. 정신과 의사신데. 해마다 1월1일이면 뉴욕회원들 전부다 선생님 집에서 떡국 끌여주시고

면담자: 강완모씨가 프린스턴에 있는 이유는?

구술자: 뉴저시 프린스턴은 뉴욕하고 가깝죠. 뉴욕의 교외 정도이죠. 지금 완모형님은 직접적으로 마당집에 오셔서 활동하거나 그러지는 않으시죠.

면담자: 현재 마당집은 문유성씨가 관리합니까?

구술자: 네, 지금 굉장히 커져서.. 인턴도 많구요. 지금 여기 있는 분들은 합수형님 당시 같이 활동했던 분이고. 유성씨 그 밑으로 합수형님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일 거에요. 그니까 정승진씨가 대표이죠.

면담자: 형 계실 때 논쟁은 없었나요?

구술자: 좀 큰 논쟁이 92년도 대회 때 한호석씨가 연합의 교육부장이었는데, 당연히 정세분석을 맡아서 2,3시간 하는데. 사람도 150명 필라델피아에 모여서 하는데.. 정세분석이 완전히 이상한 거에요. 북부조국이 위험에 있었는데, 마치 미국과의 대립을 북이 주도하는 것처럼, 실은 북이 궁지에 몰려있는데 북이 컨트롤하는 것처럼 정세분석을 해요. 그걸 듣고서 합수형님이 막 울그락 불그락 하다 못 참고 그 자리에서 지금 무슨 소리냐. 합수형님도 교육부장이고 늘 지도를 받았던 사람인데, 엉뚱한 정세 분석을 하니까..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한호석씨가 머리 좋기로 천재라는 소문도 나고 대단한 이론가라고 생각하는데, 그 나이든 회원, 젊은 회원들 많은 데서 박살이 났죠. 아마 그때부터 한호석이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는가. 그때가 아마 단초가 된 것 같아요.

면담자: 한봉형 귀국을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지 않았을까요?

구술자: 저는 모르겠어요. 왜냐면 저희는 활동하면서 빨리 합수형님이 풀려서 조국으로 돌아가셔야 한다는 생각을 쭉 해왔으니까.

면담자: 돌아가셔야 하는데.. 이후의 활동의 전망을.

구술자: 실은 합수형님이 돌아가시면 회원 대부분이 남부조국을 뒤집을 것이라고 믿었죠.

면담자: 뒤집는 방식을 국제적 활동을 통해서.. 미국, 호주, 캐나다를 뚫고 있었던 국제연대를 잘 이뤄낸 사례가 없거든요. 맑스 엥겔스 이후로 국제연대조직을 실질화 한 사람은..

구술자: 그때 제일 활발했던 필리핀 NDF도 미국에서는..

면담자: 미국을 거점으로 해서 한국에서 활동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따로 정개련이나 해맞이를 할 게 아니라, 이미 확보한 국제조직이 있었기 때문에 한봉형이 국제연대의 대표가 되었다면 한국 사람들이 꼼짝 못하죠. 어떤 사안이 있을 때 그 이름으로 발표하면 훨씬 영향력이 있지 않았을까요?

 

구술자: 그렇죠.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그런 생각이 드네요.

면담자: 우리 합수 기념사업회도 평전을 내면 국제연대통신 그런 것을 할 수 있죠.

구술자: 합수형님의 <운동화와 똥가방>에 자세히 쓰진 않았는데

면담자: 국제평화행진 할 때, 89년도 임수경 보내면서 유럽 쪽하고 호주를 다 연결 했을 거라. 국제평화대행진을 추진하면서 선을 잇고 끝내고 가시화 시킬라고 했던 것 같아요. 이런 이야기를 누가 가장 잘 알까요? 형의 국제활동에 대해서?

구술자: 이성옥, 정승진 이 분이 국제연대를 담당 하셨어요, 한달 다니는 동안에 딱딱딱.. 얼마나 준비를 해놓으셨는지. 일정을.. 거의 감동적일 정도로 예를 들어 아일랜드가서는 북아일랜드 거기서도 공연했는데 IRA가 주최한 공연. 수 백 명이 강당을 꽉 채우고. 아일랜드 갔을 때는 성공회 신부님이 그분은 NDF 유럽대표 담당하시는 분이셨는데, 이분이 감동을 받으셔서 공연보시고 한국민중운동하고 연결하겠다고..

면담자: 그 풍물친 사람은?

구술자: 여기는 정승진 뿐인데요, 그때 풍물친 사람들이 LA에 있어요. 김준. 준이는 광주 분인데.. 다른 두 사람은 나갔어요. 그때는 아예 낡은 소형버스를 샀어요. 전체 인원10명 정도가 같이 다녔어요.

면담자: 그때 건강은 어땠나요?

구술자: 그때 형님이.. 담배를 많이 폈죠. 그때 늘. 벤슨 앤 허지슨이라고 긴 담배였는데, 늘 변소휴지 사오라고. 진짜 변소휴지를 사온 적이 있죠. 하하 90년대 새벽 3, 4시까지 이야기하곤 했어요. 가끔 허리를 잡고 뉴욕 마당집이 50평 됐는데 마당을 몇 바퀴씩 돌더라구요.

면담자: 당시 모금운동은 많이 했어요?

구술자: 모금운동은 많이 했죠. 가자마자 피코노동자 모금운동 했거든요. 아마 남한에서도 그런 모금은 안 했을 거에요. 피켓 들고 식당가서 막 이야기를 하는 거에요. “조국에서 노동자들이 억울한 일을 당해서 싸우러 왔습니다.” 한국식당에서 그럼 밥 먹다가 돈을 주는 거야. 동포를 상대로 그런 무지막지한. 백기완 선생님이 ‘벽돌쌓기’할 때 그 때 회원들이 담배 핀 사람은 담뱃세, 그런 식으로 일주일 한번 밥 굶고. 당시 밥값이 7불정도 하니까. 매월 1월에 ‘황토기금’이라고 해서 올 1년 동안 절약해서 조국 민주화운동에 보태겠다는 약정을 했어요. 그래서 장사를 하거나 하는 분들은 많이 약정을 했구요. 보통 몇 천불씩.

 

면담자: 용탁씨는 무슨 장사 하셨어요?

구술자: 첨에는 장판가게를 했고, 한청련 하다가 여자 옷가게를 시작했어요. 한청련 옆에서. 마당집에서 몇 블록 떨어진데서요. 지금 있는 마당집은 폴로싱이라고 동포가 많이 사는 지역이고. 당시는 싼데 얻느랴고 히스페닉 남미쪽 동네들에서, 밤에는 총소리도 나고. 밤 늦으면 나가기도 겁나는.

면담자: 가면 초기 마당집을 가볼 수 있겠죠. 뉴욕 마당집에서 열 댓분 정도가 꾸준히 조직운동하고 그랬을까요?

구술자: 그렇죠. 한청련은 조금씩 증감이 있었지만, 저 있을 때는 20명 정도 될 거에요. 청년학교는 동포들에게 열린 조직이었구요. 숫자는 많이들 왔다 갔다하니까..그때는 미주운동이 분열되기 전이니까 어르신들도 많이들 오셨어요.

면담자: 그럼 인제 합수형이 1년에 한번정도 뉴욕에 오신 거에요?

구술자: 아니요 여러 번 오셨죠. 물론 근거지는 LA지만, 계속 돌아다니셨죠.

캐나다 필라델피아 시카고 워싱턴디시도 가시고.

면담자: 그게 건강이 버텨지나요?

구술자: 대부분 엘에이에서 뉴욕 갈 때 비행기를 타지. 나머지는 차로. 캐나다는 8시간 9시간. 혼자 다니실 때가 거의 없었는데, 회원들하고 같이 움직이니까 비행기가 아니라 차로 가는 게 훨씬 싸죠.

면담자: 주로 합수형을 보좌하신분이?

구술자: 특별히 형님을 무조건 전용하는 사람은 없었어요. 시간되는 회원이 돌아가면서 하고. 원래 형님이 누구 특별히 가려타지 않으시고 있는 차타고 다니시고 같이 움직이고. 주로 뉴욕에 오시면 외교 연대 쪽 일이 많으니까요. 정승진, 이성호 이런 회원하고 구체적인 일이야기를 많이 하시고. 저희하고는 특별히 따로 학습을 하거나 그렇지 않고 일반적인 이야기를 둘러앉아서 편하게.

면담자: 90년 유럽은 무슨 자격으로 갔어요?

구술자: 저는 유럽에 짐꾼으로 뒤치다꺼리 하는 역할로 따라갔어요. 합수형님이 뒤치다꺼리가 젤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어요.

면담자: 뉴욕하고 필라델피아는 근거리죠?

구술자: 차로 한 5시간..

오수종: 워싱턴의 홍정화(홍근수 목사 외동딸) 그 친구가 주로 외교 아시아 연대 쪽을 맡아서 하니까. 정화는 반드시 만나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구술자: 한 10년 전쯤 “뉴욕을 움직이는 100인”에 꼽힐 정도로 활동적인. 김갑송이랑 부부였는데....

오수종: 홍기완씨하고 뉴욕의 강완모. 이 사람들이 아마 한겨레 세대의 대표적으로. 일은 심인보가 제일 많이 한 것 같아요. 사무국 일을 맡은 분들을 많이 만날 필요가 있죠. 그리고 김준이라는 친구도 뒷바라지 한 회원이구요.

구술자: 어쨌든 외교연대의 중심은 워싱턴디시인데 그 때 활동했던 요원들은 다 깨지고.

오수종: 정민이 같은 사람 만나면 좋을텐데. 대표적인 사람이 정민이나, 유선모. 대전대 권혁범. 유선모, 정민. 갈라져서 나간 사람. 한호석. 그런 친구들이 열심히 하다가 나갔거든?

구술자; OO 형, 합수 형님하고 짝짜꿍이 잘맞았었는데, 교수직 제안 들어와서 한국으로 귀국하시고.

면담자: 당시 뉴욕에서 활동했던 프랑카드나 유인물이나 남은 게 있을까요?

구술자: 마당집에 가면 있을 거에요. 문유성씨에게 전화하면 바로 알 수 있을 거에요.

면담자: 뉴욕에 물건이 많이 있나요?

구술자: 뉴욕에서 많이 준비를 하게 되죠. 왜냐면 UN도 그렇고 행사나 시위가 많고. 워싱턴DC는 그 작업여건이 안되고.

면담자: 왜 합수형님은 본거지를 뉴욕으로 이동하지 않았을까요?

구술자: 엘에이가 동포사회가 훨씬 커요. 외교연대를 주안점으로 하면 뉴욕이고 엘에이가 훨씬 크고 회원도 많고. 일 있으면 뉴욕에 몇 달씩 합수형님이 있었고요.

면담자: 1.5세대하고 2세대하고 상당한 차이가 있데요.

구술자: 그렇죠. 저는 2세하고 말을 안 끼었죠.

면담자: 2세대는 한국말이 안 되고.

오수종: 그 애들한테 합수가 역사교육을 시킨 거야. 난 그 역할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을 했고. 그다음에 1세대가 병 모아서 돈을 모은 거고. 3만불씩 모아서 광주로 보냈고. 그게 정말 획기적인 일이었던거지.

면담자: 그 점이 굉장히 주목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번 평전에서 깡통 줍고 병 줍고.. 이게 아주 리얼하고 구체적으로 나오면 평전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구술자: 형님이 강조하신게 조국에서 피를 흘릴 때 우리는 여기서 땀을 흘리자라고 하시니까. 헌신성을 강조하셨어요.

오수종: 영어를 제법 알아 들으시드라고, 근데 말을 절대 안하시드라고. 침대 안쓰고..

구술자: 뉴욕 같은 경우도 마당집이 사무실이라 사람이 자면 법에 걸리거든요. 숙식을 하면 안되요. 여러 가지 위험이 있으니까. 몰래몰래 방도 아닌데다가 자고 그런 거죠. 매트릭스 깔고 자고 의자 접고 자고 그런 거지.

면담자: 그런 것은 남아있을까요? 매트릭스?

구술자: 그런 것은 없을 것 같은데.

면담자: 그럼 용탁씨는 들어온 후에는 미국하고 연락은 없어요?

구술자: 93년에 합수형님 들어오시고 뒤에 내가 들어와서 농사를 짓는다고 하니까. 어찌어찌 하라고 말씀도 해주셨는데.. 형님이 돌아오시고 나서 제일 허탈해 하시고 마음 저기 한 사람이, 심인보 같은 경우가 해마다 나왔어요. 해마다 나와서 형님 보시고.. 인보형 나랑 한 살 차이인데, 인보형 올 때마다 형님 찾아뵙고. 인보형이 중학교 때 미국에 갔을 건데. 완전히 1.5세대는 아니고.. 그런데 버클리를 다니다가 한봉형을 만나서 아주 인생이 바뀐 거죠. 원래는 버클리 다녔는데, 원래 토종 조선 사람보다 더하게 바뀌었어요. 가장 마음으로 깊이 형님을 따른 사람이 심인보라고 생각해요. 계속 상근했는데, 당연히 부인이 한청련 활동하면서 결혼을 한 건데, 부인이 굉장히 회계 쪽에 성공을 했어요. 심인보는 특별히 직업이 없이.. 형님이 조국에 돌아오는 것은 옳지만, 심인보 형은 마음 한쪽이 무너졌을 거에요. 참 한국에 들어오신 걸 마음 아파했어요.

면담자: 그러니까. 내 말이 5할을 한국에 있고 5할은 미국에 있고 그런 걸 요구하는 사람이 있었을 것 같아요.

구술자: 뉴욕에 가시면 김수곤 선생님이 연배가 높으신 분이신데. 진짜 형님 때문에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를 변화시켜나가신 분이세요. 형님을 깊이 좋아하신 분이세요.

면담자: 90년대 대회에서 삶 속에서 운동할 시기다 할 때 그 문건은 있어요?

구술자: 뉴욕에 남아 있을지 모르겠는데요. 그 김갑송이라고 뉴욕에서 기자를 했거든요. 이 친구가 형님 이야기를 언젠가 써야 한다고 해서 자료를 모았거든요. 지금 한국에 나와 있으면.. 자료를 뉴욕 센터에 뒀는지,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면담자: 글 쓰고 싶은 욕심이 있으면 자료를 모을 거거든요.

오수종: 일부는 토박이가 가져온 것도 있는데, 어떤 분이 LA에 모아두신 분이 계셨는데. 그 일부를 효선이한테 가지고 가라고 줬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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