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수통신

제목뉴욕의 원로 김수곤 선생, 정체성을 고뇌하다2018-12-22 13:11
카테고리한청련회고
작성자
첨부파일7-김수곤.hwp (64KB)

김수곤 구술 녹취문

□ 개요

○ 구술자 : 김수곤

○ 면담자 : 김경택(5·18기념재단 진실조사팀)

○ 구술일시 : 2014년 11월 15일

○ 구술장소 : 미국 뉴욕 민권센터 사무실

 

□ 녹취록

 

김수곤 선생은 1933년 경북 영일군 청하면 신흥리에서 태어났다. 일제 시대에 곡강 심상 소학교를 다니면서 6학년 때까지 일본식 교육을 받았다.. 소학교 1학년엔 조선어를 배웠으나 2학년부터 조선어 말살 정책에 따라 일본어만 사용하였다. 일본말로 호명을 하고 일본말로 대답을 하였다. 소학교 6학년 때 해방이 됐다.

 

면담자; 해방 직후 상황에 대한 기억이 있으면 말씀해주시죠.

구술자; 8월 15일을 소위 광복절이라 그러잖아요. 일본 사람들 다 도망가고 미군 사람들도 구경을 할 수가 없었어요, 시골이었으니까. 근데 얼마 지나고 났는데 ‘헬로우들이 왔다’ 그러는 거요. 미군이 나타난 거죠. 짚차 타고 오는데 막 먼지를 일으키면서 와요. 미국 사람을 보니까 진짜 원숭이같이 생겼대. 우리 초등학교에 와가지고 DDT 뿌리는 거 있죠. 이(lice), 모기, 빈대 죽인다고 분무기로 막 뿌리는 거에요. 바짓가랭이 소매에 막 뿌리는 거에요. 애들이 눈하고 코만 빠꼼하고... 미군을 처음 본 기억입니다.

면담자; 경북중학교에 들어가셨다면서요?

구술자; 1946년 10월 1일 내가 댕기던 중학교에서 가까운 곳에 연병장이 있었어요. 일본 사람들이 쓰던 연병장이었는데, 어느 날 총소리가 나는 거에요. 선생님들과 상급생들이 우리를 못 나가게 했어요. 창문도 지키고 문도 지키고. 4학년 5학년 선배들이. 그땐 중학교가 6년제였거든요.

지금은 경북지역 보수들 소굴이지만 옛날에는 사회주의자들 소굴이었습니다. 야색이 굉장히 강했어요. 미군정과 이승만정권이 학살을 한거요. 그 사람들 다 죽여 버린거야. 보도연맹이라고 알죠? 거기 등록되어 있었던 분들 전부 잡아 죽였습니다. 포항 앞바다에 줄로 엮어가지고 죽인 걸로 되있어요. 학교가 갑자기 휴교가 된 거야. 철도가 총파업 해버렸어. 대구 시내의 모든 기능이 마비되버린 거야. 근데 중학교 1학년이면. 만 열두 살 아니에요. 아, 이게 신난 거야, 사흘 낮을 걸어서 집에 왔는 거라. 세 사 람이 같이 걸어가지고 집에까지 왔어요. 시내를 나가면서 보니까 중간 중간에 지서가 불타고 있었어요. 타서 재가 된 데도 있고. 폭동이었지.

면담자 : 46년에 중학교에 입학하시고 6년을 다닌 다음 대학을....

구술자 : 서울대학 의과대학에 갔지. 53년에 들어가 59년에 졸업했지. 53년엔 대학들이 부산에 있었습니다. 부산이 임시 수도야. 그래가지고 부산에서 댕겼어. 초량동 산꼭대기에 하숙을 했는데 비만 오면 똥물을 퍼내는 거야. 그니까 우리는 똥밭으로 내려갔던 거지. 그런 속에서 산 거야.

구술자 : 의대를 입학하신 계기가 있었나요?

구술자 : 부모님이 의과대학을 가라고 했죠. 의사 중에 제일 의사 같지 않은 게 정신과 의삽니다. 사람들은 심리학자하고 정신과의사(psychiatris)를 구별을 잘 못해. 아는 사람들이 그러거든, 딴 의사했으면 돈도 잘 벌텐데 정신과 의사가 됐냐고 그래요.

면담자 : 군대는 어디서 근무를 하셨습니까?

구술자 : 해군을 갔어요. 해군 군의학교가 따로 있어요. 훈련을 2,3개월 받았을 거에요, 군의관으로 임관했죠. 포항에 해병대 36사단이 있거든. 거기 갔는데 이거 군대는 정말 있을 데가 아니야. 나는 못 있겠더라고. 어떻게든지 빠져나갈 길을 보고 있는데 마침 미국 유학 가는 길이 있는 거야. 군대에서 미국 유학을 보냈어.

면담자 : 군대에서요?

구술자 : 미국의 선진 의학을 공부해오라 그거지. 미국 사람들은 자기들이 지배하는 나라에 친미분자를 양성하기 위해 돈을 쏟아 부어요. 매프(MAP)라고 군사원조계획(Military Aid Program)이 있었습니다. 그걸 이용해서 내가 온 거에요. 여기 와서 일 년을 있었어. 10주 동안 워싱턴 DC에 가서 영어 교육을 하는 거에요. 해군 정보학교(Navak Intelligence School)이 DC에 있었거든요. 거길 간 거에요. 오디오로 영어 배우는데 철저히 하는 거에요. 그래서 영어 회화를 배웠어요. 그때 미국에 있을 적에 케네디 대통령이 취임했어. 내가 DC에 있었다고. 그래서 케네디 퍼레이드 하는 것도 보았고,

면담자 : 교육을 받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신 거죠?

구술자 : 60년도에 미국을 왔잖아요. 그래가지고 14개월 만에 한국을 갔거든 그러니까 62년 초에 귀국한 거에요. 67년도 5월 달에 예편을 했습니다.

구술자 : 67년도에 내가 제대를 했어요. 개업을 하든가 취직을 하든가, 대학 병원에 가든가, 세 가지거든. 개업을 하고 싶어도 돈이 없잖아요. 대학에 들어가려 해도 성적이 나빠요. 나는 아무데나 취직을 했으면 좋겠는데, 취직하려 하는데 아이고 새까만 후배들이 다 위에 있는 거에요. 후배 밑에서는 일하기 힘들잖아요.

우리 처가는 꼴통 예수쟁이 집입니다. 대대로 내려오는 기독교 집안이거든. 여기는 미국이라고 하면 천사들이 사는 나라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집사람이 어디든지 미국으로 가자는 거에요. 못 이긴체하고 그냥 온 거에요. 와서 정신과 공부를 제대로 해가지고 미국에서 전문의가 되었어요. 여기에서는 보드맨(board man), 보드라 그럽니다. 그거를 따가지고 여기 눌러 앉은 거야.

면담자 : 어디에 거주하셨습니까?

구술자 : 뉴욕으로 바로 왔지. 오자마자 인턴으로 왔거든. 먼저 일 시키는 데가 어딘지 알아요? 응급실입니다. 그때는 32시간 계속 근무를 해요. 상상도 하기 힘들제. 초번, 저녁번, 밤번, 초번, 아침번. 아침번, 저녁번 밤번, 이렇게 8시간 8시간 8시간 네 개를 하는 거야. 의사들, 미국 와가지고 호강하는 것 같지, 지금 히스패닉들 와서 일하죠. 한국에 들어온 이주노동자들 일하는 거 있죠. 그것과 맞먹는 거에요. 내가 한 시간에 68센트 받는 거야. 미국 사람들이 제3세계 국가의 저임 노동력을 부려먹는 거에요. 그게 미국의 노동 이민 정책이에요, 32시간을 계속 일하니까. 이거는 몽유병 환자들이야. 그런 상태에서 무슨 환자를 치료하겠어요. 내가 정신없이 일할 때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되고,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되요. 그게 내가 인턴 생활을 32시간 씩 계속 근무할 때 일어난 일이어요. 이게 꿈속에서 일어난 것 같애. 멍한 속에서 TV를 중간 중간에 졸면서 보면, 댐지 클락 법무장관 나와 발표하는 거요. 내가 악몽에 시달려요. 1년 동안 계속해서.

면담자 : 인턴 생활 하시면서 이민자 정책에 대한 환멸을 느끼면서 선생님의 친미성향 의식이 깨어나기 시작했나요?

구술자; 미국에 처음 와서 인종 차별을 목격했어요. 내가 애써 의식에서 지울라 했지만 밑바닥에 형성된 것은 부인 할 수 없는 거야. 그래서 회의를 하기 시작해요. 미국 사람들이 중미 사람들, 남미사람들한테 하는 거 보기 시작하면서, 다시 월남전에 대한 것도 생각을 하고. 그 다음에는 우리나라에서 전쟁 일어났던 거를 생각하면서 회의하기 시작하는 거에요. 소위 프론티아(frontia) 정책이란 이건 완전 침략 정책이거든.

면담자 : 인턴 생활 이후 어떤 활동을.....

구술자 : 1년차는 인턴이고 3년차는 레지던트, 수련의 생활이죠.

면담자 : 레지던트 생활은 좀 어땠습니까?

구술자 : 나는 원래 정신과를 공부하던 사람이었으니까 쉬운 거죠. 난 한국에서부터 이 분야 전문의였고. 같이 하는 수련의들보다 나의 공부가 훨씬 앞서 있었어요. 레지던트는 인턴같이 그렇게 혹독하지가 않아요. 할만 해요, 월급도 좀 많아지고.

그런데 국가 보조금 받고 사는 사람들의 아파트에서 사니까, 빈민처럼 산 거죠. 우리가 올적에 이민으로 온 게 아니거든. 법적 지위가 이민이 아니야. 임시 체제하는 사람으로 왔기 때문에 돌아가게 돼 있었어요. 내가 갖고 있는 것은 문화교류 방문자 비자(Cultural Exchange Visitor Visa)라고 그래요. 저임금으로 일하다 돌아가게 하는 제돕니다. 한 10년 일하다가 돌아가라. 법적 지위는 줄 수 없다. 투표도 할 수 없고. 게스트(guest)로 있다 나가라, 이런 거요. 이주노동자라는 게 뭡니까. 노예지 노예.

면담자 : 선생님 67년도에 들어오시고 68년부터 레지던트 생활을 하셨다고 했는데 당시 뉴욕에 한인들이 어느 정도 거주했는지요?

구술자 : 길가다 한인들을 만나면 너무 반가워가지고 “어떻게 오셨냐?” 인사할 정도였어요. 한인 음식점은 60년대에 시내에 하나 있었습니다. 그때 내가 롱아일래드로 왔다고. 나소 카운티(Nassau County) 라고 거기 군립병원 인턴으로 갔는데 카운티 자치 단체의 공무원으로 온 겁니다.

내가 미국에 와서 14개월 있으면서 모은 돈으로 허름한 피아노를 사가지고 집사람이 피아노 교습을 했어요. 음악을 전공했거든. 내 월급으로 생활한 게 아니고 집사람이 피아노 교습을 하면서 살아간 거야. 나는 레지던트 할 때부터 똥차 하나 사가지고 몰고.

한국학교를 우리가 설립했어요. 우리 새끼들 학교만 가면 영어를 쓰고 우리말을 안 하는 거야. 먹고 살기 바쁠 땐 정신이 하나도 없다가, 먹고 살만 하니까 ‘이거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거야. 중국 사람들 일본사람들은 다 자기 애들에게 자기 말을 시키는데 조선 놈들 한국 놈들은 자기 애들 말도 안 가르친다 이런 얘기를 듣고. 영어로라도 우리 과거, 문화, 전통에 대해서 가르켜야겠다. 그래가지고 뜻 있는 몇 사람들이 모여서 롱아일랜드에서 최초로 한국 학교라는 것을 세웠습니다.

면담자 : 한국 학교를 만드시고 선생님은...

구술자 : 학교를 설립한 사람들이 선생도 되고 교장도 하고 다 한 거야. 돈도 우리가 내고. 미국 공립학교 시골에 있으면 주말에는 비잖아요. 돈을 주고 우리가 학교를 빌렸다구. 그래서 토요일 날 아침에 수업을 했습니다.

면담자 : 한국 학교를 만드신 게 언제였나요?

구술자 : 그게 76년이죠. 한국 학교를 세워가지고 내가 역사를 가르쳤어요. 현 시국에 대한 것, 우리 전통 풍습, 문화 풍습에 이런 것 내가 가르쳤어요. 그러다가 70년대 말에 박승배 교수라고 불교 학자가 있습니다. 세계적 학자에요. 지금 스토니브룩에 살고 그분이 나와 동갑이에요. 그 양반이 광고를 냈어요. 어느 날 신문을 봤더니. “스토니브록(Stony Brook University) 뉴욕 주립대학에 한국학과를 설립한다” 이런 게 나왔어요. 내가 눈이 번쩍 뜨였죠. 민족 교육 한다니 전화를 했어. 우리 롱아일랜드 사는 동포들 중에 뜻 있는 사람이 전화해서 얼마 기부하겠다는 프레이즈(phrase: 광고)를 한 거에요. 알고 봤더니 내가 프레이지 1호야. 내가 천불 기부하겠다고 하자 프린트 했을 거에요. 모금운동을 해가지고 한국학과를 맹글고. 거기서 박사도 배출하고 지금 탄탄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내 뿌리를 공부해야 되겠다. 우리 전통에 대해 공부 좀 하자. ”고 해서 7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왔어요. 여기서 한 달에 한 번씩 넷째 금요일 날, 우리가 공부를 합니다. 2000년도까지는 비정기적으로 오는 방문학자들이 전공하는 과목에 대해서 강의를 하시라고 자리를 마련했어요. 대중강연을 공공장소에서 열었어요. 교회 같은 데서도 열고. 음식점에서도 하고 개인 집에서도 열고. 2000년부터 내가 청년학교에 관여를 하기 시작하였죠. 정치적인 문제는 공부하지 않았지만 민족의식에 대해 공부를 하였죠.

그때 한국에서 일이 터진 거에요. 광주에서 무진장 학살했다는 거라. 연락이 왔어. 같이 공부하는 한국학교 선생이 “ 김선생님, 어떻게 된 건지 알아봅시다. 시위를 한답니다.” 그래요. 맨하탄에 중앙도서관 층층대가 있습니다. 그 앞에서 시위를 했어요. 가서 봤더니 다 호남사람들이야. 광주 분들, 전남 출신 분들이 중심이 됐던 것 같애. 나한테 연락 한 분도 광주 분입니다. 여자 분인데 지금도 가깝게 지내요. 한명자씨라는 분이인데.

면담자 : 그 시위가 맨하탄 중앙도서관 계단에서 몇 명 쯤 모였나요?

구술자 : 백 명 내외가 됐을까. 그렇게 많이 모이기 힘들었어요

면담자 : 모여서 구호 외치고 규탄시위하였나요?

구술자 : “살인마 전두환 죽여라”는 거였죠. 차 위에 올라가서 울분을 토하고, 울기도 하고요. 이후 잭슨하이츠(Jackson Heights)에서 청년들이 모여서 뭘 한다고 그래요. 이런 소문이 난 거에요. 모금운동을 하던 사람이 있었어요. 그 사람은 내과의산데 “공부 모임 하는 청들 사람들 만나볼 생각이 없어”해요. 내가 기꺼이 갔습니다. 갔더니 청년들이 마당극을 해요. 황석영씨가 미국에 와서 청년들을 조직하고 있었어요. 윤한봉씨가 오기 전에 지식 청년들을 모아가지고 있었어요. 그랬는데 거기하고 연결이 되서 윤선생이 조직을 한 거에요. 이전에 느슨하게 문화 활동이나 하고 봉사 활동도 하고 그랬나봐. 거기 가서 보니까 청년들이 내가 마음에 들어요. 어느 날 갔더니 황석영씨가 소개하는 거야, 윤한봉씨가 이러고 앉아 있거든.(행동묘사) 황석영씨가 조직의 천재가 왔다는 거요. 아무것도 안 들리는데 조직의 천재라는 말만 깊이 남아 있어요. 윤한봉씨 만나기 전에 내가 청년들 마당극을 보고 와서 “야, 그 청년들 하는 거 보니까 맘에 든다, 우리 기부 좀 하자.” 도네이션 한 거요. 그렇게 해가지고 관계가 생긴 거야. 윤한봉 선생하고 처음 만날 때.

면담자 : 그 이후로 또 만나보셨습니까?

구술자 : 그래가지고 이 양반 올 때마다 만났죠. 안 올 때도 청년들이 뭐 하면 항상 가는 겁니다. 잭슨 하이츠라고. 그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까 거기가 아주 위험한 데였어요. 아주 가난한 동네요. 아시지만 윤한봉 선생님이 아는 사람 하나도 없는데 와가지고 사람을 포섭하는데 참 이상한 사람이야, 만나면 사람의 맘을 돌려놓아요. 알 수가 없어요. 하여튼 마술사같은... 그게 어디서 생길까 생각하는데.

공부모임을 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나의 뿌리를 알자”였지요. 내가 우리의 역사, 전통을 가리키기 위해 학교도 맹글었지만...한국 동포들의 아이덴티티(identity), 정체성이 분명하지가 않은 거야. 사람들이 우리에게 물을 때 항상 “아유 차이니즈?”하는데, 우리 차이니즈 아니거든? 중국 사람들이 자기더러 코리안이라고 그러면 아주 모욕으로 생각한다고 글드만요. 우리도 차이니즈라 그러면 모욕감이 생기지, “뭐, 떼놈”이라고?

그때 여기 사회학과 교수가 주류 사회의 미국인들이 느낀 거리감을 측정해 놓은 것이 있습니다. 통계를 내놓은 게 있는데, 우리 한국 사람이요, 흑인 다음에 제일 낮습니다. 시원찮은 사람들이라는 거요.

한국 사람에 대한 미국인들의 왜곡된 정보는 세 가지로 분류되요. 첫째는 선교사들이 우리한테 와서 보고 간 거요. 두 번째는 일본사람들이 우리를 지배하면서 보고 간 거죠. 세 번째는 미군이 한국에 와서 보고 간 거죠. 들에 나가면 똥내만 나고 만나는 사람은 전부 껌 달라 조르는 아이들, 몸 파는 성노예들. 그런 사람들을 보고 온 게 한국 사람들에 대한 주된 정보인 거죠..

“한국 사람, 중국 사람과 일본 사람하고 다른 게 뭐냐?” 이런 물음 앞에 저는 무척 막막했어요. 딱 대고 물으면 할 말이 없는 거야. 뭐가 다른 가 알 수가 없어요. 그러니 ‘한국 사람’이라는게 뭐냐? 정체성에 대해 심각한 혼돈을 겪어온 거죠.

그때 윤한봉 선생이 와가지고 한국 사람이라는 말도 편향된 시각이기 때문에 차라리 ‘코리안’이란 말을 쓰자. 교포라는 말도 쓰지 말자. 동포, 미주 동포라고 하자. 그래가지고 우리는 교포라는 말은 쓰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한청련을 조직했지요. 다음에 얼마 있으니까 나이가 우리가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조직 하나를 더 만들었죠. 한겨레 동포 연합 말이에요. 윤한봉 선생이 나더러 회장을 하라고 그러는 거에요.

면담자 : 한겨레 동포 연합이 처음 만들어진 게 언제였습니까?

구술자 : 84년에 청년학교가 조직이 됐어요. 그 양반이 81년에 여기 왔잖아요. 그래가지고 터를 닦는 게 시간이 걸릴 거 아니에요. LA에서 먼저 민족 학교가, 그 다음해...

면담자 : 아, 한청련이 먼저 만들어지고 그 이후에 한겨레 동포 연합이..

구술자 : 그렇죠 그 후신이야. 그 이듬해 정도가 아닐까? 87년도나 됐을 거야. 백기완 선생이 왔어. 백기완 선생이 나랑 동갑이거든. 백기완 선생이 왔을 때 내가 회장을 했으니까. 그때는 벌써 전국 연합이 생겼어.

면담자 : 그럼 초대 회장이 선생님께서 하신건가요?

구술자 : 그렇지. 날보고 하라고 그래서 내가 하겠다고 했지.

면담자 : 한겨레 동포 연합이 주로 활동했던 내용들은 어떤 거였나요?

구술자 : 독자적인 활동 보담도 한청련을 서포트하고 우리끼리 학습하고, 청년들 뒷바라지하고 서포트 해주었어요.

면담자 : 초창기에 한겨레 동포연합 회원 수가 몇 명 정도 되었나요?

구술자 : 그때 LA에 있었고 뉴욕에도 있었고 시카고에도 있었고 필라델피아에도 있었죠. 상당히 여러 군데에 있었어요. 한군데 마다 10명 내지 20명이 있었죠.

면담자 : 그럼 한 백 여명이...

구술자 : 대회를 하믄, 전국대회를 하면 많은 사람이 오거든요. 그렇게 해서 흩어져 있는 사람들이 모여요. 미주에만 있는 게 아니라 하와이에도 있고, 호주에도 있었고. 심지어는 구라파에도 있었어요. 호주하고 카나다는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맺어가지고 동포 대회 하면 그때 늘 만났어요. 그러고 특별한 무슨 일이 있으면, 예를 들어 DC까지 행진할 때, 미군 철수 퍼티션(Petition: 청원) 낼 때 전부 사람들이 오는 거죠. 그 때 몇 사람은 한반도로 가서 백두산에서 판문점까지 행진도 했고.

면담자 : 한겨레 동포 연합의 활동이 언제까지 지속되었나요?

구술자 : 누가 해산 선언한 일은 없고. 나는 언제까지 했는지 모르겠는데... 윤한봉 선생님 귀국하면서 갈라졌잖아요. 조직이 깨졌거든요. 왜 깨졌는지 그런 거 아시죠

면담자 : 내용은 대략적으로 들었습니다.

구술자 : 한국에서는 문민정부가 들어서게 됐고. 그러니까 이제는 운동의 주력을 이민자 문제, 그 다음에 소수민족의 문제에 주력하자. 너희들은 여기에 살 사람들이고 난 떠날 사람이다. 그러니까 거기를 주력으로 해라, 이렇게 했죠. 근데 그게 용납 안 되는 사람들이 많은 거에요. 나이 많은 사람들은. 윤한봉 선생이 오기 전부터 통일 문제에 애정을 가지고 일했던 사람들에겐 용납이 안 되는 거에요. 그래가지고 갈라졌습니다.

가까운 사람이 분열 할 때는 기가 막힌 싸움을 하는 겁니다.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더 멀어져요. 철천지 원수가 되지 않으면 헤어지기기 힘들어요. 내가 생각을 해보니까 나는 미국 시민이 됐고, 우리 자식들이 여기에 살아야 되고.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래도 내가 나이 많은 쪽에 속하니까 내가 영향력이 있는 줄 알고 양쪽에서 나한테 와서 이렇지 않습니까? 내가 결국 소수 민족 운동, 이민자 운동하는 사람들하고 내가 남았거든요. 그렇지만 양쪽 다 필요한 거에요. 나는 그 사람들 나무라지도 않고 나쁘게 생각 안 해요. 기회 있을 때마다 만나지요. 정초가 되면 전화라도 인사를 하고 기회 있으면 만나고. 대개는 내가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있거든요.

면담자 : 지금은 선생님께서 민권센터의 명예이사장님을 맡고 계시고 또 다른 활동을 하시는 게 있으신가요?

구술자 : 외부활동은 뭐. 공부 모임을 해요. 공부모임은 이 회의실을 빌려서 하는데 우리가 렌트 내고 쓰는 거에요. 15년 전에 나는 처음 한 게 동학공부였습니다. 우리가 3년 동안 동학 공부를 했어요. 갑오 농민 전쟁 120주년이 됐잖아요. 수은 선생이나 해온 선생의 가르침하고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공부를 해보면 그건 순전히 오핸데 우리가 2000년부터 2004년까지 동학 공부를 했습니다. 중간 중간에 방문학자들 오면... 지금은 유학공부도 해요. 우리 전통하고 관련된 건 전부 다 공부해요. 80년대는 해방신학, 민중신학 하는 해직 교수들이 많았죠. 여기 많이 왔어요. 그래서 우리가 민중 신학도 공부를 많이 했어요.

승산 스님이라고 선사가 있습니다. 돌아가셨지만 그 양반이 70년대 말에 왔는데 뉴욕의 로드 아이랜드(Rhode Island)의 브라운 대학(Brown University) 가까이에서 포교를 했거든요. 그분도 대단한 분이야. 그분은 진보적이라고는 할 수는 없지만 그분한테 가서 내가 참선도 하러 댕기고. 계도받았어요..

온갖 잡질을 다 한 거지. 종교에 대한 생각은, 내 이기심에서 벗어나고 작은 나에서 깨치고 해방이 되가지고 이렇게 나의 둘레가 커지면 커질수록 커져야 된다는 게 예수님의 가르침이고 부처님의 말씀이고 다 그렇게 생각을 해요.

면담자 : 이민 이후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삶에 대한 소회를 좀 듣고 마무리를 할까 하는데요,

구술자 : 내가 윤한봉 선생을 그때 안 만났으면 어떻게 됐을까? 그분 만나가지고 정치적으로 잠자고 있는 사람을 깨워준 거나 마찬가지였어요. 나는 젊은 사람들하고 어울리다보니 내가 젊어 보인다고 그러는데 청년학교하면서 청년들하고 어울려 다니니까 그런가 모르겠다고 집사람은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하는데.

사람은 열등감을 극복해야 되요. 우리가 남한테 지배를 받아 생기는 열등감도 있지만 우리는 날 때 완전히 헬프리스(helpless: 무력한) 상태에요. 누가 돌봐주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상태에서 나오기 때문에 어른에 대한 열등감이 있거든. 우리는 이중 삼중 사중으로 열등감으로 중복되어 있어요. 중화문화에 예속돼어 살았고, 오백년 전까지는 말은 있었지만 글도 없었던 민족이었고. 그러다가 몽고족 여진족 하면서 대대로 침략을 받고 살았잖아요. 그러다가 또 일본 사람들한테 억압받고...

미국 처음 왔을 때 우리가 앉으면 자기 비하하는 거야. 가족들이 모여도 그렇고 교회에 모여도 그렇고 어디 가서도 열등감을 벗어날 수가 없어. 이것이 힘들드라고. 요즘은 자긍심이 상당히 회복됐잖아요, 그죠? 그런데도 밑바닥에는 아직 열등의식이 청산되지 않았거든. 뿌리 깊은 거야. 우리 세대는 더 해. 여기 와서 청년들을 만났더니 열등감에 대한 얘기가 없는 거에요. 참 신기하드라고. 여기 왔더니 청년들이 그걸 얘기를 안 하는 거에요. 합수 선생이 한 일 중에는 정치적인 것도 있지만 그 자긍심, 민족의 자긍심을 심어주었어요. “아, 우리가 그렇게 못난 사람들이 아니다. 그러고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 사람들도 그렇게 잘난 것도 아니야. 사람들은 그냥 다 다를 뿐이다.” 이거, 굉장히 중요한 것이어요. 정신과에서 하는 일이 바로 그거거든. 열등감과 우월감, 자기비하와 자만심은 손바닥의 양면이거든요.

면담자 : 예 알겠습니다. 선생님 오랜 시간 말씀 선생님 살아오신 이야기 기록에 남기기 위해서 구술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구술자 : 그래서 편집을 좀 잘 하세요

면담자 : 아무튼 선생님 오랜 시간 구술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으로 김수곤 선생님의 구술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댓글
자동등록방지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입력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