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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종국, 필라를 말하다2018-12-24 10:27
카테고리한청련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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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이종국 선생님

 

면담자 : 안재성

구술자 : 이종국

 

안 : 나이는 지금 어떠신가요?

이 : 62년생이니까 54.

안 : 그럼 미국에 오신 게 언제에요?

이 : 저는 1980년 6월에 왔습니다.

안 : 80년 6월. 5월 항쟁 바로 직후에 왔네요,

이 : 고등학교 졸업하고 가족 하고 넘어왔습니다.

안 : 오실 때 어떤 민주항쟁이나 구체적인 생각을 해볼 기회가 있었나요?

이 : 없었습니다. 서울 봉천동에 살고 고등학교, 그 때 성동기계공고를 나왔 었는데 5.18에 대한 기억은 대학뉴스 보고 하는 수준이었죠.

안 : 그럼 처음 온 데는 어딘데요?

이 : 필라델피아요.

안 : 학교 바로 들어갔나요?

이 : 1년 영어공부하고 대학가서 4년 다니다가 그만뒀어요.

안 : 한청련을 알게 된 계기부터 말씀해주시죠.

이 : 제가 대학 다니면서 친구가 최종수 목사님의 교회를 다녔습니다. 친구 따라서 갔다가 목사님이 그 때 필라델피아에서 한청련을 만들고 있을 때 참여를 하셨어요. 필라델피아에서 좀 멀리 사셔가지고 힘들어 그만 했는데. 제가 그 교회를 다녔었어요. 친구 따라서 갔다가 청년부에 속 해가지고 있었는데 성경공부를 하자 그래요. 수요일마다 성경공부를 하 는데 성경공부 끝나고 역사공부도 하자고 그러더라고요. 그래가지고 교회 청년 멤버들이 대여섯 명 되었는데 그 때 경희 씨도 같이 있었습 니다만 거기에서 경희씨랑 저랑 다른 청년들이랑 같이 역사공부도 하 고 그러다가 어느 날

안 : 잠깐만요. 공부 같이 하신 분들 이름이?

이 : 그 분들은 지금은 활동하시는 분들이 아니고 저하고 신경희씨 둘만 필 라 한청년이 생기고 회원이 되었어요. 저하고 신경희씨요. 그래가지고 역사공부 몇 번 했는데 그 때쯤 최종수 목사님의 후배, 정기옥 목사님 이셨는데 교회 수련회에 정기옥 목사님을 초청하신 거예요. 정기옥 목 사님이 수련회 하면서 많은 얘기를 하셨어요. 교회에서 역사공부하면서 많이 배우게 되고 교회 청년 모임엔 관심이 없고, 저랑 경희씨가 한청 년 회원이 되었죠.

안 : 초기멤버는 몇 명쯤 되던가요?

이 : 필라 한청년이 85년에 만들어진 건데 제가 들어간 건 86년이고, 가보 니까 회원이 대여섯명?

안 : 어떤 일을 했는지요?

이 : 저는 회원이 되고 막 활동하고 싶었는데 활동이 별로 없더라구요. 그 래가지고 87년부터 뉴욕에 있었습니다. 뉴욕에 가서 보니 열심히 하시 고 무슨 센터도 있고 마당집도 있고 그래가지고 한 6개월 정도 제가 뉴욕에서 활동할 때 김용태 선생님이 오셨을 거에요. 김용태 선생님이 맨날 바둑만 하고 계셨을 때. 두 분이 맨날 낮에 바둑만 두셨거든요. 그래가지고 민주미술 슬라이드쇼 한다고 87년 4월인가 미국 다니실 때 모시고 필라도 같이 가고 저는 뉴욕에 또 올라오고. 8월까지 제가 있었 습니다. 뉴욕에 와서 활동하는 거 많이 배우고 다진 것 같아요. 필라는 동포사회도 작고 활동하는 것도 없어졌죠. 그래도 한청련 활동가를 많 이 배출했죠.

안 : 6개월을 집을 떠나 뉴욕에 혼자 와 있었잖아요. 여기 활동가들하고 같 이 잠도 자고.

이 : 예. 그 때는 주로 그런 식이었죠.

안 : 윤한봉 선생에 대한 기억을 듣고 싶습니다. 혼이 났다던지 싸웠다던지.

이 : 수련회 가서 많이 배운 기억이 많이 나요. 그 때는 수련회를 일년에 두 번 했던 것 같아요. 상반기. 하반기. 그런 식으로 수련을 했는데 어떤 경우는 필라에 내려와서도 이박삼일로 수련회를 했어요.

포스터를 붙이려 하는데 필라같은 경우는 한국 사람들이 많이 가는 마켓이 많지 않아 흑인 동네에서 장사하는 가게, 사업장을 일일이 다니 면서 전단을 하나씩 나눠주었습니다. 뭐 좋든 싫든 사업장에 찾아와 소 식을 전달해 준다는 게 그게 그 분들한테는 대단한 거예요. 일테면 흑 인 동네인데 젊은 사람들이 와서 광주 행사한다는 포스터 주고 가고 그러면 그게 자체가 반가운 거죠. 초기에는 그런 행사가 없었는데 그렇 게 하니까 사람들이 100여명 찾아와요.

안 : 그럼 회장은 누구였어요? 전성기 때?

이 : 이동천 선배도 회장이었어요. 이동천 선배도 필라에 계셨걸랑요. 필라 가 워싱턴하고 뉴욕하고 중간에 있고 저희 출신들이 많아요. 여기 계셨 다가 다른 데로 가신 분. 홍정화씨도 필라에 있었걸랑요. 필라 지역에 있는 유펜에서 학교를 다녀가지고 ...... 김갑송씨도 잠깐 필라에 와서 상근했었고. 그런 좀 인재들은 다 나갔죠. 필라에 남은 사람은 저 같은 사람만 남았습니다. 어차피 저는 가족들이 전부 다 거기에 있고.

안 : 그러면 사무실은 없었어요?

이 : 돈을 모아가지고 건물을 산건 필라델피아가 제일 최초였어요. 근데 그 거를 유지를 못해 이제 없어졌는데. 그니까 그런 거는 강해요 암튼. 우 그 때만해도 민족학교를 렌트했더만요. 상대적으로 필라가 집값이 싸가 지고. 제가 상근자였걸랑요. 마땅히 수입이 없어가지고 그 때 제가 2층 에 살면서 렌트비 내면서 유지하고... 그게 아깝죠. 처음에 할 때는 백 인들만 살았었는데 흑인들이 점점 올라오면서 집값이 떨어지면서 처음 에 샀을 때보다 값어치가 못한 거예요. 그때쯤 이민법이나 미주동포권 익운동에 초점을 맞춰서 뉴욕이나 LA처럼 했었어야 했는데 강단이 있 으신 분들이 많아가지고 그런 활동을 제대로 못해냈어요. 그런 영향 때 문에 마당집해도 오는 사람도 없고 그러면서 활동이 위축되고 활력있 는 사람들도 다른 지역으로 가고 그러는 바람에.

안 : 그 때 필라는 몇 명이었을까요?

이 : 20,30명됐어요.

안 : 한청년에 정식으로 가입한 사람까지요?

이 : 예. 저희는 매달 회의를 하면 기록을 남겼거든요. 저도 오기 전에 보고 왔는데. 매달 회의를 하면 기록을 다 남겼거든요. 일 년에 한 번씩 모 이는 대표자회의를 하면 보고서도 한 10장, 15장씩 다른 지역들하고 나누고. 초창기에 그런 틀을 잡아지고 잘해놨더라고요. 그런 건 지역마 다 가지고 있을 거 같아요. 있다가 나간 사람, 다른데 간 사람 이름 보 니까 한 50명 넘더라고요.

안 : 그래요?

이 : 사람들 기억에 없어진 지역도 많거든요. 저기 샌프란시스코도 있다 없 었졌고. 대회하면 100명은 참여했어요. 92년, 94년은 조금 위축된 편 이고 88년, 89년때는 보통 100명 이상은 참석했어요. 그러면 한 200명 은 되겠네요. 100명이라는 숫자는 너무 적은 거고. 우리한테 이 숫자개 념이 다들 차이가 많이 나서요. 시애틀도, 시카고도 열 두세명이라고 얘기했는데 숫자가 차이가 많이 나긴 나요.

안 : 윤한봉 평전에 들어갔으면 좋겠다 하는 내용 기억나는 게 있을까요?

이 : 윤선배님이 6개월은 서부에 계시고, 6개월은 동부에 계시고 그랬는데. 동부에 계실 6개월 동안에도 D.C에 일이 많고 뉴욕에 일이 많았어요.

필라는 중간지점이라 지나가다 들리시고. 시간에 맞춰서 수련회도 하고 5.18 강연회도 두 번 하셨던 거 같은데...제가 운전사 노릇도 많이 했 어요. D.C에 모셔다 드리고. 개인적으로는 제 인생에서 큰 스승 같은 그런 분이시죠.

안 : 0000000000000000000?

이 : 사람이란 혼자 사는 게 아니고 함께 살고 배려하고 ....운동하면서 사람들 만나고....강한모 선배하고 같이

안 : 그 뒤로부터 사실상 한청년이 깨지기 시작한 거죠? 필라의 동향은 어땠 나요?

이 : 저희도 여파가 있었죠. 그 때 주로 한겨레 쪽에 계신 분들이 많이 나가 셨는데 그 분들은 통일운동을 하셨던 분들이였기 때문에....

안 : 필라 같은 경우는 94년도에는 인원이 10여명 됐을까요?

이 : 94년 때만해도 10명 정도 됐네요. 제일 많을 때가 89년 마당집을 살 때 가장 많았고. 세우고 나서 열심히 활발하게 하다가 그게 좀 잘 안되 면서면서 많이들 빠져나갔죠. 그리고 다른 지역에 간 사람들도 많고. 저기 호주 한청년 거기 간 친구도 있고.

안 : 호주 한청년은 실제 활동이 있었나요?

이 : 예. 거기도 대회 때 마다 오고 호주 한청년도 사람도 있었고 지금도 거 기서 하시던 한 두 분이 계속 지속적으로 연락하시는 분 연락하시고. 뉴욕에서 아마 계속 연락하고 있는 거 같아요.

안 : 그러면 이종국 선생님은 한겨레 나간 사람들하고 분명히 뭔가 달랐던 거잖아요.

이 : 지금 생각해보면 황석영 선생님도 운동의 관성 이야기를 하셨는데, 윤 선배님도 그런 얘기를 많이 하셨어요. 북에 대해서 알면서 조금 가까워 진 것은 사실이에요.

근데 북이 UN에 가입할 때 우리가 UN 앞에서 단식했거든요. 결국 은 통일운동은 북한 인민하고 해야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어요. 그 때부터 북에 대해서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봐야한다는 인식이 생겼죠.

북핵문제 났을 때 윤선배님이 발제를 하는데 지금 보면 대단했어요. 6자회담에서 미국하고 북한하고 서로 회담하고 주고받는 내용들을 하루 별로 쫙 열장을 만들어 오신 거예요. 북의 생각, 미국의 생각을 다 읽어 내시는데 정말 정밀했어요. 그 때만 해도 2세들이 올 때이기 때문에 영 어로도 만들어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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