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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신소하, 망부석2018-12-26 23:12
카테고리한청련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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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18일 오후 2시 신소하님 구술녹취문

 

 

구 술 자 : 신소하 (본명: 신경희)

면 담 자 : 황광우

면담주제 : 신소하님의 활동

면담일자 : 2008년12월18일 오후 2시~ 6시(4시간)

면담장소 : 목포시 산정동 신한비치팔레스 자택

면담차수 : 1차

 

황광우 : 황석영씨가 그때 임수경 다음으로 미국 간 거는 알고 있거든요.

 

신소하 : 그건 범민련(범민족대회) 때고 그전에 와서 강연을 했었어요.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창작극할 때 같이 연출하고 그랬어요. 한청련이 할 때. 86년 초 일거예요. 내가 전단을 봤던가 신문을 봤던가 그랬어요. 필라에서 강연하는 것을 신문에서 보고 밤에 찾아갔어요. 혼자 왔느냐고 물어서 혼자 왔다고 했더니 조금 놀래더라고요. 이름을 적어 달라고 해서 방명록인가에 서명도 하고요. 지금 생각하면 한청련 남자회원들이었는데 이야기를 들었어요. 70년대 80년대 한국 상황을 들었어요. 황석영씨가 본 입장, 작가가 본 눈으로 본 것을 말한 것을 들었어요.

 

황광우: 형수님은 그때 처음으로 광주 이야기를 들은 거예요?

 

신소하: 광주 이야기는 훨씬 전에 한국에 있을 때 들었어요. 학원에서도 들었고 한국에서는 고3이었는데 대학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짝도 진보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나 봐요. 짝꿍이 ‘광주가 난리래’ 라고 이야기를 했었어요. 대충 그런 이야기만 알고 있었어요. 광주민중항쟁이라고는 자세하게는 모르고 그런 일이 있었다.

황광우: 미국은 몇 년도에 들어온 거예요?

 

신소하: 81년 6월1 일에 미국에 와서 우선 생활을 위해서 오빠가 일하는 식료품 가게에서 일을 하다가 야간대학을 다니며 영어 배우는 거부터 시작을 했었죠. 영어 배우면서 식료품가게에서 나오면서 한인이 하는 보험회사에서 일을 했었어요. 그리고 밤에 공부를 했죠. 대학의 4년제 대학을 가고.

 

황광우 : 그 장소는 필라델피아인가요. 난 지리에 대한 감각이 없어서.

 

신소하 : 네 필라델피아예요. 지도 보여 줄까요? 여기가 서부 L‧A, 동부 뉴욕 , 필라, 워싱턴DC. 이렇게 삼각형이라고 생각하면 되요.

 

황광우 : 황석영씨 강연 간 거는 진짜 형수님이 생뚱하네. 뭐가 씌었을까?

 

신소하 : 그 전서부터 내가 그 동안 책을 읽고 있었어요. 과정에서 칼 마르크스 책이라던가! 토인비의 역사책등을 보았어요. 한글로 된 책들을, 식료품가게에서 사서 읽고, 서점에서 주문해서 읽고 그랬어요. 책을 한 권 사다보면 책 뒤의 리스트 읽고 주문해서 보고 그랬어요. 아무튼 나도 생뚱맞았고.

 

황광우 : 황석영씨 강연 중 어떤 것이 기억나요? 무슨 이야기 했을까? 구로연대투쟁이야기였을까?

 

신소하 : 노동운동 강연, 감명 받았던 부분은 그 부분이었어요. 전반적인 이야기였어요.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 똥물 뒤집어 쓴 거 이야기하고 그랬어요. 그 당시에는 뭔 이야기인가 감이 없었어요. 우연히 황석영씨를 봐서 들었고 그 때 들었던 내용들이 나중에 역사공부 하면서 이런 이야기였구나 생각하고 확인하는 정도였어요.

 

황광우 : 그 전에 황석영씨 작품을 읽은 적 있었나요?

 

신소하 : 황석영씨 이름만 듣고 있었죠. 유명했죠. 내 기억에 강연을 들으며 속으로 울분을 많이 토했고 갔다 와서 고민도 많이 했어요. 한청련에서 준비한 자료를 주었는데 그때 ‘너머 너머’책을 보았어요. 한청련에서 전국적으로 팔고 있었고, 그날 안사고 나중에 와서 연락처가 한청련으로 되어 있어서 한청련에 주문을 했어요. 주문을 했는데 한청련 회원 남자 세 사람이 왔어요. 책을 가지고 오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물어 보며 내게 책을 건 네주면서 “광주문제에 관심이 있는가요? 관심 있으세요?”라는 말 에 나는 “내 나라문제니까요” 라고 대답했던 기억이나요. 아마 그때부터 나를 포섭의 대상으로 삼은 것 같아요. 꾸준히 연락오고 그 후로 강좌 있으면 오라하고 그래서 필라에서 역사학습을 시작했죠.

 

황광우 : 펜실베이니아 대학이 필라 도시 안에 있나요?

 

신소하: 네, 필라 안에 있어요.

 

황광우: 큰 형님 제자 중에 한 분이 정치학과 교수였거든. 거기서 형님을 초빙을 했어요. 형님이 거기서 펜실베이니아에 2년 정도 있었어요. 필라델피아 85년 당시에는 한청련 회원 수가 얼마나 되죠?

 

신소하 : 지금은 한청련이 필라델피아에는 해체되고 없어요. 십 한 오륙 명있었죠. 내가 접했을 당시 그때 당시는 필라 한청련 초창기라고 하죠. 유학생 중심으로 청년 20대 후반, 30대, 유학생들, 청년들이었죠.

 

황광우 : 역사공부는 무엇을 했나요?

 

신소하 : 근현대사들을 배우고 필독서로 된 것들, 지금 보면 ‘우리 역사 뒤집어 보기’라고 제목을 붙일 수 있을 것 같아요. 왕정정치였잖아요. 지금 생각하면 「들어라,역사의외침을」, 「뗏목을이고가는사람들」. 모두 필독서에 들어가는 것이었고, 주로 민중들의 삶의 역사 봉기 등 처음 접하는 역사들 이었죠.

 

황광우 : 사회과학 쪽 공부했나요?

 

신소하 : 아니요. 나는 회계학 쪽 공부했는데 한청련의 프로그램 자체가 근현대들이었죠. 한청련에서는 처음 접한 사람들 중에 열의가 있는 사람들에게 역사 학습먼저 시작해요 예비회원들에게 각 지역의 학습부장이 있어서 회원들이 역사학습에 정기적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토론하고 공부하고 커리큘럼들이 민중봉기, 동학부터, 사상도 공부했던 것이 기억이 나요.

 

황광우 : 도시에 몇 개나 있나요?

 

신소하 : L.A, 뉴욕, 필라 있었죠. 워싱턴DC는 특이한 거예요. 북가주, 시애틀, 달라스, 덴버 있었죠. 서부 3개잖아요. 중부의 시카고 , 달라스, 덴버 그럼 여섯 개지. 동부의 뉴잉글랜드라고 해서 필라 위에 따로 있었죠. 2여년 있다가 토론토 생겼죠, 호주, 유럽 생겼지. 미국, 캐나다, 유럽, 호주 묻혀서 ‘해외 한청련’이라고 했죠. ‘유럽 한청련’은 89년 90년 당시 독일중심으로 있었어요. 유럽에서는 독일중심이었죠.

 

황광우 : 회원 전체 수는 얼마나 될까요?

 

신소하 : 그 때는 극비였다. 전체를 합치면 천여 명 아니었을까 싶어요. 정회원들이 한창 번성기였을 때 전성기가 87,8,9부터 시작해서 91년 92년까지 김영삼 집권할 때까지 소련붕괴 되고 이러면서. 한청련은 운동노선을 노선이랄까 방향을 조금 틀었어요. 처음에는 통일하고, 북하고 미주하고 3대일로 하다가 남쪽은 좀 틀고 북틀고 하면서 미주 해외 쪽으로 운동방향을 틀었다. 90년 후로 운동의 방향을 틀었다.

 

황광우: 그것이 무슨 말씀이세요?

 

신소하: 우리 운동 역량 배치하는 것이 해마다 ‘8월 대회’를 개최하는데 주로 L.A하고 뉴욕에서 했는데 전 회원이 다 모이는 대회가 있어요. 그걸 하면서 운동방향과 정책, 사업계획을 짜고 역량배분을 하는 게 있었어요. 그 배분들을 처음에는 남북 해외 3대일 공조를 하다가 북은 나중에 들어가고 처음엔 남쪽을 많이 했었죠. 80년대 초 남쪽이 워낙 심각한 상태여서 연대운동도 하고 남쪽운동 지원운동도 하고 국내현실을 미국에 알리고 동포사회 청년들 의식화 교육으로 역량 했다가 나중에 북계 범민련하고 뜨면서 북에 지원하다가 북에 통일문제가 대두가 되면서 우리가 평화대행진도 하고 그러다가 임수경이 방북했다.

 

황광우 : 아 그게 그리 연결되는 건가요. 묻고 싶었던 대목인데 형님께 이야기를 들었는데 감이 안 잡혀요. 임수경 씨와 한청련의 관계는 어땠던 겁니까?

 

신소하 : 임수경씨가 평양에 청년 대표로 참여를 했어요. 전대협 대표였기에 가능했다. 임수경씨가 전대협대표로 안 오고 다른 사람이 왔어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운동하는 과정에서 연대활동(타민족형제들 지원세력)을 하는데 한국의 인권운동이라던가 민족민주주의 운동이 한국에서만 안 되고 해외에서 지원을 해야 한다. 해가지고 해외외국인들 타민족형제라고 불렀는데 타민족형제들을 조직했어요. 그게 “코리아의 통일과 평화를 위한 국제연대위원회”라는 것이 있어서 각국의 각 지역의 유명한 운동을 잘 하고 있는 타민족형제들을 위원회들을 모아서 위원회를 같이 공유하고 위원회를 꾸렸다.

그 사람들이 국내에 들어와서 국내 상황도 둘러보고 들어가고 한청련 회원들이 통역도하고 경자언니가 도와주고 이랬었는데 그 사람들이 필요시에 ‘국제연대위원회’로 청와대에 압력도 넣고, 해외에서 성명서도 발표를 하고 백악관을 상대로 로비 등 서명운동을 보내고 아무튼 여러 가지 활동을 많이 했어요. 코리아를 위해서 많은 일을 했다. 그 사람들을 상대로 우리가 계획했던 것이 “국제 평화 대행진”을 계획했었어요. 백두산부터 판문점까지 평화 행진을 하는 거예요

 

황광우: 어떻게?

 

신소하: 우리는‘국제평화위원회’에 들어 갈 사람하고 우리가 참석할 사람 대표를 접촉하는데 그때 6.25참전국을 다 접촉하여 그 참전국의 재야 운동권을 접촉해서 대표 한사람씩을 보내 달라 했었어요. 그 사람이 참석을 못하면 성명서에 이름 쓰고 동의하는 그런 걸 받았었어요. 우리 원래 계획은 백두산에서부터 판문점에서.

 

황광우 : 그건 북의 동의가 있어야 하잖아요.

 

신소하 : 아 그건 했었지. 우리가 해외연대위원회에서 이렇게 하겠다. 그러니까 북에서 해 줄 것은 뭐냐 하면은 장소를 빌려 달라 그거였어요.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준비해서 갔어요. 하다못해 현수막 걸 못, 볼펜, 연필, 지우개 필기도구 싹 다가지고 갔었어요. 그러니까 북에서는 아무런 지원을 받지 않고 단지 먹고 잘 수 있는 공간 백두산에서 판문점까지 갈 거니까 그 길을 열어 달라했다. 그 허락을 받았었어요.

 

황광우: 판문점까지 와 가지고 그냥 또 이쪽으로 와요?

 

신소하: 판문점에서 와서 우리는 제를 지내려고 했거든요. 6.25 참전 때 돌아가셨던 각국 나라 대표들이 있으니까 각국의 위패를 모셔놓고 제를 지내려고 했었어요. 89년도에.

 

황광우: 문익환 방북 언저리네?

 

신소하: 아마 그 전 일걸요! 89년도 봄에서부터 여름이었죠. 그 분은 가을에 가셨을까. 그렇게 하는 와중에 희소식이라고 하나 낭보라고 하나 전대협이 간다는 것을 알았지. 먼저 우리는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1차 방문단이 가서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북하고 얘기를 하고 있었고, 연락담당으로 뉴욕에서 형님하고 나하고 마당집을 지키고 있었고, 그때 당시 우리가 크게 두 가지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국제평화대행진’ 백두산에서 판문점까지 그거 하는 거 하고 하나는 북에 평화대행진 참가하지 못하는 한청련회원들 있잖아요. 회원들이나 주변사람들을 미군 철수 핵무기철거 10만 명 서명을 받아서 뉴욕에서 출발해서 워싱턴 DC까지 행진을 해서 전달하는 행사를 같이 했었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정신이 없었어요. 한쪽에서는 국제평화대행진준비하고 있었죠. 한쪽에서는 이 서명 받고 이 서명을 2년에 걸쳐서 받았는데 이거 해가지고 정리해가지고 봐서 중복되는 거 빼고 형님스타일이 그러잖아요. 숫자 채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사람과 개인이 다 들어가야 된다 해 가지고 주소 없는 사람을 빼고 여기 저기 받혀 있었던 사람 빼고 하여 10만 명 넘게 채웠죠. 그 서명을 박스에 담아서 이쪽에서는 풍물 치면서 워싱턴 D.C까지 내려가고 중간 중간 도보행진을 할 때 지나가는 주마다 허락을 받아야 해요.

 

황광우 : 임수경 방북이 평화대행진 먼저 튼 거구나!

 

신소하 : 그게 아니라 ‘세계청년축제’에 가서 우리는 ‘세계청년축제’에 참여를 안 하고 우리는 평화대행진에 참여를 하겠다했고 임수경이는 참여를 했고 시기가 맞아 떨어진 거예요. 같은 시기가 맞아 떨어진 거였어요. 그렇게 해서 임수경씨를 만나서 행진도 같이 했죠.

 

황광우 : 이때가 어떻게 보면 한청련 활동의 절정이라고 봐야겠네요.

 

신소하 : 그럴 수도 있죠. 대외적으로 국제적으로, ‘국제평화대행진’ 그 후로 탄압이 있었다. 나도 피해자였다. 임수경 방북으로 국제평화대행진에서 문규현 신부님이 방북하고 한청련이 나오고 그러면서 우리 집안 식구들이 ‘빨갱이 단체다’라고 하며 내가 몰렸다. 우리 집은 형님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우리 집이라기보다는 미국의 일반 대중들은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예요. 한국 같은 철저한 반공나라에서 배타고 두 끼 밖에 안 먹고 빠져나온다는 것, 밀항 이야기 등은 사람들이 그 자체를 못 믿은 거지. 상상할 수 없어서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윤한봉에 대해서 실체를 인정하지 못 한 거죠. 안기부가 아닌 북에서 보낸 사람이라고 ‘빨갱이’라고 우리 집에서는 말했다.

 

황광우 : 빨갱이 맞잖아요.(웃음)

 

신소하 : 아니다, 북에도 안 갔다 왔는데요. 자생적인 빨갱이 일거다! 한청련을 반대해가지고 내가 오빠에게 많이 맞았다. 가정폭력으로 법정소송으로 경찰에 폭력으로 고소하고 그 후로 집안과 떨어졌다.

 

황광우: 그래가지고 집안하고 빠이빠이 해버렸어요?

 

신소하: 한청련 활동을 집에서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반대했는데 드러나게 안했고 조금 열심히 학습하고 회의하고 그랬는데 각종 신문과 언론을 가지고 한총련이 빨갱이가 아니냐하고 들이대며 뉴스등 모든 사람들을 빨갱이로 이야기 했다. 평화신문을 같은 언론이다 보세요. ‘이 신문도 같은 언론이다’라며 반론했는데 이 신문도 빨갱이라 하며 싸웠다. 그래서 싸웠지. 폭력당한 걸로 오빠를 고발 해 놓고 한청련 회원 집으로 잠적을 하고 나중에 재판장에서 만났죠. 필라 회원 집에 있다가 DC회원 집에 있다가 뉴욕 마당 집에서 기거했어요.

 

황광우 : 형님은 언제 만났나요?

 

신소하 : 86년 겨울 역사공부하면서 만났어요. 필라에서 우리나라 민중역사를 배우고 나면 마지막에 항일 빨치산 운동사 부분을 강연하러 오셨어요. 잠바입고 똥가방 메고, 그때 처음 만났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윤한봉씨를 표현하는데 굉장히 어마어마한 표현들을 했다. 역사공부도 저렇게 잘 하는데 뭐가 무섭지? 나는 별로 어려운 사람으로 대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어려운 사람으로 안대했다. 멋모르고 철없는 사람이었지…….(웃음)

 

황광우 : 형수님이 순수하니까…….

신소하 : 항일 빨치산 운동 교육받으며 감명을 많이 받았어요. 그때사 우리역사에 대해 눈을 떴죠!

 

황광우 : 이현상에 대한 것은?

 

신소하: 이현상씨에 대한 것은 조금씩 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개인에 대해 이야기 한 것은 아니고 전체적인 스토리 만주, 중국 등을 짚어 주었다. 그때 공부를 하면서 읽었던 것은 기억이 나는데…….

 

황광우 : 언제부터 본격적인 한청련 활동을 하셨습니까?

 

신소하 : 87년 1월에 정식회원(상근활동)으로 활동했지요. 88년 89년 국제평화대행진 할 때 일부는 북으로 평화대행진 가고 일부는 미주 평화대행진이라고 해서 마당집 지킬 사람이 없었어요. 그때 뉴욕 마당집에 있을 때 지원을 해서 그때 임시 상근자 하고 있었다. 형님하고 나하고 평화대행진하고 국제평화대행진 의 연락책을 하고 있었다. 미주평화대행진에 낀 사람은 찬밥신세, 국제평화대행진도 못하고 미주평화대행진 둘 다 못가면 쉰밥신세였다. 형님과 난 쉰밥신세였지.(웃음)

 

황광우 : 저도 87년대 6월 항쟁을 연대에 있을 때 저도 전화로 진두지휘하고 있었어요. 형수님 말씀이 가슴에 쏙 들어오네. 현장에서 뛰고 싶은데 불끈불끈하고……형수님 심정이 이해갑니다.

 

신소하 : 평화대행진 할 때 매일매일 전화가 와요. 북하고의 관계, 타민족형제와의 어려운 문제 등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있었는데. ‘조국에서 전화합니다!’하고 교환수가 먼저 전화가 와요. 형님이 혼자 전화를 받았는데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어요. ‘무슨 일 있었는 줄 알어?’ 그러시는데 나는 깜짝 놀랬어요. 뭔 일이 있었나하고 그런데 궐기대회 할 때 백두산에서 평양으로 마지막 판문점으로 집결하는데 10만 명이 모였다는 소식을 듣고 머리가 쭈뼛해졌어요. 북에는 사정이 어렵다 보니까 미처 준비 못한 플래카드 준비해 주십시오. 하면은 밤새 재봉틀로 꿰매서 중간에 합류하는 사람들 편에 보냈어요.

 

황광우 : 형님이 미국에서 담배를 많이 피웠죠? 술을 안 먹으니까.

 

신소하 : 줄담배 피웠죠. 형님이 상태가 좋으면 아침저녁 담배를 참으셨는데 긴장이 되면 밤에 담배를 피우시고 새벽에 눈뜨자마 피시고 아침에 눈뜨자마자 많이 피셨어요. 몇 번 끊고 피고 했는데 많이 피셨어요. ‘밴슨해긴슨’이라는 담배였어요.

 

황광우 : 양담배가 우리한테 안 맞아요. 폐기종은 언제 알았나요?

 

신소하 : 94년 2월에 김남주씨 장례 치르며 장례위원장 일을 하면서 폐기종인줄 알았어. 사람들이 놀렸대요. 미국에서 너무 안 걸어서 그런다고…….

사람들이 데리고 조남중씨에게 가서 진단받았는데 폐기종진단을 받았다. 그때만 해도 얼마나 심각한지 몰랐죠. 미국에서는 걸어 다닐 일이 별로 없어서 덜 느꼈는데 숨이 찰 정도라거나 몸이 상태가 안 좋은 줄만 알고 있었다.

 

황광우 : 형님 말고 한청련의 핵심활동가라고 할까 그런 분들은 몇 분이나 되십니까?

 

신소하 : 지금의 한청련은 공식적으로 해체가 됐다 98년 6월에 해체가 되 고 한겨레만 있다. 원래 한청련 회원이 36세가 되면 한청련을 졸업하고 한겨레로 올라간다. 새로운 젊은 층이 안 들어오거나 못 들어와서 한청련 활동은 못하고 한겨레로 모였다. 한청련은 정리가 됐어요. 그전에 아주 크게 조직사건 두 번이 있다 조직을 반 나눈 사건! 93년 귀국 직전에 터졌었다. 귀국하면서 조직문제화 되어 반으로 나누어졌다. 그 사건으로 인해서 한청련1기생이 모두 제명되었다. 조직 파괴 작전이라고 하나. 내부적으로 파워게임이었다. 한청련 회원은 2년마다 한번씩 L.A와 뉴욕 양쪽에 있으니까 그 선배들은 1기생 선배들이었고 난 1.5세에 가까운 운동권의 후배였다. 1기 선배들 중 유학생들, 지식인들 청년층이지만 똑똑해서 형님하고 같은 선상에서, 형님이 처음 의식화 시켰던 사람들끼리의 파워게임이 있었다. 그 당시 한청련 회장이 L.A에 있었는데 뉴욕과 시카고에 거물급들 1기생 선배들이 부회장, 조직부장직도 하고 외교 연대 부장직들도 하면서 임원을 맡으며 있었는데 정확한 속셈은 나는 모르지만 자기 딴에는 형님이 가시면서 조직을 형님이 분배를 해 줄 거라고 생각했었나 봐요. 그런데 그게 말이 안 되잖아요. 한청련 회원이 엄연히 있는데. 사실은 형님은 당부 말씀하고 귀국하신 것 뿐이었어요. 그러고 나니까 회장에게 힘이 쏠리면서 삐걱거린 거 같애. 자기네들 끼리. 일부는 나가는 명목을 못 찾지. 세력을 확보는 것에서 명분을 못 찾아서 내세운 명분이 ‘한청련은 통일운동을 안한다. 그런데 우리는 통일운동을 해야 한다. 그런데 한청련은 안 한단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강령에 의해서 통일운동을 하고 있었거든. 당연히 하고 있는 것을 자기들도 알고 있었고.

 

황광우: 뜨겁게 안한다는 얘기지.

 

신소하: 자기들 같이 지금의 한총련같이 무조건 친북적인 것은 안한다는 그거 였어요. 나중에 보니까 그 사람들이 북을 왔다 갔다 하면서 북하고 관계를 하고 범민련 들어가서 무조건 북의 입장 들고 이러더라구요. 우리는 범민련하고 꽉 끼었거든. 탈퇴를 해버리고. 문제는 그 사람들이 나가서 잘하냐! 또 그렇지 못하데. 그렇게 해서 한청련이 크게 타격을 입었다. 조직이 약화된 상태에서 2004년에 또 한 번 조직사건이 일어나서 그나마 있던 1기생 한청련들이 거의 다 떨어져 나가고 제명되고 모두 사라졌다. 크게 어느 조직을 하다보면 조직원들이 탈퇴하는 이들이 있지만 한총련 전국적인 차원에서 해외 한청련까지 관련되어 가면서 했던 사건은 그 두 사건이 매우 컸다.

 

황광우 : 형님의 비중이 컸고 관성대로 굴러갈 수도 있지만 광주로 들어온 다음에는 헤게모니 싸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신소하 : 그랬던 거 같아요. 공백상황에서 1기들의 희생이 없었으면 한청련 이 있을 수 없다. 그러니까 그 분들을 영웅시했었는데 스승역할을 했던 사람들이었는데 자기들끼리는 경쟁이 심했나보다 그 사람들 중에서도 리더십도 없었다고 본다.

 

황광우 : 국내운동의 변화도 있었다. 형수님은 형님과 활동하시면서 논쟁한 적은 있어요?

 

신소하 : 내가 논쟁거리가 됩니까?(웃음) 그럴 만큼 나는 이론적으로 철저하지도 않아요. 내가 형님에게 존경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는데 형님을 어려운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잖아요. 87년 1월에 ‘정회원’이 되었는데 8월 달에 L.A에서 ‘8월 대회’가 있었다. ‘8월 대회’는 국내, 유럽, 일본 캐나다, 미주전역에서 사람들이 온다. 정신이 없어요. 각 지역의 자원봉사자들은 한 달 전부터 자원봉사를 한다. 난 일주일 전에 가서 자원봉사하고 있는데 형님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을 봤다. 구석구석 먼지 닦고 쓰레기 줍고, 뜯어 고치고 이런 일들을 하고 있는데 난 ‘특이하신 분이다’라고 생각했죠. 그분이 움직이시니까. 그분이 누구라는 것을 알고 같이 청소하고 정리정돈하고 뒷바라지 하고 그랬어요. 그래서 그때 형님을 감동적으로 봤던 계기였어요. 난 그런 자세로 형님을 보는데 캐나다에서 온 다른 한 사람은

“형님이 저렇게 하니까 오히려 우린 더 불편한데” 하며 안 그랬으면 좋겠는 데라고 생각했어요. 나와는 반대였다.

 

황광우 : 형님에 대한 호칭은?

 

신소하 : ‘형님’이라했어요. 내 세대까지 ‘형님’이었요. 내 세대 이후는 선생님이었어요.

 

황광우 : 뜨겁게 논쟁한 것은 없었나요?

 

신소하 : 한청련 역사적으로 1.5세이기에 임원이 아니었기에 임원회의에 안 들어갔다. 1기생들과 관계가 있었죠. 임원회의에 들어가야 논의하는데 정책 논의 등을 같이 할 기회가 없었다. 형님과 정책이야기를 할 기회가 없었다. 나이가 차이가 많고 의식차이가 많고 그러니까 이론적으로 형님이 지적할 때는 직접안하고 임원들을 통해서 이야기 하고 그랬어요.

 

황광우 : 한청련의 공식직함은 무엇이었나요?

 

신소하 : 한청련 회원, 민족학교 총무(L.A)였어요. 집을 나와 뉴욕에서 자원봉사활동(상근)을 하는데 자금 마련을 위해서 크리스마스트리를 팔았다 뒷일 해주는 사람들의 일을 하고 있었다. 남자들이 나무 팔고 있는 사람들의 잠자리 돌봐주고 빨래하고 그런 ‘따까리’일을 했어요. 그런데 L.A에서 연락이 와서 자체에서 문제가 있어서 상근자가 빈다는 연락을 받고 89년 12월에 상근으로 가게 되었어요.

 

황광우: 바로 집하고 대판 싸우고 서부 개척하러 들어가셨군요. 아 부럽다.

 

신소하: 그때 당시의 한청련은 필요에 의하면 부르면 가는 거였고 직장과 지역을 이동을 했다. 뉴욕에 있던 사람도 북가주에 가고 1기생 중에서 가족이 이사를 가서 직장을 잡고 한청련 일을 했다. 필요에 따라서는 직장도 옮겨 다니고 지역도 옮겨 다니고. 결혼한 사람들은 1기생들은 가족들이 모두 한청련 회원이었고 부부가 같이 동의해서 옮겨가요. 그런 희생이 있으니까 후배들이 존경을 했죠.

 

황광우 : 오바마 보니까 형하고 활동 연대가 비슷하겠던데 81년도부터 했으니까. 백인들이 정치적 역량으로 비전이 없다는 거지. 그러니까 흑인들한테 넘어간 거지 백인들 청년 내부에 미국을 이끌어나갈 비전을 제시할 만한 카드가 없었던 거지

 

신소하 : 얼마나 기대에 어긋나게 하는 지 봐야지 흑인이라는 인종차별을 깬 것만 해도 엄청난 거라고 생각해요. 공화당에 조금만 진보적인 사람이 있었으면 오바마가 안 되죠. 미국은 묘하게 민주당, 공화당이 8년씩 돌아가는데 오바마에게 기회였던 같다. 공화당이었으면 안 됐을 가능성이 있어요.

 

황광우 : 오바마 보면서 형님하고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형수님이 광주에 온 거는 한청련의 조직의 명에 따르는 전통에 따른 건가요?

신소하 : 한청련들은 몰랐지요. 북의 핵문제부터 워싱턴포스트지에 광고내고 할 때 가끔 형님이 전달사항을 주셔요. 새벽에 전화가 왔어요. ‘잘 들어’ 그래서 무슨 말씀을 하실 줄 알고 잠결에 볼펜과 종이를 가져왔다. 그런데 느닷없이 결혼을 하는데 어쩌고저쩌고 하는데 결혼하신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날더러 나오래요 결혼한다는 말 전에 날더러 일주일 전에 나오래요 “왜요?” 했더니 자기가 결혼을 한 대 형님이 결혼하시는데 나한테 들러리 서라는 건가? 생각했는데 ‘내가 가서 뭐해요’ 했더니 그때부터 이야기하시는데 자다가 잠이 번쩍 깬다는 표현 있잖아요. 그 때 딱 맞더라고. 그때부터 아무생각이 없지. 그래가지고 임원들에게 이야기 하라고 하길래 내가 그랬지 형님이 한청련 회장한테 이야기 하라 했죠(웃음).

 

황광우 : 미국에서는 그런 언질을 안 했나요?

 

신소하 : 안 했죠, 형님이 그런 거 하실 뿐 이예요? 난 확실히 형님을 좋아한 거는 맞어. 형님은 좋아했지? 형님도 나를 좋아했을 거야. 황선생님은 데이트하고 했어요?

 

황광우 : 난 데이트 할 만큼 했죠. 우리는 원 없이 했죠.

 

신소하 : 우린 그런 거 없었어요. L.A 상근자로 활동하며 같이 생활하고 의식이었던 무의식이었던 간에 나는 1.5세였기에 선배 측에는 못 끼었는데 큰 행사 등에는 보조 식으로 갔고 행사의 중심에는 내가 항상 없었어요. 그럼에도 형님 가는 곳에 항상 같이 갔던 거 같애. 지금 생각해보니까 형님 귀국하고 나서는 나만 서운했나?

황광우 : 남녀 간의 애정적 차원에서? 섭섭했을 거 아녜요

 

신소하 : 글쎄 남녀 간의 애정적 차원인가는 모르겠는데 엄청나게 울었어요. 항상 같이 있었는데…….

 

황광우 : 반핵평화 운동 있잖아요. 우리 남한 내에서는 본격적으로 안했거든요. 어느 날 90년도인가 ‘민중의 함성’이란 책속에서 남한의 전선이 불리하게 배치되고 있다고 폭로하고 이 쪽 정치적 흐름 속에서 반핵평화문제가 전 국민적 이슈로 올라올 계기 자체가 없었다. 형님 활동하는 거 보니까 미국 내에서 핵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하고 있더라고…….

 

신소하 : 한국 이민사 100년 사인데 81년 형님이 시작했는데 70년대까지는 기독교인들 중심으로, 김대중 중심으로 하면서 일종의 인권운동차원에서 한국을 보는 거고, 그렇다고 해서 노동자 농민들은 몰랐고, 김대중이 갇히니까 김대중 석방 운동이나 하는 정도이었어요. 이 사람들 의식자체는 미국이 한국을 돕는다는 거였고 우리는 미국에 의해서 통일도 이루어지고 독재를 타파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예요. 친미반공주의라고 했는데 한청련 들어오면서 우리가 들어오면서 우리는 미국을 걸고 들어왔어요. 역사공부를 하면서 미국이 우리 역사에 관여하는 과정을 깊게 공부했다. 유엔 앞 단식도 하고 핵무기철거운동도 하고 미군철수운동 등으로 하니까 놀랬지. 엄청나게 많이 싸웠어요. 미군을 적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기존의 운동권과 많이 싸웠고 일부에서는 빨갱이라는 말부터 시작해서 미국운동권을 깨려고 안기부에서 파견했다는 얘기부터.

황광우 : 빨갱이는 좋은 말이다.

 

신소하 : 그 빨갱이를 북에서 남파된 사람을 칭하는 것이라 하니까 그러지 어떤 책을 읽어보니까 우리가 미군문제 들고 나오고 핵무기 문제를 들고 나오니까 충격을 많이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노인들중심의 운동만하다가. 추리가 처음이었어요. 서명운동 할 때 말도 맙시다.

 

황광우 : 미국의 서명운동은 어떻게 해요?

 

신소하 : 미국에서는 A4용지에 윗줄은 영어로 쓰고 우리 주장을 쓰고 아래는 한글로 쓰고 이름 쓰고 주소 쓰고 하여 열 칸짜리 서명 칸을 하여 복사를 여러 장 하여 사람을 일대일로 만나서 나는 누구고 목적을 설명하고 서명을 받아요. 의견이 다르면 많이 싸우잖아요. 필라델피아에서 서명 받을 때 내가 기록을 한 번 세웠어요. 필라델피아에서 템플대학을 다니고 있었는데 그 주위에서 서명을 받는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돌아다니면서 많은 논쟁을 하죠. 미국인 같은 경우는 너희는 가라. 한국인들은 빨갱이라고 소리 지르고, 일대일로 접촉을 해요. 많이 싸워요. 그렇게 해서 각 지역에서 모은 서명운동이 한 장에 열 명 들어가는 싸인이 십 만 명이었다. 잘못된 거 빼버리고. 하는 건데 그 때 회원들 대단했어요. 한 두 사람이 테이블을 설치하고 나머지 회원들은 막 흩어져요. 골목으로 다, 두 시간 모여서 오고. 대단했어, 그때 참…….

 

황광우 : 귀국서명 운동 때도 십만 장 했어요.

 

신소하 : 돌이켜 생각해보면 형님이 남편이면서 인생의 큰 스승이었어요. 내가 한청련, 형님을 안 만났다면 평범한 사람과 결혼해서 돈을 버는 관심밖에 없었을 것인데 앞으로 얼마가 될지 모르지만 인생의 한 부분은 정말로 조국이라는 것에 대해서, 민중을 위해서 10여 년간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서 그 부분에 있어서 굉장히 고맙지요.

 

황광우 : 난 이해가 잘 안 되는 것이 있는데 내 혼자만의 의문점을 갖고 있는데 대한민국 운동 권 중에 투철한 사람이 있는데 무소유를 말하지 않으면서 삶속 에서 무소유의 원리로 살아가는 사람은 내가 볼 때는 한봉이 형 뿐 인거 같애요.

신소하: 참 특이하죠! (웃음)

 

황광우: 간디가 무소유자였고 사상적으로 무소유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칼 맑스, 레닌 등인데 사상적으로 이야기 해 버리면 재미가 없고, 도대체 어떤 기질이 어떤 성격적 도덕적 기질이 무소유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한 번 좀 나름대로 파보고 싶어, 형수님은 어떤 거 같애요?

 

신소하 : 형님이 근본적으로는 본인이 철두철미하시니까 운동을 하게 되면 서 원칙을 정한 것 중에 하나는 내 걸 가지지 않는다. 왜 그렇게 했는지는 말씀 안 해 주셨더라고. 가족이 있으면 걸리니까 안 되고 집이 있으면 집착이 생기니까 소유하지 않으셨고 집안내력으로 보면 형님의 보호 신 이신 형님의 할머니부터 시작해서 어머니 돌아가신 시할머니 형님의 할머니가 꿈속에서 이야기를 해주신다 했다. 표정으로 이야기 해 주시고 고문을 심하게 당할 것이다라는 암시로 할머니가 굉장히 침울한 표정으로 나타나신다던 가 보호신이라고 하더라고요 또 본인의 별명이 집안의 도둑이었대요. 집안에 있는 것을 다 주신대요. 사람들을 불러다 놓고. 우리 아버님이 6.25때죠. 그나마 재산을 갖고 있을 때 남로당 쪽의 공격받지 않은 이유가 주변에 워낙 많이 베풀어서 이 사람들이 주변에서 커버를 해줘서 남로당 때 피해를 입지 않았다. 지금은 우리 어머니가 그러셔요. 남을 다 주셔요! 그것이 영향이랄 수 도 있고…….

 

황광우 : 선비의 기질이라는 것이 있거든요. 형님이 그 선비 기질을 많이 갖고 있는 거 같다.

 

신소하: 어떤 면에서?

 

황광우: 일체의 비리하고는 타협을 하지 않는 선을 단호하게 그은 단호한 그런 대목이.

 

신소하 : 우리하곤 다른 사람 같애. 아무리 형님을 생각해봐도 아까도 황선생님이 얘기 해 줬지만 국내에서 운동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무소유, 언행일치등 일반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지 않나요?

 

황광우 : 그게 전통적인 조선선비이죠. 우리가 너무 많이 굴절되고 변절된 거고 오히려 우리 형님이 남도의 꼿꼿한 절벽 위의 솟아난 낙락장송이라 하잖아요. 그러한 절개를 지키는 선비적 기질을 순수하게 간직해온 거지.

 

신소하 : 집안에 그런 내력이 없었거든요. 남 도와주기 좋아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무소유주의자고 그렇진 않았거든요.

 

황광우 : 굳이 오늘 이론적으로 하느냐. 인간의 품성이나 성격이라는 게 생문학적 유전도 있지만 문화적 유전도 있어요.

 

신소하: 형님 영혼이 좀 특이한 영혼이신 거 같애

 

황광우: 젊었을 때는 이강 선배와 한봉이 형이 쌍벽으로 존경받았죠.

 

신소하 : 형님은 일반인으로서는 할 수가 없는 것이 뭐냐 하면, 형님은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했다. 내가 생활상에서 인성에서 보면 내가 그 한청련에 있을 때에도 형님에 대해서 어려움을 안 갖고 있었다고 했었잖아요. 나는 그 때만해도 순수하니까, 배운 대로 하니까, 형님이 좀 나오면 형님께 ‘그건 아닌데요. 형님!’ 그것을 왜 그렇게 해야 돼요. 난 이렇게 생각해요 그러면서 그런 논쟁을 가끔 했어요. 그렇게 하면 그런 것에 대한 자극을 본인이 반성을 많이 하고 그 것에서 많이 고쳐요. 그 나이 연배나 그 지위로 봤을 때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일들을 형님은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랬어요. 나하고 엄청나게 부딪쳤던 부분들이 그런 부분들이었죠. 끊임없이 성찰하고 고치셨어요. 그게 난 특이하다고 생각했어요. 난 죽었다 깨어나도 못할 일을 형님은 하셨죠! 그래서 물어본 적이 있어요. “그거 없이 어떻게 운동하냐”라고 하셨어요. 어떻게 그렇게 철저히 본인을 자각하고 성찰하면서 자기 절제를 하면서 사냐 했더니 그것이 운동하기 전서부터 자기 생활화 되어 버렸다라고 하고 운동하면서부터 끊고, 맺고 하는 거부터 자기 성찰하는 것이 굉장히 몸에 베였고, 또 하나는 유일하게 지도자라고 하잖아요. 미주에서도 남들이 안하는 노선을 택해서 미국문제, 핵문제 건드리면서 조직을 운영해나갈 때 그야말로 정치학 박사, 지식인들, 유학생들을 의식화 시켜서 지도해 낼 때는 형님이 참 고단하고 외로웠다는 얘기를 하셨는데 어떤 문제가 터지면 이 문제를 해결하고 하는 과정에서 논의하고 의논할 사람이 없었어요. 혼자서 고민하고 방향 찾고 길을 찾아서 조직에서 제시를 해 줘야만이 임원들이 눈을 뜨고 임원들을 상대로 설득을 해내고 임원들이 동의가 되고 조직사업으로 채택이 되니까. 그런 과정이 외롭고 힘들었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한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덜 외로웠을 수도 있다고 하셨어요.

 

황광우 : 내가 고등학교 때도 내가 자취방에 가봤는데 손톱깎이, 재산목록 54번이던가 52번인가. 편지지 3장, 빤스, 양말, 란닝구등 …….

 

신소하 : 팬티도 2장 있으면 1장 남 주고 김남주씨나 그런 사람들이 많이 받아 입었다더만, 그게 본인은 운동하는 사람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 거 같애! 그게 운동이라고 생각한 거 같애 형님은 본인이 해야 할 일, 역할이라고 생각하셨고, 문제는 그것을 내게도 요구하여 내가 힘들어했지

나는 많이 갖고 싶었는데……. (웃음)

 

황광우 : 제 나름대로 ‘내가 아는 윤한봉’을 써야 하는데 그 대목을 어떻게 써야 할 지 고민입니다. 한봉이 형님은 말, 구술이 천제적이예요. 글은 직설적으로 쓰는데 말은 그렇게 재밌고 독특한 표현들이 참 많았어요. 그걸 입담이라고 하죠. 내 어머니의 어머니, 그러니까 외할머니가 ‘설 소리꾼’이었는데 그런 외할머니의 문학적 재주가 우리에게 연결되기도 하는데 한봉이형은 입담이 어때요? 어머님을 보면…….

 

신소하 : 그거 보면은 집안의 내력인거 같기도 해요. 뉘서부터 시작됐는지 모르겠는데 가족 6명중에서 말 표현력이 실감나는 분은 형님이 제일 잘하시고, 그 다음이 경자고모, 경자고모는 흡입력이 있고, 그 다음이 난실이가 잘해요. 어디선지 모르지만 내력이 있는 듯해요.

 

황광우 : 문화적 유전자라는 새로운 개념을 떠올리는데. 분명히 개인적가계로는 추적이 힘들다. 남도 전체 문화전 분위기, 남도사람들이 말이 무지하게 구성지고 재밌거든…….

 

신소하 : 우리 시어머니가 말 표현이 참 재미있다. 우리 시어머니가 학교를 전혀 안다니신 분이신데 글을 모르시는 분이신데 생소한 표현들이 정말 재미있다. 내가 잠깐 왔다 가면 “너를 본 듯도 하고 안 본 듯도 하고” 그런 식으로 말씀하신다. 잠깐 왔다 갔다는 표현을…….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으신 분이라 그런 영향도 있을 거 같다.

 

황광우 : 아이큐가 굉장히 좋은 사람들이 말담이 좋거든요. 그렇게 이야기하면 엘리트주의라고 하니깐 그렇게 얘기하기 싫은데.......

 

신소하 : 지식인들 운동에 대해서는 반대죠, 형님정도 공부하면 지식인들 10배는 될 것 같은데 실천 없는 지식인들의 운동에 대해서는 아주 싫어했어요.

 

황광우 : 형님처럼 민족의 일에 대해 애정을 갖고 계신 분들을 사상적으로 본다면 민족주의라고 하는데 99%가 배타적이다. 그런데 형님은 오히려 국제주의이고 그러지가 않아요.

 

신소하: 그렇지가 않아요. 세계 민중들에 대한 애정이 강하신거 같애

 

황광우: 한글에 대한 애착이 굉장히 깊더라고……. 그거를 후배들한테는 이야기를 안했다. 이런 이야기가 한글이 우수하다는 것은 한국 사람들에게는 창피한 이야기다. 한글에 대한 소신을 갖고 계셨는데, 한번은 형님에게 ‘형님, 아무리 한글은 탁월한 글자인거 같애’ 하며 맞장구를 쳤더니 굉장히 좋아하더라! 그 이야기를 하다 보니 한글을 굉장히 좋아했었구나! 그 계기가 보면 동네친구와 내기로 다시는 한문을 쓰지 않겠다고 맹세한 후 한글을 쓴 거 보면

 

신소하 : 그러고 보면 그것도 참 특이한 분이고. 맹세를 하면 본인은 꼭 지켜야 하니까 맹세를 안 한다고 했어요. 어떤 것이든 간에…….

 

황광우 : 나이 드신 분들이 운동 많이 하신 분들은 권위주의거든요 거꾸로 정치적 행보와는 거리가 멀다. 김근태 경우는 굉장히 똥폼을 잡거든요. 속으로는 아무것도 없으면서 정치장사나 하고 있으니 …….김승호 형님도 무지하게 권위적이다. 같이 있는 상근자 박승호는 내 1년 선배인데 김승호 선배한테 완전히 주눅들어가지고 ‘고양이 앞에 쥐’식으로 아무 말도 못한다. 한봉이 형은 아무런 권위가 없다

 

신소하 : 권위가 있었으면 아마 내가 가까이 갈 수 없었다.

 

황광우 : 그래서 형수님이 아무 부담 없이 받아줄 수 있지 않았나. 마치 토끼가 호랑이 수염 갖고 놀고……그런 것이 권위가 없이 행동하셔서

 

신소하 : 호랑이 등 타고 놀고…….하하하. 일할 때는 엄청나요. 무지하게 야단을 치신다. 정말로 개인감정이 아니고 일로 하니까 그러지 나이로 하면 3년4년 후배인데 무지하게 야단치셔요. 자식 앞 부인 앞 상관없이 회의 때 그러신다. 그래서 그런지 한청련 회원들이 직장에 가서도 일도 잘하고 인정도 받는지 모르겠는데. 거침없이 토론하거나 논쟁할 시 70년대 미주 운동했던 친미 반공세력들하고 논쟁할 때 보면 나이와 상관없이 했다. 본인이 권위적인 것을 인정안하다 보니까 상대방이 권위적이면서 삐딱하게 나온 것을 인정을 못했죠.

 

황광우: 너무 과도하게 썰어버리는 면이 있죠. 들어와서 문병란 선생님을 0처럼 취급해 버리고.

 

신소하: 처음엔 안 그랬죠. 문병란 씨가 L.A에 왔을 때 얘기를 들어보면 형님이 큰절을 했다. 우리는 그 모습을 보고 우리는 깜박 죽었다. 형님이 큰 절하실 정도면. 필라에 왔을 때도 내가 다 안내를 했는데. 형님이 같이 오시고 해가지고. 우리는 그때 문병란 씨에 대해서는 엄청났었어요. 내가 결혼하고 왔어도 형님은 스승으로 깍듯했다.

 

황광우 : 명예욕이 오버하는 것을 형님이 목격하셨겠죠.

 

신소하 : 직접적으로 우리랑 부딪쳤어요. 82년도부터 5.18행사를 하는데 친북세력들이 문병란 씨를 초청했는데 우리와 맞설 계획으로, 자기네들은 활동내역을 북에 가서 보고하고 칭찬받고 내려오고 이런 경로였어요. 우리가 오창규, 박문옥 순회 공연하려고 했는데 그 사람들이 문병란 씨를 초청을 한 거야. 미국에서 연락이 온 거야. 이렇게 하면 5.18행사가 두 개가 된다. 형님이 만나서 초청단체에 대한 배경이야기를 문병란 씨를 만나서 이야기를 했어요. “아 그럼 안가겠네.” 말씀하시고, 우리가 안 가신다고 그러더라고 연락을 했어요. 그랬더니 그 쪽에서 온다고 포스터가 붙었다고 연락이 와서도 갔어. 안 간다 해 놓고 두 번 안 간다 했어. 나중에 뒤에서 들리는 소리가 미국에서 하는 일을 갔다가 윤한봉이가 좌지우지하려고 한다면서 이렇게 뒷북치는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그래서 만나서 담판을 지으면서 절교했다.

그래서 문병란 씨는 0망신을 당했다. 미국의 사정을 모르고 했으니 안 되는 거였어. 문병란 씨는 우리 하는 식으로 L.A등 뉴욕들 몇 십만 명이 모인다고 하니까 자기가 붕 뜰 줄 알고 갔는데 어림 반 푼어치도 없지. L.A 말고 다른 곳을 못 갔어요. 우리는 오창규, 박문옥과 전국으로 합세하여 워싱턴포스트지에도 났다. 엄청나게 많이 났지. 그때부터 당해가지고 문병란 씨는 엑스 표였지

 

황광우 :이런 걸 글로 쓸 순 없겠지만....

 

신소하 : 그게 이해가 되요. 몇 명 없어요. 1.2차 조직사건을 겪으면서 비극 이예요

 

신소하 : 청춘을 바친 사람들 중에서 탈퇴 시에 깨끗이 하고 가면 나중에도 좋은데 정당하지가 못하더라.

 

황광우 : 조직운동이 성숙하지 못한 과정에서 진행된 서클적 운동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많은 서클들이 성숙하지 못해서 그런 아픔들이 열에 아홉은 다 가지고 있다

 

신소하 : 미국은 심했던 것 같아요.

 

황광우 : 형님의 카리스마라고 할 수 있죠.

 

신소하 : 미주에서 본국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필리핀, 쿠바, 니콸라등이었는 데 필리핀이 조직이 컸는데 미주지역개척을 위해서 했는데 모두 희석되고 성공하지 못했다. 필리핀본국에서 운동 경험을 듣겠다고 찾아왔었다. CIA, FBI등이 공작도 심하게 했다. 그래서 성공을 못하고 깨졌다고 하더라고

우리는 짧은 시간에 가장 치열할 때 형성이 되어 짧은 시간에 이뤄냈다. 그러니깐 웬만한 공작은 안 먹혔고 강력한 지도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나도 그랬지만 다른 이들도 많이 싸웠다. 국제평화대행진이후에는 탄압이 있었는데 오히려 뭉치는 계기가 되었다. 국내에서부터 운동을 했던 사람들이면 덜 했을 것 같은데 그렇게 치사하고 비열한 방법으로 조직을 파괴하고 배신하고, 그런 사람들과는 한청련, 한겨레를 떠나서 길거리에서 만나도 이해를 못한다.

형님 장례식에 1기 때 조직파괴하고 나간 사람이 찾아왔다. 조직파괴하고 나간 사람들은 만나기 싫다. 나 인사안 받았어. 어영부영하다가 탈퇴하고 나간사람들은 찾아와도 되는데 조직파괴하고 나간 사람은 못 들어오게 하라고. 실제로 L.A에서 한 사람이 왔다가 못하고 쫓겨났어.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야. 사람이 자기 정리를 깨끗이 하고 가면 그 당시에는 이해가 안 되고 싸우고 하더라고 나중에는 받아들이고 화해가 될 수 있지만은 인간적으로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야. 그건 안 되는 거야.

 

황광우 : 형이 미국에서 생활하는 규칙 있잖아요. 후배들이 영어 한 마디도 않고 어떻게 사냐고 묻는 거거든요. 가능한가?

 

신소하 : 형님이 가능했던 것은 운전을 못하시니까 집 한 바퀴 외에는 오갔다. 집을 돌때도 외국인이 '하이'하고 인사하면 인사는 하는데 웬만한 영어는 알아들었다. 국제연대위원회 때 보면 좌담회 통역을 하면 질문을 먼저 알아들어서 먼저 답하고 했는데 이해도 하는데 안 쓸 뿐이었다. 형님 옆에는 늘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그게 가능해요. 대부분의 일들은 우리들이 했어요. 슈퍼에 가서 담배도 그냥 집어오면 되니까. 한 번 영어를 썼다고 들었다. 비행기를 놓친 적이 있는데 영어를 써서 좀 늦게 다른 비행기 타고 오셨다고 들었다. 영어를 전혀 안 했어요. 국제연대위원회분들이 형님에게 말하면 웃고 한국말로 말하고 우리가 통역을 하고 그랬는데 어떻게 활동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런 사람이 국제연대위원회활동을 했다는 게 신기하지 않아요?

영어를 못해도 국제연대회의도 잘했다. 타민족인들 필리핀 지도인 들도 신기해했죠. 영어로 된 전단 같은 거 읽어보시고 잘못된 것도 잘 집어냈다. 독해는 가능하시니까 잘했어요. 하하하

 

황광우 : 침대에서 안 잔다는 것은 잠자리를 편하게 안 갖겠다. 그 말이지요.

 

신소하 : 그런 거지요. 형님 의식으로는 침대는 미국식이다는 의식이 있을거예요. 푹신푹신한 편안함과 미국식이다라는 것 때문에.

황광우 : 샤워는

 

신소하 : 목욕은 했고 샤워는 안했어

 

황광우 :70년대 당시의 조건은 그랬어요. 삶의 조건이 바뀌면 몸을 깨끗이 하는 게

 

신소하 : 굉장히 깨끗하셨다. 하루에 한번 발 닦고, 하루 세 번 양치, 세수하시 고 속옷도 이틀에 한 번씩 갈아입기. 그런 것은 했어요. 샤워도 서구문화라서 싫어하셨다. 철저하셨고 우선은 서구문화라는 인식이 있으셨고 편리한 것은 추구하지 않아요. 목욕을 하면 1시간씩 하시죠. 끝까지 구석구석. 내가 한 번씩 놀린다니까, 한 2키로는 빠질 거라고 어떻게 저렇게 자기관리를 하실까하고 자꾸 물어봤던 것도 그거에요. 우리는 작심삼일도 안 될 때가 많잖아요.

 

황광우 : 광주에 와서 오히려 힘들어하셨죠.

 

신소하 : 맘고생을 많이 고생하셨죠. 본인이 생각했던 국내의 영사관 쪽에서의 공작, 친북세력의 공작, 미주의 노인들의 친미반공의 공작 등은 차라리 순진했던 거 같은 거고 한청련 중심의 운동 같은 거는 공동체로 편안했는데 그런데 여기는 본인말로는 말 통하고 문화 통하고 다 통하는데 안통하고 안 되고 다르더라! 그것이 말 안 되는 미국에서의 활동보다 더 힘들었다고 하더라! 진짜로 맘고생 많이 했어요.

 

황광우 : 가장 힘들 때는 어떤 때일까요

 

신소하 : 5월 재단 만들 때인데 보여줬던 사람들 그래도 형님은 그때 70년 대 민청학련 사람들을 동지로 생각했는데 만드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배신감이 굉장히 심했다.

 

황광우 : 구체적인 사람의 이름 알아요? 나도 그동안 관심 안 가졌는데

 

신소하 : 알지……. 그러나 말 못하겠어요

 

황광우 : 형이 돌아오셔서 한 활동이

 

신소하 : 94년도 8월에 돌아오셔서 민족미래연구소, 정개련, 해맞이, 박정 희 기념관반대, 들불, 김남주기념사업회. 돌아가시고 나서 국민훈장 동백장 백서를 받았는데 노무현씨가 줬다. 뭣 땜에 줬는지 모르지. 민주화운동 뭐 이러고저러고 하면서 줬어. 훈장받은 사람은 영광인가 봐. 직장 구할 때도 우선순위가 되고 범죄를 저질러도 감옥도 안 간다고 그러데.

 

김연옥 : 95년 4월에 결혼하셨구요. 가족에게 의료혜택이 많을 거 같은데요.

 

황광우: 혜택이 있으면 형수님이 챙겨야죠.

 

신소하: 자식은 되는데 부인은 안 돼. 5.18로 인한 1종 의료 혜택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국립대학 등록금도 자식은 되는데 부인은 안 된다. 그 말만 나오면 열 받는 다니까. 보훈청에도 알아봤는데 법이 안 된다고 하니까

 

황광우: 가족개념에 부인이 없다는 것은 헌법 소원해야지. 뭔가 착오지 이런 게 있을 수가 없는 거지. 자식한테 주면서 부인은 안 된다는 것은...

 

신소하: 보훈청 사람들도 잘 몰라 우리나라가 혈족중심이라 그런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부인은 영순위인데 유공자였을 때의 부인이 헤어지고 다른 사람에게 갔다면 혜택을 끊어도 이해가 되잖아요. 그런데 아니잖아. 그래서 내가 열 엄청나게 받았지.

 

황광우; 형기한테 얘기해서 정식 안건으로 올리자. 윤한봉기 념사업회에서

윤한봉의 유일한 가족이 형수님뿐인데 가족에 대한 법적 헌법소원을 내야지

 

신소하 : 형선 형님이 그날 들었대! 청와대 행정 실에서 조문을 와서 자제 내에서 회의를 해서 준다고 했데. 우리가 달라는 것도 아니고 자기네들이 준다고 하는데 ‘안 받을 이유가 있것소’하더라고. 49제 지낼 때 마라도 들어가 있을 때 전대에서 연락이 왔어요. 명예졸업장을 주겠다. 나는 근본적으로는 반대한다. 형님입장도 그랬다. 전대에서 왜 자꾸 명예졸업장을 준다고 하나. 기념 사업회에서는 윤한봉 홀을 주면 받겠다. 그랬다는데

 

황광우 : 전대에 도움이 되니까 준다는 거잖아요. 실은 아무 도움도 안 되는데 대학교 동문의 한 구성원이자 자랑스러움으로 김남주 시비를 학교에서 세우는 것은 학교의 위상을 높이기 때문에 주는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한봉이 형도 같은 맥락이고, 그래서 준다고 봐야 되겠죠.

 

신소하 : 형님과 이론적으로 대립한적 있냐고 했죠. 이론적인 논쟁은 아니고 우리 한청련이 북에 대해 객관적이었는데 북은 범민련이나 이런 걸로 자기편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고 우리는 일방적으로 북의 편에 들어가면 안 된다 남쪽운동과 해외운동에 도움이 안 된다고 해서 객관적인 입장을 취했는데 인도적인 차원에서만 도와주고 있었는데 워싱턴포스트지에 광고를 냈다. 북핵문제로 각 지역의 각 나라의 타민족형제들에게 서명 받아서 광고를 냈는데 그런 와중에 북이 형님에 대해서 친북세력을 통해 형님을 비방하는 말이 들어온다. 통일 파괴세력이라고. 상근하면서 내가 임원회의 들어갔는데 열 받아서 한참 후배인데도 북에 항의 편지를 하자. 왜 남의 조직의 지도자를 한 조직의 지도자를 비방하는가에 대한 것을 항의 하자는 말을 했다. 임원들이 다들 놀라는 가운데 형님은 자리를 피하고 임원들은 편지를 쓰는 것은 반대하는 상황이었다. 왜 우리 조직 지도자가 당해야 되냐면서 나는 우겼어. 그 회의가 끝나고 합동회의(각 지역의 지도자회의)에서 이런 의견이 있다고 하여 통과가 돼서 결국 항의 편지를 보냈다. 북의 워싱턴에 있는 대사관에 보냈지. 그 말을 듣고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

 

황광우 : 폐기종으로 긴장을 하고 기 치료를 한 것으로 아는데

 

신소하 : 기 치료가 맞다 안 맞다 이거보다는 담배 끊고 짧은 시간에는 몸이 좋아졌었는데 근본적인 문제 까지는 좋아지지 않았던 거 같다. 폐의 다른 기능이 좋아져서 그랬던 거 같다, 그 기가 육체적인 치료도 있었지만 영적인 치료도 도움이었던 거 같다. 본인의 삶을 정리하고 직감력 등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었다. 뭘 하면 열심히 하는 분이신데 본인은 그걸 모범생기질이라고 하는데 뭘 하면 푹 빠지셔서 열심히 하셨어.

 

황광우: 무안에 언제 내려오셨죠?

 

신소하: 2006년도 2월 달인가 3월 달인가 그랬을 거야. 무안에서 10개월 살다가 2006년도 11월 달에 목포에 들어왔어요. 그전에 민족미래연구소를 거의 정리하시고 광주 집에 계셨었고, 그러다가

 

황광우: 2006년도에 무안에 왔었어요?

 

신소하: 그때 무안에 인터뷰하러 왔었잖아요. 그때 점심인가 저녁인가 먹고 들어가면서 내년에 형님 회갑이시니까 책 정리하는 거 이야기하고 두암동에 2001년도 8월 달에 들어가고 그 전에는 금호동 12평짜리 영세민아파트에 들어갔죠.

 

황광우: 형수님은 당분가 여기서 사시겠네. 광주에 오실 의향은....

 

신소하: 광주에 갈 의사가 없고, 형님이 이 집을 엄청 좋아하셨어요. 형님이 이집을 요양소겸 에어컨도 넣고 했지. 소유를 모두 내 소유로 했죠. 민족 미래 연구소할 때 통장하나는 있었다. 그거 밖에 없었어요.

 

황광우: 아이고 나도 마누라가 전부 가지고 있는데 한 번씩 나올 때마다 만원씩 탈 때마다 불편해요.

 

신소하: 형님은 그거 하나는 철저하셨어. 그 통장도 자기 소유로 생각을 안하셨어. 나에게도 비밀 번호를 안 알려주셨어. 처음엔 내가 회계를 내가 보다가 내가 회계장부를 잘 못하니까 형님이 하시고 나중에 보니까 형님한테 엄청나게 크게 도움 받았다는 사람이 나오더만. 민족미래연구소에 대한 자료를 모두 없애셨어. 그래서 내가 한 발 늦었다는 거지. 똥가방을 내가 한 두어 번 읽었는데 참 잘하셨다는 생각이 들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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