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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30-4.29 LA 폭동을 겪다2019-01-09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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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 LA 폭동을 겪다

 

92년 4월 29일 흑인운전사 로드니 킹을 폭행했던 백인경찰관들에게 무죄가 선고되자 분노한 일부 흑인형제들이 곳곳에 모여 그에 대한 규탄을 시작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규탄의 움직임은 LA 빈민가 전역의 폭동으로 비화되었다. LA 민족학교는 가난한 흑인 형제들과 히스패닉 형제들이 모여 사는 빈민가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불안에 떨기 시작하였다. 민족학교 부근에 사거리가 있고 그 사거리의 세 귀퉁이에 주유소가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는 민족학교와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구멍가게까지 딸린 그 주유소는 남김없이 털리고 방화 공격까지 당했으나 약탈자들이 음료수를 꺼내가는 과정에서 음료수 병들이 깨져 바닥이 젖어있었기 때문에 불이 붙지 않아 위기를 모면했다. 불이 붙으면 민족학교로 옮겨 붙을 가능성 이주 높았기 때문에 걱정했던 우리들은 주유소가 무사하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대각선상의 길 건너편 주유소는 완전히 불타고 말았다.


나는 걱정이 되어 달려온 회원들 중 여자 회원들은 모두 귀가시키고 남자 회원들과 함께 집안에 있는 모든 용기에 물을 가득 채워놓고 고무호스와 방어용 연장들을 준비하는 등 민족 학교의 약탈과 방화에 대비한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어둠 속에서 밤을 새우며 라디오와 TV를 통해 폭동의 진행 상황을 지켜보았다.

3일간이나 지속된 폭동 과정에서 다행히 민족학교는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으나 그렇지 않아도 심각한 경기 침체로 허덕이던 LA지역 동포사회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경제적 피해를 입었다. 전체 피해 업소 수의 89%와 전체 피해 액수의 90%를 차지할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 그렇게 우리 동포들이 엄청난 피해를 당한 이유는 조국의 언론들이 떠들어댔던 인종 갈등,한흑 갈등 때문이 아니고 자본이 적은 우리 동포들이 폭동의 중심부인 가난한 흑인 형제들이나 히스패닉 형제들이 모여 사는 빈민 지역에서 술이나 식료품 잡화 등을 파는 가게를 주로 많이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포상가가 밀집되어 있는 코리아타운 또한 소수의 가난한 타민족 형제들이 거주하는 곳이었고 평소에도 LA에서 가장 범죄가 많은 곳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큰 피해를 입었던 것이다. 물론 인종 갈등도 집중적인 피해 이유 중의 하나임에는 틀림없으나 그것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우리 동포들이 빈민 지역에서 업소를 운영하여 돈을 많이 벌었으면서도 그 지역사회에 이바지는 거의 하지 않고 거주도 그 지역이 아닌 살기 좋은 다른 지역에서 했으며 평소에 고객인 지역주민들과 고용한 타 민족 형제들을 멸시하고 천대하는 등 잘못을 했기 때문에 더 큰 피해를 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주된 이유가 아니었다.


4.29 LA 폭동은 가난한 흑인 형제들과 히스패닉 형제들이 일으킨 전형적인 도시빈민 폭동이었다. 당시 체포된 사람들은 50%가 흑인이고 43%가 히스패닉이었다. 백인도 4%나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체포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전과자(60%),무직(66%),저학력(60%가 고교중퇴자),남성(89%)인 빈민들이었다.

결국 미국의 심각한 빈부격차와 인종주의 때문에 신음하고 있던 도시 빈민들이 인종주의적인 재판 결과에 분노해서 시작한 시위가 흑인 사회와 히스패닉 사회의 정치의식 빈곤과 지도력 부재 때문에 항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폭동으로 변질되어 버렸던 것이다.

당시 폭동에 가담한 일부 폭력배들은 업소를 약탈한 후 업주들에게 보험 가입 여부를 물어 보험이 없다고 하면 거액을 요구했고 그에 불응하면 업주가 보는 앞에서 방화를 해버리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심지어 어떤 폭력배들은 규모가 큰 업소들에 전화를 걸어 거액을 요구하며 응하면 업소를 보호해 주고 불응하면 방화하겠다는 협박을 하기도 했다.


내가 그때 놀랐던 것은 그동안 우리와 연대해 왔던 진보적인 흑인 형제들 중에도 4.29 폭동을 폭동으로 인정하지 않고 봉기나 항쟁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었고,우리 민족학교 식구들이나 회원들 중에도 흔히 말하는 인종 갈등,한흑 갈등의 표출로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놀란 나는 서둘러 회원들의 잘못된 인식을 바로 잡아주고 회원들과 의논하여 4.29 폭동을 한-흑 갈등에서 비롯된 흑인 폭동으로 보고 일단 ‘4.29 사태’로 부르기로 했다. 그것은 연대해 온 흑인 형제들의 입장도 고려하고 흑인 형제들에게 적대감을 갖고 있는 동포들과 한심한 언론도 고려했기 때문이다.


한청련과 한겨레는 호남향우회와 함께 5.18민중항쟁 12주년 기념식을 마치고 나서 제2부에서 4.29 사태에 대한 공개토론회를 열어 동포사회가 4.29 사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갖도록 노력했다. 그리고 민족학교와 함께 폭동 피해 동포들이 보상과 장기저리 융자를 받을 수 있도록 법률상담을 하고 서류 작성을 도와주는 등의 활동을 해나갔다. 구호와 함성이 없는 침묵 속의 폭동,당당한 약탈과 방화,나는 4.29 LA 폭동을 겪으면서 미국의 일그러진 또 다른 얼굴을 보게 되었다. 5.18의 위대함과 항쟁참여자들 그 중에서도 특히 가난한 시민들의 고결한 도덕성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볼 기회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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