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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8-UN 분리가입 저지 2019-01-09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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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간의 UN본부 앞 단식농성

 

한청련,한겨레는 90년 2월 합동회의에서 10월에 조국의 평화와 자주통일을 위한 해외동포대회를 개최하고 10월 1일부터 15일 동안 UN 분리가입 저지와 평화협정체결 촉구를 위한 UN 본부 앞 단식농성을 추진하기로 의결하였다.

우리들은 그 결정에 따라 UN 분리가입 저지와 평화협정 체결 촉구를 위한 단식농성 및 시위 준비위원회 (이하 준비위원회)를 꾸렸는데 거기에는 램지 클라크(전 미법무부 장관),토마스 검블톤(주교),폴 무어 (전 뉴욕 성공회 주교),노암 촘스키, 브루스 커밍스, 코넬 웨스트 등의 교수, 잭 오델(무지개연합 국 제국장),월든 벨로(식량개발정책연구소 선임 연구원),윌리암 쿤 슬러,스탠리 포크너 등의 변호사,벤 새배스, 거스 슐츠 목사, 다무 스미스(국제연대위 공동대표),안젤라 산브라노(엘살바도르 민중연대위원회 전국대표),데이비드 이스터(KSN대표),수베일 리,레슬리 바이스터(국제연대위 임원들) 등 30여 명에 달하는 저명한 각계의 타민족 형제들과 임창영 박사,이승만,함성국, 유태영 목사 등을 포함한 13명의 동포운동가들이 참여하였고 8개의 동포 단체와 72개의 타민족형제단체들이 후원했다.


준비위원회는 89년 22일간의 단식농성 때와 마찬가지로 외교 연대 요원들과 단식 보호 요원들을 두고 활동을 시작했다. UN 본부 앞 평화공원에서 시작된 15일간의 단식농성은 89년 때보다 기간은 짧았지만 훨씬 더 많은 준비를 거친 알찬 단식 농성이었다. 단식농성은 같은 날 뉴욕에서 시작된 해외동포대회에 참가하고 준비위원회에 참여한 200여 명의 동포들과 타민 족 형제들이 함께 한 함마술트 광장에서의 집회와 시위로 시작되었다.


89년 때와는 달리 단식자도 타민족 형제 두 명과 유럽,일본, 호주,캐나다,미국 및 남부조국 동포들 을 포함 22명이나 되었. 외교 연대 요원도 국제위윈회의 레슬리 바이스터,수 베일리,그리고 한청련의 정민,정승은, 이진숙 회원 등 10명이나 되었다.

외교 연대 요원들의 활동은 미국과 소련 대표부를 방문,면담한 것 외에는 89년과 비슷했다. 언론의 보도도 89년과 비슷했으며, 세계 곳곳에서 연대사를 보내온 것 또한 미 연방하원 의원 로날드 델럼스씨가 연대사를 보내온 것을 빼고는 89년과 비슷했다. 각 지역 회원들은 89년과 마찬가지로 지역동포 신문에 단식농성 사실을 광고하고 열심희 모금활동을 전개했다.

여하튼 90년의 대 UN 투쟁은 89년의 그것보다 모든 면에서 진일보한 활기찬 투쟁이었다. 단식 종료일인 10월 15일 오후 미국인 형제 Kathleen Rumpf와 독일인 형제 Kan Hansen, 남부조국 조성우 씨, 일본의 홍우공 씨,캐나다의 안윤식 회원,유럽의 정인옥 회원, 호주의 김대건 회원,미국의 김난원,김희정,김희상,김희숙,오상묵,문유성,이종국,윤창헌,장광민,최경선,황정아 회원 등의 단식자들과 유선모,김현관 회원 등의 단식보호 요원들은 비록 눈에 보이는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헌신했다는 긍지를 안고 평화공원을 깨끗이 청소한 후 경건한 자세로 첫 사과즙을 마셨다.

나는 두 차례의 UN본부 앞 단식농성 때 허리 상태가 안 좋아 단식은 못하고 대신 낮에는 단식 현장을 지키고 밤에는 단식자들과 같이 자고 단식이 끝난 후에는 단식자들의 복식을 돌보는 등 처음부터 끝까지 단식자들 곁을 지켰다. 따라서 나는 도합 37일간을 아침부터 어두워질 때까지 단식장인 UN 본부 앞 평화공원에서 생활한 셈이었다.


그런 특별한 경험을 통해서 나는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한번은 우리들이 단식하는 동안 티베트인들과 카슈미르인들이 30여 명씩 몰려와 중국과 인도를 규탄하는 시위를 했다. 그 두 차례의 시위 때는 단 한 명의 기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테러에 항의하는 유대인 20여명이 몰려와 시위를 할 때는 미국의 중요한 언론사 기자들이 빠짐없이 나와 취재하고 10여명의 경찰들까지 몰려와 보호하느라고 한바탕 소동을 일으켰다.

유대인들의 시위가 끝나자마자 몰려왔던 기자들은 바로 곁에서 단식농성하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단 한마디도 안 묻고, 사진 한 장 안 찍은 채 돌아가 버렸다. 나는 막강한 경제력과 정치력과 각 분아의 고급 전문인력을 가진 미국 내 유대인들의 영향력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들보다 더 관심을 끌지 못한 채 고산족 특유의 우렁찬 목소리로 UN 본부를 향해 악을 쓰고 있던 외로운 티베트인들과 카슈마르인들이 우리들에게 연대사를 부탁해 왔을 때 우리들은 못해주었다. 우리가 중국으로부터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티베트인들의 편을 들었다가는 중국이 화가 나 조국의 UN 분리가입을 동의해 버릴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대신 인도로부터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잠무카슈미르인들을 편드는 것은 인도가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아니니까 별 문제가 없겠다고 생각해 연대사를 해주었다.


그때 나는 티베트인들에게 부끄럽게 생각하면서 국제 외교라는 것이 얼마나 자국중심적이고 이해타산적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한 줌도 안 되는 우리들조차 외교활동을 한답시고 원칙적 입장에서 연대를 못하고 조국의 이해를 기준으로 선별 연대를 하니 국제무대에서 벌어지는 각국 정부 간의 외교전은 얼마나 살벌한 이해 싸움이겠는가?

단식에 얽힌 잊지 못할 사연도 있다. 유달리 힘들어 하던 주부 회원 김희정씨가 단식 6일째 되던 날 탈진 상태가 되었다. 놀란 우리들은 즉시 그 회원의 단식을 중단시켰다. 그런데 단식을 끝내고 알아보니 그 회원은 임신 3개월째였다. 다음해에 김희정 씨가 아들을 낳자 나는 평화공원에서 조국의 평화를 위해 태중단식을 한 그녀에게 평화를 위해 살아가라는 뜻에서 화성(和成)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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