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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6-교육지표사건, 광주를 엎다2018-12-27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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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1978 민주교육지표사건


구술자: 그러고 인결집78년에 인제 중요한   6․27 민족교육지표사건이에요. 그때가  5월이나 됐나. 인자 슬그머니 정보가 들어오더라고요. 긍께 서울에서 성내원 교수랑 백낙청 전교수가 중심이 돼가지고 광주에 이제 전남대는 송기숙 교수가 맡고 조대는 문병란 선생이 맡고 문병란선생은 인자 그때 학원강사였지 교수가 아니었는데, 조대는 맡고 그런 식으로 해갖고 전국적으로 이제 유신헌법을 개탄하고 민족교육지표 아니 국민교육헌장 이걸 비판하는 성명서를 준비한고 있다. 얼마나 인자 흥분되는 사건이었어요. 드디어 인제 교수님들이 움직인, 교수님들 움직이믄 학생들이 가만있나. 그래가지고 인제 나는 주변에다가  일이 아주 은밀하게 진행됐기 때문에 학생들하고 접촉의 창구가 조끔이라고 있는 친구들한테 인자 이러이러한 것이 준비된다 그러면은 교수들이 발표를 하게 되면 뻔하니 연행되고, 해직 투옥될 건데 그래갖고 교수들만 피해보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된다, 이거 운동으로 운동에너지로 이걸 증폭시켜야하니까 학생들이 바로 뒤따라서 쳐줘야한다. 눈치것들 움직이라고 이렇게 이야기해주고 교수님들 만나면 슬금슬금 인자 자극 주는 그런 정보는 일제 이야기하지 않고, 지금도 송교수님은 가끔  말씀 하시는데,  발표한   앞두고 우연히 인자 저녁에 만났는데, 내가 학교 교수님 어째 하시는   돼가세요? 나는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충 알고 있기 때문에, 그랬더니, 깜짝 놀라더라고. 금방  표정을 바꾸면서 뭔일?  하는  없어. 그러고 가시더라고. 하여튼 잘하셔야 합니다 어째  이상한가 자네 우리집 가서 차나 한잔 하세 좋습니다 하고 따라갔지 안자. 집이 중흥동인가 됐을 건데 따라가서 자네  알아? 그래서 아니 내가 모르는 일도 있어요? 그래서 교수님  열명 조끔 넘겼죠? 그러니까는 깜짝 놀라더라고 그러면서 어떻게 알아 이사람아. 아이고 눈치로 아는 거죠.  어찌고 하면은 내가 맞춰볼까요?  양반이 얼굴색이  굳어지면서 서명한 교수들도 누군지를 모르고 한다는 거여. 자네가 어떻게 알어? 내가 맞춰볼가요 그래갖고는 세었어. 하나둘 누구 누구누구 여덟명째  가니까 송기숙 교수 얼굴이 완전히 굳어블드라고. 그래 갖고 인자 세사람이 틀렸어요.  어떻게 아냐고 아니 나는 간단하다고 평상시에 내가 대학 들어다니면서 교수님들 이렇게 만나뵐  뭔가가 미안해하고 괴로워하는 교수님들하고 내가 월부책장사한다고 75년에 뛰어다닐  사라고도 안했는데 사람 시켜서 학생 시켜서들 찾어 오라 해갖고 사준 교수들이 있다. 그런 교수들이 있었어요.  모르는데 블러갖고 가면   판다며? 내가 사줄게 그래갖고 사주고. 그런 교수님들을 내가  해갖고 세사람이 틀렸어요 인제  사람은 싸인은 한다는데  사람이 해외로 지금 연순가 문가나가게 돼서 뱄다,  한분 틀리고 나머지 그랑게  분이 틀렸어 하여튼.  내가 그때 틀린분이 홍승기교순가 하고 김두진. 하셨는데 내가 모르는 분들. 그분들, 깜짝 놀래. 내가 인자 직접 배왔던 사람들이 김현곤 교수는 불어, 해서 내가 알고 이석원 교수는 문화사, 뭐인자 직접 나를 가르치지는 않았지만 인제  이제 이홍길 교수라던가 이방기교수라든가 이런 분들은 내가 인자 개인적으로 알고. 어쩌고 어쩌고 해갖고  하여튼 어디가서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교수님이나 알아서  하십시오. 나는 밖에서 나름대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라고 인자 27  밤에 발표해서 미리 그런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송기숙 교수님 댁에 그날 27  밤에 발표해서 미리 그런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송기숙 교수님 댁에 그날 27일부로 연행이 됐어요. 정보부로. 교수님들이  송기숙 교수님 댁에다가 대책본부를 꾸몄어 인자 그래갖고 서울에다  전화하고, 서울서들 내려오고 그때 백낙청 교수도 내려오고 그랬어요. 그러고 인제 30일부터 학내에서 인자 기도회부터 시작해서 아니  30일이다 28일부터 시작해서 29  이제 대규모 교내 시위가 벌어지고, 30, 7 1 시가지를 벌이고 까지 발전한 거죠. 근게 인자 거기 있으면 송기숙 교수님 댁에 전화가 있어갖고 미리 이야기하는데 학내에서 29일날  시위하고 그럴  지금 어디로 이동하고 있고 지금 어디서 경찰하고 붙고 있고 실황되다시피 전화가 오고인자 그랬는데, 긍게 안기부 이놈들이 골목길에다가 아예  정보과 계장하고 직원하나하고 둘이 차에 타고 있더, 내가 들락거리고 있다가 정말 이래도 되는거야? 이게 이래도 되는거여! 왜그냐믄 다른 지역에서   사건이 여기서 터져브니까 전남대에서 자기들도 책임이 있지. 그러다가 31, 31일인가? 이제 사모님이 송기숙 선생 사모님이  싫은 눈치를 하는 거여 우리들한테. 저놈들이 인자 뻔하지 당신 남편 조용히 있으면 나올 건데 저놈들이 이용해먹는다 상식이지. 그러믄 당신 남편 진자  나와븐다 이런 애기. 그래서 사모님이 사정없이 미운표정을 지어블고  눈치를 주고 하더니 쫓겨나브렀지. 그러고 정보부에서 부장이 정보부장이 지부장이 만나고 싶다고 그래갖고 인자 황석영씨하고 내가 정보부에 갔어요, 갔더니 아니 이렇게 뒤에서 장난을    있어요? 어쩌고 저쩌고 시치미  치고 무슨 장난이요?  우리는 송기숙 선생님 인자 석방을 위해서는 노력했을 뿐이라고. 올바른 발언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어쩌고 인자 이러지 맙시다   그라고 인자 갖짠다는듯이 한방 놔블 듯이 인상을 써갖고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성질 내쌌드라고. 어쨌든 그렇게 되고 마지막날  박석삼이라고 박석률이라고 민청학련세댄데 석률이 동생인데,  박석삼가 나중에 즈그 형하고 같이 남민전에 연류돼 갖고 고생했는데,  박석삼이하고 죽은 박기순 둘이를 불러갖고, 인자 석삼이는 인제 학생들 시위준비 과정에서부터 자기 가게에 모여서 음모도 꾸미고 그런 친구 중에 하난데, 둘이 모여서 인자 그동안의 일지를 작성했어 인제. 이렇게 해서 27일부터  해갖고 학생들이 어떻게 모여서 어떻게 하고 학내에서 시위할  경찰들이 진입해갖고 거기서  치고박고  정도였으니까. 시내에서 뛰다닌 것부터 그대당시에  광주시내  높은 빌딩 옥상에 군장교들이 올라가서 고막 뭐야 충장로 등등 골목골목 누비고 뛰어다닌 것을 전부  사람들이  내려다보고 있고 그랬는데, 고런 이야기  쓰는데 마지막에 와서 형님 장갑차가 나왔다네요, 그래 그래서 확인도 안해보고 장갑차 출현 써가지고 차비 줘서 서울로 와서 문익환목사님 만나갖고 그게 인자 언론에서 보도를 안하니까. 외신에서 나왔어요,  성명서도. 성명서도 외신으로  보내가지고 광주가 이런 상황이라는 것을 빨리 알려드리라고 그래갖고 인자 보냈어요. 그랬더니 석삼이가 거기 가서 전했더니  양반이 장갑차 출현에 충격받아갖고 기자들한테 이야기 해가지고 신문사 기자들이 내려온 거예요. 근디 인자 장갑차 출현했는디 지나가블믄  수가 없지. 그래갖고  난처해갖고 있는데 벌교  농임회에서 무슨 땅문제 갖고 그동안에 무슨 집회시위했었는데,  팀들이 도지사실을 점거해갖고 난리를 꾸민거여 그시간에. 그거  현장을 대신 인자 인도해브렀어. 근게 인자 기자들 말이 글더마 도대체 이놈의 광주는 민주 교수들도 그렇고 학생들도 그렇지만 농민들까지 이게 도대체 완전히 다른나라라고 놀란거여. 서울에는 그런것이 없는데, 근게 인자 도청앞에 가니까 난리가 인자 전경들 서있고, 도청 안에서 악을 썼쌌고, 이층에서  벌교 농민들 투쟁현장을 그분들이 와서 보고 그랬는데.  석삼이는 그것땜에 수배되고 그래갖고  내려오고 서울가 있다가 즈그 형님 꼬임, 꼬드기는 바람에 남민전에 들어가지지고 날벼락맞아가지고 지금까지 서울서 살고 있는데, 기숙이는 인제 그걸 계기로 해서 7 초에 기장인가 어디 교회 청년들 모임에 거기 나가가지고  629시위 627민족교육지표사건에 대해서 폭로하고 징계 먹을 것에 대해서 미리 자퇴를 해버렸죠. 자퇴안했으면 무기정학이지. 인제 밖에서 박기숙열사 양력에는 무기정학이라고 지금도 그렇게 해요. 그때 자퇴 안했으면 무기정학이지. 인제 밖에서 박기숙열사 양력에는 무기정학이라고 지금도 그렇게 해요. 그때 자퇴 안했으면 무기정학이었으니까. 711 전후해서 있었던 전준가 전북 어디서 있었던  교회 청년회 모임에 가서 언론에서  다루니까 민족교육지표사건에 대해서  이야기 한거지. 그래가지고 인자 들어간 친구들도 일제히 옥바라지 시작하고 그런 일이 있었는데, 그것이 인자 민족교육지표사건이죠. 인제 그때 그래요 그사람들을 송기숙 교수가 얼굴이 굳어질 정도로 놀랬던  뭐냐면 어떻게 아냐 이거지, 왜그냐믄 당시에 학생들이 시위하고 성명서 발표하고 참여하는 것하고 교수님들 하는  하고는 차원이 다른 거예요. 왜이냐믄  학생들은 기득권이 아니거든, 기독권자가. 교수는 어떻게 보면  사회에서는 기득권인데, 특권계급인데 사회적인 지위, 명맘, 모든 것을 봐서나 소득으로 봐서나 정말로 좋은 자리 아니에요. 그걸 포기하고 그것도 투옥될 각오를 하고, 교수님들이 거기에 서명을 한다는 것은 보통 결단이 아니거든. 정말 보통 결단이 아니여 그거. 그전에 내가 다른 이야기이지만 전남대  본관에다가 518기념문화 기념관? 518 기념관 만들고  안에 인자 들어가서 보믄 학생운동사 나온데  최영태 소장한테 내가 아조 강하게 이야기를 했는데, 민주교육지표사건이 너무 적게 다뤄졌다.  가서 보면은 이거야 말로 큰거다.  사건이다. 전국적으로 봐도  사건이다. 전남대만 유일하게 했으니까. 그런데 너무 비중이 적드라,  번째 민주 교육지표사건이 있는 전남대학   사건을 현장인 전남대학교에서 민주교육지표사건에 대한 기념사업이 전혀없다는 것은 사진 몇장 걸어놓고 인제사  부끄러운 이야기다. 우리는 들불 열사 추모비도 세우고 그러지 않냐. 근데 느그는 뭐하냔 말이야. 그역사적인 사건이다. 근게 나름대로  신경을 써야 할거 아니냐 나중에 야길 들어보니까 전남대에서  조형물도 만들고 그러자고. 그런데 인자 교수들부터 서운한게 뭐나면 나이든 자신들이 자기가 나서갖고 자기를 기념할   없는  아니요. 누가 해줘야써. 근디 기념사업이라는  힘들어. 왜그냐믄 돈이 들어가니까. 근디 가만히 말을 못하고 체면에 가만히 있는데, 다른 하다못해 학생들 중에서 투신한 애들  시위하다가 죽은애들부터 시작해서 강경대 기념사업회가 어쩌고  박승희 기념사업회가 어쩌고  있는데,  민주교육지표사건 기념, 사업이라는 것은 아예 없는거여. 20년이 흘렀는데도. 20년이 뭐야 30년이 흘렀는데. 속상하지 근디 자기를 자기가 기념한다고   없고, 그러니 인자 내가 나서주고 싶은데, 나도 이제  김남주 기념사업회 김용근 선생 기념사업회있고 인자 들불 여기까지 하고 있는데,  거기가 신경쓸 여유도 없고 그래서 자꾸 인자 해란 말이야 나도 참여하겠다, 그래서 627민족교육지표사건이후에  시위에 참여했다가 감방에 가거나 학사징계받은 친구들 등등 관심있는 친구들 중심으로 인제 기념사업을 추진하겠다고 그저께 연락이 왔더라고. 그것도 사실은 관련자들이 나선다는  자체가 모양새가 그렇긴한데  어떻게  사람이 없으니까 힘들어요. 아조 힘들어.  조형물 만드는데 실비로 전부 무료로 해주고, 공사하고  해갖고도 6천만원 들었다고요.  518자유 공원 가봤어요?

면담자: ,가봤어요.

구술자: 그게 대한민국 명물이에요. 고거 본딴게 여그저그 나오기 시작한다고 지금.  양식을  따서. 테라코타를  붙이고, 그런데다가 인제 지금 들불  제정 인제 사단법인 들불기념사업회 만들어갖고 1 5천정도 모금을 했는데, 5천만원정도  모금을 해가지고 매년 천만 원짜리 상을  거여. 그것이 대한민국 운동권 관련 상으로는 제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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