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수언행록

 
 
 
제목45-뒷이야기2019-01-09 10: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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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이야기

 해외에 나가 있는 동안 나는 바닷가에 나갈 때마다 바다더러 “나도 네 신세처럼 되어버렸단다. 나에게도 너와 비슷한 그리움이 있단다. 굽이쳐가다 내 조국강산을 만나거든 나의 이 그리움을 전해주라.”라고 부탁하곤 했었다.
 이제 나는 아직도 그리움으로 몸부림치고 있는 바다와 달리 그리운 조국, 꿈에 그리던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조국은 내가 그리던 조국은 아니었다.
 귀국한 지 3년이 된 지금도 나는 조국생활에 적응을 못해 고통을 겪고 있다. 조국생활에 적응하기가 미국생활에 적응하기보다 훨씬 힘들었다. 적응이 힘든 까닭은 사회가 너무 악독해 졌고 사람들의 가치관,사고방식,생활방식 등이 너무 많이 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I2년 세월의 벽이 너무 높고 두꺼웠기 때문이었다.
 귀국 후 첫봄에 나는 해외에 있을 때 그렇게도 보고 싶었던 진달래를 보기 위해 시골로 찾아갔다. 그리고 묘한 실망감과 배신감을 안고 돌아왔다. 진달래마저 옛 진달래가 아니었다. 내가 그리던 진달래는 초동들의 낫에 잘려 다보록한 진달래,앉아서 꽃잎을 만지고 향기를 맡았던 진달래,소박한 시골처녀 같은 진달래였다. 그러나 내가 본 진달래는 키가 커질 대로 커져 부잣집 정원에 있는 화사한 꽃나무 같은 진달래,세련된 도시 아가씨같은 진달래로 변해 있었다.
 12년 망명생활 동안 나는 외롭고 슬프거나 괴롭고 힘들 때마 다 5월 영령들과 옛 동지들을 생각하며 이겨내곤 했는데 돌아와 보니 5월 영령들은 모든 영광과 명예를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는 일부 인사들에 의해 앞이 가려진 채 말없이 누워 계시고 옛 동지들은 진달래처럼 거의가 다 변해 있었다. 변했다는 소리 듣지 않도록,미국화 되었다는 소리 듣지 않도록,변함 없는 전라도 촌놈 ‘합수’로 살다가 돌아가자고,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운동하다가 돌아가자고 그렇게 무수히 다짐하며 살다가 돌아와 보니 나는 박물관에서 방금 나온 사람,깡통 안 찬 거지, 부시맨,골동품,상처 안 받은 사람,꿈을 먹고 사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조국의 운동,광주의 운동을 해외에 확장시킨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살다가 돌아와 보니 운동 또한 진달래처럼 변해 있었다. 물도 썩었고 고기들도 변해 있었다. 옛날의 운동 자세와 모습은 초라하고 피곤한 모습으로 군데군데 흔적처럼 남아있을 뿐이었다. 12년 세월의 벽,12년 변화의 바닥이 나를 마냥 외롭고 쓸쓸하게 만들고 분노하게 만들고 절망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아닌데…”

 귀국 후 나에게도 큰 변화가 있었다. 95년 4월에 팔순이 넘으신 어머님의 집요한 하소연에 굴복해서 결혼을 했다. 만 47세의 늙은 총각이었던 나는 한청련 회원으로 민족학교 총무로 활동하면서 나를 정성으로 뒷바라지 해주었던,그리고 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아는 34세의 신경희 씨에게 국제전화로 청혼해서 결혼한 후 내 생애에서 가장 넓고 좋은 주거공간인 12평짜리 영구 임대아파트에 살림을 꾸렸다. 연구소도 운영하고 있다. 고마운 몇몇 후배들의 도움을 받아 95년 3월 ‘민족의 위대한 미래상을 마련하고 중장기적인 진 로를 제시하며 그 진로를 개척해 나갈 인재와 세력을 양성한다는 목적을 가진 민족미래연구소를 광주에 설립해서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동안 미국도 두 번 다녀왔다. 내가 귀국한 후 한청련,한겨레는 조직 내에 분규가 일어나 일부 화원들이 탈퇴하는 진통을 겪었지만 장하게도 빠른 시간 내에 조직을 재정비,강화하여 옛날처럼 왕성한 활동을 헌신적으로 계속하고 있었고 빠른 속도로 동포사회에 뿌리를 내려가고 있었다.
 건강이 나빠졌다. 서양의술로는 못 고친다는,무서운 불치병 이라는 폐기종에 걸렸다. 대기오염이 심한 도시생활은 피해야 한다는 고약한 병이다. 악화된 건강은 나의 의욕과 열정을 많이 빼앗아 갔을 뿐 아니라 내가 귀국 후 세운 중장기 계획까지 변경시키고 말았다. 나는 이 글을 쓰고 나면 만사를 제쳐두고 숨은 명의들을 찾아다니며 본격적인 치료를 할 작정이다. 나는 건강을 다시 회복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수평선을 향해 달려갈 것이다.
 아무리 괴롭고 힘들지라도 5월 영령들과 지난 I2년의 망명생활과 헌신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한청련, 한겨레 회원들을 생각하며 이겨 나갈 것이다. 영원한 그리움의 바다와 속이야기를 나누어가며 이겨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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