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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37-민족의 수치2019-01-09 10: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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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동포사회의 문제점

 

미국 전체 인구의 0,4%도 못되는 약 90만 명으로 이루어진 재미 동포사회는 조국 동포사회와 마찬가지로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중요한 문제점 몇 가지만 지적해 보겠다.

첫째,잘못된 인종관과 그로 인한 터무니없는 인종주의이다. 미국에는 백인(74%), 흑인(12%), 히스패닉(8%)을 포함한 58개 인종집단이 모여 살고 있다. 미국인들의 평가에 따르면 우대 순위에서 우리 동포들은 일본인(19위),중국인(30위),필리핀인(39위),흑인(42위)들보다 낮은 43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92년). 그런데도 우리 동포들은 스스로가 백인들 다음의 대우와 평가를 받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다른 유색인종들을,특히 수 백 년 동안 피와 땀으로 미국을 개척하고 민권을 쟁취해 놓은 대선배인 흑인 형제들을 터무니없이 멸시하고 천대하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우리 동포들은 인종감정에 기인한 폭행이나 낙서같은 혐오범죄의 피해를 아시아계 중에서 제일 많이 당하고 있었다.(92년)

둘째,형편없이 낮은 정치 참여도와 기가 막힐 정도의 보수성이다. 재미동포들은 이민 온 소수민족들에 관해 연구하는 학자들을 곤혹스럽게 할 정도로 특출하게 학력이 높았다. 88년 통계에 의하면 -동포이민자들의 78%가 고졸 이상이고(미국평균은 66%), 남자 이민동포의 52%가 대졸 이상이며 (미국평균은 20%), 여자 이민동포의 22%가 대졸 이상이다(미국평균은 13%). 그렇게 학력이 높으면서도 우리 동포들은 유권자의 1%만이 투표에 참가할 정도로(92년) 미국 정치에 무관심했다. 그러한 우리 동포들의 정치적 무관심 때문에 미국의 정치인들 또한 우리 동포사회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 재미 동포들의 보수성에 대해서는 상상에 맡기겠다.

셋째,조급하고 무리한 경제적 성취욕이다. 우리 동포들이 타민족들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열심히 일해서 소수민족들 가운데 가장 빠른 경제적 성취를 하고 있다는 것은 미국 사회에서 모르는 사람아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렇게 지독하게 일한 덕분에 우리 동포들이 돈은 빨리 벌었는지 몰라도 그로 인한 건강악화와 자녀와의 대화 부족,부부간의 갈등 때문에 고통을 겪고 심지어 정신건강까지 망치고 있었다. 통계를 보면 재미동포들의 정신질환 발생률은 뉴욕의 경우 타 소수민족의 2.3배나 높고, LA의 경우에도 아시아계 중 가장 높았다(90년). 또 마약을 복용하는 동포들이 전체 아시아계의 60%를 차지하고(92년), 가정폭력과 가정폭력의 강도(피해정도)에 있어서도 전체 소수민족 중에서 단연 1위를 차지했으며 이혼율도 남부조국 보다 5배나 많았다(88년). 음주운전도 소수민족들 중에서 1위를 차지하고(92년) 자녀를 때려 아동학대죄로 법정에 서는 동포도 아시아계 중 1위를 차지했으며 (92년), 구속 또는 수감 중인 동포 청소년들도 아시아계 중 또 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가슴 아프게도 72%의 동포 아동들이 집 열쇠를 가지고 다니는 소위 ‘열쇠아동’이었다.

넷째,낮은 범죄 신고율과 허위진술이다. 우리 동포들은 범죄 신고도 잘 안하지만 신고를 해놓고도 가해자가 재판을 받을 때 법정증언을 안 하거나,한다 해도 보복이 두려워 신고할 때와 다르게 진술을 번복해버려 40% 정도의 재판이 기각되고 있었다(91년). 그래서 경찰관들은 코리언 관련 사건을 기피하고 교도소 내 범법자들 사이에서도 ‘코리언은 봉이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어 동포를 상대로 한 범죄는 계속 늘어만 가고 있다.

다섯째,민족교육에 대한 무관심아다. 재미 동포사회에는 제대로 된 민족교육 기관이 하나도 없었다. 동포사회 자체 모금과 남부조국 정부의 지원금으로 세운 LA 한국아카데미라는 정규 초등학교가 하나 있긴 하다. 그 학교 학생들의 90%가 동포 소년 소녀들이지만 교육내용은 1주일에 3시간씩 우리말과 태권도 등을 가르치는 것을 제외하면 다른 미국 초등학교와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우리말을 가르치는 한글학교는 미국 전역에 6백 15개가 있었으나(92년) 순수한 한글학교는 그중 10%도 안되고 나머지는 모두 교회 부설 한글학교였다. 순수한 한글학교에서도 1주일에 두세 시간 정도만 초보적인 우리말과 글을 가르치고 있을 뿐이었다.

재미 동포사회는 우리말을 못하는 2세들이 전체 2세들의 63%나 되고 타민족 형제들과 결혼하는 비율이 1세들은 8,5%인데 비해 2세들은 47,9%나 되고 3세들은 무려 84,2%나 될 정도로, 뿌리교육을 등한시해 일부 뜻있는 동포사이에 민족정체성 유지가능성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 동포들은 만약 조국동포들의 미국 이민이 중단되면 재미동포사회는 앞으로 30년을 못 넘기고 소멸해버릴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까지 하고 있었다.

상황이 그렇게 심각한데도 남부조국 정부는 민족교육을 지원해 주기는커녕 여전히 재미 동포사회에 대해 민족적 차원이 아닌 정권 안보적,남북 대결적 차원에서 접근했다. 민족학교를 비롯한 각 지역 마당집의 민족사 교육,민족문화 교육,동포 사회 봉사 및 권익옹호를 통한 민족의식 고취활동을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 방해 탄압했다.

재미동포들의 조국현실에 대한 소박한 관심과 걱정을 부담스럽게 여겨 자기 뿌리도 잘 모르는 1,5세나 2세들에게 ‘미국에 이민 간 이상 조국에 신경 쓰지 말고 미국 주류사회에 파고들어가 성공하라고 종용할 뿐이었다. 뿐만 아니라 동포사회와 소수민족들을 철저하게 외면하고 보수적인 미국인들의 편에 서 있는 모 연방하원의원을 미국 주류사회에 파고들어 성공한 재미동포의 상징이나 되는 양 추켜세우는 등 한심한 짓을 계속하고 있었다.

재미 동포사회의 문제들은 이민동포들에 의해 이식된 조국 동포사회 문제들과 재미동포들이 미국 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데서 비롯된 현지 문제들이 겹친 것이다. 다시 말해 재미동포들이 아직 주인의식을 갖지 못한 데 기인한 낮은 정치 참여도와 문화적 갈등 때문에 발생한 문제들을 제외하고는 재미 동포 사회의 거의 모든 문제점들의 뿌리는 조국에 있다는 것이다.

세계를 미국으로 압축하면 조국 동포사회가 곧 재미 동포사회가 되고 미국을 세계로 확대하면 재미 동포사회가 곧 조국 동포사회가 된다. 조국 동포들은 재미 동포사회가 조국 동포사회의 압축판이라는 인식을 갖고 스스로의 모습을 한번쯤 재미 동포사회를 거울삼아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재미동포들보다 나은가?”

그리고 조국 동포들은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비록 가난하기 때문에 조국동포들로부터 ‘똥포’라는 소리를 듣고는 있지만 재미동포들을 비롯한 해외동포들이 조국동포들 보다 훨씬 더 성실하고 검소하게 살아가고 훨씬 소박하고 진실하다는 것을!

 

끝으로 타민족형제들을 당황하게 하거나 놀라게 하는 우리 동포들의 특이한 생활문화와 습성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덧붙여 보겠다. 다양한 민족들이 뒤섞여 살고 있는 미국에서 살다보니 우리 동포들의 문화와 습성은 다른 민족들의 그것들과 확연하게 대비되어 자주 물의를 빚거나 화젯거리가 되곤 했다. 가장 확연하게 드러난 특성은 우리 동포들이 모든 면에서 유별나게 극성스럽다는 것이었다. 재미동포들은 223명당 교회 하나씩을 갖고 있어 인구비율로 본 교회숫자에서 모든 민족을 제치고 단연 1위를 차지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92년),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에서만 하고 있다는 새벽기도를 미국에 와서도 열심히 하고 가끔 산꼭대기에 올라가 처절한 통성기도를 하여 타민족 형제들을 놀라게 하곤 했다. 한번은 우리 동포들 몇 명이 동부 지역 어느 산꼭대기에 올라가 통성기도를 하고 있는데 캄캄한 밤중에 산 위에서 들려오는 괴이한 고함소리에 놀라 잠이 깬 산기슭 마을 타민족 형제들이 다투어 경찰에 신고를 했다. 신고를 받은 경찰은 조난사고로 알고 허겁지겁 개와 헬리콥터까지 동원한 구조대를 출동시키는 소동을 벌여 인근지역의 화젯거리가 되기도 했다.

휴거 소동이 일어났을 때도 지하철이나 큰 길목에서 회개하라고 악을 쓰는 사람들 중에서 유별나게 목이 쉰 채로 악을 쓰고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우리 동포들이었다. 라스베이거스 같은 곳에 가서 도박을 하다 돈이 떨어져도 일어나지 않고 악성 단기 고리대금까지 빌려 쓰며 끝까지 계속해 하룻밤사이에 패가망신하는 사람들 대부분도 언제나 우리 동포들이었다. 또한 우리 동포들은 곳곳에서 새끼 전복까지 다 잡아먹을 뿐만 아니라 탐스럽고 굵은 미국의 고사리를 꺾으려고 산야를 떼지어 다니며 보호 식물들을 짓밟아 대고 자주 길을 잃고 헤매는 사고를 일으켜 결국 지방자치단체들로 하여금 전복과 고사리 채취 규제법까지 제정하게 만들어 버렸다.

또 노인아파트에 입주한 우리 할머니,할아버지들은 이웃들을 의식하지 않은 채 청국장까지 그것도 문까지 활짝 열어놓고 사정없이 끓여 먹음으로써 타민족 노인들이 모두 다 코를 싸쥐고 이사 가게 만들어 버렸다.

 

우리 동포들이 영어를 잘 못해 일어나는 우스운 일도 많았다.

할머니,할아버지들은 주로 노인회에 나가 영어를 배웠는데 몇 년을 다녀도 실력은 항상 제자리걸음이었다. 그분들의 영어 실력은 누가 아파트 문을 두드리면 안에서 “Who 여?”하고 묻고,두드린 분은 “Me 여〜”라고 대답하는 정도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젊은 사람들도 영어 때문에 곤욕을 치르기는 마찬가지였다.

미국에 온 지 1년밖에 안된 우리회원 한사람은 F 발음을 P로 할 때마다 하도 많이 당해 신경과민이 되어 있었다. 어느 때 부터인가 F발음은 말할 것도 없고 P발음까지도 F로 하게 되었다. 하루는 그 회원이 일을 보러 갔다가 어느 텅 빈 주차장에 주차하려고 차를 세우자 경찰 두 명이 탄 경찰차가 바로 옆에 와 섰다. 순간적으로 그 회원은 그곳에 주차를 해서는 안 되는 가 싶어 그 경찰관들에게 물어본 후 주차하려고 “May I park here?”(여기에 주차해도 될까요?)라고 물었다. 그 회원은 자기도 모르게 PARK(주차하다)를 ‘FUCK’ (X하다)로 발음해버린 것이다.

황당한 질문에 경찰들은 당황했는데 그 중 한 명이 동양계가 발음을 잘못했다는 것을 얼른 눈치 채고 기지를 발휘해 “Sure, but not with me.”라고 대답한 후 배를 잡고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 회원은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어대다 그냥 돌아와 버렸던 것이다.

 

민족적 수치

 

조국에 있을 때는 별로 느껴본 적이 없었고 또 느꼈다 해도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던 민족적 차원의 수치를 나는 미국에서 살면서 뼈저리게 경험하게 되었다. 그 까닭은 여러 가지 있었으나 그 중 몇 가지만 이야기해 보겠다.

 

첫째,우리나라의 해외 진출 기업들이 자행하는 현지 노동자들에 대한 악독한 취급 문제다. 우리들과 연대운동을 해오던 필리핀과 중남미 형제운동가들이 조심스럽게 그러나 날카롭게 그 문제를 따져 왔을 때 나는 고개도 못 들고 대답도 못했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수치스러웠다.

“너희들도 미국이나 일본의 다국적 기업들에게 그렇게 당했으면서 어떻게 그런 악랄한 짓을 할 수가 있느냐? 너희 조국 (Korea) 도 제국주의 국가다.”

 

둘째,국제결혼의 후유증 문제다. 미군기지촌에서 살다가 미군들과 결혼하는 이른바 국제결혼을 통해 미국에 오는 우리들의 누이와 딸들은 90년에 3천 9백 82명,91년에 3천 1백 96명 , 92년에 3천 3백 1명으로 매년 평 균 3천명 이상이 된다. 그렇게 미국에 온 분들은 대개가 3년 안에 이혼하는데 이혼율은 84%에 이른다.

이혼한 분들은 가진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고 기술도 없고 영어도 잘 못하기 때문에 대부분이 가난에 허덕이고 가난을 이기지 못한 절반 정도는 가슴 아프게도 매춘으로 생활해 나갔다 (88년). 매춘 생활을 하는 분들의 수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미국 10개 도시의 매춘 여성 중 우리 동포 여성들의 수가 제일 많고 뉴욕시 퇴폐 안마소에서 매춘을 하는 우리 동포 여성들의 수가 뉴욕시 안마소 매춘 여성 전체의 75%에 이른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미국 언론들에 의해 확인되었다(89년). 부끄럽게도 미국 언론들은 가끔 우리 동포 여성들의 매춘에 대한 특집을 만들어 적나라하게 보도하곤 했다.

셋째,관광객들의 추태 문제다. 80년대 말부터 조국에서 미국으로 떼지어 관광오는 동포들의 추태는 정말해도 너무했다. 정말로 돈이 많았다. 떼지어서 쫓기듯 바삐 다니며 남들은 아예 무시하고 제멋대로 하고,사정없이 떠들고 기념사진은 빠짐없이 찍고 박물관에는 잘 안 들어가고 고급상가나 백화점에 들어가 경쟁이나 하듯 고가품을 싹쓸이했다. 재미동포들의 가난과 고생과 똥차의 허술한 옷차림을 비웃으며 관광을 마친 그들은 마지막 공항에서마저 사정없이 떠들다가 조국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 부끄러움을 모르는 돈 많은 관광객들은 고급상가나 백화점들로 하여금 우리말과 영어를 잘하는 판매원들을 서둘러 고용하게 만들어 놓았고 황태자 같고 중동의 토호 같은 우리 동포 관광객들을 안내해 오면 판매액이 15% 정도를 커미션으로 주겠다는 선언을 하게 만들어 놓았다. 고아수출 연속 1위,미국 내 매춘 여성 수 1위인 코리아와 돈을 쓰레기 버리듯 쓰고 가는 코리언 관광객의 극명한 대비는 의식 있는 타민족 형제들로 하여금 인식의 혼란을 느껴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 놓았다. 그들은 땀 흘려 살아가는 동포들에게 허탈감을 안겨준 채 당당하게 돌아가곤 했다. 그들은 미국 사회에 빨리빨리 신화,큰손 신화,싹쓸이 신화,안하무인 신화,저질 신화를 남겨 놓고 흐뭇한 표정으로 돌아가곤 했다.

나는 정말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이 민족적 수치를 어떻게 없앨까? 국제사회에서 코리아가 부자나라로 널리 알려져 있고 조국동포들 또한 알려진 것보다 더 부자라는 것을 과시나 하듯 세계 곳곳을 휩쓸고 다니는데 고아수출 1위,미국 내 매춘여성 1위라는 이 민족적 수치를…” 그러나 조국동포들은 그런 것들에 대해 별로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살아가는 것 같았다. 91년 봄 어느 날,강경대 열사 장례식 소식을 들어 알고 있는 타민족 형제 한 사람과 만나서 나눈 이야기 중 일부다.

 

“그 학생이 지도자인가?”

“아니다. 평범한 학생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장례식이 요란한가?”

“우리 민족은 인간의 생명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나는 그에 대해 동학의 인내천 사상까지 예로 들어가며 한참을 설명했다. 내 설명은 들은 그가 이렇게 물었다.

 

“그렇게 너희 민족이 인간의 생명을 중요시한다면 왜 고아들을 너희 나라에서 안 키우고 외국으로 입양시키는가?”

 

나는 대답 대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입양아 문제다. 우리나라가 서방 선진국들에 우리 아동들을 많이 입양시키고 있다는 것은 조국에 있을 때부터 알고는 있었으나 막상 미 국에서 살다보니 해도 너무할 정도로 입앙을 많이 시키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83년부터 92년까지 무려 10년 동안 미국 입양아 수에서 1위를 차지하였고 그러한 사실이 자주 미국의 언론을 통해 상세히 보도 되었다.

85년의 경우를 보면,우리나라에서 미국에 입양시킨 아동의 수는 두 번째로 많이 입양시킨 콜롬비아의 6백 24명과 세 번째로 많이 시킨 인도의 4백 96명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인 5천 7백 34명이었다. 그 해에 미국이 받아들인 입양아 전체의 67%나 되었다. 미국인들도 점차 입양을 줄여가기 때문에 우리나라로부터의 입양도 점차 줄고는 있지만 여전히 우리나라는 고아 수출 1위라는 부끄러운 기록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미국 가정에 입양된 아동들은 양부모를 잘못 만나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훌륭한 양부모를 만났을 경우에도 가정과 사회에서의 이질감과 소외감,가족 구성원간의 불일치,성격적 갈등,사춘기의 감정적 혼란 때문에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었다, 그들의 심리적 고통이 얼마나 심한가는 미국 전역에서 정신과 치료를 받는 환자의 4분의 1을 입양아들이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해외 입양에 얽힌 이야기가 하나 생각나 소개하겠다.

90년 여름 어느 날이었다. 자동차 정비업을 하고 있던 회원이 스위스에서 왔다는 20대 동포 청년 두 사람을 민족학교로 데리고 왔다. 우리 회원은 그 두 청년이 중고차를 끌고 정비소에 찾아왔는데 스위스에서 왔다는 말을 듣고 순간적으로 제네바에 설립하기로 한 외교연대 마당집의 후원자로 끌어들여야겠다고 생각해서 데리고 왔다는 것이었다. 두 청년은 독일어를 쓰고 우리말을 전혀 못했으며 영어는 약간만 할 줄 알았다. 독일어를 잘하는 회원의 통역을 통해 들은 그 두 청년의 사연은 기구했다.

두 청년은 찢어지게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이란성 쌍생아였는데 다섯 살 때 유럽으로 입양을 가게 되어 어느 공항에서 헤어졌다. 스위스의 어느 산골짜기 마을로 입양된 동생은 출발 전에 어머니가 주신 3남매가 함께 찍은 사진 한 장을 고이 간직한 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요리사가 되었다. 그 동생은 철이 들자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어 유럽 어느 나라인가로 입양되어 간 쌍둥이 형을 찾기 시작했다.

약 2년 동안 신문에 광고도 내고 관계기관에 부탁도 하는 등의 노력을 한 끝에 엉뚱하게도 같은 스위스의 다른 산골짜기 마을로 입양되어 목수가 되어 살고 있던 형을 만나게 되었다. 둘은 서로가 간직하고 있던 사진을 통해 형제임을 확인했다.

감격적인 상봉을 한 형제는 부모님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부모님의 주소를 알아내 조국에 영어로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는 용케 두 형제의 어머니 손에 들어갔으나 영어를 모르는 어머니는 그 편지를 서랍에 넣어둔 채 잊어버리고 있었다. 몇 달 후 미국 LA에 살고 있던 두 형제의 외삼촌이 조국을 방문했을 때 그 형제의 어머니는 잊고 있었던 영어 편지를 내 보였다. 그렇게 하여 두 형제는 외삼촌을 통해서 어머니와 소식을 주고받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막내 여동생 또한 미국 어딘가로 입양되어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두 형제는 미국의 여동생을 찾아 3남매가 함께 어머니를 찾아보기로 약속하고 부지런히 일을 해 돈도 마련하고 기초적인 영어공부도 했다. 미국 도착 후 두 형제는 동생을 찾아 미국 전역으로 돌아다닐 계획을 세우고 중고차 한 대를 산 뒤 사전 정비를 위해 정비소에 들렀다가 우리 회원을 따라 민족학교로 오게 되었던 것이다.

동생은 우리말을 한 마디도 기억하지 못했으나 형은 “떴다. 비행기”라는 말만 기억하고 있었다. 눈시울을 적시며 두 형제의 사연을 듣고 난 우리들은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다. 그때 둘 다 박사이자 교수인 부모님 밑에서 하버드대를 졸업한 완전 2세 여자 회원이 자기가 도맡아 돕겠다고 나섰다.

그 회원과 두 형제는 두 달 동안의 온갖 노력 끝에 천행으로 뉴욕에 살고 있는 여동생을 찾았다. 그 여동생도 우리말은 못 했으나 오빠들처럼 사진 한 장을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세 남매는 우리 회원들로부터 어머니께 큰절하는 법을 배운 후 꿈에도 볼 수 없었던 어머니를 찾아뵙기 위해 조국으로 떠 나갔다. 그 후 여동생을 찾는 과정에서 사랑이 싹튼 동생 쌍둥이와 우리 2세 회원은 결혼했다.

우리는 해외 입양아들을 민족적 차원에서 감싸 안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들은 55년부터 84년까지 해외에 입양시킨 우리 아이들의 수가 13만 2천 명이 넘는다는 부끄러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더 이상 우리 아이들을 다른 나라로 보내지 않고 우리들 손에서 키울 수 있도록,더 이상 우리들의 누이와 딸들이 다른 나라에서 손가락질 받으며 살지 않도록,더 이상 우리 동 포 관광객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지 않도록,더 이상 우리나라 기업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로부터 증오와 저주를 받지 않도록 뼈를 깎는 자세로 노력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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