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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7-22일간의 UN본부 앞 단식농성2019-01-09 09:5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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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간의 UN본부 앞 단식농성

 

한청련,한겨레는 88년에 뉴욕에서 개최한 8월 대회 중에 UN 앞 함마슐트 광장에서 2시간 동안 시위를 했었다. 조국의 분단고통과 군사긴장,전쟁위험을 국제사회에 널리 알리고 40년이 다 된 휴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고 미국으로부터 군사주권을 되찾으며 미군을 철수시키고 핵무기를 철거시키기 위해서는 전술적으로 UN을 상대로 싸울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최초의 대(對) UN 투쟁인 그 시위는 미국의 들러리가 된 UN이 우리 조국의 분단과 장기간의 휴전체제와 군사긴장을 유지시키는 데 어떤 죄를 졌는가를 폭로하고 규탄하는 것이었다.

89년 10월에는 UN 본부 정문 건너편 평화공원에서 22일간의 단식농성을 진행했다. 우리들의 두 번째 대 UN 투쟁이었다. 단식농성은 평화협정 체결 촉구와 UN 분리가입 저지를 위한 것이었고,동시에 노태우 정권의 악랄한 탄압과 이의 모함을 무력화시키고 회원들의 동요와 그에 따른 조직의 위축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또한 문 신부님과 임수경 씨의 구명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 동안 10만 명 서명운동과 두 곳에서 동시에 진행한 행진,그리고 행진 보고대회 겸 노태우 일당의 중상모략 폭로규탄대회 등으로 지칠 대로 지쳐 있었지만 회원들은 다시 한 번 떨쳐 일어섰다.

우리들은 연대활동을 해온 타민족 형제들과 우호적인 동포 운동가들과 함께 ‘평화협정 체결촉구 및 UN분리가입 저지 대책위원화’를 꾸리고 그 밑에 외교 연대 요원들과 단식 보호 요원들을 두었다. 후원에는 8개 동포 단체와 몇개 타민족 형제 단체가 참여하였다.

UN 총회 기간 중인 10월 3일부터 시작된 우리들의 단식농성은 UN 창립 이래 최장기간의 단식농성으로 기록되었다. 물론 천안문 사태에 항의하는 중국인 형제들의 두 달간의 천막 단식 농성이 있기는 했지만 그때는 UN총회 기간이 아닌 6, 7월이었고 장소도 UN 정문 앞이 아니라 조금 외진 곳에 있는 함마슐트 광장이었다. 또 그들은 식사만 안했을 뿐 우유나 주스 같은 음료수를 마시며 하는 단식이었기 때문에 물과 소금만으로 버티는 우리들의 단식과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우리들의 단식농성장인 평화공원은 말이 공원이지 실제로는 비좁고 유달리 바람이 많은 곳이었다. 단식농성에는 애로도 많았다. 장소 사용 기간도 한 단체에 1주일밖에 허용해 주지 않았다. 우리는 연대하는 타민족 형제 단체들의 이름으로 잇달아 신청하여 22일간을 계속해서 사용했다. 밤에는 그곳에서 잠을 못 자게 했기 때문에 단식자들은 침구를 싸들고 미국 여성의류노조 건물로 가서 잤고 다음날 아침 출근시간에 맞춰 이동해 와 농성을 시작하곤 했다. 또 주변에 화장실이 없어서 200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모 여성단체 건물의 화장실을 사용해야만 했다.

경찰들의 단속도 우리를 괴롭혔다. 농기나 걸개 그림,가로글막 등을 철책이 파손된다며 묶지 못하게 했다. 그러면 단식자용 깔판에 직접 구호를 써서 철책에 기대어 놓거나 길바닥에 펴놓거나 합판에 붙여 탑에 기대 놓는 식으로 해 나갔다. 비가 쏟아져도 천막을 못 치게 해서 비가 올 때는 탑 기단에 비스듬히 비닐을 걸쳐 눌러놓고 단식자들이 그 밑에 누워 비를 피하는 소동을 벌이곤 했다.

단식자들은 소음과 매연 차가운 바람과 따가운 햇살 속에서 때로는 비바람을 맞아가며 22일간의 노천단식을 정신력 하나로 버텨나갔다. 나를 포함한 단식 보호 요원들은 열과 성의를 다해 단식자들을 보호하고 온갖 뒤치다꺼리를 묵묵히 해나갔다.

외교연대 요원들은 UN을 상대로 한 외교활동을 처음 해보기 때문에 외교서한 작성방법도 잘 모르고 UN 사무국의 구성이나 우리가 접촉해야 할 안보리 관련 부처 각국 대표부의 위치나 방문 절차도 몰랐다. 하지만 항시 하던 대로 최선을 다하자는 다짐 아래 이곳저곳 기웃거리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보는 등 기초적인 노력부터 해 나갔다.

물과 소금으로만 버틴다는 우리들의 장기 노천단식 소문이 UN 외교가에 참신한 충격을 주어 화제가 되었다. 시간이 흐르자 외교관들이 단식 현장을 방문해 위로와 격려를 해주었고, 찾아와 이것저것 묻고 홍보물을 받아가는 UN 사무국 요원들도 점차 수가 늘어났다.

단식 5일째 되는 날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실로 의외의 인물이 나타나 우리를 도와주었다. 익명의 UN 사무국 요원이 우리에게 전화를 걸어 은밀한 곳에서 만나고 싶다고 했다. 외교연대 요원 한 사람이 그를 만났는데 그가 UN 사무국과 안전보장 이사회 관계기구 연락처 등 우리들이 필요로 하는 거의 모든 정보를 제공해주었던 것이다.

우리 외교 연대 요원들은 자체 노력과 그 사람의 도움으로 총 20개국의 대표부를 방문하여 직접 면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소속 5개국 대표부와 비상임이사국 10개국 대표부,신임 비상임 이사국 5개국 대표부, 코리아 중립국 감시위원회 소속 4개국 대표부,코리아 전쟁 참전 16개국 대표부뿐만 아니라 모든 UN 회원국 상임대표부와 상임 옵서버국 대표부,UN 사무국 관계부처,안보리 관계부처,미 의회 내 관계부처 및 주요 책임자들 49명,UN 사무총장 등에게 홍보 문건 6종과 공식 서한 7종을 발송하고 세계 각국의 500여 주요 운동단체 및 개인들에게도 같은 내용의 문건과 서한을 발송하였다.

한편 각 지역 회원들은 단식농성 사실을 지역신문 광고를 통 해 동포사회에 알리고,단식농성과 문규현 신부와 임수경 학생 석방을 촉구하는 광고를 워싱턴포스트지에 내기 위해 필요한 2만 5천불 정도의 모금을 하느라고 쉴틈이 없이 뛰어다녔다.

워싱턴 DC와 뉴욕의 회원들은 단식농성 뒷바라지를 하는 한편 외교서한 및 홍보자료를 만들어 발송하느라고 잠을 제대로 못잤다. 단식농성 사실이 국제사회와 동포사회에 널리 알려지면서 우리들은 일부 못된 동포들의 협박 전화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조국의 전민련과 세계 각지의 타민족 형제 단체들이 보내온 연대사도 많이 받았다. 또한 언론들의 관심도 꽤 많이 불러 일으켰다. 모든 동포사회 신문들,조국의 한겨레신문과 중앙일 보,뉴욕 타임스지를 비롯한 5개의 미국 신문,AP 통신과 신화사 통신을 비롯한 4개 통신사 New Yorker라는 미국 잡지 등 에서 우리들의 단식농성 사실을 기사화해 주었다.

UN 창립 기념일인 10월 24일 22일간의 단식을 끝마쳤다. 단식을 끝마친 김갑송,백태형,안동현,심인보,정기열,허준 회원과 10일 안팎의 부분 단식을 한 김미혜,장맹단, 서혁교 회원을 비롯한 10여 명의 회원들, 그리고 눈부신 활동을 한 외교 연대 요원 이성옥,홍정화,정승은,이지훈 회원,단식 보호 요원으로 활동한 신경희, 정귀상,이창재 회원,사무요원으로 활 동한 강완모,한호석 회원 등은 그날 오후에 최선을 다했다는 뿌듯한 자긍심 속에서 모여든 회원들과 후원해준 동포 및 타민 족 형제들과 함께 UN 창립 이래 최장기 단식농성의 기록을 남기고 뜻 깊은 단식 종료식을 했다.

한청련,한겨레 회원들은 단식농성을 끝내자마자 쉬지도 않고 89년의 각종 사업 활동으로 인해 진 빚을 갚기 위해 또다시 소득증대,소비절약의 구호 아래 뛰기 시작하였다. 일부 회원들은 11월 24일부터 12월 24일까지 한 달 동안 눈보라치는 뉴욕의 맨하탄 거리에서 나무 판매 사업을 했다. 그 사업으로 번 돈 1만 5천 불을 세어 보는 것으로 생후 가장 바빴던 89년 한 해를 마감했다.

 

「범민련」과의 갈등

 

90년 봄에 남부조국 통일운동권에서 8월의 범민족대회 개최 계획을 발표하면서 해외 운동권에서도 적극 참여해 달라는 요청이 왔다. 그래서 한청련,한겨레는 우리들을 모함했던 지난날의 죄를 덮어둔 채 통일운동 단체 및 개인들과 함께 북미주 범민족대회 추진본부(북미주범추본)를 만들었다.

노태우 일당의 탄압 때문에 범민족대회는 한 곳에서 열리지 못하고 서울과 평양 두 곳에서 분산 개최되었다. 북미주 범추본 참여자들은 노태우 일당이 입국 허가를 해주지 않아 서울의 범민족대회 참가를 막고 나서자 거의가 다 평양의 범민족대회로 가게 되었다.

한청련,한겨레는 89년의 무리한 사업 활동으로 인한 심한 재정난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서울의 범민족대회에는 두 명의 회원을 파견했으나 평양의 범민족대회에는 대표를 파견하지 못하고 한겨레 회원 4명만 개인 자격으로 참가하는 데 그쳤다.

나는 그때 몇 가지 징후로 보아 평양의 범민족대회에서 남북 및 해외동포를 망라한 무슨 조직체를 결성할 가능성이 높다고 예측했다. 그래서 출발을 앞둔 북미주 대표단 단장인 은호기 선생님께 개인적으로 범민족대회에서 무슨 조직을 결성하려고 하면 동의하지 말고 돌아와 함께 논의해서 결정하셔야 한다는 부탁의 말씀을 드렸다.

나는 남북 및 해외 동포를 망라한 어떤 조직체가 결성되면 남부조국의 통일운동이 어려움에 빠질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그런 부탁을 했던 것이다. 우려했던 대로 평양의 범민족대회에서는 은호기 단장님을 비롯한 소수의 재미동포들을 제외한 참가자들이 찬성하여 범민련(조국통일 범민족연합)을 결성하고야 말았다.

우리는 범민족대회가 끝나자마자 평양의 범민족대회에 참가하고 돌아온 북미주범추본의 해체를 일방적으로 선언해버린 후 독자적으로 범민련 결성 준비를 해나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범민련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북미주뿐만 아니라 해외 각지의 범민련에 참여한 통일운동 세력들로부터 집중적인 비난과 모함을 당하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그런 속에서도 다음과 같은 우리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조건과 역량이 각기 다른 남북해외가 연합을 할 경우에는 남부조국 통일운동만 집중적인 피해를 보게 된다. 민족적 차원에서 볼 때 연합체로서의 범민련 결성은 통일운동의 강화 발전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통일운동의 중심인 남부조국 통일 운동에 심대한 타격을 주어 전체 통일운동에 침체와 약화를 초래하게 된다. 통일운동의 강화 발전을 위해서는 남북,해외의 연대를 강화해 나가야 한다. 굳이 범민족적인 통일운동체를 만들려면 협의체 수준에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들은 범민련에 참여하지 않은 채 남부조국 통일 운동권의 범민련 참여 여부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 중에 남부조국에서 조성우 씨가 나와 이런 내용의 간곡한 부탁을 해 왔다.

 

“남부조국 통일운동권의 범민련 참여가 확실시되고 있다. 나는 협의체 수준의 통일운동체를 기대했다. 범민련이 협의체가 되도록 계속 노력하겠다. 남,북, 해외 3자가 모인 범민련에서 해외의 역할이 크다. 범민련 내에서 남부조국 통일운동권의 입장에 서서 활동해 주는 해외 통일운동 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한청련,한겨레가 그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 남부조국 통일운동을 생각해서라도 제발 범민련에 참여해 달라.”

 

얼마 후에 베를린에서 범민련 결성을 마무리하기 위한 남, 북,해외 3자 회담이 열렸다. 회담을 끝내고 귀국길에 오른 조성우 씨가 “이름은 연합이지만 실제로는 협의체로 운영하기로 합의하였다. 믿고 간다. 최선을 다해 달라.”라는 내용의 전화를 했다. 베를린 3자 회담에 참석한 남부조국 대표 3명은 귀국하자 즉시 구속되었다.

우리들은 많은 논의를 거쳐 ‘남부조국 통일운동을 지키기 위해서 범민련에 참여한다. 조직적 참여는 않고 회원들 일부를 개인 자격으로 참여시킨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북미주범추본에 남아 있는 단체 및 개인들과 협의하여 북미주범추본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12월 1일에 범민련 북미주본부를 결성하였다. 그러나 북미주범추본 해체를 일방적으로 선언하고 독자적으로 범민련 결성을 추진하던 사람들이 12월 8일에 똑같은 이름인 범민련 북미주본부를 결성하는 바람에 두 범민련 북미주본부를 구별하기 위하여 ‘12월 1일생 범민련 북미주본부’와 ‘12월 8일생 범민련 북미주본부’로 나누어 부르게 되는 우스꽝스러운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그렇게 출발부터 곤혹스러웠던 12월 1일생 범민련 북미주본부에 참여했던 회원들은 참여 이후 계속된 해외 범민련의 상식을 벗어난 견제와 소외, 비민주적 운영과 그에 대한 항의의 묵살,12월 8일생 범민련 북미주본부의 끊임없는 음해를 견디지 못하고, 1년 2개월 만인 92년 2월에 범민련에서 전원 탈퇴하고 말았다. 그러나 한청련,한겨레가 범민련과의 관계를 정리해 버린 더 큰 이유는 남측 범민련 준비위가 우리들에게 너무 큰 실망감과 배신감을 안겨 주었고 범민련이 철저하게 연합체로 운영되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들이 범민련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나자 해외 범민련 참여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온갖 모함을 해오기 시작하였다. 그 비방 중상의 강도는 내가 83년에 민족학교를 설립했을 때보다 훨씬 더 높았다. 반통일분자,조직 이기주의,종파분자,정세의 변화를 모르는 놈들이다,윤한봉과 한청련은 끝났다,한청련은 윤한봉의 사조직이다 등등의 온갖 비방 중상은 우리들로 하여금 통일운동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하도록 만들었다.

여하튼 범민련이 결성된 89년 8월 이후부터 소련, 중국,호주를 제외한 해외 각 지역의 운동권은 범민련 참여 여부를 둘러싸고 예외 없이 심각한 분열과 갈등에 휩싸이게 되었다. 각 지역에서 나타난 공통된 현상은 ‘민족세력이고 통일세력인 범민련 참여자들’의 ‘반민족세력이고 반통일 세력인 범민련 불참자들’에 대한 집중적인 비방 중상이었고,범민련 참여자들의 ‘회의’와 매년 8월에 개최하는 ‘행사 와 ‘성명서 발표’ 중심의 변함없는 통일운동이었다.

남부조국의 통일운동권도 우리가 우려했던 대로 범민련 참여를 빌미로 한 지속적이고 집중적인 탄압을 받고 있었다. 당시에 나는 회원들에게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머지않아 범민련에 대한 재검토와 재평가가 시작될 것이다. 통일운동의 내용에 대한 재검토도 시작될 것이다.”

 

일본지역 운동과의 갈등

 

일본지역 운동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어 미국으로 온 나는 일본지역 운동에 관한 지식과 정보를 얻기 위해 신문이나 기관지도 많이 보았고 일본지역 운동에 대해 잘 알고 계시는 선배 운동가들의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그리고 미국을 방문한 재일동포들의 이야기도 여러 차례 들어 보았다. 물론 내가 만난 제일동포들은 소속은 거류민단이었지만 총련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민단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사람들이었다. 총련 소속 재일동포들은 아예 미국 입국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만나볼 수 없었다. 재일 한국민주통일연합(한통련. 한민통의 후신) 소속 동포들 또한 한통련의 간부로 활동하다가 탈퇴한 김광남씨를 제외하고는 만나볼 기회를 갖지 못했다. 여하튼 내가 확인한 것은 역대 독재정권들이 주장했던 것과 달리 한통련이 총련의 배후 조종을 받는다는 사실을 입증할 어떤 증거도 없다는 것이었고 일본지역 운동은 한통련을 중심으로 해서 해외 어느 지역보다도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일본지역 운동을 포함한 장기적인 해외운동의 통일을 구상하게 되었고 조건이 허락하면 직접 일본을 방문할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몇 가지 이유로 한통련과의 관계가 악화되는 바람에 모든 것이 백지화되어 버렸다. 77년에 일본의 한통련이 중심이 되고 미국의 미주민련과 유럽의 일부 운동 세력 (해외한민련구주 본부)이 참여한 최초의 해외운동 연합체인 진보적인 민주민족 통일 해외 한국인 연합(해외 한민련)이 결성되었는데 80년대 초에 미주민련이 탈퇴하는 바람에 미국지역 운동과의 조직적 연 결이 끊어진 한통련은 미주민련 대신 미국의 일부 통일운동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통일운동가들 대부분 이 바로 나를 모함하고 민족학교와 재미한청련에 대한 방해공작을 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나와 한통련과의 관계가 미묘해져 버렸다. 그것이 첫 번째 이유였다.

두 번째 이유는 내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이곳저곳에서 하고 다녔는데 그 이야기가 미묘한 파장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70년대까지 해외운동의 중심은 일본지역 운동이었지만 앞으로는 미국지역 운동이 중심이 될 것이다. 84년을 분기점으로 해서 재미동포 수가 재일동포 수보다 많아졌고 5..18 이후 민족 민주운동의 과제가 민주 자주 통일 평화로 정리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미국과의 관계 문제가 운동의 중심에 놓이게 되고 그에 따라 미국지역 운동의 중요성이 한층 더 높아지게 되었다. 또 한 앞으로 국제 연대운동의 중요성이 갈수록 높아지게 될텐데 여러 가지 조건을 비교해 볼 때 국제 외교 연대운동의 중심은 미국이 될 수밖에 없다. 또한 해외운동이 활성화되고 제 역할을 다 하려면 남부조국 운동과 긴밀한 연관을 가지고 해나가야 하는데 일본지역 운동은 여러 가지 제약 때문에 미국지역 운동 보다 남부조국 운동과의 관계를 갖기가 어렵다. 그런 만큼 미국지역 운동의 중요성을 생각해서라도 사명감을 가지고 더욱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세 번째 이유는 87년 남부조국 대선 때 재미한청련과 한겨레는 이의 분열 행위를 통탄하고 비판적 지지론을 강력히 비판하는 입장이었는데 반해 한민통은 비판적 지지의 입장에 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범민련에 대한 입장 차이와 그 후유증에 따른 오해였다. 재미한청련과 한겨레가 범민련 결성에 반대하여 조직적으로는 불참하고 일부 회원들이 개인 자격으로 참여하는 것만 허용하였다가, 91년 말에는 참여했던 회원들마저 탈퇴시켜 버린 데 반해,한통련은 범민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범민련 참여 문제를 놓고 한통련이 분열하는 과정에서 범민련 참여에 반대하여 한통련 소속 단체인 재일 한국인청년동맹 (한청동)을 탈퇴한 청년들이 우연히도 재미 한청련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 같은 재일 한국청년연합(재일한 청련)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청년운동체를 만들자 한민통 측과 범민련 측이 나와 재미한청련이 재일한청련 결성을 뒤에서 조종한 것으로 오해하고 심한 비방 중상을 해왔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이유들로 인해 일본지역 운동을 포함한 해외운동 통일 구상은 백지화되었고,88년에 여행증명서를 발급받아 일본 여행이 가능해졌음에도 나는 일본 방문을 포기했던 것이다. (재미한청련과 한겨레는 일본의 오사카에 있는 민족교육 문화센터 하고만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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