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수언행록

 
 
 
제목5-함평 농민 싸움2019-01-01 10:57
작성자

4. 함평 농민 싸움

 

붉은 황토로 뒤덮인 함평군은 고구마를 재배하기에 좋은 땅이었다. 함평농협은 농민들에게 수확량을 전량 수매하겠다며 고구마 재배를 권장했다. 그런데 이를 믿고 1,000여 가구가 고구마를 심었는데 농협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이다. 마을 앞 도로마다 고구마를 쌓아 놓았으나 끝내 수매를 하지 않아 다 썩어버렸다. 이에 보상을 요구하는 농민들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1976년부터 시작해 3년째 싸움이 계속되는 사이, 대다수 농민들이 떨어져 나갔다. 1978년 들어서는 100여 가구만 남게 되었다. 카농은 4월 중순 광주 북동성당에서 대회를 열었다. 전국에서 회원 800여 명이 모여 ‘함평고구마 피해보상’을 요구했다. 마침 모내기철이었다. 대회를 마친 농민들은 모를 심으러 집에 가고, 70여 명이 성당에 남아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전국회의를 개최했어요. 나도 참모로 따라 간 거요. 내가 거기서 발언권을 얻어서 한마디 했어. 그때 내가 호소력이 있었나봐. ‘이것은 함평 농협과 카농농민회 간의 대립이다. 이 농협의 배후에는 정부가 있다. 천주교의 동조를 확보하지 못하면 처음부터 밀리는 싸움이 된다. 투쟁의 중심은 광주전남이 되어야한다. 모든 일은 사활을 걸고, 모든 것을 책임지고 바쳐야 한다. 이 세 가지가 맞아 떨어지면 필승을 합니다.

 

함평 고구마 까움의 불을 지른 이는 이강이었다. 이강은 김남주와 함께 1973년 지하신문 《함성》지와 《고발》지를 발간해 박정희 유신체제에 대항해 싸운 열혈 투사였다. 언제나 역사에 헌신하고 봉사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한 이, 옳은 일이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벼든 이, 사람들은 그를 앞뒤 없는 전차라 불렀다. 열혈남아 이강이었다.

1978년은 유신정권에 대한 저항운동이 극도로 침체된 상황이었다. 그 상황에서 농민들이 단식농성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경찰의 방해와 성당 측의 불허로 일을 급하게 서두르다보니 준비가 안 된 상태로 단식농성을 시작하게 되었다. 사태를 계속 점검하던 윤한봉은 무엇보다도 아무런 준비도 없이 농민들이 굶는다는 데 경악했다. 그는 말한다.


함평 고구마 사건이지만 전국에서 간부들이 오고 그랬는데. 그래 단식농성이 딱 들어가 버리니까 농민들이 갑자기 예비단식 과정도 없이 시작해요. 침구도 없지. 세면도구도 없지. 소금도 아무것도 없는 거여.

 

윤한봉은 달랐다. 윤한봉은 이 많은 사람들이 4월 꽃샘추위에 어떻게 잠을 잘 것이며, 농민들이 예비단식도 없이 갑자기 밥을 끊어 버리면 이를 어쩌나 걱정한다. 걱정만 한 게 아니라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신없이 뛰어 다녔다.

그 시절 70명분의 침구를 모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솜이불만 쓰던 시절이라 부피도 엄청났다. 광주를 대표하는 저항 시인 문병란의 집에서 이불과 수건, 치약과 칫솔과 같은 생필품을 모았다. 경찰이 모르는 뒷골목 담을 넘어 성당 안으로 공급했다.

단식자들의 건강도 문제였다. 지도부는 무기한 단식이라면 굶어죽을 때까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윤한봉도 그런 성격이었다. 그러나 겨우 고구마수매 건에 목숨까지 바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이도 있었다. 농민 조계선이다. 윤한봉은 그의 의견에 따랐다. 몰래 먹을 수 있도록 미수가루도 공급했다.

 

침식 뒷바라지가 전부가 아니었다. 농성이란 널리 알려지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광주전남 운동권을 총동원해 매일 북동성당 앞에서 항의 집회를 벌였다. 단식 4일째에는 YWCA에 1,000여 명이 모여 ‘군부독재 타도’의 구호를 외치고 북동성당까지 행진을 했다. 일 년에 한두 번 시도되던 교내시위도 10분 만에 강제 해산되던 시절이었다. 경찰의 봉쇄를 따돌리며 ‘유신체제 물러가라’ 외치면서 북동성당까지 행진한 사례는 참여자들 모두에게 통쾌한 사건으로 기억되었다.


한봉 씨가 타고나기를 대중운동가야. 처음 농민들은 한봉 씨를 편하게 생각 안 했어요. 매일 누가 어디로 갔고 누구는 뭣을 했고, 담뱃종이 하나 분량에 저녁 일정까지 보내 왔어. 그거 보면 꼭 그대로 해, 오늘은 100명이 모여서 뭐 한다, 내일은 200명, 모레는 500명, 굶는 숫자는 그대로 있지만, 밖에서는 1000명 단위로 늘어가. 북동성당을 쳐들어와서 데모소리가 들릴 정도로 투쟁을 하는 거야.


농민들은 처음엔 윤한봉을 불편하게 생각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질리게 만들어 버리는, 지나치도록 치밀한 꼼꼼함 때문이었다. 그는 매일 담배종이만한 종이에 깨알같이 하루의 계획을 적어 성당 안으로 들여보냈다. 쪽지는 황연자를 통해 전달되었다. 뛰어난 미인이던 그녀는 성당의 유치원 교사로 위장해 아이들 손을 잡고 들어오면서 안과 밖 양쪽을 연결했다.

단식 농성하던 사람들이 놀랐다. 윤한봉이 보낸 쪽지에 나온 계획이 그대로 집행되었다. 오늘은 어디서 몇 명이 와서 성당 입구에 모여 항의 집회를 한다, 내일은 몇 명이 온다. 모든 게 정확히 실현되었다. 며칠 뒤 수백 명이 성당 앞에 몰려와 항의했다. 기운이 빠져 누워 있는 농성자의 귀에 함성이 들려왔다.

 

사건이 일파만파로 번졌다. 안달이 난 쪽은 정부였다. 선동가 서경원의 호된 질책에 농협전남지부장은 변명하기에 바빴다. 결국 농협이 잘못했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정부는 농민의 손을 들어주었다. 보상금 300만 원은 다음날 즉시 지급되었다.

농성이 끝난 뒤에도 윤한봉의 일은 남았다. 그 많은 침구류를 주인들에게 일일이 돌려주었고, 성당을 청소하고 기물을 정리해주느라 고생했다. 덕분에 농민들에게 윤한봉의 신뢰는 높아졌다. 조계선은 회고한다.


단식 끝나고 황연자하고 무등산 올라가서 닭죽이나 먹자고 글더라고. 내 기억에는 한봉이 형이 무지하게 원칙적이고 강한 사람인데 정이 그렇게 많아요. 놈 안쓰러운 거 못 보고 나 농민회 열심히 하라고 광주 올라오면 한봉이 형이 밥 사주고 차비를 줬지.

 

댓글
자동등록방지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입력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