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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3-세 차례 결의2019-01-01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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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세 차례 결의

그냥 전남농대 축산과 들어갔어. 인제 자취생활 하다가 2학년 때부터 전대 뒤에 지금은 아파트가 서버렸던데 바로 문리대 뒤에 거기서 하숙생활을 했죠. 이제 난 대표적인 모범생이 됐지. 군에 있으면서, 부모님 속 썩힌 거, 고등학교 때 공부안하고 맨 땡땡이 치고, 그런 거 반성도 많이 했고. 내 인생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을 했고. 지난날 그렇게 부실하게 살았던 것부터 반성하고 알차게 정말 성실하게 살아야겠다 맘 먹었지. 공부 열심히 했지. 그러니까 인자 농대에서 교수들이 나에 대한 기대가 커 가지고 유학 갔다 와서 강단에 서라고 교수되라고. 부모님이 원하는 대학을 가지 못해 윤한봉도 꽤 마음고생을 했을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들에게 효도는 삶의 제1 준칙이었다. 뒤늦게 전남대 농대에 진학한 윤한봉, 눈에 불을 켜고 공부에 몰입한다. 어렸을 때의 향학열이 뒤늦게 피어오른 것이다.


빨간색과 파란색과 검정색 볼펜으로 최소 세 번 이상 윤한봉은 전문서적을 밑줄 그어 가며 꼼꼼히 탐독했다. 하숙집에서 후배들이 윤한봉에게 접근해 시국 이야기라도 할라치면, ‘씨잘데기없는 소리 그만하고 들어가 공부나 하라’고 권유하던, 지극히 모범적인 복학생이었다. 그때 과장이 직접 옷 벗겨 놓고 의자로 때리고 각목으로 때리고 가죽혁대로 때리고 직접 심문했어요. 유명한 창고가 있었어요. 그 창고가 있는 건물로 데리고 가더니 수건 씌우고 진짜 물고문 하는 거예요. 철사로 묶어놓고 두 손만 움직이게 해놓고 할 말 있으면 불어라. 물을 부으니 이제 숨이 막 넘어가죠. 안 불면 또 두드려 맞고 물 붓고. 그때 내가 새벽에 벌거벗은 몸으로 아직 차도 안다니는 도청 앞 분수대를 건너가는데, 아. 그 처참함, 뭐랄까. 지금도 그 새벽 풍경이……

고문이 가장 비참한 게 뭐냐면 아무 의미가 없는 폭력 앞에서 굴복하는 자기 자신의 무력감이에요. 나는 고문이 무서워요. 감옥은 하나도 안 무서워요. 인간 육체에 다가오는 그 고통, 끝없는 고통, 나중엔 살짝만 맞아도 온몸이 징처럼 울려요.


민청학련에 연루되어 끌려가 고문을 당한 이학영의 구술이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갈 때엔 어떤 사연이 있기 마련이다. 시위를 선도하고, 경찰서에 끌려가 매를 맞고, 수사기관원들의 혹독한 고문에 시달리고, 교도소에 투옥되는 것이 운동권 학생이 가게 되어 있는 명확한 미래였다. 젊은이가 그런 고난의 길을 마다하지 경우, 거기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십중팔구 운동권 학생에게는 영향을 준 선배가 있다. 선배로부터 물들임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윤한봉에게는 물들임의 영향을 준 선배가 없다. 이게 이상하다. 뿐만이 아니다. 운동에 뛰어들기까지 몇 권의 책을 탐독한다. 1960년대 광주일고의 광랑이나 피닉스와 같은 독서 서클에선 밀스(Mills)의 《들어라 양키들아》를 읽었다. 카스트로의 혁명운동을 예찬하는 붉은 책 말이다. 광주일고의 일부 학생들은 고교시절에 이미 카(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었다. 대학원생들도 해독하기 어려운 수준 높은 역사철학서인데 말이다. 독일의 사회민주주의자 브라이덴시타인이 집필한 《학생과 사회정의》도 널리 애독된 서적이었다. 윤한봉은 민청학련의 호남 총책을 맡기까지 이 기본서적들도 읽지 않은 것 같다.


 민청학련의 전국조직을 주도한 서울대의 나병식과 황인성이 전남대의 김정길에게 윤한봉을 만나게 해달라 요구했다. 김정길은 책임을 맡을 의향이 있는지 윤한봉에게 의사를 타진했다. ‘형님 어째 공부만 모범생으로 하실라요?’ 답은 간단했다.
‘아니여 인자 나도 싸울 거여.’
하지만 아무리 신념이 확고하더라도, 제일 걸리는 게 부모님이다. 부모님을 떠올리면 감옥행을 쉽게 선택하지 못한다. 그런데 윤한봉에겐 이런 망설임이 없다. 이상하지 않은가?
윤한봉이 김정길의 제안을 물마시듯 쉽게 받아들인 데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었다. 윤한봉은 예감의 청년이었다. 그는 어떤 책을 읽고 그에 따라 실천을 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누구의 연설에 감복되어 그에 따라 실천을 하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다. 자신의 생각에 매우 솔직했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신의 예감대로 행동했다.
내가 윤한봉의 이름을 처음 들었던 것은 1975년 2월 어느 날이었다. 그때 나는 지산동 법원 옆 어느 재래식 주택에서 살았다. 광주일고 재학 중이었다. 나의 어머님은 아주 충실한 기독교도였는데, 새벽이면 일어나 2층 장광에 올라가 기도를 올리고, 부엌에서 찬송가를 부르면서 하루를 시작하셨다. 그날, 부엌에서 밥을 짓던 어머님의 한 맺힌 소리, 울부짖는 소리가 내 귓가에 또렷이 들렸다. 아침 해가 뜨기 직전, 겨울의 이불 속에서 일어나기 싫어 뒤척이고 있던 때였다.
“오따, 오따, 어째야 쓰까. 한봉이 아부지가 돌아가부렀네.”
어머니는 윤한봉의 이름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당시는 동아일보 광고 탄압 사태로 시국이 뒤숭숭한 시기였다. 1975년 2월 15일 대통령 특사로 민청학련 관련자들이 감옥에서 풀려나고, 윤한봉 선배는 출옥해 돌아가신 아버님의 영전에 섰다. 이게 일간지에 보도되었고, 아마도 어머님은 그렇게 윤 선배 부친의 부고 소식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날 아침, 어머님의 울부짖음이 환청이 아니었길 바라는 마음에서 난 2010년 어느 날, 전남대 도서관이 있는 백도 건물의 지하실에서 1975년도의 신문기사를 뒤적였다. 어렵게 찾았다. 그날의 기사가 있었다.


“꽃 피는 올 봄엔 내 아들 풀려나 나의 무덤에 술잔을 올렸으면”


 --구속 아들 석방 기다리다 숨진 어느 아버지의 유언

민청학련 사건에 관련, 징역 15년의 형이 확정돼 대전 교도소에 수감 중인 전남대 축산과4년 윤한봉 군(27)의 가족들은 음력설인 11일 아침 아버지의 제사상을 차려놓고 슬픔을 참지 못해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아들의 구속으로 끝내는 홧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 엿새 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 윤옥현(59)의 제사가 겹쳤기 때문이다. 윤 씨는 구속된 아들이 보낸 세 번째 편지가 집에 도착하기 2시간 전인, 지난 6일 오후 4시 “꽃 피는 올봄엔 내 아들 풀려나 나의 무덤에 술잔을 올렸으면...” 하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윤한봉의 이름을 호명하셨던 어머님의 무의식 저 깊이엔, 북평면 좌일장터에 허옇게 누워있었다는 한말 의병들의 얼굴이 떠올랐을런지 모른다. 어머니는 해남 북평면 출신이고, 한봉 형은 강진 칠량면 출신이어서, 지척이면 닿는 바닷가 사람들이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부르던 이곳 남도 민중들의 한이 그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첫 번째 결의 그래서 인자 궁시렁궁시렁하면서 나가보니까 유신 쿠테타가 난 거예요. 그래갖고 휴교령부터 시작해서 의회 또 폐쇄해 버리고, 헌법폐지하고 난리가 났지 이제. 와, 그때 내가 뒤집어졌지. 방에 들어와 가지고 보던 책에 볼펜으로 찍어불고 사전 찍어불고 벽에다 박치기하고 어떻게 화가 나는지 뭐야 나는 너무 무시당한거지 이제 국민의 한 사람으로써 국민들 알기를 이 새끼들이 벌레로 알고 있구나 하니까. 어린애 취급하고, 바보취급하고 분노 때문에 아 내가 공부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제 오늘부터 나는 싸운다.

 최초의 결의는 유신헌법이 통과되었다는 소식이 라디오 방송에서 흘러나온 그날 저녁이었다. 북괴의 남침야욕 운운, 총력안보 운운, 한국적 민주주의 운운, 국회 해산 운운…… 전남대 의대 부근 금동의 어느 골목집에서 여동생 윤경자와 함께 자취를 하던 시절이었다. 옆방에는 일단의 대학생들이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저녁밥을 먹고 삼삼오오 모여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1968년 삼선개헌을 하고, 1970년 대통령 선거에서 부정 선거를 동원해 김대중을 힘들게 누른 박정희. 이제 거추장스런 선거도 없애고, 국회도 없애겠단다. 독재의 노골적 선포인 유신헌법 앞에서 그대 양심이 있는 자, 무엇을 할 것인가? 이제 어디에 있어야 할 것인가? 윤한봉은 공부하던 전공서적을 찢어버리고, 보던 영어사전을 볼펜으로 찍어버렸다. 분노한 청년 윤한봉은 선언한다. “오늘부터 공부는 끝이다. 국민을 버러지 취급하는 저 독재자, 나는 싸운다.” 다른 학생들은 투쟁의 결의를 부모님께 감춘다. 반대할 것이 뻔한데 알려드려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순진한 청년 윤한봉은 또 이상한 짓을 한다. 맨 먼저 아버님께 자신의 결의를 밝힌다.

아버님한테 가서 아버님 제가 아무래도 이 정치판 돌아간 것이 눈뜨고 못 보겠어서 학교 제적당하고 감옥에 갈 각오를 하고 싸우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보고 드리러 왔습니다. 아버님이 이러고 앉아서 듣고 계시다가, “그래 해라. 그런데 앞장만 좀 서지 마라. 앞장서지 말라는 말은 아버님으로서 하는 이야기여. 하라는 말은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한 말이고.”

‘아버님, 나는 이제 독재정권과 싸우렵니다’며 먼저 보고하는 아들도 아들이지만 ‘그래 해라’고 허락한 아버지 윤옥현도 대단하다. 공부 그만하고, 투쟁에 나서겠다는 아들의 결의를 말리지 않는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를 믿는 참으로 아름다운 사이였다. 이후 아들은 투옥되고, 아버지는 아들의 투옥에 절망해, 그 길로 세상을 하직한다.

아버님이 굉장히 건강하셨어요. 형이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 중일 때 아버님이 잠옷 바람에 광주도경 정보과로 연행을 당하셔서 취조를 당하셨지요. 아침에 윤한봉이를 잡았다는 보고를 받은 도경 정보과장이 사형시킬 수 있도록 조서를 만들어라 지시하는 것을 들으시고 그 길로 내려오셔서 드러누우셨어요.


두 번째 결의 최초의 깨달음은 옥중에서 왔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윤한봉은 1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중생활을 했다. 창비에서 출간한 다산의 《시문선》이 윤한봉의 손에 들어왔다. 다산이 강진에 유배 온 것이 1801년이고, 합수가 칠량의 초등학교를 졸업한 시기가 1960년이므로 둘 사이엔 160년이라고 하는 적지 않은 세월이 떨어져 있다. 하지만 강진의 다산초당이 자리한 율동 마을은 윤한봉의 칠량 마을 건너편 동네였다. 

강진 칠량 앞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구강포의 정자를 다산이 좋아했는데, 이 사실을 안 유홍준은 구강포에서 내려다 본 칠량 앞 바다의 풍경을 사진에 담아 청중들에게 슬라이드로 보여주곤 했다. 1988년 즈음이었다. 미국의 한청련 회원들에게 유홍준은 습관처럼 또 구강포 앞 바다 풍경을 상영했다. 그 바다를 보고 윤한봉은 훌쩍훌쩍 울었다. 유홍준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구강포의 그 바다가 윤한봉이 어렸을 적 대화를 나누었던 그 바다였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바다를 무척 좋아했다. 그래서 기회만 있으면 몇 시 간씩 바닷가에 홀로 앉아 있곤 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나는 서로 속이야기를 털어놓을 정도로 바다와 친해졌다. 18세가 되던 여름 어느 맑은 날 바닷가 바위 위에 앉아 전부터 궁금하게 여겼던 몇 가지 것에 대해 물었더니 바다는 눈을 지그시 감고 중간 중간에 긴 한숨을 토해가면서 대답해주었다. 나도 눈을 지그시 감고 바다의 이야기를 들었다. “짐작한 대로 원래 나는 하늘과 하나였단다. 그런데 갑자기 사고가 발생해 본의 아니게 나는 하늘과 갈라져 지구로 내려오게 되었단다. 지구로 온 그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하늘과 하나가 되지 못하고 만나지도 못한 채 그리움 속에서 하늘만 바라보며 살아왔단다. 오늘처럼 살포시 미소 짓는 하늘, 평온한 하늘을 볼 수 있는 날은 나도 한없이 즐겁고 평화롭단다. 그러나 며칠 전처럼 먹구름에 가려버리거나 세찬 바람이 몰아쳐서 하늘을 볼 수 없게 만들면 나는 화를 내고 거칠어진단다. 나는 그리운 하늘을 바라만 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하늘과 맞닿아 있는 수평선을 향해 억겁의 세월 쉬지 않고 굽이쳐 달려가고 또 달려왔단다. ‘어서 가자! 저기 가면 만나볼 수 있다! 힘을 내자! 저곳에 가면 옷자락이라도 만져볼 수 있다. 넘실넘실 너울너울, 그렇게 가도 가도 가까워지지 않는 수평선을 향해 굽이쳐 가다보면 낮은 들판 높은 절벽 얼음산들이 내 앞을 가로막곤 한단다. 그럴지라도 하늘을 만나기 위해서는 수평선을 향해 계속 가야하기 때문에 나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때로는 지친 채로 때로는 화가 난 채로 이렇게 밀고 부딪치는 몸부림을 계속 해오고 있단다. 그리고……”

역사는 새끼줄처럼 꼬여서 이어지는 것인가? 다산도 가고, 조선 왕조도 갔지만, 다산의 숨결은 새끼줄처럼 꼬여 강진의 한 청년에게 이어졌으니, 그 새끼줄은 바로 다산의 《시문선》이었다.

 

애절양(哀絶陽, 슬프도다, 양물을 자르다니)

갈밭마을 젊은 아낙 울음소리 서러워라 
현문 향해 울부짖다 하늘에다 호소하네
군대 간 지아비 돌아오지 못하는 일은 있어도
자고로 사내가 제 양물 잘랐단 소린 못들었네
시아버지 상은 이미 지났고 갓난애는 배냇물도 안 말랐는데
이 집 삼대 이름이 군적에 모두 올랐네
억울함 하소연 하려해도 관청 문지기는 호랑이 같고,
이정(관원)은 으르렁대며 소마저 끌고 가네.
남편이 칼 갈아 방에 드니 흘린 피 흥건하고
스스로 한탄하길 애 낳은 게 죄로구나!

 

윤한봉은 다산의 ‘애절양’을 읽었다. 탐관오리들의 늑탈에 신음하는 백성의 원성을 들었다. 윤한봉은 다산의 시에 묘사된 백성들의 궁핍을 보면서 자신의 나태한 생각을 반성한다. 그 깨우침은 죽비처럼 매서웠다. 근데 인자 다산이 강진에서 유배생활 하면서 강진만 유역에 민중들의 처참한 삶을 시로 읊은 것들이 여러 편 나와요. 그 시들을 읽다가 너무 충격을 받아븐거야. 이 민중들 고달픈 삶에 대해서. 그 처참한 민중들의 그 가렴주구에 시달리는 민중들의 삶을 그 비참한 삶의 모습을 그려놓은 시들을 보고는 눈물이 쏟아져 블더라고. 그것이 오늘의 민중들의 삶으로 나한테는 받아들여진 거여. 나 이런 거 모르고 살았구나. 내가 말로 민중 어쩌고 떠들면서 내가 배고파보지 않아서 몰랐구나. 


윤한봉은 어려서부터 꿈이 있었다. 칠량의 들과 밭을 매입해 자신만의 전원을 꾸린다는 것이다. 호수엔 나무로 이은 뗏목을 띄우고, 뗏목에서 꽃도 키우고 채소도 키우고, 보름달이 뜨면 달을 노래하며 산다는 꿈이었다. 물론 해조음의 벗들과 함께 이 전원 생활을 누리는 것이었다. 고관대작 정약용은 유배에 와서도 백성들의 고통을 염려했는데, 나는 대체 어떤 놈이냐? 윤한봉은 결의한다. ‘민중과 함께 살자.’


세 번째 결의 1975년 2월 16일 출소했어요. 그런데 잘 알겠지만 4월 달에 들어와 가지고, 9일 날이었어요. 4월 9일날 인혁당 관련 여덟 분이 사형당하셨어. 여덟 분이 그냥 사형당해부렀어. 그때 내가 전남대 도서관 앞에 있었는데, 얼마나 화가 나는지 거기서 내가 일어나갖고 또한번 맹세를 했어요. “내 한 목숨 다 바쳐 이놈의 독재정권, 학살정권하고 맞서 싸운다.” 악을 썼지요.

세 번째 결의도 느닷없이 왔다. 사형 선고는 선고만 하고 집행을 차일피일 유예하는 것이 사형의 관례이다. 그런데 사형선고 하루 만에 사형을 집행해버린 사법사상 최악의 야만이 이곳 한국에서 벌어졌다. 박정희가 시킨 짓이다. 박정희는 자신의 체제에 반대한 대학생들 108명을 감옥에 쳐 집어넣고 그것도 모자라, 여정남을 위시한 30대의 청년 여덟 명을 처형했다. 1975년 4월 9일의 일이었다.
하늘이 울고 땅도 울던 날이었다. 서울대 학생 김상진은 자신의 배를 칼로 갈라 불의의 독재에 항거했다.
그때 윤한봉은 비록 학교에서 제적을 당했지만 매일같이 학교에 나가 후배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전남대엔 흰 건물의 도서관이 있는데, 이 건물을 줄여 백도(白圖)라 한다. 소식을 들은 윤한봉은 백도 계단 앞에서 선언한다. “이 한 목숨 역사의 제단에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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