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수언행록

 
 
 
제목2-말에 대한 책임2019-01-01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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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한국 민주운동의 지도자, 윤한봉


1. 말에 대한 책임


80년 당시 우리는 굉장히 걱정했죠. 합수가 잡혔을까? 안 잡혔을까? 우리는 합수가 제발 안 잡혔으면 했어요. 합수는 잡히면 무조건 수괴에요. 윤한봉은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의 수괴가 되었을 것이다. 만일 체포되었다면 말이다. 왜냐하면 5월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나기까지 당시 광주 지역 민주운동 진영의 리더는 윤한봉이었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1987년 6월 항쟁을 경유하면서부터야, 겨우 운동가들의 존재 의의를 인정해주기 시작했다. ‘그래도 당신들 덕택에 민주화가 되었구먼……’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전에는 대부분의 국민들이 민주화 운동가들을 불순분자, 혹은 용공세력으로 보았다. 잘 보아주어야 위장취업자였다. 언론이 그렇게 만들었다. 매일 티비에 보도되는 장면은 화염병을 투척하는 대학생이나, 붉은 띠를 두른 노동자가 전부였다. 국민들은 이들 과격 투사들을 무서운 존재로 볼 수밖에 없었다. 윤한봉은 그 무서운 투사들의 괴수였다.

 

정녕 윤한봉은 어떤 사람이었던가? 그의 소년 시절을 들여다보면 부모님께 공손하고, 형님들과 우애가 깊고, 동생들에겐 자상한 모범생 소년이었다. 학교에서는 공부를 잘해 6년 내내 반장을 도맡았고, 동무들과 놀 땐 골목대장 역할을 했으며, 졸업할 때엔 도지사상을 받은 모범생이었다. 어린 시절 윤한봉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형 윤광장의 회고를 들어보자.

한봉이가 국민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전교 1등을 독차지 하고 반장까지 하는걸 보고 2학년 때부터는 ‘위인전’부터 읽게끔 했다. 한봉이가 책 읽는 것을 너무 좋아해서 나는 엄청난 보람을 느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중·고생들이 읽는 책까지 웬만한 책들은 거의 다 읽어 버렸으니 놀라운 일이었다. 한봉이는 국민학교 6년 동안 전교 1등을 놓친 적이 없었고 반장도 6년 동안 계속했다.

그런 그가 광주일고에 입학한 것은 당연한 코스였다. 그 시절 전라남도의 모든 학생들이 합격하길 희망했던 고등학교가 광주제일고등학교였다. 광주일고를 합격했으니, 그다음 서울의 유수대학에 진학하는 것은 당연히 예정된 코스였다. 부모님이 윤한봉에게 걸었던 기대는 대단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윤한봉에게는 광주일고의 흔적이 없다. 고교 시절은 사춘기 특유의 정신적 특질로 인해, 회의도 하고, 방황도 하고, 현실의 불의 앞에서 비분강개를 뿜기도 한다. 고교 시절엔 사춘기의 특질을 공유하는 두 세 명의 벗이 있기 마련인데, 윤한봉에게는 그런 벗이 없다.


광주일고에는 고교생들에게 인상 깊은 가르침을 준 훌륭한 스승들이 여럿 있었다. 영어 선생이면서도 수업시간엔 칠판에 제갈량의 출사표를 휘갈기고,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일필휘지하는 이민성 선생 같은 분이 있었고, 역사 선생이면서 역사 교과서는 한 쪽도 나가지 않고서, 시대에 대한 우국충정과 자신의 역사철학을 역설하는 김용근 선생 같은 분이 있었다. 김용근 선생은 일제 치하에서 여러 차례 구금된 전력이 있는 독립운동가였다. 광주일고생의 상당수가 이들 선생의 영향을 받아 어린 시절부터 민족과 사회를 논하는 학생으로 성장했다. 그런데, 윤한봉의 고교시절엔 이들 스승에 대한 추억이 없다. 윤한봉이 고교 3년생이었을 때, 시국은 한일정상회담으로 떠들썩했다. 이른바 6.3 사태라고 불리는 학생 시위가 거세게 일어났다. 광주학생 독립운동의 전통을 자랑하는 광주일고 학생들이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보고 가만히 앉아 있지 않았다. 그 시절 광주일고 학생들은 지성인으로서의 교양과 의식을 키우는 독서 서클 활동을 열심히 했다. 그 시절 ‘광랑’과 ‘피닉스’가 결성되어 이후 오랫동안 광주일고 학생운동의 중심으로 활약했다. 그런데 윤한봉의 회고 어디를 보아도 고교 시절의 서클 활동 전력이 없다.


윤한봉의 몸은 광주일고의 정문을 출입했으나, 윤한봉의 정신은 고향 칠량에 있었던 것 같다. 윤한봉은 도시 광주에 올라와 10대를 보내고 있었지만 그는 도회지 광주 사람이 아니었다. 여전한 촌놈이었다. 서울 사람이 광주를 도시라고 하면, 광주도 도시냐고 웃겠으나, 광주는 칠량 촌구석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큰 도시였다. 광주일고의 학생들 중 상당수는 부모님의 소원대로 검판사가 되고 의사가 되는 길을 계단 밟듯 착착 밟아갔다. 윤한봉에겐 명문대학의 이면에 자리하는 출세욕도 없었다. 도시의 욕망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전라남도 강진하고도 칠량의 촌놈으로 10대를 통째로 보내고 있었다. 첫 입시에 실패하고 정수사라는 절에서 재수 공부를 했다. 1805년 다산이 아들 정학유가 강진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과 함께 겨울철 공부를 하려했던 절이 정수사다. 다산의 제자 황상이 은거한 일속산장도 이 정수사 입구 근처에 있다. 윤한봉은 정수사 시절 때에도 밤이면 산을 넘어 고향 친구들을 만나 놀았다.


그 친구들끼리 평생의 우정을 약속한 모임이 있었으니 바로 해조음(海潮音)이다. 바다의 파도 소리라는 말이다. 쌀 한 가마니면 적은 돈이 아니었다. 윤한봉은 10여명의 회원들로부터 각각 쌀 한 가마니를 회비로 거둔 후, 거둔 돈을 서울로 가는 회원 한명에게 몽땅 준다. 박윤석이라고. 이 친구가 서울로 간다고 하니까 돈이 없어. 한봉이 뭐라고 하냐면, 우리가 한가마니씩 낸 돈을 주자. 서울가서 성공해서 갚도록 하자. 한봉이가 그러니까 다 그러자고 한 거지. 전부 다 줬어. 쌀 6가마니를. 여기까지가 윤한봉의 10대 이야기다. 그의 10대를 온통 점유한 것은 초등학교 시절 사귄 동네 친구들이었다. 참 순진한 소년이었다. 죽는 그날까지 단 한 점의 사욕을 챙긴 적이 없는, 지독히도 미련하기조차 한 그의 순진성은 10대에 이미 깊이 뿌리를 뻗었다.


윤한봉에겐 남다른 정신적 특질이 있다. ‘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이라는 옛말이 있는데, 윤한봉은 자신의 말에 대한 책임감이 유달랐다. 중학 시절의 일이다. 방학이라 고향에 내려왔는데, 예기치 않게 친구와 언쟁을 하게 되었다. 친구는 광주로 유학을 가지 못한 열등감 때문이었는지, ‘공부해 보았자 필요 없다, 한문만 공부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윤한봉은 ‘지금은 한글 시대이다. 케케묵은 한문은 어서 버려야 한다.’며 반론을 폈다. 둘의 언쟁은 서로의 자존심을 긁는 지경으로 비화되었는데, 순간 윤한봉은 선언한다.

‘내가 한자를 쓰면 개0식이다.’

한자는 지난 2000년 동안 사용되어온 동아시아의 공용 문자이다. 선조들은 어린 시절부터 늙을 때까지 한자로 기록된 유교 서적을 공부했다. 동아시아인에게 한문이 갖는 영향력은 유럽인에게 라틴어가 갖는 영향력과 동일하다. 1945년 일본제국주의가 물러나고, 한국의 초등학교는 마침내 한글로 작성된 책을 교과서로 채택했다. 윤한봉은 역사의 새 흐름을 대변했고, 윤한봉의 친구는 역사의 낡은 흐름을 대변했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이후 오랜 시일 한글과 한자는 함께 사용되었다. 그 당시 한자를 쓰지 않겠다는 윤한봉의 맹세는 매우 비현실적인 고집이었다.

대개의 경우 순간의 감정에서 나온 과도한 발언의 경우 시간과 함께 유야무야가 되는데, 윤한봉은 달랐다. 윤한봉의 말은 하늘을 두고 한 맹세였다. 이후 한자 쓰기를 거부하는 이상한 고집 때문에 엉뚱하게 경찰들에게 호된 매질을 당하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진다. 경찰의 조사를 받으면서 윤한봉은 이름 석 자의 한자(漢字)를 쓰길 거부했다. ‘광주일고를 다닌 놈이 이름 석 자의 한자를 못 쓴다고. 누굴 놀려?’ 경찰들은 윤한봉의 따귀를 호되게 갈겼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말 혹은 약속 혹은 맹세에 대한 윤한봉의 병적 집착이다. 하루는 형 윤광장과 도시락 반찬을 놓고 티격태격 다투게 되었다. 형이 동생 한봉에게 꾸지람을 하자, 자존심을 상한 한봉은 버럭 선언한다. ‘도시락은 죽어도 싸지 않을 거야.’ 한창 성장할 나이인 고교 시절에 윤한봉은 졸업할 때까지 도시락을 싸지 않았다. 윤한봉은 어려서부터 매우 강한 자존심을 가졌다. 윤한봉은 다른 사람과 비교되지 않는 긍지를 지닌 소년이었다. 자존과 긍지를 말하니, 《일리아스》의 영웅 아킬레우스가 떠오른다. 아킬레우스는 사랑하는 벗 파트로클로스가 헥토르의 손에 죽자, 복수에 나선다. 그런데 헥토르를 죽이면 이어 자신도 죽게 되어 있는 신들의 각본을 어머니 테티스로부터 듣는다. 하지만, 아들 아킬레우스는 한사코 고집한다. “절 붙들지 마세요, 어머니. 짧은 삶을 살지라도 영원히 남게 될 명성을 택할래요.” 아킬레우스의 말은 이후 영웅의 특질을 압축한 명언이 되었다. 그런데 윤한봉에겐 그 명성의 욕망도 없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오직 헌신만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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