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수언행록

 
 
 
제목<임을 위한 행진>--서문2019-01-01 10:48
작성자

 ==윤한봉 전기==

황 광우 작/‘합수 윤한봉 기념사업회’ 기획

Hwang Kwangwoo and Choi Hedgie co-author


서문

2007년 6월 27일 한 영혼이 하늘로 갔다. 소설가 홍희담의 고백 그대로 이 지상에서 그와 함께 살았다는 것만으로 행복한 ‘순결한 영혼’이었다. 그와 함께 추억을 공유하는 지인들은 만나면 모두 ‘그의 삶’을 기록하자고 했다. 아홉 해가 지나도록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윤한봉은 괴이한 분이었다. 그는 자신을 기록하도록 쉽게 허여하지 않았다. 삶이 파란만장했으므로 아무나 덤빌 수 없었다.

누가 1980년 5월 21일 살육의 현장을 글로 묘사할 것인가? 누가 1980년 5월 26일 공수부대가 도청을 공격하던 그날 밤의 긴장과 공포를 글로 묘사할 것인가? 누가 1981년 4월 30일 표범호의 화장실에 숨어 망명의 길을 떠나는 서른네 살 젊은이의 눈물을 글로 옮길 것인가? 누가 12년 동안 망명생활을 하면서 견뎌야 했던 향수와 고독을 글로 담을 수 있을 것인가? 형이 이 세상을 뜨고 나는 5년 동안 형의 족적을 조사했다. 나는 윤한봉과 함께 살을 부대끼고 살아온 분들을 두루 만났다. 전홍준과 이강, 김상윤과 나상기, 이학영과 조계선, 최철과 정용화. 박형선과 윤경자, 윤영배와 신소하로부터 나는 윤한봉과 광주의 숨은 이야기를 들었다.


윤한봉은 두 대륙에 족적을 남긴 이였다. 윤한봉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힘들었다. 윤한봉은 1996년도에 자신의 보고서 《운동화와 똥가방》을 출간했고, 2006년도 타계하기 직전 자신의 삶을 소상하게 밝힌 구술록을 남겼다. 한 권의 책과 한 편의 구술록을 남기고 타계했으니 선배의 삶을 정돈하고자 하는 작가에게 막강한 전거를 남기고 간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형제들이 ‘광주의 윤한봉’을 묘사하기 힘들듯이, 우리는 ‘미국의 윤한봉’을 묘사하기 힘들었다. 콧구멍에 미국의 바람조차 쐬어보지 않은 자가 어떻게 ‘미국의 윤한봉’을 글로 옮길 수 있을 것인가? 안재성과 나는 2016년 1월 태평양을 건넜다. 우리는 윤한봉과 함께 고락을 한 한청련 형제들을 만났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이길주와 홍기완, 김준과 윤희주, 안동현과 서연옥, 김진엽을 만났고, 시애틀에서 김진숙과 김형중, 이종록과 이교준, 모선길과 박준우, 권종상과 조대현, 그리고 몇 분의 부인들을 만났다. 시카고에서 장광민과 이재구, 박건일과 김남훈, 그리고 최인혜와 여러 분들을 만났고. 뉴욕에서 김수곤과 정승진, 임용천과 차주범, 강병호와 김영국, 문유성과 이종국, 김희숙과 김갑송, 장미은과 박성연을 만났다. 뉴저지에서 강완모를 보았고, 워싱턴 D.C.에서 서혁교를 만났다. 전에 몰랐던 일화들을 수집할 수 있었다. 돌아와 나는 광주에 있는 ‘오월의 숲’에서 매 월 두 차례 윤한봉의 지인들을 모시고 윤한봉을 이야기하는 집담회를 열었다. 윤광장과 김희택, 조광흠과 최동현, 정상용과 정해직으로부터 아주 유익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참으로 힘들게, 그리고 참으로 반갑게 안재성의 손에서 《윤한봉 평전》의 원고가 나왔다.


또 문제가 제기되었다. 미국에 거주하는 한청련 형제들의 자녀들,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학교를 다닌 탓에 한국어를 알지 못하는 동포 2세들(Korean Americans)과 윤한봉이 그렇게도 사랑했던 타민족 형제들(Non- Korean brothers and sisters)에게 안재성의 《윤한봉 평전》은 그림의 떡이었다. 기념사업회는 나에게 ‘영문 윤한봉 전기’를 만들어낼 것을 주문했다. ‘미국의 윤한봉’을 몰라 애를 먹었던 것처럼 ‘영문 윤한봉 전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넘기 힘든 장애를 만났다.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이는 한국인 윤한봉을 기술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이는 미국의 청소년들이 이해할 수 있는 영어를 구사할 수 없다. 두 언어, 영어와 한국어 사이엔 말 그대로 태평양이 가로놓여 있었다. 우리가 한국에서 익힌 서툰 영어의 조각배를 타고 어떻게 저 태평양을 건널 것인가? 이것이 우리가 직면한 난제였다.


내가 최혜지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최혜지는 미국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녀 영어를 모국어로 구사하는 학생이며,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연세대학교를 다니는 ‘두 언어 구사 능력의 소지자’이다. 최혜지 덕택에 ‘영문 윤한봉 전기’가 제법 읽어볼 만한 문건으로 탈바꿈되었다. 우리는 이 영문을 미국의 동포 2세들에게 읽혔다. Michelle Jae-Eun Chang, Albert H. Pak, Clara Choi, Eugene Kim, Sae-Hee Chun, Cliff Lee, Hyun-Woo Kang으로부터 아주 꼼꼼한 감수를 받았다. ‘국문 윤한봉 전기’의 초고는 애당초 ‘영문 윤한봉 전기’를 만들기 위한 밑그림이었다. ‘국문 윤한봉 전기’의 초고는 영작을 전제로 작성된 글이어서 매우 간결하게 작성되었고, 더러는 거친 대목도 있었다. 이제 ‘영문 윤한봉 전기’를 탈고하고 나니, 나는 더 이상 ‘영작의 족쇄’에 얽매일 필요가 없게 되었다. ‘국문 윤한봉 전기’의 초고를 갈고 다듬는 과정은, 마치 조각가가 진흙을 만지고 놀듯, 나에게 즐거운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전혀 다른 두 권의 전기, ‘영문 윤한봉 전기’와 ‘국문 윤한봉 전기’를 손에 쥐게 되었다. 나는 ‘광주의 윤한봉’에 대해서 좀 안다. ‘국문 윤한봉 전기’는 윤한봉의 투박한 육성을 원음 그대로 전달한다. 이뿐만 아니라 윤한봉과 함께 민주주의의 가시밭길을 걸어온 광주 촌놈들의 목소리를 살아 있는 그대로 전하고자 노력했다. 길게는 5년 동안, 짧게는 1년 동안 나는 하루도 윤한봉의 서사로 고민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내가 윤한봉의 서사에 매달린 것은 내가 어렸을 때 형으로부터 얻어먹은 한 그릇의 점심 때문은 아니다. 어제 탄핵이 인용되었다. 이제 촛불은 새 역사를 만들어가야 한다. 우리가 만들어야 할 ‘새 나라’는 무엇일까? 우리가 후대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새로운 삶’은 무엇일까? 나는 그 답이 여기 이 책에 있다고 확신한다. 이 글을 읽고 ‘나도 윤한봉과 같은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는 청소년이 단 한 명이라도 출현한다면, 숱한 밤 윤한봉과 씨름했던 나의 노동에 대한 보상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2017년 3월 11일 탄핵 이튿날

빛고을에서

황광우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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