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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14-시애틀, 무슨 줄담배를 피어요?2019-01-01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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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시애틀의 동양식품점에서 일하다

 

시애틀은 아름다운 도시였다. 한국인 이민자의 다수가 로스앤젤레스에 살 때였다. 1980년대 초반의 이야기다. 캐나다와 인접한 소도시 시애틀까지 흘러들어온 한국인은 얼마 되지 않았다. 눈에 띠는 새로운 사람이 나타나면 금방 소문이 나버렸다.

사람들이 ‘담배 피우는 남자’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은 1981년 여름이었다. 동양식품을 취급하는 김동근 씨네 식품점에 새로 온 30대 중반의 한국인 청년에 대해서였다. 김동근의 사촌동생으로 알려진 이 청년은 주로 청소를 하거나 상품을 진열했다. 주인 내외가 외출했을 때는 계산대에서 돈을 받기도 했고, 안주인 김진숙을 도와 김치를 담그기도 했다. 그리고 손님이 없어 한가랄 때는 가게 옆의 주차장에 나와 담배를 피웠다. 쪼그려 앉아서다.

 

청년은 몸이 너무 말라 막대기에 바지와 셔츠를 걸쳐놓은 허수아비 꼴이었다. 그런데 청년은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꼭 몸을 잔뜩 웅크리고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웠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고개를 무릎에 박은 채 흐느껴 우는 모습을 보았다고도 했다.

“건강 해치려고 어찌 그리 줄담배를 태워요?”

안주인 김진숙이 타박을 하면, 청년은 처박았던 고개를 들고 수줍은 표정으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김진숙은 바지런하고 마음이 넓은 여인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마주친 청년의 눈빛이 무섭도록 강렬했다고 말했지만, 그녀의 눈에 청년은 오갈 데 없는 가련한 망명객이었다. 김동근 부부는 한인사회에 인맥이 넓었다. 청년을 위해 교포들을 직접 만나도록 주선해주었다. 청년은 부부의 소개를 받아 반핵단체 사무실에도 가보고 부르스 커밍스와 같이 저명한 교수도 만나기도 했다. 김형중 씨를 비롯해 시애틀에서 활동하던 진보적 교민들도 만날 수 있었다.


청년이 화물선을 타고 시애틀에 나타난 것은 1981년 6월 초였다. 청년은 시애틀 한인들에게 김일민으로 불렸다. 그의 본명을 아는 사람은 김동건 부부 외에는 없었다. 김일민의 본명이 윤한봉이란 것, 광주항쟁에 관련된 일급수배자로서 1981년 4월 29일 화물선 표범호에 숨어 타고 마산을 떠나 35일 만에 시애틀로 밀항했으며 현재 미국 정부에 망명신청을 한 사실이 널리 알려진 것은 2년이 지나서였다. 사람들은 그가 왜 죄인처럼 주차장 구석에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며 때때로 비참한 표정으로 머리를 무릎에 처박고 흐느껴 울었는가 그제야 이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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