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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12-동지는 간 데없고2019-01-01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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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윤한봉의 망명 이야기 -1980년에서 1993년까지-


11. 5월 광주, 빛의 도시


계엄군의 목적은 시위를 해산시키는 게 아니었다. 시위자를 한 명 한 명 끝까지 쫓아가 대검으로 해치우는 것이었다. 계엄군은 사냥감이 정해지면 골목까지, 집안까지 쫓아가 곤봉으로 두들기고 총검으로 찔러 끌고 갔다. 시민들 전체가 그들의 사냥 대상이었다. 젊은이든 중년이든 상관없이 찌르고 때리고 군홧발로 짓이겼다. 속옷만 입혀진 채 피투성이가 된 이들은 철사에 손이 묶여 군용트럭에 실렸다. 이들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시민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시민들의 시위 대오는 쇠로 만든 끊어지지 않는 그물 같았다. 착검한 계엄군이 몰려오면 뒤로 물러섰다. 계엄군이 멀어지면 다시 다가 갔다. 어둠이 깔리면서 시민들은 더 늘어났다. 할아버지와 아이들 빼고 광주 시민 모두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말없는 항의의 물결이 계엄군을 미치게 만들었다. 검붉은 핏물, 깨진 보도블록, 화염병 조각들…… 계엄군은 이 거리를 뛰어다니며 광란의 사냥을 계속했다. 총포 소리와 헬기소리 그리고 불타는 차량이 뿜어 올리는 검은 연기로 시가지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윤경자는 아들을 들춰 업은 채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1980년 5월 20일 저녁이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시위대는 계엄군과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시위대의 함성과 계엄군의 총성이 어둠을 뚫고 날아왔다. 그녀의 심장은 터질 것만 같았다. 건설회사에서 일하던 남편 박형선은 이틀 전에 체포되어 끌려갔다.

 

오빠 윤한봉이 며칠 째 종적이 없었다. 경찰은 벌써 몇 차례나 들이닥쳐 윤한봉을 내놓으라 협박했다. “오빠는 어디에 있나? 오빠는 이 혼란 속에 무슨 일을 당했을까?” 윤경자는 가슴이 떨려 견딜 수가 없었다. 거리에 나가 상황을 살펴보고 싶은데 갓난아기에게 최루가스를 맡게 할 수도 없었다. 마루 위에서 발돋움으로 바깥을 살펴보고 있었다.


“계엄군이다! 도망쳐!”


고함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뛰는 발소리가 요란했다. 급히 골목으로 뛰어 들어온 사람들은 평소라면 엄두도 못 낼 높은 담장을 쑥쑥 뛰어 넘어 흩어졌다. 단 한 사람, 뒷집 사는 아저씨만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네 딸을 둔 중년의 약사였다. 겉옷도 입지 않은 런닝 셔츠 바람이었다. 바로 그 흰색이 계엄군의 눈에 띄었다. 약사가 집에 들어가 대문을 걸어 잠그자, 계엄군은 대문 앞으로 몰려들었다. 계엄군은 대문을 총검으로 찍어 부수고 집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놀란 약사는 안방으로 들어가 문고리를 잡고 버텼다. 군인들은 총검으로 문고리 부근을 푹푹 찔러대자 약사는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가족들은 비명을 질렀다. 군인들은 약사가 중년의 가장임을 확인하고서야 물러났다.


윤경자의 회고이다.

그 난동을 겪고 나서 난 발발발발 떨리지. 남편도 없지, 그 아수라장을 보고 나니까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 저녁에 덜덜덜덜 떨고 있는데 새벽쯤에 누가 ‘찬아 찬아’ 이렇게 부르는 소리가 나요. 대문 밖에서. 귀를 대보니까 오빠 목소리야. 뛰쳐나가니까 나를 본 순간 오빠가 그냥 대문 앞에서 들어오지도 못하고 주저앉더라고. 그래서 보니까 손에는 굉장히 큰 드라이버를 들고 다른 손에는 몽둥이 하나를 들고 주저앉아 있어. 

 

난동을 목격한 윤경자는 온몸이 덜덜 떨려 잠을 잘 수 없었다. 계엄군의 무차별 공격에도 불구하고 시위는 밤새 계속되었다. 시민들은 진실을 보도하지 않는 언론에 분개했다. 밤 9시 문화방송 건물이 불길에 휩싸였다. 새벽 4시에는 한국방송 건물도 화염에 휩싸였다. 바로 그 시각이었다. 대문 밖에서 낮고 조심스런 소리가 들려왔다.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대문을 여니 한 남자가 목에는 마스크를 걸치고, 양손에는 긴 드라이버와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지칠 대로 지친 몰골이었다.

윤한봉은 동생을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윤경자는 오빠의 어깨를 떠밀며 말했다.


“오빠! 죽으려고 우리 집에 왔어? 경찰이 몇 번이나 왔다 간 줄 알아요?”


삶과 죽음이 교차하던 밤이었다. 새벽까지 시위를 하느라 윤한봉의 근육은 마지막 한 가닥까지 다 풀려버린 상태였다. 음성도 나오지 않았다. 시가지에서는 총성과 함성이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윤경자는 오빠를 집안으로 끌어들였다. 사정했다.

 

“오빠, 어서 여기를 빠져나가요. 우리 집에 있다간 개죽음이에요. 저놈들이 오빠를 살려주겠어요?”


1980년 5월 17일 자정을 기해 계엄령이 떨어졌다. 학생운동가와 민주 인사들이 그날 밤 다 체포되었다. 윤한봉은 체포를 면했으나 학생회 간부들까지 대다수가 체포되었다. 윤한봉은 광주 청년 운동의 공인된 지도자였다. 그는 군부집단의 무력 공격을 예견했고, 민주진영은 군부세력의 도발에 대비해야 한다고 누차 주장했다. 그의 호소에 귀를 기울인 이는 아무도 없었다. 주의 깊은 경계로 그는 겨우 체포를 면할 수 있었다. 윤한봉은 온종일 돌아다니며 시위를 했다. 돌을 던졌다. 구호를 외쳤다. 밤새 뛰어 다녔다. 그 역시 대중의 한 명에 불과했다. 투쟁을 이끌 조직도 없었고, 함께 상의할 동지도 없었다. 거대한 시위 물결에 섞이고 보니 무력하기만 했다. 잠을 못 자 쓰러질 것 같았다. 체포를 각오하고 여동생의 집으로 온 것이다.


“오빠, 제발 이 집에서 나가세요. 다른 사람들도 다 시골로 피신했잖아요.”


윤경자는 애원했다. 윤한봉은 완강했다. 끝까지 시민들과 함께 싸우겠다는 것이었다. 윤경자는 할 수 없이 그를 벽장으로 올려 보내고 먹을 것과 요강을 넣어주었다. 윤경자는 애원했다. 오빠, 지금 날마다 우리 집에 와서 오빠를 찾는데 여기서 죽으면 개죽음이다. 오빠 여기서 그냥 죽어버리면 오빠가 하고 싶은 일도 못하지 않느냐. 살아서 일을 해야 될 거 아니냐. 내가 상용이 오빠하고 연락이 되면 오빠하고 연결을 해주마. 그 대신 상용이 오빠하고 연결이 안 되면 오빠가 이 집을 빠져나가라. 이후 윤경자는 애를 업고 정상용을 오빠를 찾으러 다녔으나 실패했다. 돌아와 또 애원했다. “상용이 오빠 연락이 안 된다. 어디 선을 타야 될지를 모르겠다. 광주를 좀 빠져나가라. 오빠도 살아야 될 거 아니냐. 또 우리 집 닥치면 어쩔래.”

형 윤광장이 달려온 것은 두어 시간 후였다. 그는 동생이 걱정되어 사방으로 찾아다니던 중이었다. 동생을 흔들어 깨웠다.


“한봉아, 어서 떠나라. 너는 지금 잡히면 무조건 죽음이다. 어서 떠나라.”


인생의 중요한 고비마다 조언을 주던 형이었다. 고집불통인 윤한봉도 형의 말은 거부하지 못했다. “알았습니다.”

잇단 총성과 치솟는 연기로 도시는 더욱 불안했다. 오누이는 걷고 걸었다. 시 외곽에 무사히 도착한 오누이는 거기서 헤어졌다. 윤경자는택시에 오빠를 밀어 넣었다. 광주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내려놓으라고 부탁했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도청을 지키던 윤상원이 계엄군의 총에 죽었다. 윤상원은 ‘최후의 일인까지 싸우겠다’는 결의를 밝혔던 항쟁지도부의 대변인이었다. 윤상원은 그의 말 그대로 1980년 5월 27일 새벽, 도청을 공격해 들어오는 공수부대의 총탄에 목숨을 놓았다.


윤한봉이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되고 1975년 석방된 이후 광주 지역의 청년 학생 운동을 이끌어온 지도자였다면, 윤상원은 1978년 광주 지역 운동에 뒤늦게 합류한 활동가였다. 윤한봉은 형사들이 호시탐탐 미행했던 ‘드러난’ 활동가였다면, 윤상원은 이제 막 태동한 ‘들불 야학’ 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은’ 활동가였다. 윤상원과 윤한봉은 80년 5월 광주 민주화 운동을 이끈 두 지도자였다. 윤상원은 윤한봉을 도우면서 광주 지역의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다. 윤상원의 죽음 앞에서 윤한봉은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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