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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11-횃불 성회2019-01-01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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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광주민중항쟁


나는 아직도 그날 광주의 진실을 모른다.
1980년 나는 당시 S대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서울의 신림동에서 어머니와 동거하고 있었다. 형(황지우 시인)이 문을 두드린 것은 5월 18일 오전 8시였다. 비상계엄령이 확대되었으니 피신해야 한다는 형의 무거운 주문이었다. 형과 나는 어머님께 작별 인사를 고하고 길을 나섰다. 광주로 가기 위해 터미널에 나갔는데 사귀던 여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랑의 열정은 일탈을 저지르게 한다. 예정에 없던 강화도행 버스에 오르게 된 것은 하루만이라도 더 연인과 함께 있고픈 욕망 때문이었다. 다음 날 공중전화 박스에서 돌린 다이얼에서, ‘광주가 피바다다. 내려오면 큰일 난다’는 다급한 목소리가 울렸다. 


이후 나는 잠행에 들어갔다. 서울의 미아리에 있는, 애인의 친구가 사는, 반지하의 골방이 내가 역사의 현장을 기피하고 숨은 공간이었다.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은 기억하고 싶지 않다는 것일 게다. 저 역사의 현장을 기피한 것을 크게 후회하게 된 것은 일주일 후의 일이었다. 애인이 살던 반포아파트 인근 식당에서 해장국을 먹으면서 나는 보았다. 텔레비전에선 한 떼의 청년들이 얼굴에 두건을 두르고 트럭에 올라 손에 몽둥이를 쥐고 흔드는 모습이 방영되고 있었다. 그들은 폭도였다. 살인자는 어데 가고, 광주의 젊은이들만이 영락없는 폭도로 보도되는 이 장면, 진실과 허위가 완전히 거꾸로 뒤집히는 이 장면을 나는 이후로도 오랫동안 잊을 수 없었다. 


역사의 흐름에 회한이 깊었던 우리는 만나면 동이 트도록 함께 술을 마시곤 했다. 언제였을까. 나는 한 후배로부터 1980년 광주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후배는 5월 20일 MBC 방송국이 불타던 그날 밤 공수부대원의 총을 머리에 맞고 쓰러졌다. 죽었다. 죽었는데, 총알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 기적처럼 되살아난 녀석이었다. 나는 이렇게 들었다.

그러다 도청 점령당하기 전날, 집으로 가지요. 동네 어른들에게 잡혀 동명교회의 탑에 갇히게 돼요. 그날 밤 공수부대가 들어오고 한 여성이 선무방송을 해요. ‘시민여러분, 나와 주십시오.’ 그 목소리가 얼마나 애타고 간절하던지 한신대에 다니던 형이 기어히 일을 냈지라. 교회에는 두꺼운 커튼이 있었는디, 그 커튼을 다 뜯어내 밧줄을 만들었고 밧줄을 타고 밖으로 나갔지라우. 형은 돌아오지 않았어요. 


우리들은 합동장례식에 참여해요. 당시의 망월 묘역은 험악한 곳이었어요. 여성 시신이 한 구 있었는디, 자동소총으로 난사당한 시신이었지라우. 시신을 두고 어머님 두 분이 ‘내 딸이다.’면서 서로 싸우드랑께라요. 오랫동안 방치된 시신이라 심하게 부어 있었지요. 두 분이 시신을 만지면서 싸우는 것도 아니고 다투는 것도 아니고, 그런 장면을 보고선 더 이상 못 있고 돌아와 부렀지라우. 그 뒤 우리 어머님은 한 달 간 죽은 여자 분을 위한 단식기도를 올렸구만요.

교회 첨탑에서 커튼을 찢고 도청으로 달려간 그 한신대생은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무엇이 그를 도청으로 달려가게 했을까? 왜 후배의 어머님은 한 달 간이나 곡기를 끊고 기도를 올려야만 했을까? 딸의 주검을 마주한 그 어머님들의 영혼은……?
30년이 지났건만 나는 아직도 그날 광주의 진실을 모른다. 그날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피를 흘렸던 분들이 이제 오십을 훌쩍 넘기고 있다. 물론 그날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다. 그 후 7년, 1987년 6월 민중대항쟁에서 500만 명의 시민들이 서울에서 제주까지, 전국 방방곡곡 일어나 마침내 독재자를 몰아내게 되었고, 이어지는 대파업을 통해 그동안 개돼지 취급받으며 살아온 노동자들이 마침내, ‘노동자도 인간이다. 인갑답게 살아보자.’며 일어서게 되었다. 하여 이제 우리들은 ‘사랑도 명예도’ 남김없이 간 윤상원을 자랑스럽게 여기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저 가신 분들의 넋은 편하게 있는 것인지 나는 늘 돌이켜 보게 되고, ‘그날 너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는 물음 앞에 떨리는 영혼을 주체하지 못한다.


윤한봉은 광주민중항쟁에서 어떤 존재였는가? 이제 가장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 시기 윤한봉은 수배자였고, 도피했다. 따라서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윤한봉이 수행한 의미 있는 실천은 기대할 수 없다. 1992년 내가 윤한봉의 귀국 추진 운동을 하던 무렵 한 후배 동료가 나에게 이렇게 투덜거린 적이 있다. ‘그날 현장을 도피한 사람인데, 뭐가 대단하다고 귀국 운동을 추진하는지 모르겠다.’ 맞는 말인가.
1980년 5월 나는 서울대의 학생회에 몸담고 있었다. 그때 서울대 학생회는 만일 계엄령이 확대, 실시될 경우 캠퍼스에 결집해 투쟁하자고 선언했다. 그런데 나는 그 결의를 지키지 못했다. 이후 수배자의 신분이 되어 이 집 저 집, 동가숙 서가식 떠돌았다. 나중에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유인물을 제작해 유포했지만, 조만간 다시 피신 생활로 돌아섰다.
일상의 시기에 공개적으로 활동한 운동가들은 비상의 시기가 오면, 체포되고, 수배되기 때문에 감옥에 가거나 도피 생활에 들어가는 것이 운동의 불가피한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5월 18일 이후 피신할 할 수밖에 없었던 윤한봉의 선택을 놓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운동의 ABC를 모른 소치이며, 온갖 고난을 뚫고 실천한 선배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본다. 역사는 윤한봉으로 하여금 무대에서 내려오도록 명령했던 것이다.


시골의 농부들은 볏짚을 꼬아 새끼줄을 만든다. 볏짚의 길이는 1미터가 넘지 않는다. 그런데 볏짚들이 꼬이고 꼬여 수 십 미터에 이르는 긴 새끼줄로 변환된다. 우리의 투쟁도 새끼줄과 같은 것이 아닐까? 한 개인, 특정 집단이 수행할 수 있는 실천의 몫은 제약되어 있다. 하지만 서로의 실천이 꼬이고 꼬여 해방 투쟁의 긴 새끼줄을 엮어나가는 것이다.
1980년 5월 18일 다수의 운동가들이 피검되었다. 사전 검속을 피하고 ‘투사회보’를 작성할 수 있었던 팀은 들불 야학의 강학과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노출되지 않았다. 또 한 팀이 있었다. 박효선이 이끈 극단 광대였다. 그만큼 그들은 주목받지 않았다. 역사는 윤한봉을 무대에서 내려오도록 하고, 대신 윤상원을 호출했다.

 

광주 시민이 없는 광주민중항쟁은 생각할 수 없고, 항쟁지도부 없는 광주민중항쟁도 생각할 수 없다.

광주민중항쟁의 불씨는 5월 18일 전남대학교의 교문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각자의 캠퍼스에 집결해 투쟁을 전개하자는 학생회의 결의를 말 그대로 이행한 대학은 유일하게 전남대학교뿐이었다. 하지만 만일 학생들만이었다면, 이후 공수대원들의 잔혹한 몽둥이질과 총격을 결코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다.  정상용은 고교 시절부터 혁명의 꿈을 꾼 청년이었다. 전남대에 들어가 서클 민사련을 결성했고, 이후 전남대 학생운동의 밑돌을 놓은 대표적인 학생운동가였다. 민중이 무장을 하고 혁명을 일으키는 그날을 수없이 꿈꾸고 기다려온 그였다. 하지만 19일 시위대에 섞여 투석전을 하면서 절망한다. ‘내가 이런 역할밖에 못하는가? 돌 던지는 거 말고 다른 역할은 없는가?’ 그는 광주 시민들이 이렇게 총을 들지 상상을 못했고, 이후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할 수 없었다. 시민들이 무기고를 탈취해서 총을 들자, 정상용과 그의 동료들이 선택한 것은 ‘피신’이었다. 


5월 20일부터 공수부대를 몰아내는 일을 떠맡은 것은 오직 저 ‘이름 없는 민중’이었다. 70여 만 명이 사는 도시에서 30만 명이 이 투쟁을 수행했으니 어린애들과 할아버지들 빼고는 광주 시민들이 다 나온 거다. 밤새 공격했다. 몇 만 명의 시민들이 밤새워 도청을 공격했다. 한편은 시청에서, 한편은 광주역에서 도청을 공격했고, 일부는 조선대에 집결 중인 군인들을 공격했다. 그들은 군인들의 무차별 조준사격과 헬리콥터 기총소사에 물러서지 않았다. 마침내 진압군을 격퇴시키고 광주 시민들은 맨주먹으로 해방 광주를 쟁취했다. 정해직은 구술한다.

지산동 조대후문 앞에 있는 집으로 갔어요. 겁이 나서 사회과학서적을 다 박스에 숨겼어요. 기관단총 소리가 무지허게 나드만요. 잠이 안 와요. 헬리콥터 소리가 끊이지 않고…… 아침에 나가보니 사람들이 조선대로 가보라는 거야. 군인들이 다 도망갔대. 어떤 군인은 권총도 내버리고 도망갔대. 참 희한했어. 희한하드만. 완전한 반전이었지. 우리는 해산했는데, 시민들이 도청을 점령한 거야. 계엄 하의 최정예 진압군과 맞서 싸워서 그들을 퇴각시키고 해방 도시를 지킨 사실은 동서고금에 없다. 도대체 그 무엇이 30만 명의 시민으로 하여금 밤새워 진압군을 공격하게 만들었던가? 역시 광주민중 항쟁의 주체는 오로지 광주 시민이었다. 광주 시민이 없는 광주민중항쟁은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5월 27일 새벽까지 도청을 사수한 항쟁 지도부의 존재 의의를 결코 간과해선 안 된다. 해방 광주를 쟁취한 시민들은 애타게 고대했다. 전주에서, 대전에서, 서울에서 어디에선가 광주의 투쟁을 지지하고 지원하는 투쟁이 일어나길 기대했다.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시민들은 고립감에 떨었다. 수습위원회는 자발적으로 무기를 회수하여 반납했다. 일종의 투항이었다. 이때 만일 ‘최후의 일인까지 투쟁하겠다’는 항쟁지도부가 없었다면 광주민중항쟁은 반쪽짜리 항쟁으로 전락했을 것이다. 아마도 항쟁이 아닌 사태로 폄하하는 저들의 의도가 쉽게 관철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항쟁지도부 없는 광주민중항쟁도 생각할 수 없다.’ 정상용은 증언한다.

수습위원회가 항쟁을 지속하지 않고 수습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어서, 우리로서는 용납할 수 없었어요. ‘이 항쟁은 끝까지 가야한다. 군부집단과 끝까지 싸워서 이겨야 한다. 도청에 무기 반납하면 끝나버린다.’고 주장했지요.
23일부터 우리 쪽에서 궐기대회를 주도했죠. 수습대책위원회를 교체하자! 기존에 수습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던 김종배, 허규정, 윤상원 동지와 이야기했어요. 김종배, 허규정도 이대로 끝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학생을 모집해서 투입시키자. 순차적으로 인력을 보강하고 25일 날 수습위원회를 몰아낸 거죠.

 
김종배가 수습위 위원장. 허규정이 내무담당, 내가 외무담당, 김영철 선배가 기획관리실장을 맡고 기획위원에 이양현, 윤강옥이 들어오게 되고. 그리고 도청 안팎을 잘 알던 윤상원이가 대변인을 맡고, 홍보위원장으로 박효선이 맡고. 25일 그렇게 조직을 개편하고. YWCA에 학생들이 모이면, 학생이 모이는 데로 도청으로 투입시키고.

그 항쟁지도부의 중심에 윤상원이 있었다. 그리고 이양현, 정상용, 윤강옥, 김영철, 박효선, 정해직이 포진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윤한봉과 함께 1970년대 광주 운동을 이끌어오던 분들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 다음과 같은 테제를 제출할 수 있다.

윤한봉과 그의 동료들이 전개한 70년대의 광주 운동 없이 광주민중항쟁은 생각할 수 없다.

개인은 새끼줄을 이루는 한 올의 볏짚이다. 특정 개인이 내가 역사의 새끼줄이었노라 말하는 것은 영웅주의의 덫에 걸린 과대망상이다. 우리는 다 역사의 새끼줄을 이루는 한 올의 볏짚이다.
이기홍이 없는 일제하 광주 독립운동을 말할 수 있는가? 김시현이 없는 4.19의 광주 운동을 말할 수 있는가? 정동년과 박석무와 전홍준이 없는 한일협정반대운동을 말할 수 있는가? 이강과 김남주의 함성지를 거론하지 않고 유신반대투쟁을 말할 수 있는가? 김상윤을 빼놓고 광주 운동권의 이론 학습을 말할 수 있는가? 정상용과 김정길을 제외하고, 1970년대 전대 학생 운동을 거론할 수 있는가? 이양현과 정향자를 제외하고 광주 노동운동을 말할 수 있는가?
마찬가지로 1978년 함평고구마 투쟁과 교육지표선언, 이어지는 광주 청년 운동에 있어서 윤한봉을 제외하고 긴급조치 9호 시절의 운동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윤한봉 혼자 지역청년운동을 이끌었던 게 아니다. 윤한봉에게는 분신처럼 그를 보좌한 박형선과 윤강옥, 성찬성과 김수복, 최철과 정용화, 김희택과 최연석, 김은경과 임영희, 윤상원과 박효선이 있었다. 이 좁은 지면에 다 거명할 수 없는 수백 명의 동료들과 동조자들이 있었기에, 1970년대 후반 윤한봉과 그의 동료들은 전국 어느 지역에 비교되지 않는 운동의 활기를 보여주었다. 정상용은 회고한다.


서울 다음으로 광주 운동권의 영향력이 제일 컸으니까. 당시 광주운동권의 결정이 전국의 방향을 결정했어요. 그 핵심에 한봉 형이 있었구요. 그래서 재야운동권의 핵은 한봉 형이었어요. 서울에서 어떤 일을 결정할 때 광주입장을 묻는 것이 당시 관례였어요. 그래서 서울에서 요청이 오면 광주에서 만나서 논의를 해요. 80년 이전에. 당시 노동운동은 취약했고 농민운동이 있었는데, 사회운동을 잇는 사람이 한봉 형이었어요. 당시 군부정권에서 보면 한봉 형은 타켓이었지요.

1980년 5월 16일 빛고을은 횃불성회를 거쳐 마침내 위대한 항쟁의 바다에 이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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