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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10-1979년, 현대문화연구소2019-01-01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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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현대문화연구소


내가 형의 살림방을 처음 목격한 것은 1979년 9월 어느 날이었다. 경찰의 감시망이 좁혀져 오고 있음을 느꼈던 것일까? 형은 자취방을 정리하기 위해 나를 불렀다. 지산동 천주교 성당 옆 골목의 어느 집 골방이었다. 1평 정도, 그야말로 골방 중의 골방. 큰 가방 한 개가 덩그마니 놓여 있었다. 살림의 모든 것이었다. 문지방 옆엔 청색 플라스틱 그릇이 있었는데, 그 안에 편지지가 들어 있었다. 나는 편지지를 들춰 보았다. 만년필, 손목시계, 팬티, 런닝구, 양말, 면도, 손톱깎이, 고무신 등 총 50여 항목의 살림도구가 적혀 있었다. 형은 입던 옷을 갈아입었다. 갈비뼈가 기타줄처럼 드러났다. 깡마른 몸이었다.


남들은 윤한봉 하면, 거창한 투사의 얼굴을 떠올리고, 가까운 지인들은 ‘합수’하면 철두철미 고집스런 원칙주의자의 모습을 떠올릴 것이다. 형이 이승을 떠나고 많은 이들이 눈시울을 적시면서 추억하는 형의 모습은 “영어를 쓰지 않고, 침대를 거부하며, 샤워도 않으면서” 미국 망명생활 13년을 견딘, 무서운 고행의 수도사였다. 나에게 가장 인상 깊은 형의 모습은 이 날 자취방에서 본, 가방 하나가 살림살이의 모든 것인 무소유주의자의 속살이었다. 무소유를 지향하지 않고선, 투사의 길, 고난의 길을 걸을 수 없겠지만, 난, 형처럼 일관된 무소유주의자를 아직껏 본 적이 없다. 큰 산은 가까이에서 산의 전모를 볼 수 없다. 하여 윤한봉의 삶을 어떻게 평해야할지 모르겠다. 한국의 간디라고 해야할 지, 한국의 호지명이라고 해야 할지.


어느 날, 형은 한 떼의 후배들을 데리고, 무등산으로 들어가는 버스를 탔다. 산수오거리에서 금곡마을을 지나 식영정 근처에서 내렸다. 영희 누나, 은경이 누나, 연석이 형이 기억난다. 무슨 성격의 모임인지도 모르고 따라갔고, 하여 그날의 모임에서 무슨 대화가 오고갔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연석 형의 노래가 인상 깊다. “저들의 푸르는 솔잎을 보라.” 나는 양희은의 노래를 그때, 처음 들었다. 암울한 시기, 암담한 청년들을 위로해주는 노래였음이 분명하다.


저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비바람 맞고 눈보라 쳐도

온누리 끝까지 맘껏 푸르다

서럽고 쓰리던 지난 날들도

다시는 다시는 오지 말라고

땀 흘리리라 깨우치리라

거치른 들판에 솔잎 되리라


그랬다. 지금도 한봉 형을 기억하는 이들이 맨 먼저 하는 말은 “인정 많은 형”이었다. 밥을 못 먹는 후배들을 보면, 밥값을 쥐어주고, 고향 갈 차비가 없는 후배를 만나면 차비를 쥐여 주고, 담배 값이 없는 후배들에겐 답배 값을 쥐여 주었다. 고문에 몸을 다친 후배 김정길의 요양을 위해 월부 장사에 나섰던 형. 이웃의 불우를 그냥 보지 못하는 눈물 많은 이가 한봉 형이었다. 전라도 사투리로 말해 “오매, 짠한그!” 하는 그 마음 때문에 내 것을 다 ‘퍼줘부러야’ 직성이 풀리는, 남도 민중의 애잔한 마음, 그 현현이 한봉형이었다.

어쨌든 간에 1978년, 광주운동이 굉장히 활성화된 해였어요. 79년 초에도 마찬가지였어요. 운동 한다 뭐한다 해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감방에 들락거리고 그래가지고 가족들하고 차분히 바람 쏘이러 야외에 나가보거나 그러지를 못해 가정에서. 삭막하지. 그래서 5월 5일 날 민주가족야유회라는 것을 가게 됐어요. 가족들을 다 끌고 나오니까 꽤 많은 숫자가 모였다고요. 화순 쪽으로 갔는데 지금 화순 어딘지는 기억이 안나요. 80년에는 여그 광주에 있는 식영정으로 갔었고.


내가 형의 활동을 가까이에서 보게 된 것은 1979년 7월 어느 날부터였다. 나는 그해 7월 17일 김해교도소에서 출소해 장동에 있는 현대문화연구소에 출입하기 시작했다. 한봉 형은 옥바라지를 위해 책을 모으던 참이었다. 나 역시 감옥에서 보았던 책 한 보따리를 옮겨 놓았다. 순식간에 2,000여 권의 장서를 수집한 것으로 안다. 한봉 형은 동료들의 옥바라지를 그렇게 체계적으로 조직해 나갔다.


인제 책장을 짜놓고 구호를 청했어요. 일기장과 가계부를 제외한 책은 다 내와라. 족보, 일기장 가계부 족보를 빼고 책은 전부 다 내놔라…… 서울 출판사 돌아다니면서 책도 모으고 집집마다 가방을 들고 가서 쓸 만한 책들 뿌리째 뽑아갖고 왔어요. 한 이천 권을 책장에다 빽빽이 채워 넣고 옥바라지할 때 썼죠. 그 사무실을 송백회 회합장소로 쓰게 되고 그 다음에 거기서 80년 1월에 극단 광대가 출범을 해요. 


1979년 가을, 나 같은 풋내기 운동가에게는 눈이 핑핑 돌만큼 정국이 급변했다. YH 여공 김경숙 씨가 건물에서 떨어져 죽고, 이어 신민당의 김영삼 씨가 의원직 제명을 당하면서 그해 9월엔 전운이 감돌았다. 아니나 다를까, ‘남조선 민족해방 준비위원회’라는 지하조직 사건이 불거져 나오고, 그러다 부산과 마산에서 민중항쟁이 터져 나오고, 그러던 어느 날 한봉 형이 사라졌다. 또 잡혀간 것이다.


그때 23일이에요. 무작정 나는 끌려 간 거지. 이 무지한 놈들이 서부경찰서 숙직실로 데고 들어가요. 들어가서 보니까 이미 의자 두 개 세워놓고 몽둥이 걸어놓고, 빠께스에 물, 걸레 주전자부터 딱 물고문 준비해놨더라고. 이런 등치 큰 놈들이 옷 벗기고 수갑 채우고 허벅지에다 장대 채우고 물고문을 시작했는데,

부마항쟁이 터지자 부산에서 마산으로 번지고 그러니까 이것이 전국으로 확산될 것을 긴장한 거예요 이놈들이. 정권차원에서 광주를 중시한 거예요. 가능성이 제일 높다고 판단한 것이죠…… 그래가지고 내가 3일간 엄청나게 고문을 당해부렀습니다 물고문을……근데 27일 아침이 되니까 이놈들이 갑자기 나갔다오더니만 내 수갑을 풀어주면서, 벽에 탁 기대앉더만 ‘어허, 나라가 걱정 돼. 나라가 걱정돼’ 하는 거요. 그런데 실내 방송이 들리는데 ‘유고…… 계엄령……’이 들리는 거야. ‘아! 박정희 죽었구나.’순간 발끝에서부터 간질간질 해갖고, 그 쾌감은 아직 그 이후로는 느껴본 적이 없는데 온 몸이 간질간질하면서 ‘아, 나 살았다. 더 이상 고문 없다, 박정희 죽었다. 세상 바뀐다.’ 아 그때 참 희한한 경험했어.


1979년 10월 26일은 박정희가 죽던 날이자, 한봉 형이 고문받던 날이었다. 우리들은 충장로 시위를 모의했다. 그날 낮에 전남대 식당에서 대학생들이 데모를 했고, 저녁엔 충장로에서 한 판 붙기로 했다. 강이 형과 형선 형, 석희 형과 선규 형…… 한봉 형의 동지들이 다 모였다. 우리는 결의했다. ‘모두 다 함께 잡혀 들어가불자’.

그날 오후 7시 경, 나는 광주천에서 대그박만 한 돌들을 정부미포대에 담아, 충장로 거리에 뿌려놓았다. 서울에서 내려온 문국주 형은 초조한 모습으로 충장로의 1가에서 4가를 반복해 걸었다. 약속했던 싸움판은 벌이지 못했다. 씁쓸했다. 우리는 남광주 시장 인근의 허름한 여인숙에서 1박을 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라디오에서 조가가 울려퍼진다며, 시국의 비상함을 누군가 알려왔다.

“먼 일이 벌어진 거여.”

대통령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날 오후였다. 그 당시 나는 방림동 산 밑에서 살고 있었다. 어머님은 잔치를 벌였다.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옥살이를 한 여러 빵잽이들이 우리 집에 모여 막걸리에 부침개를 먹었다.

형은 다시 돌아왔다. 엄청 당했단다. 오른 팔이 마비되어 있었다. 마비된 팔을 흔들며 열변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자신의 고난을 고난으로 여기지 않았던 형, 늘 낙천적 마음으로 살았던 형. 불우한 이웃을 보고는 그냥 지나가지 못 했던 형, 불의 앞에선 불같은 분노를 감추지 못했던 형, 누구보다도 위선을 미워하고, 인간의 존엄을 존중했던 형. 나는 그 후 오랫동안 형을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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