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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4-망명생활2019-01-09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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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망명생활 1


마침내 미국땅을 밟다


나는 동현이와 상륙허가증을 가지고 태연하게 병실에서 걸어 나갔다. 선원들은 모두들 상륙준비 때문에 방에 들어가 있는지 배에서 내릴 때까지 나는 단 한 사람도 보지를 못했다. 밤 9시가 조금 지났을 무렵이었다. 배에서 내려 미국인 수위실 앞을 태연하게 지나갔다. 수위실 안에는 두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그들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수위실을 지나서 보니 육지 쪽으로 긴 잔교가 놓여 있었다. 육지를 향해 잔교 위를 걷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흔들리는 뱃속에 있어서 그런지 몸이 약해져서 그런지 어지럽고 휘청휘청해서 똑바로 걸을 수가 없었다. 나는 긴장한 채 천천히 걸었다. 펌데일 부두는 조용하고 어두웠다. 민가도 안 보이고 사람도 안 보였다.

마침내 미국 땅에 첫발을 내딛었다. 35일 만에 육지를 밟았다. 사방은 고요할 뿐 이무런 기척도 없었다. 온몸의 긴장이 풀리자 다리에 힘이 빠져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한참 후에 동생들이 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일어나서 가지고 있던 칼들을 어두운 밤바다에 던져 버렸다. 80년 5월 하순부터 몸에서 떼지 않고 가지고 다니던 칼들,최악의 경우 한 놈이라도 죽이고 자살하기 위해 가지고 다니던 칼들,목욕할 때도 입에 물었던 칼들,밤에도 머리맡에 다 두고 잤던 그 칼들을 어두운 밤바다에 힘껏 던졌다.

 

 

암호명 ‘봉선화’와 ‘진달래’

 

 

동생들과 만나 셋이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택시가 왔다. 우리는 그 택시를 타고 밸링햄에서 l0km 남쪽에 있는 시애틀의 중심가까지 갔다. 중심가에서 나는 택시에 남아 대기를 하고 찬대와 동현이는 택시에서 내려 전화를 하러 갔다. 한참 있다가 동생들이 뛰어왔다. 찬대가 황당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형님,느닷없이 그쪽에서 무슨 암호를 대라고 합니다. 뭐 자기는 진달래를 좋아한다면서 우리더러 무슨 꽃을 좋아하냐고 물어보는데 어떻게 된 겁니까? 너무 황당해서 다시 전화하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고 왔어요.”


순간적으로 나는 그 여자가 용화의 연락을 받은 사람이 분명하다고 판단했다. 기관원이라면 절대로 그렇게 허술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일이 제대로 풀리는 것 같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나는 동생들을 보며 씩 웃었다.


“다시 전화해서 가서 대답할 테니 집주소와 약도를 불러달라고 해서 받아오지.”


우리들은 약도를 받은 후 약속된 지점으로 택시를 몰고 갔다. 가면서 나는 동생들에게 용화와 정했던 암호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다.우리 세 사람은 약속된 지점에 가서 그 여자 분과 남편을 만났다. 아직은 상대방에게 서로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그분들을 따라 집으로 갔다. 집에 들어온 우리는 암호를 서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내가 먼저 암호명 ‘봉선화를 말했다.


“봉선화를 좋아합니다.”


동포 여자 분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저는 진달래를 좋아합니다.”


암호를 확인하는 순간 온몸의 긴장이 확 풀렸다. 나는 우선 밥부터 좀 달라고 했다.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긴장하지 않은 상태에서 음식다운 음식을 실컷 먹었다. 그 여자 장로로 행세 했던 분이 시애틀에 거주하시는 김진숙 선생님이고 그 분의 남편은 김동건 선생님이었다. 목사와 부인이 표범호에 올라가 을 때 김동건 선생님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부두 한쪽에 차를 세워둔 채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두 분 다 조국에서 신학대학교를 나온 후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막내아들 용이와 함께 살며 동양식품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국의 민주화운동에도 열성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풀리는 의문들


우리들은 식사 후에 그동안에 있었던 궁금한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두 분의 이야기를 듣고 이리저리 짜 맞추어보니 두 분이 우리들과 만나기까지의 사연은 이랬다.

우리들과 마산에서 헤어진 정용화는 광주로 돌아가 강신석 목사님과 조아라 장로님을 찾아가 협조를 부탁했다. 조 장로님과 강 목사님은 용화가 당부한 대로 적들의 전화 도청과 편지 검열을 피하기 위해 전화나 편지를 직접 하지 않고 선교사로 나와 있던 베스 헌트리 목사에게 편지를 써주며 미국에 나가서 직접 부쳐 달라고 부탁했다. 미국에 온 베스 헌트리 목사는 5월 20일경 미시건주의 디트로이트시에 살고 있는 김용성 박사와 이학인 선생에게 그 편지를 발송했다. 김용선 박사는 전 민선 서울특별시장이었던 김상돈씨의 사위이고 이학인 선생은 조아라 장로님의 아들이었다. 편지는 그 두 분에게 이러저러한 사람이 미국으로 배타고 가니까 인도받아 정치망명을 신청할 수 있게 도와 달라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받아 본 두 분은 하도 황당한 소설 같은 내용이라 안기부에서 반응을 떠보기 위해 장난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처음에는 웃어넘겨 버렸다고 했다. 두 분이 그 편지를 장난 편지로 생각했던 이유 중의 또 하나는 발신인이 ‘민주화를 위해 일하는 광주사람들’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 장로님과 강 목사님은 당시의 엄혹한 상황을 감안해 자신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었다. 그런데 5월 말 일경에 두 분에게는 전 편지보다 더욱 절실한 내용의 두 번째 편지가 날아들었다.

두 번째의 편지는 첫 번째 편지의 반응이 없는데다 표범호가 예상보다 빨리 미국에 도착할 것이라는 정용화의 급한 연락을 받고 초조해진 조 장로님과 강 목사님이 다른 또 한 분에게 편지 발송을 부탁해 그분이 미국으로 나와 급히 발송한 편지였다. 배가 떠난 후 사태의 추이를 계속 지켜보고 있던 찬대의 형인 정찬용은 삼미사를 통해 배가 예상보다 빨리 도착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급히 용화에게 연락했었다.

두 번째 편지를 받은 이학인 선생 과 김용성 박사는 이건 장난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고 위싱턴 DC에 있던 북미한국인권위원회 총무로 활약하고 있는 감리교의 페리스 하비 목사에게 급히 협조를 부탁했다. 협조 부탁을 받은 하비 목사는 시애틀 시에 있는 삼미사 대리인에게 전화를 했다가 표범호가,전화한 바로 그날 그것도 몇 시간 후에 도착한다는 대답을 듣고 깜짝 놀랐다. 하비 목사는 평소에 인권운동 관계로 잘 알고 지내던 시애틀의 김동건,김진숙 선생 부부에게 즉시 연락을 취하는 한편,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에게 연락해 내가 무사히 미국에 상륙해서 정치망명을 신청할 수 있도록 협조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케네디 상원의원도 바로 워싱턴 주 이민국에 전화를 해서 협조를 당부했다. 요트를 타고 말고 할 시간도 없는 김동건,김진숙 선생 부부는 자기들 교회의 백인 목사를 모시고 허둥지둥 펌데일 부두로 달려갔으나 급히 연락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하비 목사로부터 암호 이야기를 못 듣고 갔었기 때문에 머뭇머뭇하다 그냥 돌아왔던 것이다.

한편 케네디 상원의원의 부탁을 받은 이민국에서는 내가 선원으로 위장하고 오는 줄 알고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세 명의 직원을 무장시켜 표범호로 파견했고,그 이민국 직원들은 나를 찾기 위해 선원들 신상에 대해 그렇게 꼬치꼬치 묻는 등의 소란을 피우다 허탕치고 돌아갔던 것이다. 배에서 내린 김동건,김진숙 선생 부부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하비 목사에게 전화를 해서 허탕치고 왔다고 보고를 했고,하비 목사는 그때서야 빠뜨렸던 암호 이야기를 해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시애틀에 와서 전화를 했을 때 김진숙 선생이 불쑥 암호 이야기를 꺼냈던 것이다. 이민국은 이민국대로 케네디 상원의원에게 그런 사람이 없다고 보고를 했고 케네디 상원의원은 하비 목사에게 같은 연락을 하는 등 그쪽은 그쪽대로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었다.

모든 의문들이 다 풀리고 자초지종이 확인되자 모두들 즐겁게 웃었다. 김진숙 선생은 내가 차를 마시는 시간을 이용하여 여기저기에 전화를 걸어 내가 무사히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찬대 역시 조국에 전화해 여유 있는 목소리로 “무사히 물건 전달했소.”라고 보고했다. 보고를 마친 후 우리들은 정말 오랜만에 편안한 마음으로 밤을 새우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나를 도와 준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은 내가 도착한 지 얼마 후에 보좌관인 칼리 키 씨를 광주로 보내 강 목사님과 조비오 신부님을 통해 나의 신원을 확인했다.


이민국 출두 명령의 거부


6월 4일 아침이 되자 동생들과 헤어지며 작별 인사를 나눴다.


“찬대,동현이 !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떳떳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세. 열심히 살고…’,

“형님도 건강하시고요…”


장한 동생들은 다시 펌데일 부두의 표범호로 돌아갔다. 동생들이 떠나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미국 땅에 홀로 남았다는 생각에 갑자기 고독감이 빈 가슴 속에 파고들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쉬고 있었다. 그런데 이민국에서 명령이 왔다. 날더러 당장 출두하라는 내용이었다. 김동건,김진숙 선생은 함께 가자고 했다. 그러나 나는 단호히 거부하고 두 분께 말씀드렸다.


“동생들이 타고 온 표범호가 미국 항구에 정박해 있는데 내가 이민국에 가서 망명 신청을 하게 되면 밀항 경위와 동생들의 이름이 다 드러납니다. 그렇게 되면 정보를 입수한 미국의 정보기관이 조국의 정보기관에 그 정보를 제공할 것이고, 보안사나 안기부에 정보가 들어가면 두 동생은 말할 것도 없고 위험을 무릅쓰고 은산과 도피를 도와주신 분들,또한 밀항을 도와준 국내의 여러 분들에게 큰 피해가 가게 됩니다. 최소한 표범호가 미국을 떠나 벤쿠버에 가서 일을 보고 남미로 떠난 후 출두하겠습니다. 나에게는 나를 도와주신 모든 분들에게 피해 가 안 가도록 최선을 다할 의무가 있습니다. 7일 정도 지나면 출두하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씀드리고 이민국의 출두 명령에 완강하게 버텼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이민국에서 나를 체포하겠다는 협박해왔다. “좋다. 할테면 해봐라. 그러면 캐나다로 가겠다.’고 나도 똑같이 응수를 했다. 만약을 몰라 그날 밤은 배에 올라왔던 백인 목사 집으로 피신했다.

내가 그렇게 버티자 케네디 상원의원과 나의 변호사가 이민국과 의논하여 6월 I2일에 출두하는 것으로 타협을 했다. (나의 변호사는 김용성 박사와 이학인 선생님이 비용을 대서 급히 선 임해준 유명한,그러나 형편없이 보수적인 변호사였다.) 사실 나는 그때 여차하면 캐나다로 갈 각오를 했다. 마산에서 헤어질 때 용화더러 캐나다 동포운동가들에게도 연락해 놓으라고 했었고,시애틀에서 150km 정도 올라가면 철조망도 없는 국경선이 있는데 그런 국경선을 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했었다.


망명생활을 위한 각오와 다짐


이민국의 출두명령 때문에 일어났던 소동이 가라앉자 나는 평온을 되찾았다. 양복과 구두를 벗어던지고 편안한 옷과 운동화로 바꿨다. 이민국에 갈 때까지는 체력을 회복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약 1주일 동안 실컷 먹고 잤다.

덕분에 건강은 급속도로 회복되었으나 체중만은 일정정도 회복되고는 더 이상 올라가지 않았다.(15년이 다 된 지금도 키는 171cm인데 체중은 55kg밖에 안된다.)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고 긴장이 풀리자 나는 항해 중 화장실에 앉아 생각했던 것들을 정리하는 한편,망명 생활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시작했다. 다행히 낮에는 김동건 선생님 내외분은 식품점으로 출근하고 아들 용이는 학교에 갔기 때문에 혼자서 조용히 생각을 정리할 틈이 있었다. 나는 이렇게 미음을 다졌다.


“내가 미국에 있을 기간이 5년일지 10년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세월을 하루같이 광주의 원혼들과 고난 속에서 싸우고 있는 조국 동포들과 동지들,그리고 헌신적으로 도와주신 모든 분들을 생각하면서 전라도 촌놈 ‘합수’로 변함없이 살아가자. 부끄럼 없이 살아가자. 절대로 그분들을 배신하지 말자. 몸은 비록 이역만리에 있지만 마음만은 항시 그들 곁에 있다고 생각 하며 살아가자. 절대로 그들의 원망과 지탄받을 생활은 하지 말자. 절대로 편안한 생활은 하지 말자. 조국에 돌아갈 때는 떳떳하게 갈 수 있도록,살아 남은 죄와 도망친 죄를 깨끗이 씻고 갈 수 있도록 성실하고 철저하게 운동을 하자. 내가 미국에 온 것을 망명 도주로 생각 말고 내 스스로 크게는 조국의 운동권이,구체적으로는 광주의 운동권이 파견해서 나온 것으로 생각하여 철저한 사명감을 갖고 운동하자. 항시 조국 운동,광주 운동의 존엄을지키자. 절대로 훼손하거나 더럽히지 말자. 그리고 미국에 사는 만큼 미국을 객관적으로 보고,배울 것은 배우자. 해외에 나온 만큼 국제정치,국제사회에 대해서 열심히 배우고 해외 동포사회에 대해서도 열심히 배우자. 그리고 전망을 제대로 못해 엉터리 대책을 세우고 전망이 빗나가자 허둥댔던 지난날의 어리석음을 다시는 범하지 않도록 정세분석 훈련을 열심히 하자.”


망명 생활의 수칙을 정하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각오와 다짐을 한 나는 생활 속에서 지켜야 할 몇 가지 수칙을 독한 마음으로 정했다.


첫째,이승만처럼 미국화 되지 않기 위해서는 영어 안 쓰고(어쩔 수 없는 경 우에만 쓰고) 운전 안 하고 샤워 안 한다.

둘째,샤워는 조국에서처럼 한 달에 두어 차례 목욕하는 것으로 대신 한다. 셋째, 조국의 가난한 동포들과 감옥에서 고생하는 분들을 생각해서 침대에서 자지 않는다.

넷째,조국에서처럼 절대로 ‘내 것’을 갖지 않는다.

다섯째,생활의 긴장을 유지하기 위해,도망자라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 조 국에서 도피생활 할 때처럼 잠잘 때도 허리띠를 풀지 않고 그대로 잔다.


나는 조금 모진 데가 있어서 무엇이든지 한번 각오를 하면 거의 그대로 해내곤 했다. 특히 맹세를 하면 아무리 힘들어도 끝까지 지켰다.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내 친구 중에 집이 가난해서 중학교 진학을 못하고 고향에 있는 서당을 다니던 단짝이 있었다. 나는 그 친구를 찾아가 내가 도와줄테니 광주로 올라와 신문배달을 하며 중학교를 다니라고 설득했다. 그런데 자존심이 상했는지 그 녀석이 이렇게 말하며 버텼다.


“한문이 최고다. 한문을 모르면 사람 노릇을 못한다. 나는 계속 한문 공부를 하겠다.”


그래서 나도 우겨댔다.


“한글이 최고다. 조금 있으면 모두 다 한글만 쓰게 된다. 한문 공부는 필요 없다.”


그렇게 한참을 옥신각신하다가 화를 못 참은 나는 미련하게도 그 녀석 앞에서 이렇게 선언해 버렸다.


“내가 앞으로 한자를 쓰면 X새끼다.”


그날 이후 꼭 필요할 때 내 이름 석 자를 한자로 쓰는 것 빼고는 한 번도 한자를 쓰지 않았다. 그 대신 옥편과 국어사전을 끼고 살다시피 했기 때문에 한자를 읽고 이해하는 데는 남들에게 뒤떨어지지 않았다. 한자를 안 쓰고 못 쓰는 것 때문에 고통도 많이 당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민청학련사건 때 잡혀 들어가 수사를 받을 때였다. 수사관에게 내가 학교 이름과 본적 현주소를 한자로 못쓴다고 하자 그 수사관은 내자 자기를 희롱한다며 사정없이 두들겨 됐다. 내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해주자 그때는 또 반골이니 독종이니 하며 또 두들겨 팼다. 그런 미련한 짓을 중학교 2학년 때도 또 한번 했었다. 그때 나는 광장이 형님과 자취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형님이 싸준 도시락 반찬이 마음에 안 들어 발로 차버렸다가 심하게 얻어맞았다. 얻어맞고 화가 난 나는 울면서 선언해 버렸다.


“내가 다시 도시락을 싸면 X새끼다.”


그날 이후로는 최전방에서 군대생활을 하면서 작업 나갈 때 반합을 차고 나간 것 빼고는 도시락을 안 가지고 다녔다. 그것 때문에 고통도 많이 겪고 손해도 많이 봤다. 한창 클 때인 중고등학교 때는 거의 점심을 안 먹고 학교를 다녔으니 … (나는 93년 귀국할 때까지의 12년 동안 생활수칙을 다 지켰다. 다만 허리가 아파서 침 맞을 때 약 10일 동안만 허리띠 없는 운동복을 입고 잤다.)

어쨌든 생활수칙을 그렇게 정하고 나서 나는 한 가지 결정을 더했다. 나의 은신,도피와 밀항을 도와준 조국의 모든 분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조국 상황이 변해서 내 신분을 밝혀도 괜찮을 때가 오거나 내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할 때까지는 가명을 쓰고 산다는 결정이었다. 그 후 나는 시애틀에서는 ‘김일민’으로,나성에서는 ‘김상원’으로 이름을 바꿔가며 살다가 83년이 되어서야 내 본명을 썼다.

 

 

이민국 출두와 정치망명 신청


도착 후 4일이 지난 날 저녁이었다. 명 신청을 하려면 증빙 자료들이 필요한데 구할 방도가 없어 걱정이었다. 김동건 선생님께 이야기 했더니 창고에 신문과 잡지들을 많이 모아놨으니 한번 찾아보라고 하셔서 뒤져보았다. 놀랍게도 내 얼굴 사진까지 나온 5.18 관련기사는 말할 것도 없고 75년 2월에 석방된 민청학련사건 관련자 명단과 긴급 조치 9호로 감옥에 있을 때인 77년의 양심수 명단,그리고 79년 I2월의 긴급조치 9호 해제에 따른 석방자 명단까지 모조리 다 나왔다. 너무도 쉽게 걱정거리 하나가 해결되었다. 한 해외동포의 수집벽 덕을 톡톡히 본 것이다.

신문 잡지에서 찾은 내 증빙 자료의 번역과 변호사로부터 전달받은 정치 망명 신청 서류 작성은 김진숙 선생님이 도맡아 해주셨다. 하비 목사님도 몇 가지 추가 자료를 보내주셔서 나의 망명 신청 서류는 생각보다 쉽게 갖추어졌다.

6월 12일에 나는 김진숙 선생님과 함께 변호사를 따라 위싱턴주 이민국에 출두했다. 거기에서 지문 찍고 사진 찍고 나서 이민국 관리가 묻는 말에 대답하고 마지막으로 서류에 서명하는 절차를 밟아 정식으로 정치 망명을 신청했다.

나는 이민국 관리와 마주 앉았다.

“당신이 타고 온 배가 처음 출항한 곳은 어디인가?”

“부산이다.”

“출항 날짜는?”

“5월 9일.”

“밀항을 주선해 준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들의 이름은?’

“그들이 누구인지 이름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다만 밀항을 직업적으로 하는 사람들 같았고, 그 대가로 나는 돈을 주었다.”

“누군가 배를 타고 내릴 때 도와줬을 것 아닌가?”

“밤중이었고,눈이 헝겊에 가려진 채 배를 타고 내렸다.

“배에서 식사를 넣어준 사람이라도 있었을 것 아닌가?

“작은 구멍으로 음식물이 들어와 알 수 없었다. 그보다도 나는 거의 굶었다.”


나는 시종일관 거짓말을 했다. 서류 작성을 다 마치고 서명을 하라기에 나는 서류를 쭉 훑어보았다. 그런데 타고 온 배이름 란에 표범(Leopard)이라고 씌어 있어서 순간적으로 부끄러웠고 동시에 걱정이 밀어닥쳤다. 조국의 안기부나 보안사에 이 정보가 들어가지 않기를 빌면서 나오는데,등 뒤에서 그 관리가 혼잣말로 “말썽꾸러기!”라고 해서 나는 돌아보며 씩 웃어주었다.

나는 망명 신청을 하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것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50년대까지 망명법 제정을 마친 서구와는 달리 미국은 80년 4월에야 망명법을 제정했다. 그 이전까지는 정치 망명 신청자들에 대해 그때그때 정치적으로 선별해 영주권을 주었다. 미국이 뒤늦게라도 망명법을 제정한 까닭은 베트남전이 끝난 후 쏟아져 나온 선상난민(Boat People)들을 서구 각국과 캐나다 등이 적극 나서서 난민으로 받아들일 때 가장 큰 책임을 지고 있으면서도 법이 없다는 이유를 내새워 방관만 하고 있던 미국이 세계 여론의 압력을 집중적으로 받았기 때문이었다. 진보적인 서구의 망명법과 달리 미국의 망명법은 정치 망명자들에 대한 특혜나 우대가 없었다. 미국은 정치 망명 신청자들 중에서 다른 조건은 다 갖추었다 할지라도 권력을 이용해 남의 인권을 유린한 경력이 있는 사람,공산주의자,파렴치한 범죄를 저지른 경력이 있는 사람은 받아주지 않았다.


6년간 끌어버린 망명재판


미국정부는 나의 정치 망명을 허가할 것인지 여부를 결정하는 재판을 그날부터 6년 동안이나 열지 않고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계속 연기만 했다.

여러 변호사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나의 정치 망명 신청 조건은 특A급이라 절대로 거부할 수 없다는 것,재판을 질질 끄는 이유는 전두환 정권을 지지하는 미국 정부가 나의 망명을 허가해 주자니 외교적으로 곤란하고 거부하자니 나의 망명 조건이 너무 확실해서 입장이 난처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망명 허가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망명 재판에 계류 중이었기 때문에 나의 미국 체류는 합법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신분증이 없기 때문에 미국의 다른 지역을 다니는 데 어려움이 많고 일자리를 구하기도 어려웠다.

나는 9월 말부터 변호사를 통해 이민국에 떼를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재판을 끌려면 나를 불법 입국자들을 가둬두는 수용소에 넣어달라고 사정없이 떼를 썼다. 그랬더니 이민국은 10월 10일 경에 나에게 노동허가서를 발급해주었다. 노동허가서를 받아보니 황당했다. 입국 경위란에 ‘밀항자’라고 찍혀 있었던 것이다. 우리 동포 업소에 취직하기는 애초부터 틀린 노동 허가서였다. 나는 투덜대기는 했지만 그래도 사진이 없는 증명서라도 하나 갖게 되니 기분이 좋았다.

노동허가서를 발급 받은 며칠 후 변호사로부터 필요하면 식품 교환표(Food Stamp)를 신청하라는 연락이 왔다. 식품 교환표란 미국 정부가 빈민들이나 난민들에게 주는 월 약 10만원에 해당하는 일종의 식품 배급표다. 그걸 가지고 식료품 가게에 가면 담배나 설탕,커피,고기 같은 것을 제외한 나머지 식품들을 구입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왠지 싫어서 거절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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