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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34-김남주, 먼저 가다2019-01-01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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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동지는 가고

 

1994년 2월 13일은 슬픈 날이었다. 벗이자 동지인 시인 김남주가 눈을 감았다. 긴 감옥살이 때문이었을까? 췌장암이었다. 윤한봉에게 김남주는 형제나 다름없었다. 김남주는 여동생 윤경자의 집에 오면 늘 숯처럼 더러워진 속옷을 벗어놓았다.


남주 오빠는 우리 집 올 때는 속옷이 숯검댕이가 되었지. ‘경자야, 팬티 런닝구 새로 주라’해서 갈아입고 가요. 세상에 내일 장가가신다는 분이 목욕을 안 해요. 우리 집에서 장가를 가셨거든요. “오빠 목욕했소?” 그러니까 “장가 가믄 목욕해야 되냐?” 묻는 거에요. 세상에 장가 가면서 목욕도 안 해요. 그래서 목욕시키고 속옷 입혀서 장가도 보냈죠. 틈나면 나한테 와서 용돈 달라 해요. 나한테 진짜 동생처럼 했어요. 우리 집 와서 가져간 게 주로 속옷이야. 근디 오빠가 내놓은 옷은빨아서 입을 수가 없었어요. 재활용할 수가 없었당께.

 

석방된 김남주는 옥바라지를 해온 박광숙과 결혼식을 올린다. 김남주는 진심으로 윤한봉을 존중했다. 박광숙은 남편에게 묻는다. 

윤한봉이란 분은 어떤 분이세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순결한 사람이야. 백 프로 순결한 사람, 추호의 거짓이나 허황됨이 없는 철저한 사람이지.

 

‘가장 순결한 사람’이라는 시인의 찬사는 허언이 아니었다. 윤한봉은 곧바로 ‘김남주 기념사업회’를 추진했다. 시비 건립을 위한 모금 운동에 들어갔다. 기금이 다 모이자 김남주 시비 건립에 들어갔다. 1996년의 일이다. 시청 공무원들을 설득해 광주시 중외공원 양지바른 곳에 김남주의 시비를 세웠다.

나는 윤한봉 선배가 작고하기 몇 해 전, 김남주에 대한 선배의 회고를 들은 적이 있었다. 다행히 선배의 육성을 녹취해 보관한 글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김남주 시인이 출소 후 겪었던 아픔을 여기에 그대로 내놓는다.

 

 남주는 한마디로 ‘기인’이다. 남주는 진지함을 속에다 감춰버리곤 했다. 그 진지함을 못 읽은 사람은 그를 괴물이라고 생각한다. 남주의 일화는 무지하게 많다. 남주를 모르는 사람은 “뭐 그런 새끼가 있냐?”고 할 정도이다.남주가 전남대 원서 내려갔다 영문과에 여학생이 제일 많아 영문과로 써 버렸다. 완전히 소년이지. 영문과 이경순 교수를 짝사랑했다. 수업시간에 영어 선생이 뭐라고 떠드니까 뒤에서 ‘허허허’ 웃어. 갑자기 교실이 찬물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교수가 당황해서 쳐다보니 남주가 “웃기지 마슈”하며 씨익 웃고 나와 버렸다. 실력도 없는 것이 아는 체 한다는 거였지. 매일 책 도둑질이나 하고 다니고 카츄사 다니던 친구 이강한테 책 빌려오라고 하고, 영어 실력이 뛰어나니까 번역해서 돌려보고 그랬다.


후배들에게 《파리코뮌》 가르치다 수배상태가 된다. 도피하면서 목포 결핵 요양원에 숨어있다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에 있는 동안 석률이가 꼬드겨 남민전에 가입한다. 78년 7월 여름 때쯤이다. 내가 서울 남주 도피처에 찾아갔더니 남주가 이런 말을 했다. “형님이 깃발을 드시면 내가 프로파간다를 맡겠다.” 지하조직을 만들어 참가하자는 이야기였다.


내가 미국에 있을 때 남주가 전화를 했다. 후배들이 엄청 몰아친다는 거였다. 자신을 재교육대상으로 취급한다는 하소연이었다. 당시 강00 교수 같은 방방 뛰는 친구들이 많았다. 이 친구들은 10분 정도 이야기 해보고 ‘저거 재교육대상’이라고 낙인찍고 그랬다는 거다. 남주가 많이 당했다. 이 과정에서 남주 상처 무지하게 받았다.

한번은 남주의 강연 다니는 문제에 대해 내가 비판한 적이 있다. “남주 씨, 강연 그만 댕겨.” 남주가 그랬다. “형 먹고 살아야 하는데 어쩌겠어요?” 강의 끝나고 뒷풀이 할 즈음, 몇몇 후배들이 그랬다. ‘천하의 김남주도 물 건너갔구나.’ 그런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그런 말 한마디가 남주에게는 상처였다.


내가 귀국하고 망월동을 찾았다. 추모사를 한 적이 있다. 그날따라 날씨가 무지하게 좋더라. ‘사상의 거처’ 이야기하면서 내가 그랬다. 오늘 날씨를 보니 남주가 ‘사상의 거처’를 찾은 것 같다고 했던 적이 있다.

미국에 있을 때부터 허리가 아팠다. 늘 가슴이 답답했다. 윤한봉이 자신에게 불치병이 있음을 발견한 것은 김남주의 장례식 때였다. 묘를 쓰기 위해 산길을 오르는데 숨이 차서 걷지를 못했다. 검진을 맡아보니 폐기종이었다. 폐가 조금씩 죽어가는 병이었다. 현대의학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한 병이었다.


건강이 나빠졌다. 서양의술로는 못 고친다는 무서운 불치병이라는 폐기종에 걸렸다. 대기오염이 심한 도시생활은 피해야 한다는 고약한 병이다. 악화된 건강은 나의 의욕과 열정을 많이 빼앗아 갔을 뿐 아니라 내가 귀국 후 세운 중장기 계획까지 변경시키고 말았다. 나는 이 글을 쓰고 나면 만사를 제쳐두고 숨은 명의들을 찾아다니며 본격적인 치료를 할 작정이다. 나는 건강을 다시 회복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수평선을 향해 달려갈 것이다. 

 

그래도 담배를 끊고 운동을 하면 더 나빠지지는 않으리라는 희망을 가졌다. 장례식을 치르고 윤한봉은 조그만 공간을 확보한다. 낡은 건물의 3층을 얻는다. ‘민족미래연구소’의 현판을 건 것은 1995년 3월이었다.

윤한봉은 광주 수창초등학교 뒤, 골목에 위치해있는 3층짜리 건물의 맨 위쪽 공간을 얻어서 서서히 자신의 귀국 생활과 활동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민족미래연구소라는 간판은 사무실을 얻어 단장을 시작한 뒤 거의 1년여가 지나서 주변 사람들과 함께 상의해 결정한 이름이었다. 조진태는 회고한다.

 

민족미래연구소는 그의 민족적 관점과 민중적 자세와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명칭이었다. 변화한 정세와 상황을 분석하고 연구해 민족의 미래와 민중의 삶을 바꿀 수 있는 활동을 펼치겠다는 자신의 뜻과 의지가 담긴 명칭이었다. 민족미래연구소의 개소식에는 70년대 민주화운동의 기라성 같은 인사들이 전국 각지에서 오셔서 축하했다. 건강상의 이유로 문을 닫기 전까지 민족미래연구소는 혼돈의 시대를 가름하는 나침반이었다.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살고자 하는 이들의 의지처였으며 극렬한 상품 세상의 타성에 젖은 사람들에게 회초리의 상징이었다. 그곳엔 항상 따뜻한 차와 정갈하기 짝이 없으면서도 포근한 촌사람이 앉아 있는 곳이었다. 낡은 건물의 3층은 아늑해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때로는 형형한 눈빛으로, 때로는 한없이 촌스러운 합수로 변함없었던 선배님과 민족미래연구소였다. 회의는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연락을 제대로 취하는 것은 기본. 회비를 걷은 내역은 물론, 사용처 까지도 10원짜리 하나 틀려서는 안 되는 것. 한번은 해맞이 모임 때 소식지에 컬럼 형식의 글을 허락도 맡지 않고 회원들에게 발송했다가 단단히 혼난 적이 있었다. 눈물이 쏙 빠지게 혼을 내셨다. 한동안 먹먹해서 사무실에서 점심을 먹을 수가 없어서 핑계를 대고 따로 밖으로 돌면서 해결한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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