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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30-해방의 소리2019-01-01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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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해방의 소리

 

1987년부터 ‘재미 한청련’은 ‘해외 한국청년운동연합체’(해외 한청련)의 건설을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청년운동의 불모지인 캐나다에는 권혁범 회원을 파견하고 유럽과 호주에는 윤한봉이 직접 갔다. 1987년과 1988년의 8월 대회에도 세 지역의 청년들을 초청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 1987년에 캐나다에 디딤돌이라는 청년운동체가 만들어져 재미 한청련과 연대활동을 해오다가 1990년 3월에 디딤돌은 ‘재캐나다 한국청년연합’(재가 한청련)으로 발전했다. 독자적으로 1987년부터 한국민족자료실을 설립해 운영해오던 호주 청년들도 90년 3월에 ‘재호주 한국청년연합’(재호 한청련)을 결성했다.

개인적 차원에서 운동에 참여했던 서독의 청년들도 1990년 10월에 ‘재유럽 한국청년회’(재유 한청)를 결성했다. 그렇게 해외 각 지역에 청년운동체가 결성되자 미국을 포함한 4개 지역 청년 운동체 대표들은 1990년 10월에 뉴욕에서 열린 ‘조국의 평화와 자주통일을 위한 해외동포대회’에서 재미 한청련, 재호 한청련, 재가 한청련, 재유 한청련을 회원 단체로 하는, 해외운동 사상 최초의 청년운동 연합체인 ‘해외한청련’(공동의장: 정민, 최문현, 김나경, 박희원)을 결성하게 되었다. 마침내 일본을 제외한 해외의 청년운동 단체 들을 하나로 묶는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흘러라, 네 온갖 서러움, 더러운 네 굴욕과 수모……”


공연은 가슴을 에는 듯 애절한 독창으로 시작되었다. 키 크고 잘생긴 얼굴에 시원스런 음색을 가진 뉴욕 한청련 회원 정승진의 노래였다. 웬만한 가수보다 뛰어난 정승진의 가창력이 유럽인 청중들을 감탄시키는 동안, 최용탁 회원은 준비한 슬라이드를 무대로 쏘았다. 광주학살의 참상과 봉기한 시민군의 모습이 담긴 사진들이 한 장씩 스쳐갈 때마다 유럽인들은 낮은 신음을 냈다.

이어지는 마당극의 분위기는 또 달랐다. 미국에 대한 해학과 풍자는 관객들을 폭소에 빠뜨렸다. 마지막 박력 넘치는 사물놀이와 함께 “반전반핵, 양키고홈”의 구호를 외치며 풍물패가 무대를 뛰어 돌자 다들 박수를 치며 브라보를 외쳤다.

1991년 10월,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의 한 강당에서 열린 공연이었다. 주최는 IRA 곧 아일랜드공화국군이었다. 강당 바깥에는 무장한 영국군이 삼엄한 경계망을 펼치고 있었다. 공연자는 정승진을 단장으로 한 한청련 문화선전대 10명이었다. IRA 측은 선전대의 작은 규모에 걱정을 했다. 하지만 눈물과 웃음, 감격으로 가득한 한청련 문화선전대의 공연은 20년 넘게 내전의 고통을 겪어온 북아일랜드 인들을 열광시키기에 충분했다.

한청련 문화선전대의 유럽순회공연은 제2차 국제평화대행진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다. 한청련은 1989년 제1차 평화대행진을 마치면서, 2년에 한 번씩 행진을 하겠다고 선포한 바 있었다. 1991년 한청련은 문화선전대를 꾸려 유럽순회공연을 하도록 했다.

국제연대를 담당한 한청련 회원은 이성옥과 정승은이었다. 이들은 문화선전대의 유럽 일정을 아주 꼼꼼하게 세웠다. 많은 유럽인들의 도움을 얻어 한청련 문화선전대는 50일간 유럽 6개국을 순방하며 17회의 공연을 했다. 호주의 멜버른과 시드니까지 건너가 네 차례 공연을 했다.


프랑스공산당 기관지 《르 휴메니떼》가 주최하는 파리 축제 때였다. 흥분과 감격의 공연을 마치고 저녁 준비를 할 참이었다. 북한 《로동신문》 직원 한 사람이 김치를 싸가지고 왔다. 하지만 북한과 접촉하거나 북한으로부터 지원을 받는 것은 문선대원의 금기였다. 마침 문선대를 찾아온 망명객 홍세화는 같은 민족의 인정으로 생각하고 받아야 한다고 했다. 대원들은 망설였다.

“홍세화 선생은 정으로 가져온 음식이니 고맙게 받는 게 좋겠다고 했어요. 하지만 우리는 논의 끝에 돌려보내기로 했어요. 그런데 며칠째 김치 맛을 보지 못했던 우리가 몰래 김치의 일부를 섭취했음을 이제는 고백해야겠네요.” 문화선전대의 짐꾼 최용탁의 회고다. 그는 1990년에 처음 만난 당시의 윤한봉을 이렇게 회고한다.


한청련에 가입하고 두어 달쯤 지났을까요. 나는 뉴욕에서 처음으로 윤한봉 선생을 만났어요. 만나자마자 깊이 빠져들었어요. 윤한봉 선생은 호지명이었어요. 삶의 모든 순간을 조국의 운명과 함께 하는 혁명의 화신이었지요. 이 세상에서 가장 눈부신 사람, 지금도 내 가슴을 설래게 하는 사람, 그분이 합수 형님이지요. 


스물다섯 섬세한 감성을 가진 문학청년의 눈에 비친 윤한봉의 한 장면이다. 1990년이었으니 마흔 두 살 때의 모습이었다. 미국에 건너간 지 10년째, 좌우 양극단에 선 인사들과의 비방과 견제에도 불구하고 줄곧 200~300여 명의 탄탄한 정예회원을 유지하고 있는 한청련의 지도자였다. 한국의 진보운동 사상 최초로 수십 개국의 진보운동가들을 결합시켜 국제평화대행진을 성사시킨 국제적 지도자이기도 했다. 광주에서는 후배들의 사랑을 받는 선배였다면, 미국에서는 선배를 넘어 존경받는 지도자가 되어 있었다. 윤한봉의 한평생을 도표로 그린다면 미국에서 그 정점을 찍게 될 것이다.

윤한봉의 마음은 그러나 항상 조국을 향해 열려 있었다. 십 년이 되도록 그는 여전히 침대를 거부하고 수배자임을 잊지 않기 위해 옷을 벗지 않고 혁대도 풀지 않고 잤다. 술도, 맛있는 음식도, 편한 잠자리도, 여성도 없이 오로지 24시간 운동만 생각하는 자신에게 허락한 유일한 오락은 담배뿐이었다. 도청의 비극이 벌써 10년이 흘렀음에도 그는 여전히 구석에 쪼그려 앉아 등을 잔뜩 구부린 채 담배를 피우며 광주민중항쟁의 윤상원과 후배들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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