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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전남대 축산학과 입학2018-12-27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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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전남대 축산학과 입학

 

구술자: 그런데 그때 보니까 또 재수 없이 그때 예비고사 대학 입학 예비고사라는 게 생겼어. 내가 고등학교 졸업할 때 그때는 없었는데. 과목이 무지하게 많애진 거여 다해야 될 건데. 책을 사다 보니까 이만큼 되더라고. 근디 인자 내가 그전부터 농촌에 들어가서 살고 싶었는데 사실 광장히 낭만이고 목가적으로 생각한 거지. 초지를 가꿔가지고 가축들 영화에서 본대로지. 양이나 치고, 과수원이나 운영하고 하는 식으로 해가지고 신석정씨 시 같은 거 좋아하고 그럴 때니까 근게 인자 농대 간다고 그래갖고 예비고사 보고 뭐 힘든데 가 고생하는 거 그냥 전남농대 축산과 들어갔어. 인제 자취생활 하다가 2학년 때부터 전대 뒤에 지금은 아파트가 서버렸던데 바로 문리대 뒤에 하숙, 하숙촌이었는데 거기서 하숙생활을 했죠. 이제 난 대표적인 모범생이 됐지 이제. 군에 있으면서, 부모님 속 썩인 거 학교 다니면서 고등학교 때, 공부안하고 맨 땡땡이나 치고, 그런 거 반성도 많이 했고. 내 인생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을 했고. 지난날 그렇게 부실하게 살았던 것부터 반성하고 알차게 정말 성실하게 살아야겠다 그래가지고 고무신 끌고 다니고, 그냥 예를 들면 전대뒤에서 하숙할 때 한 달에 시내 한번이나 나올까 정도로. 나오지도 않고. 공부 열심히 했지. 그러니까 인자 농대에서 축산과에서 아예 교수들이 나에 대한 기대가 커 가지고 유학 갔다 와서 강단에 다시 서라고 교수되라고. 그 이를테면 2학년 때부터는 아예 방학 때 연구실하나를 줘가지고 나보고 공부하게 하고. 방학 때도 집에 잠깐 들렀다 올라와서 인자 거기서 공부하고 그럴 정도였어. 모범생이었지. 학생들에게 나이도 들었겠다, 덜렁대니라도 나잇값 할라고 그러잖애요. 그러듯이 조심하다보니까 애들이 형님 형님하고 따르고, 나는 또 인자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 뒤늦게 정신차려갖고, 만학도가 돼서 대학에 들어온 것인디 영 부끄럽고 그래서 일고 후배들한테도 말을 안 놓고, 형선이 덕기, 이런 식으로 야! 소리 안 하는게 습관이 돼가지고, 그거 군대에서 길러졌는데 내 밑에 졸병들한테 손을 안 댈려고 하다보니까 말을 고쳐야겠더라고. 야, 그러면 이새끼야 저새끼야가 될 수 잇는데, 이를테면 김일병, 그러면 0새끼야, 이렇게 문법적으로 안 된다고. 그래서 김일병 이것 좀 하지, 김일병 이리좀 와. 이런 식으로 끝에를 애매하게 하다고니까 몸에 배버려서 후배들한테도 말을 안놔. 지금도 그러는데 야, 자를 안 하는데 그래갖고 혼자서 모범적인 생활을 하다가, 아버님은 인제 옛날로 돌아오니까 좋아하고, 광장이 형님은 유학 보내겠다고 하고. 그러고 있는데 내가 1학년 때 무슨 일이 있었냐면 대통령선거가 있었고, 김대중씨가 그때 박정희한테 도전했지. 그러고 이제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고,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박정권에 의해서 대학의 교련교육이 시작이 된다고. 그래서 그때 이제 교련반대시위, 학원 병영화반대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났죠. 대학에서 그런데 자꾸 이제 그 후배들이 시위 같은 거 앞장서서하는 친구들이 나를 꼬드기는 거야. 끌어들이려고. 내가 들어갔을 때가 전남대 운동사에서 한 획이 그어지는데, 왜냐면은 그 전까지만 해도 전남대학교에 운동의 맥이 형성이 안됐어요. 맥이. 그런데 71년부터 이제 전남대 운동의 맥이 형성이 되요. 그게 뭐냐면 광주일고가 이제 내가 11횐데 서중 우에가 이제 고등학교가 생긴거죠. 그래서 인제 서중보다 역사가 짧지. 광주 그 일고가 가면 학교 교정에게 학생 독립운동 기념탑이 있어. 인제 광주일고생들, 서중생들은 긍지로 알지. 광주 학생운동의 본거지다. 그런 곳인데 거기에 그 역사적인 영향력이라는 게 참 거 참 누군가 한번 그것도 학자, 학문적 접근을 해야 하는 부분인데. 그 영향력이라는 게 수량화 할 수 없는데 엄청난 거예요. 그게. 엄청난 건데. 항일독립운동과정에서도 학교에 독서회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해요. 일제하에서도. 독서그룹이 있어가지고. 그것은 인제운동을 주도하고 그랬는데. 전남대, 아니 광주일고에가 특활이라고 특별활동이라고 해가지고 일주일에 한번씩 웅변 좋아하는 친구들 이리 모이고 그런거 있잖아요. 서예 좋아하는 반 서예반 있고 그러듯이. 거기에 인자 향토반이라는 게 있었어요. 그래가지고 인자 향토사랑이 어떻고, 농촌체험하고 봉사활동도 하고. 거기에 몸담았던 학생들 중에 일부가 광랑이라는 일종의 서클같은 것을 만들었어요. 그 광랑이 향토반에 다 들어갔다고 보믄 돼요. 인자 그 광랑이 빛 광자 광주사내, 사내 랑 자해가지고. 광랑이라는 서클이 있는데, 이 광랑이라는 서클이 6흰가에 선배들에 의해서 6회 때부터 광주 학생운동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대목인데. 6회, 6회들이 만들었어요. 근데 이제 그 광주사내들의 모임에서 자기들끼리 이제 학습을 하는데 독서회 같은 거니까. 당시로는 아주 불순한 공부들을 했다고. 그래가지고 여러분들이 들어서 알랑가는 몰라도 쿠바인의 입장에서 미국에 대해서 맹비판을 한 리슨 양키라는, 양키야 들어라 뭐 그런 책이 419이후에 출판이 됐었다고요. 금서로 돼 있다가. 그런데 516 쿠테타가 나면서 다시 금서가 됐지. 그게 일반인들과 접촉이 안 되는 책인데. 그런 책을 놓고 미제국주의의 진면목이 무너가를 공부한다던가, 이런 식으로 해갖고 어떻게 보면 쪼금 붉으스름했지. 그러니까 자기들이 자칭 사회주의라는 사람들도 있었고 할 정돈데. 거기에 선배들 중에서 9회선배가 이제 반공법사건 같은 걸로 좀 들어가고. 10회가 통역당 막둥이로 어린 통역탕으로 해가지고 고생도 하고.

면담자: 그 분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구술자: 근게 9회 조용호, 김민혁, 아니 조용호씨가 이상한 책들 붉으스름한 책들 가방에 담고 기차타고 내려오다가 비슷한 가방하고 바꿔들고 나와 브렀어. 그래갖고 인제 그 다른 사람이 집에 가서 본 게 이상한 책들이, 가서 경찰에 신고를 해가지고 혼난 사건이고. 10회가 박경호 선배가 인자 통역당 막둥이 들어갔는데. 거기에 인제 일고 14회, 그러니까 내 3년 후배들이 이제 들어가 있는 사람이 정상용, 국회의원. 518항쟁지도 대변인 아니 외무부, 외무부장 맡았었지. 이양현 거기도 518당시 그 기획의원으로 도청항쟁지도부 있었고, 김이택 그것도 이제 나중에 긴급조치로 빵잽이하고, 민청련 의장도 하고 그랬지. 지금은 공직에가 있는데. 박영규, 영신이 김영신, 박영신, 그렇게 되고 이제 16회가 최철희, 19회가 정용화, 정용화도 518관련해서 그렇고. 그런데 근데 이 14회 애들이 대학에 들어와 가지고 전남대, 만든게 정상용, 이양현이 주축이 돼갖고 이 광랑 애들이 만든게 전남대 민족사회연구회라는 걸 만들었어요. 민사련이라고 그래가지고 이 민족사회연구회에 또 일고 후배들이 이제 김정길, 이제 뭐 김정길이야 민청사건부터 남민전 등등으로 징역 좀 많이 살았지. 박형선, 거기도 민청학련사건. 문덕희 이런 친구들이 이 민족 사회연구회 들어가서 다 일고 출신들이에요.

면담자: 선생님 잠깐만요, 향토반이 일고에 있는 동아리죠?

구술자: 일고에 있는 일종의 동아리지. 특별활동 아니 동아리가 아니라 일종의 특활한 동아리지. 독서 발표 같은 거 하고 방학 때 농활을 했던 것이 향토반이야. 거기 최초의 향토반을 만든 사람이 지금 곡성군수 고현석씨에요. 6회들. 이사람 이외도 두사람, 세사람이 만든 건데, 이 광랑이 인제 향토반에 들어가서 나중에는 좌지우지하게 된 거지.

면담자: 광랑은 일고생들의 모임인거죠? 향토반 출신의 전남대생이 아니라.

구술자: 일고의 광랑이라는 독서서클이, 일종의 불온한, 요즘 말로 하면 서클이 있었는데 이 서클맴버들이 대부분 다 향토반에 들어가 있었지. 그래가지고 향토반에 영향을 줬지. 향토반 출신들이 또 많이 운동에 참여하게 됐는데, 이 광랑이 벌써 9회 조용호 선배가 감방에 가고 10회 박경호 선배가 감방에 갈 정도로 문제가 있는 서클이었지. 요 출신들이 14회가 대거 전남대에 와가지고 정상용, 이양현이가 전남대에 민족사 연구회를 만들어요. 여기에 일고출신과 일고출신 아닌 사람들도 일단 요즘 말로 하면 사회과학 서클이야. 이념서클 같은거.

면담자: 민사련이요.

구술자: 그렇지. 민족사회연구회가 이 친구들이 중심이 돼서 전남대에 운동의 맥을 형성해. 그러고 이 사람들이 71년 학원 병영화 반대, 교련반대시위 여기에 주축이 되지. 주도, 여기서 주도를 해요.

면담자: 이거는 합법적인 서클은 아닌 거죠? 등록돼 있거나 그런 서클은 아닌거죠?

구술자: 그때 당시는 등록이고 뭐고 없지.

면담자: 지하서클이라고 보면 되나요? 그런 개념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건가요?

구술자: 아니 그때만 해도 긴급조치가 발효되기 전까지만 해도 그때 당시 서클 갖고 탄압하거나 그럴 때는 아니야. 초기 그러니까 교련이 인제 도입도리 때니까 그때만 해도 나았지. 그래갖고 71년부터 학원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이 시작된다고. 왜 그러냐면은 전국적으로 교련반대시위에 주도적 역할을 한 친구들 강제입영 시켜버리죠. 강제입영대상자들이 여기에 인제 정상용, 이양현, 김진, 그다음에 또 갑자기 이름들이 생각 안 나네. 원수들. 그 여러 명이 인제 전남대에서도 강제입영이 되죠. 근데 이제 이게 알아 둬야하는데 이 교련반대시위 할 때 서울에 위수령이 내려요.계엄령하고 다르죠. 위수령이니까. 계엄이 내리면 이제 군법회의가 만들어지고 사법부, 행정, 다양한 분야에서 군이 이제 권력을 장악하는데 이제 위수령은 일정한 특정한 치안질서유지를 위한 특정한 임무만 띠고 군인이 투입 되는 건데, 위수령이 내려지는 건데 지방에서는 유일하게 전남대학교 교정에 그 전에는 교정으로 안 들어왔어요. 학생시위가 아무리 심해도. 학내 진입이 없었다고 그 전까지만 해도. 80년 이후에는 일반화 돼 브렀지만. 진입자체가 상주화 하다시피 해블고. 처음으로 대낮에 이제.

구술자: 그래서 학내 경찰이 직접 들어오고 그랬는데, 그때만 해도 하여튼 어쨌든 그 저 교련반대 시위를 하는데 자꾸 이거 민사련 후배들이 나를 꼬드기는 거예요. 인자 내가 일정한 학생들에게 영향력이 있는걸 알고 자꾸 꼬드겨. 이제 슬금슬금. 그래서 인자 나는 알면서 속이 다 보이지 나를 살살 흘리는 거 알면서도 이제 모범생활 공부나 해야지 고등학교 때 허황방탕하게 살았응게. 아고 다 잊어블고 총장 이름도 모르고, 누가 누군지 하나도 총장 이름이 누군지도 모르고 하여간에 학교 뒤에서 농대까지 걸어서 수업 받고 점심때도 밥 먹으로 왔다가고, 일요일에도 학교 나와서 공부해버리고 도서관에서 방학 때도 연구실에 가서 공부해버리고 그런 식이었어. 그런데 경찰이 학내 대낮에 진입할 땐데 왕창 모여 있어 본관 앞에. 지금은 박물관 아니 사회 교육원인가 그게 됐지.

면담자: 옛날 구 본관이요?

구술자: 구 본관, 그 앞에 인자 학생들이 몽창 모여 있을 땐데, 긍게 나는 꼬드겨도 주모자급으로 안들어간 것 뿐이지 명분은 시위니까 소극적 참여는 해서 따라는 다녔지. 시위대를. 앞장만 안 스고. 그런데 그날 경찰이 바깥에 후문, 정문 다 싸고, 곧 진입할거라 그래가지고 교수들, 교직원들이 막 나와 가지고 해산하라고 설득할 때여. 근데 한 학생이 일어나가지고 비장한 각오를 표하면서 이 자리에 원자탄이 떨어져도 우리는 자리를 떠선 안 된다. 어마막지한 소리를 하더라고. 그래야지 하고 앞줄에서 세 번째 줄에 앉아있었는데, 밀고 들어오는 거여. 노래 부르고 어쩌고 앉았어 인자 원자탄이 떨어져도 가지말자고 박수 받고 그랬으니까 그럴 줄 알았지. 근데 파바박 뒤가 무너지는 소리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난리가 나니까 돌아보니까 내가 제일 뒤에 앉아있는거야. 다 도망가 블고. 한참 이러고(손 올리고) 막 해쌌고 그 때만해도 정형화된 외치는 그것이 없었으니까 나도 모르게 일어나가지고 (건물)안으로 들어가 브렀어. 본관 안으로 들어갔다 한참 있다가 도망간 사람들 쫓아다니고 도망 다니고 그러다가 끝났어. 최루가스가 난리가 났지. 날더러 인자 모두들 안에 본관에 들어온 사람들보고 나가래. 교수들이 꼴보기 싫다고. 우리들이 해산하라고 할 때 했으면은 이런 꼴 안당할건데, 새끼들아, 최루탄에도 도망간 새끼들이 웬 말이 웬 말이 많냐고. 그래갖고 막 조롱을 하는 거야. 꼴 보기 싫다고 다 가라고, 그러면서 교직원들한테 쫓아내라고, 그래갖고 인자 나오는데.(자존심이)망가질 대로 망가져 나오는데 거기 경찰 놈 새끼들이 서 가지고 있으면서 막말로 나 같으믄 뭘 떼어 블겄다 새끼들아 막 어쩌고. 처음부터 해산을 하던지 그렇게 도망을 가블라믄. 그러면서 야유를 하는 거예요. 그 야비를 받으면서 나와 가지고 집에 오는데 얼마나 속이 뒤집어질 거여. 집에 와 가지고 이발소 가서 머리를 싹 밀어블고는 다짐을 하기를 한목숨 걸고 할라믄 하고, 말라믄 말지 어정쩡하니 뒷따라 대니다가 이런 수모를 당한다고 다시는 이런 일 없다. 할라믄 하고 말라믄 말고. 다시 한번 내가 각오를 단단히 하고 머리를 밀어 브렀는데, 그래가지고 이제 어쩌고 시위 어쩌고 강제 입영한 애들 당하고, 한풀 꺾였지. 유기정학 무기정학도 꽤 많이 당했고. 그래가지고 인자 민족사 연구회가 그 된서리를 맞고 이름을 바꾼것이 이제 교양 독서회에요. 요것도 민청학력 사건 때부터 깨지지. 근데 이제 그렇게 됐는데, 아예 담 싸브러. 머리 깎고 인자 그라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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