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수언행록

 
 
 
제목23-어머님2019-01-09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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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이 찾아 오시다

 

89년 봄에 팔순이 다 되신 늙은 어머님이 오셨다. 그동안 몇 차례 전화를 통해서만 목소리를 들었던 어머님이었다. 80년 5`18 이전에 뵌 후 9년 만에 다시 뵙게 된 꿈에 그리던 늙은 어머님,내가 운동을 해도 한 번도 막지 않으시고 결혼하라는 조건만 다시던 어머님,80년 초에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도 “4남 2녀 중 너만 남았다. 너를 결혼 못 시키고 죽으면 저승에 가서 네 아버지를 무슨 낯으로 뵙겠냐?”며 들들 볶으시던 어머님! 72년 박정희의 유신쿠데타에 충격을 받아 운동에 뛰어든 나는 74년 초에는 죽을 각오로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사전에 아버님께 말씀드려야겠다고 생각해 긴급조치 4호가 내려지기 며칠 전인 3월 말경에 고향에 내려가 아버님께 말 씀드렸다.


“죽을 각오로 싸우겠습니다.”

“해라. 그러나 앞장은 서지마라.”


예상했던 대로 아버님은 말씀하셨다. 공과 사가 분명하신 아버님은 공적 입장에서는 하라고 허락하셨고 사적인 입장에서는 자식의 피해를 걱정해 앞장은 서지 말라고 하신 것이었다. 그 후 내가 아버님을 다시 뵌 것은 대전교도소의 면회실이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75년 2월에 내가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나와 보니 아버님은 20일 전에 돌아가시고 안 계셨다. 모든 사람들은 나 때문에 울화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 뒤로 큰아들은 전두환이 욕했다가 반공법으로 감옥에 갔다 오고,5.18 때 감옥에 갔다 온 둘째 아들은 전교조 활동한 다고 뛰어다니고, 막내아들은 농민운동 한다고 뛰어다녔다. 민청학련 사건 때 감옥에 갔다 온 후 착실하게 사업을 하던 막내 사위도 5.18 때 감옥에 갔다 오고, 막내딸도 운동한다고 뛰어다니고, 큰손녀는 노동운동한다고 뛰어다녔다.

셋째 아들놈은 감옥에 세 차례나 들락거리다가 5.18 이후 수배당해 애간장을 태우다 만리타향으로 도망가 나이 40이 넘도록 집도 절도 없이 장가도 안 간 채 운동화 신고 똥가방 하나 메고 천리사방을 떠돌아다닌다는 소식을 듣고도 모든 것을 속으로 삭이며 흐트러짐 없이 살아오신 장한 우리 어머님이 이 불효자식 얼굴 보시려고 둘째 사위 박형선을 따라 미국까지 오신 것이다.

그러나 그때 나는 국제평화대행진 준비 때문에 바빠서 관광도 제대로 못시켜 드리고 주위 사람들 신세만 졌다. 내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어머님도 약해지실 것 같아 “장가나 가고 하라.”는 어머님 말씀에 “어머님도 욕심이 많군요. 5.18때 자녀를 잃은 부모님들 생각해서라도 그런 말씀 마십시오. 내가 안 죽고 이렇게 살아서 뛰어다니는 것만으로 만족하십시오.”라고 단호하게 대답해 버렸다. 또 몇 달만 내 곁에 있다가 가고 싶다는 의향을 내비쳤을 때도 정신없이 바쁘니 빨리 돌아가시라고 해 버렸다.

어머님은 막내사위와 함께 한 달도 못돼서 귀국길에 오르셨다. 나는 그때 LA에서 귀국하시는 어머님을 뉴욕에서 배웅해 드리고 말았다. 이제 어머님도 내 얼굴 보시고 가셨고 나도 어머님을 뵈었으니 살아생전에 다시는 서로 못 보게 되더라도 여한은 없으리라. 그래도 어머님,이 불효자식 귀국할 날이 언제 일지 모르지만 그때까지 돌아가시지 말고 내내 평안하시옵소서..


91년 말에는 경심이 누님과 매제 형선이와 누이동생 경자가 외조카 찬이와 지웅이를 데리고 미국에 왔다. 형선이를 빼고는 11년만의 만남이었다. 그때는 시간이 좀 있어서 관광도 직접 안내하는 등 사람 노릇을 제법 했다. 특히 여동생 경자는 이 험한 오빠 때문에 내가 미국으로 나온 이후 치안본부와 안기부에 끌려가 고생을 많이 했다. 그리고 회원들과 후원자들,타민족 형제들이 조국을 방문할 때마다 대접하느라고 수고를 했다. 경자에게 보답한다는 뜻에서 회원들과 나는 열심히 대접했다. 그래서 제법 홀가분한 마음으로 누님과 동생과 조카들을 배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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