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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2-‘광주 청문회’와 헛된 귀국의 꿈2019-01-09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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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한봉 선생 귀국 추진위원회’의 결성


88년 말이 되자 조국의 국회 내에 광주특위가 구성되고 5.18 학살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청문회가 열렸다. 5.18 민중항쟁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어정쩡하게 규정되고 5.18 관련으로 투옥되었던 모든 분들이 사면,복권되고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과 명예회복이 구체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학살원흉인 노태우 정권 하에서이긴 했지만 여소야대가 된 국회의 활동에 힘입어 5.18 문제가 조금씩 풀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한 정국변화에 발맞추어 그동안 광주의 옛 동지들에 의해 개인적 차원에서 조용히 진행되어 왔던 나의 귀국추진운동도 전국적 차원의 조직적 틀을 갖추고 전개되기 시작했다.

11월에 광주에서 귀국대책준비위원회가 발족했고 12월 13일에는 서울에서 귀국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기자회견과 성명서 발표,그리고 나의 법적 신분확인을 위한 대정부 서면질의 등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고문으로는 강희남,계훈제,김규동,문익환,박형규,백기완,성내운,송건호,유시백, 윤공희,윤기석,이종하,조아라님이 추대되었고 공동추진위원장은 강신석,김승훈,문병란,유연창,이부영님이,사무국장은 김근태,정동년 님이 대변인은 홍성담 님이,추진위원에는 김용태 님을 포함한 약 300명이 참여해 주셨다. 소식을 들은 나는 그 분들께 감사드리며 한 분 한 분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조국을 떠나온 지 벌써 8년이 다 되었다. 가고 싶었다. (귀국추진위원회의 활동은 89년 5월부터 시작된 소위 공안정국 때문에 활동을 중단하였다가 92년 3월에야 활동을 재개하게 되었다.)

 

 

‘광주 청문회’와 헛된 귀국의 꿈


88년 말에 광주의 옛 동지들이 날더러 광주청문회에 나가 증언할 의사가 있느냐고 물어와 그렇게 하겠다고 흔쾌히 응낙했다. 광주에서는 단순히 청문회의 증언만을 생각한 듯 했으나 나는 청문회 증언을 귀국 기회로 생각하고 속으로 흥분했다.


“5.18 관련 수배자는 나밖에 없다. 투옥되었던 사람들은 모두 다 사면 복권이 되었으며 5.18 민중항쟁을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까지 부르고 피해자 보상과 명예회복이 거론되고 있는 마당에 아무리 노태우 일당이 나를 미워하여 귀국 허용을 안 해주고 싶어도 여소야대 국회의 광주특위에서 나를 증인으로 채택하면 나에 대한 수배를 해제하거나 한시적으로라도 귀국을 허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귀국하여 증언한 후 그대로 눌러 앉아 버려도 체포 투옥하기에는 너무 정치적 부담이 커서 어쩌지 못할 것이다. 설혹 투옥한다 할지라도 들어가 눌러 앉아버리자.”


나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했다. 증인으로 채택되면 곧바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차분히 인사하고 갈 겨를이 없을 것 같아 서둘러 각 지역을 돌며 귀국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당시에 나의 청문회 증언이 거부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광주특위에서 틀림없이 나를 증인으로 채택할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나는 5.18 관련 최후의 사법적 미처리자이고 수배 사유도 내란 주요 임무 종사와 계엄법 위반인 데다 범죄 내용도 내란을 일으키기 위해 DJ로부터 돈을 받은 정동년 씨가 그 돈 중 일부를 나에게 주었고 나는 그 돈을 학생시위 배후 조종에 썼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 DJ와 5.18을 연결시킨 전.노 일 당의 조작 진상을 완전히 밝히기 위해서라도, 또 이와 정동년 씨의 증언과 마찬가지로 나의 증언도 들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광주의 동지들도 들어올 준비를 하라고 큰소리를 쳤다. 광주에서도 각 당에 나를 증인으로 채택해 달라고 요청했고 5.18 수괴로 몰렸던 정동년 씨도 청문회 증언을 하면서 나의 증언을 꼭 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귀국추진위원회에서도 성명서를 통해 나의 청문회 증언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광주로부터 어처구니없는 소식이 날아왔다. 평민당 소속 이모 위원이 내가 청문회 증언 때 DJ의 명예와 권위에 손상을 주는 발언은 안하겠다는 각서를 써주면 증인으로 채택되도록 노력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한마디로 거절해 버렸다. 나에게는 청문회에 나가 증언하면서 이를 모독하는 사적 발언을 할 필요도 생각도 없었지만 역사적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청문회에 나가 증언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사적 각서를 조건으로 제시하는 데 분노했기 때문이었다.

그일 이후에도 나는 내가 증인으로 채택되리라 믿고 귀국 준비를 계속했다. 그러나 결국 증인으로 채택되지 못했다. 귀국의 꿈은 일장춘몽,헛된 꿈이 되고 말았다. (나는 그때도,귀국한 지금도 내가 증인으로 채택되지 못한 정확한 이유를 아직 모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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