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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9-평화시위장의 충격2019-01-09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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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시위장의 충격


83년 4월 나는 난생 처음 민족학교 청년들과 함께 LA에서 개최된 수만 명이 참가한 반전 반핵 반개입 평화시위에 참가했다. 미국의 시위와 집회에 처음 참가한 나는 다양한 인종들이 다양한 플래카드,다양한 피켓,다양한 상징물들을 들고 구호를 외치거나 노래를 부르며 한가롭게 행진하는 광경과,그 시위대를 보호하며 질서를 유지시키는 경찰들의 태평한 모습을 보고 상당한 혼란을 겪었다. 도대체 이것도 시위인가? 애들을 목마 태우고 걷는 사람,웃통을 벗고 걷는 사람,유모차를 앞세우고 걷는 사람,수영복을 입고 걷는 사람..

시위를 마치고 하는 성토대회도 마찬가지였다. 10여 명의 참가 단체 대표들이 공원 한쪽에 만들어진 연단 위에서 2〜3분 정도씩 짧은 연설을 차례 차례 했고,참가자들은 이곳 저곳에 모여 앉거나 누워서 연설을 듣다가 가끔 환호하거나 박수를 쳤다. 일부 참가자들은 연설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쉴새 없이 먹고 마시며 떠들었다. 그리고 집회장 주변에는 포장마차 같은 다양한 간이매점이 줄지어 있고,또 다른 한쪽에서는 제3세계 운동단체들과 미국내 좌파단체들이자료 진열대를 설치해 놓고 각종 홍보선전용 도서, 잡지,전단,비디오테이프,구호딱지(Sticker), 구호단추(Button) 등을 팔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성토대회장 같지 않은 성토대회장,시장 바닥 같은 성토대회장에서 나는 또 한 번 혼란을 겪었다. 그렇지만 그 혼란 속에 서도 나는 분명히 보았다. 수만 명의 시위대 속에,다양한 인종과 민족과 다양한 운동단체와 각계각층의 남녀노소들이 참가한 시위대 속에 우리 동포들은 없었다. 세계 최고의 군사적 긴장 과 세계 최고의 핵무기 밀도를 가진 나라를 조국으로 둔 우리 동포들,일본인과 함께 세계 2대 피폭 민족인 우리 동포들,미 국의 군대와 핵무기가 주둔 배치된 자신들의 조국,작전 지휘권마저 미국에 주어버린 조국을 둔 우리 동포들은 한 명도 없었다. 그 많은 운동단체들의 진열대 속에서 우리 동포 운동단체들의 진열대는 없었고,그 많은 흥보 선전물 속에서 우리 운동의 홍보선전물은 하나도 없었다.


인종차별 규탄 시위장의 충격


83년에 디트로이트시에서 사건이 하나 발생했다. 자동차 공장에서 해고당한 백인 노동자 몇 명이 중국계 청년 빈 센트친을 때려죽인 사건이었다. 밀려드는 일본 자동차 때문에 해고당했다고 생각한 백인 노동자들이 일본인에게 분풀이를 한다면서 엉뚱하게도 중국계 청년을 잘못 때려죽인 것이다. 그런데 백인 노동자들은 재판에서 아주 가벼운 형을 선고 받았다. 그러자 인종 차별적인 재판 결과에 항의하는 집회시위가 미국 전역에서 들고 일어났다. 불황의 책임을 소수민족에게 떠넘기려는 미국 정부의 정책과 사회분위기에 분노한 소수민족들,그 중에서도 동양계가 앞장서서 항의했다.

LA지역에서도 6월에 동양계가 주축이 된 연합 항의시위가 일어났다. 2만 명 정도가 참가한 그 시위에 나도 민족학교청년들과 함께 참가해 열렬히 구호를 외쳤다. 행진을 마친 후 LA시청에서 성토대회를 할 때 우리들은 참가한 동포들을 찾아보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한참 후에 모인 우리들은 맥이 풀렸다. 결론은 ‘우리 13명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동양계만 참가한 것도 아니고 백인,흑인,히스패닉 형제들까지 참가한 연합시위인데 우리 동포들은 아무도 안 나왔던 것이다. 단 한명의 동포운동가나 동포언론인도 나오지 않았다.


DJ의 LA강연


82년 12월 DJ가 미국으로 나왔다. 동포들의 환영은 대단했다. 몇 군데의 강연회를 마친 DJ는 83년 여름에 LA에서도 강연을 하게 되었다. 나는 박정희 피살에서 5.18까지의 기간에 보여준 DJ의 처신에 대해 불만이 많았지만 5.18 이후 겪은 고난을 통해 많이 변화되었으리라는 기대 속에서 열심히 강연회 준비를 도왔다. 강연회 직전에 열린 동포사회 축제 때 강연회 홍보전단을 동포들에게 배포하러 다니고 민족학교 청년들과 함께 강연회장에 걸 플래카드를 만들었다. 강연 당일에는 신변 경호를 위한 강연장 주변의 경계 활 동에 참여하는 등 협조를 했다.

그러나 DJ가 연설 중에 “5. 18은 내가 잡혀가자 분노한 광주 시민들이 일으켰다.”고 말하는 걸 듣고 우리들은 분개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강연장을 나와 버렸다. ‘변하지 않았구나. 과대 망상증이 심하구나. 5월 영령들이 자신을 위해,자신의 석방을 위해 그렇게 싸우다 가셨다는 말인가? 5.18의 의의와 정신을 왜곡하고 모독해도 정도가 있어야지 …’

 

 

망월 묘역의 흙과 꼬방동네의 흙


83년 가을에 조국으로부터 두 종류의 흙이 왔다. ‘잊지 말라’는 부탁과 함께 광주 동지들이 망월묘역의 흙을 보내왔고 이철용 형이 서울 꼬방동네의 흙을 보내왔다. 나는 흙을 받은 날 밤 혼자서 조국을 떠나온 이후 처음 대하는 조국 땅을 만져 보고 냄새를 맡으며 ‘그래,잊지 말자’고 다짐을 했다. 나는 그 흙들을 유리그릇에 담아 민족학교 한쪽 선반에 모셔놓은 5월 영령 위패 앞에 나란히 놓아두었다. 그 후에는 한라산의 돌과 백두산의 돌을 구해 그 옆에 나란히 놓아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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