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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8-어려움을 딛고2019-01-09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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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을 밝히다


여기저기서 모함과 중상과 방해공작을 해오자 견디다 못한 나는 주위 분들과 상의한 후 공식적인 기자회견과 강연회를 통해 나의 신분을 밝히기로 했다. 83년 5월 하순에 나는 LA프레스 클럽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미국 밀입국 배경과 정치 망명 신청 사실을 소상히 밝히고 현지 동아일보와 단독 인터뷰를 통해 5.18 민중항쟁의 진상과 밀항 탈출 과정을 밝혔다. 그리고 나는 동포운동권의 방해공작 때문에 애초 계획했던 워싱턴 DC 의 강연회는 못 가고 대신 이에서 5.18 민중항쟁 3주년 기념 강연을 했다. 나는 평생 처음으로 한 대중강연에서 원고도 없이 단상에 올라가 약 2시간 반 동안 항쟁의 진상을 전하고 오송회 사건의 고문 조작내막을 폭로했다. 그리고 전두환정권의 타도를 위해 재미동포들이 적극 참여해 줄 것을 온몸으로 호소했다. 기자회견과 강연회를 통해 그렇게 나의 신분을 밝혔는데도 안기부 앞잡이,북의 공작원으로 모는 못된 세력들의 중상은 여전히 계속 되었다.


초미니 데모


2월에 민족학교를 설립하고 나서 여러 가지 어려움 때문에 허둥대고 있을 때 83년 3월,조국의 대법원에서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주모자들인 김현장과 문부식의 사형이 확정되었다는 급보가 날아왔다. 깜짝 놀란 나는 힘은 없지만 하는 데까지는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홍기완,문성철과 함께 전보 문안을 만들었다. 그리고 인사라도 한번 나눈 적이 있는 모든 분들에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화해서 백악관의 레이건에게 두 사람의 구명을 탄원하는 전보를 쳐달라고 호소했다. 불과 이틀 만에 미주운동 역사상 가장 많은 143통의 전보를 치는 성과를 올렸다. 그런 다음 우리들은 수천 명이 들고나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LA시에 있는 연방정부 청사 앞에 가서 시위를 하며 급히 만든 수천 장의 구명호소 전단을 배포했다. 그날 LA의 한국일보는 그 초라하나 당돌한 시위 사진을 싣고 사진 밑에다 ‘자칭 민족주의자들의 초미니 데모’라고 써서 보도해 주었다. 시위를 마친 우리들은 빨리 힘을 키우자고 굳게 다짐했다.


민족학교 초기의 어려움


민족학교를 설립할 당시 초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사방에서 중상과 방해공작을 받게 되자 함께 시작했던 분들의 자신 감과 의욕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상황이 막막했다. 최진환 이사장마저도 일 년을 넘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불안해 할 정도였다.

우선 나의 숙식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문제였다. 조국에서처럼 똥가방 하나 메고 동가식서가숙 하려고 해도 미국사회의 조건은 조국과 너무 달라 쉽지가 않았다. 민족학교 설립과 동시에 김상돈 장로님 댁을 떠나온 나는 처음에는 이집 저집 다니며 먹고 잤으나 조국에서와 달리 마음이 편치 않았다. 또 대중교통 수단이 형편없는 LA에서 차 없이 돌아다니기가 너무 힘들어서 한두 달 후부터는 민족학교에서 그냥 먹고 자기 시작했다.

나는 주위의 도움을 받아 중고 냉장고와 솥,냄비 등의 취사 도구를 마련하고 쌀과 고추장, 된장,멸치를 사서 직접 해먹기 시작했다. 직장을 때려치운 기완이가 가끔 찌개가 담긴 냄비를 들고 민족학교로 출근했다. 그런 날은 그런대로 잘 먹었다. 하지만 찌개 냄비가 없는 날은 멸치와 고추장으로 때웠다.

민족학교에는 부엌이 따로 없기 때문에 솥이나 그릇을 씻으려면 양푼에 담아들고 다른 사무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공동화 장실로 뛰어가 세면대에서 씻어야 했다. 그러다가 누가 오는 기척이 있으면 몽땅 양푼에 담아들고 변기에 걸터앉아 그 사람이 나갈 때까지 숨어 있곤 했다. 우리들에게 누가 식당에서 음식을 사주면 우리들은 먹고 남은 음식뿐만 아니라 남이 먹다 남긴 음식,심지어 자장면 남긴 것까지 싸들고 와 나중에 먹기도 했다.

식사 문제에 비하면 잠자는 문제는 아주 쉬웠다. 미국에서는 화재와 범죄예방을 위해 사무실에서 잠자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냥 숨어서 잤다. 초기에는 덮을 것이 없어서 수건으로 배만 덮고 자기도 했다. 담배는 주로 건물 주차장에 널려 있는 꽁초로 해결했다. 그런 중에도 이사들과 후원자들이 가끔씩 음식을 가져와 우리들은 힘을 얻었다. 특히 이 길주 이사가 맛있는 걸 자주 가져와 우리들은 그를 천사라고 불렀다.

옷은 얻어 입거나 수익사업으로 시작한 중고품 판매를 위해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헌옷들 중에서 골라 입었다. 어쩌다 운이 좋으면 ‘핏덩이 갈비덩이’(피에르 가르뎅)같은 고급 상표의 옷 을 주워 입기도 했다. 그렇게 이를 악물고 버텨나가자 동포들 사이에 소문이 퍼졌다.


“윤한봉이가 거지가 다 되었다더라.”

“민족학교 청년들이 불쌍하다.”

“제대로 먹지도 못한다더라.”


동정심 많은 동포들은 그런 소문을 듣고 하나 둘 음식물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숙식 문제도 그랬지만 재정 문제 역시 어려웠다. 운동권이나 동포사회로부터 고립되니 자연히 재정 문제가 심각해졌다. 사 무실 월세와 전화비를 제때 내기가 힘들었다. 이사장과 이사들 그리고 후원자들이 정기적으로 조금씩 내고 기완이가 주머니를 털어 그때그때 어렵사리 해결해 나갔다. 그러나 빚이 점차 늘어만 갔다.

우리들은 머리를 맞대고 연구해서 세 가지 수익사업을 시작 했다. 그중 하나는 미술품 전시였다. 미술 분야에 조예가 있는 진호 형님은 그림을 모으고,목수 일을 잘하는 기완이는 표구 하고 액자에 넣어 약 30점의 작품을 만들어서 전시회를 했다. 이렇다 할 재주가 없는 나는 그때 온갖 잔소리를 들어가며 기완이의 조수 노릇을 했다.

노래 테이프도 제작해서 판매했다. ‘뿌리 깊은 나무’사에서 만든 판소리 다섯 마당 음반을 구해서 빈 테이프에 옮겨 닮고 김민기,양희은 테이프를 복사해 그럴듯한 플라스틱 상자에 함께 넣어 팔았다. 테이프 길이가 달라 남은 부분은 내가 평생 해본 적이 없는 시낭송을 해서 채워 넣었다. 노래 테이프 제작 판매 는 나중에 저작권 보호니 뭐니 하며 신문에서 떠들기에 86년경에 중단해 버렸다.

중고품과 빈 깡통을 수집해서 판매하기도 했다. 전자제품, 부엌용품,장난감,가구,의류,신발, 깡통 같은 것들을 수집해서 팔았다. 중고품은 뜻있는 분들이 직접 차로 실어오기도 했고 연락을 받고 우리가 직접 가져오기도 했다. 나는 수집한 깡통들을 쭈그러뜨리기 위해 주차장 바닥에다 쏟아놓고 사정없이 밟아대곤 했다. 전두환, 노태우의 대가리로 생각했던 것이다. 중고품과 깡통 판매는 그 후 각 지역 마당집과 한청련의 중요한 수익사업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와 같은 수익사업을 통해 재정난을 조금씩 극복해 나가고 있을 때 조국에서 판화 붐이 일어났다. 나는 광주 동지들의 도움을 받아 50여 장의 판화를 입수했다. 기완이의 지휘 아래 우리들은 액자를 제작했다. 그런데 낙관이 없는 판화가 20장이나 나와 고민하다가 진품이 확실하니 도장을 위조해서 찍기로 했다. 그런데 모두들 자신이 없어했다. 그래서 나는 평생 해본 적이 없는 그 짓을 저지르게 되었다. 독일제 조각도구들을 구입해서 2시간 만에 도장을 위조해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무도 진품의 낙관과 구분을 못했다. 또 색칠해진 판화가 잘 팔린 다는 걸 알게 되자 붓과 물감을 구해서 모든 판화에 색칠을 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들은 액자에 넣은 판화를 1백 불에서 3백 불까지 받고 팔았다. 판화제작 판매 사업은 88년까지 계속했는데 우리가 미국 전역에 판매한 판화는 4백 점이 넘었다. 판화를 선물해 주신 화가들과 싸게 공급해 주신 화가들에게 깊은 감사들 드린다. 판화는 어려웠던 그 시절을 이겨내는 데 둘도 없는 무기였다.

미국에 와서 겪은 곤란한 일 중 하나는 읽을 만한 책을 구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공짜로 좀 구해보려고 찾아다녀도 볼 만한 책들을 모아놓은 곳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운동가들에게 빌려보곤 했는데 좋은 책이 없을 때는 한번 본 책이라도 다시 읽었다. 책방에 가도 읽을 만한 책이 거의 없었지만 어쩌다 가끔 욕심나는 책이 한두 권 있어도 돈이 없어 살 수가 없었다. 책방에서 욕심나는 책을 발견하면 나중에 돈이 생기면 살 요량으로 그 책들을 다른 사람이 사가지 못하도록 진열된 책들 뒤에 숨겨놓고 나오곤 했다. 나중에 책방에 다시 들러 그 책들이 아직도 그대로 잘 있는가를 확인만 하고 다시 나왔다.

그런 만큼 민족학교에서 청년들과 학습할 때도 역시 마땅한 도서 자료가 없다는 게 큰 애로였다. 어렵게 구한 학습교재도 한 권뿐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때그때 학습할 부분을 복사해서 나누어 읽곤 했다.

한번은 나성에서도 쓰고 다른 지역에도 보내기 위해 학습교재로 택한 <분단전후의 현대사>를 90권이나 복사하여 제본하기도 했다. 그때 기완이와 나는 돈이 없어서 500쪽이 넘는 그 징그럽게 두꺼운 책을 직접 복사하여 손으로 제본했다가 손바닥이 물집 투성이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도서 자료를 민족학교뿐만 아니라 앞으로 세울 각 지역 마당집마다 비치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악착같이 모으기 시작했다.

나는 조국에 있을 때 현대문화연구소에 옥바라지용으로 쓸 겸해서 도서 2,000권을 모아 비치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책을 모으기 위해 주위 사람들에게 족보와 일기장과 가계부만 빼고 다 내놓으라고 들볶았다. 출판사들을 찾아다니며 사정하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훔쳐 나르는 방법을 썼다.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나는 자신이 만만했다.

어쨌든 나는 필요한 도서 목록을 작성해 닥치는 대로 모았고 조국을 방문하는 사람들과 미국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조건 책 선물을 부탁했다. 틈만 나면 사람들에게 지옥에 갈 죄에 대해 이야기 해주면서 은근히 협박했다. 술 억지로 권하는 죄,책을 사유하는 죄,발 닦고 고무신 물 안 털어놓은 죄,소설 책의 재미있는 부분을 찢어 버린 죄 등등. 그렇게 난리를 피우고 돌아다닌 결과,의식 있는 동포들은 가지고 있는 책을 몽땅 내놓기도 했고,학업을 마치고 귀국하는 어떤 유학생들은 전공서적만 빼고 다 내놓고 갔다. 광주 동지들도 수백 권의 책을 보내오고 출판계에 뛰어든 옛 동지들도 자신들이 출판한 책들을 보내 왔다. 민족학교 도서 자료는 순식간에 급속도로 늘어갔다.

초기에 민족학교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청년들의 수가 적은 것도 어려움이었다. 사면팔방의 중상과 방해공작을 극복하고 청년들을 모아 의식화 학습을 한다는 것은 정말로 힘들었다. 우리들은 청년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민중문화연구회를 이끌고 있던 김석만 씨는 탈춤 강습을 했고 태권도 고단자인 기완이는 태권도 강습을,음악 전공인 김형성씨는 동요, 가곡,운동가요같은 노래를,작가인 전지호 형은 문학 강좌를,최진환 박사와 은호기 선생과 나는 역사 강좌를 하는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정기적으로 진행했다. 평화운동,코리아타운 개발 방안,동포사회의 노동 문제 등을 주제로 한 교양강좌도 부정기적으로 열었다.

그러나 그렇게 애를 써도 찾아오는 청년들은 극소수였다. 한번은 우리 노래 부르기 시간에 아무도 안 와서 민족학교 식구들 넷이서 둘러앉아 알고 있는 모든 동요,민요,가곡,운동가요를 밤늦도록 목놓아 부른 적이 있었다. 그런 상황이 계속되자 다급해진 나는 프로그램이 있는 날은 하루 종일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랐다. 시작할 시간이 가까워지면 조바심이 나서 건물 앞 인도로 나가 들어오는 차들을 기다리며 서성거리곤 했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들의 노력은 드디어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참여하는 청년들이 하나 둘 늘어갔다. 더디기는 했지만 정년들의 의식도 서서히 변화되어 가기 시작했다. 나와 민족학교는 설립 6개월 만에 온갖 중상과 방해를 극복하고 동포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미국을 방문 중이던 성래운 교수님이 어느 날 민족학교로 직접 찾아오셔서 격려해 주시고 LA지역 어른들을 만나 나를 많이 도와주라는 부탁도 해주고 가셨다. 미국에 왔다가도 모두들 전화 한번 해주지 않은 채 귀국해 버리던 그 어려웠던 시절에 성래운 교수님은 직접 찾아오셔서 그렇게 우리를 도와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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