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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5-노태우 일당의 탄압2019-01-09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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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일당의 악랄한 중상모략

 

내가 한청련,한겨레 회원들과 함께 미국 핵무기 철거를 위한 10만 서명 작업과 두 곳의 행진 준비에 정신없이 매달려 있을 때였다. 조국에서는 서경원 의원의 방북사실이 밝혀져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그 소식을 들은 나는 문익환 목사님과 황석영 형님의 방북 사건을 겪어보았기 때문에 조금 놀랐을 뿐 큰 관심을 갖지 않고 하던 일을 계속해 나갔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노태우 일당은 서의원의 방북 사건이 마치 나와 한청련,민족학교에 무슨 관련이나 있는 것처럼 몰아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88년 8월에서 의원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LA 민족학교에 들러 8월 대회에 참가한 후 그 길로 북부조국을 방문하였고 그 방북 주선을 한청련 회원인 성모 목사가 했다고 발표를 했다.


나와 회원들은 펄쩍 뛰었다. 서의원이 LA 민족학교에 들렀을 때 나는 8월 대회 준비 차 뉴욕에 가 있었다. 8월 대회에 참가한 서 의원과는 시간이 없어 방북에 관한 이야기는커녕 8년 만에 만났으면서도 회포도 제대로 풀지 못하고 헤어졌을 뿐이다. 그런데도 노태우 일당은 아무런 증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서의원이 나와 사이도 안 좋은 DJ의 친서를 가지고 민족학교에 들렀느니 어쩌니 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그런가 하면 성모 목사는 유럽의 모 운동단체 간부라고 하는 등 횡설수설하며 성모 목사와 한청련을 연결지으려고 기를 썼다.


성모 목사는 진보적인 민족주의자로서 한청련 초기에 유학생 회원으로 활동하다가 84년에 독일로 유학을 떠나면서 탈퇴했던 사람이다. 84년 초에 LA에 거주하고 있는 시민권을 가진 부모님의 초청으로 미국 영주권을 받기 위해 나에 돌아와 있었으나 한청련에 가입하지 않고 8월로 예정된 영주권 인터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당시 성모 목사는 노태우 일당이 자신을 북의 공작원으로 몰고 서 의원 방북을 주선했다고 한 데 대해 중상모략이라며 펄쩍 뛰었고 8월에 인터뷰를 마친 미국정부도 아무 말 없이 그에게 영주권을 내주었다.


그 후 노태우 일당은 서의원 방북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평민당 총재인 DJ를 구인하여 심문하는 과정에서 DJ가 나를 중상하자 DJ의 진술 내용을 가지고 신이 나서 나와 민족학교와 한청련을 또다시 공격하기 시작했다. 화가 난 나는 노태우 일당에게 공개질의서를 보내 정면 반박하고 DJ에 대해서는 최종적인 X표를 치고야 말았다.

그렇게 한창 우리를 중상하던 노태우 일당은 임수경 학생이 방북하여 평양축전과 국제평화대행진에 참가하고 문규현 신부님이 방북하여 임수경 학생과 함께 판문점을 통해 귀환하자 두 사람의 방북을 나와 한청련이 배후에서 조종했다고 또다시 광적인 공격을 해왔다.


노태우 일당은 나와 한청련이 북부조국 조평통의 지시를 받아 국제평화대행진을 추진했고 마찬가지로 지시를 받은 내가 한청련 외교 연대부장인 이지훈씨를 호주로 보내 김승일씨를 만나도록 했고 이지훈씨로부터 밀명을 받은 김승일씨는 남부조국으로 들어가,호주에서 살다가 부산의 모 병원에 선교사로 나가 일하고 있는 자신의 남자 친구인 치과의사 김진엽씨를 만나 밀명을 전한 후, 김승일씨외 김진엽씨 두 사람이 함께 전대협 간부들을 만나 임수경 학생을 평양축전에 보내는 공작을 했다고 조작해 발표했다. 또 내가 조평통의 지시를 받아 문규현 신부의 방북을 배후조종해 성사시켰다고 하면서 한청련을 이적 단체로 몰았다. 더 나아가 군 입대를 위해 귀국한 한청련 회원이었던 유학생 박태훈 씨를 이적단체 가입 및 활동이라는 죄목으로 구속까지 했다.


나와 회원들은 분통을 터뜨리고 말았다. 국제평화대행진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한청련 스스로가 5월 말에 참가를 포기해 버린 평양축전에 전대협을 참가시키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게다가 잘 알지도 못한 조평통으로부터 내가 지령을 받았다는 것도,서로 알지도 못한 호주의 김승일 씨를 통해 공작을 했다는 것도,김승일 씨가 만나보지도 못한 이지훈 씨로부터 밀명을 받고 남부조국에 들어갔다는 것도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잠꼬대였다.

노태우 일당의 조작이 얼마나 황당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를 제시하겠다. 행진 준비에 여념이 없던 6월 하순 어느 날,국제평화대행진에 참가할 타민족 형제들을 모집하기 위해 필리핀을 거쳐 호주에 들어간 이지훈 씨가 나에게 전화를 했다.


“접니다. 민족자료실에 와 있습니다.”

“그래? 일은 잘 되가나?”

“네. 다른 지역은 어떻습니까?”

“그런 대로 잘 되어가고 있어.”

“그래요? 그런데 여기 와보니 애들이 일 저지른 것 같아요.”

“그게 무슨 말이야?”

“김승일이 알아요?”

“김승일? 모르겠는데.”

“나도 처음 본 여잔데 진엽이 애인인 모양이에요.”

“그래? 그런데 무슨 일을 저질렀다는 거야?”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는 걸 들어보니 김승일이가 남부조국에 갔다가 엊그제 돌아왔는데 그 친구가 거기서 진엽이랑 전대협 윗대가리들을 만난 모양이에요.”

“그래서 어떻다는 거야?”

“그냥 만난 것이 아니라 여학생 같은데 전대협 대표를 평양에 보내기로 한 모양이에요. 그 일에 끼어서 엉뚱한 짓을 한 것 같요.”

“골치 아픈 일에 신경 쓰지 말고 우리 일이나 열심히 해.”

“알았습니다. 다시 보고 드리겠습니다.”


김승일 씨는 5월 22일에 남부조국에 들어갔다가 6월 22일에 호주에 돌아와 있었고 이지훈 씨는 6월 14일에 호주에 들어갔다가 6월 24일 경에 민족자료실에 들러 김승일 씨를 처음 만난 것 이다. 김승일 씨가 남부조국에 간 이후에 이지훈 씨가 호주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결정적 증거는 호주 시드니 공항의 입출국 확인 도장이 선명히 찍혀있는 이지훈 씨의 여권이다. 그 결정적 증거 때문에 그랬는지 모르지만 노태우 일당은 그렇게 여론을 통해 요란하게 떠들었던 조평통 → 윤한봉 →이지훈 →김승일 →임수경으로 이어지는 지령 전달 경로를 막상 임수경 학생의 기소장에서는 빼버렸다. 그리고 대신 북의 조선학생위원회一>전대협一>임수경으로 이어지는 지령 전달 경로를 집어넣었다.


임수경양 밀입북사건 체계도(안기부 발표, 중앙일보 89.9.8) 누락


그리고 임수경 학생의 기소장에서 빼버린 조평통 → 윤한봉 →이지훈 →김승일 →임수경으로 이어지는 지령 전달 경로를 구속된 김진엽씨의 기소장에 범죄사실이 아니라 모두(冒頭)사실로 슬며시 끼워 넣어 기정사실화하는 간교한 짓을 저질렀다. 우리는 이지훈 씨의 호주 입출국 일자에 관한 호주 외무부의 공식 확인서까지 받아 이지훈 씨의 호주 입출국 확인 도장이 찍힌 여권사진과 함께 재판부에 제출했다. 그런데도 재판부는 조작된 모든 사실에 눈을 감았다. 노태우 일당이 나와 한청련이 문규현 신부님을 배후에서 조종해 방북시켰다고 한 것도 포복 절도할 일이었다. 노태우 일당이 얼마나 엉터리로 사건을 조작했는가를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를 제시해 보겠다. 

두 곳의 행진이 한창 진행 중이던 7월 22일 경에 내가 뉴욕의 마당집 청년학교에서 행진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바삐 움직이고 있을 때 LA에서 왔다는 낯선 동포 신부 한 분과 함께 문규현 신부님이 불쑥 찾아오셨다. 후에 들은 바로는 그 낯선 신부님이 정의구현사제단의 방북 요청을 문 신부님에게 전달한 분이었다.

 

 

“합수! 나 북에 또 가게 되었소.”

“무슨 일로요?”

“날더러 임수경이 데리고 같이 내려오래.”

“누가요?”

“정의구현사제단에서. 그나저나 허락을 안 해주면 어찐다?”

“누구 허락을 받는데요?”

“일본에 계신 주교님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주교가 일본에 갔나요?”

“아니 일본인 주교. 내가 그 주교님 밑에 소속돼 있거든.”

“그래요? 천주교 조직은 복잡해서 뭐가 뭔지 원.”

“그나저나 합수가 좀 도와줘야겠소.”

“무얼 도와드릴까요? 돈은 없습니다.”

“나 돈 많아. 비행기 표나 끊게 해줘요. 일본 거쳐 북경으로 가야하니까.”

“그 주교가 허락 안 해주면 어쩌려고 북경까지 끊어요?”

“그래도 일단 끊어놓고 사정해야지.”


나는 곁에 있던 여자 회원들에게 도와드리라고 부탁했다.

“그나저나 신부님은 복도 많습니다. 가보고 싶어도 못 가는 사람들이 많은데 신부님은 지난달에도 갔다 오시고 이번에 또 가시게 되었으니.”

“이번 일은 달라요. 책임이 크다고. 그리고 감옥에도 가고.”

“그렇기는 하네요. 사제단이 어려운 결정을 했군요. 시끄럽네요.”


나는 전화가 온 바람에 대화를 중단했고 통화를 끝냈을 때는 문 신부님이 볼일이 많다며 내일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떠나가셨다. 문 신부님은 다음날 다시 오셔서 회원들이 끊어놓은 비행기 표를 받자마자 바로 떠나가셨다. 우리는 서로의 건강을 빌며 헤어졌다. 당시에 나는 문 신부님의 방북에 대해 별로 놀라지 않았다. 왜냐하면 문 신부님이 한 달 전인 6월에 미국인 신부 한 분과 함께 북부조국을 다녀오셨는데 그때 노태우 일당은 문 신부님이 영주권자이고 영사관에 통고를 하고 갔으니까 문제 삼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또 문 신부님은 일본인 주교의 허락을 받지 못하면 갈 수가 없다고 했고 만약 허락을 받으면 영사관에 통고를 하고 가시겠다고 말씀했기 때문이다. 내가 그 뒤로 문 신부님을 다시 만난 것은 8월 초순이었다.


국제평화대행진단의 통일각 단식농성이 끝난 이틀 후 느닷없이 문 신부님이 뉴욕에 오셔서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만나보니 문 신부님은 임수경 학생과 단둘이서 판문점을 통과하는 것보다는 미국의 영향력 있는 각계 인사들과 함께 통과하는 것이 정치적으로나 운동적으로 효과가 더 클 것으로 생각하시고 그런 인물들을 동원하기 위해 급히 돌아오신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최소한 두 세 달 정도의 시간이 있다면 몰라도 그렇게 갑자기 동원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씀드리고 그동안 모아두었던 임수경 학생과 문규현 신부님 방북사건 관련 신문기사들을 보여드렸다. 문 신부님은 다른 종교계 인사들과도 상의해 보신 후 나와 같은 의견을 들으셨는지 서둘러 다시 북부조국으로 떠나가셨다. 사실이 그러함에도 노태우 일당은 나와 한청련이 문 신부님의 방북을 배후조종했다고 계속 모략했다. 


심지어는 사제단회의에서 문 신부님 파북 결정을 주도한 세 분과 신부님들이 자신들이 했다고 당당하게 밝히고 나오기까지 했는데도 막무가내로 나와 한청련을 공격해왔다. 그렇게 언론을 통해 악랄한 중상모략을 하던 노태우 일당은 막상 문 신부님을 기소할 때는 공소유지가 불가능하니까 임수경 학생을 기소할 때와 똑같이 문 신부님 기소장에서 나와 한청련 관련 부분을 슬며시 빼버리는 간교한 짓을 또 한번 되풀이했던 것이다.

89년 들어 몇 달간 계속된 나와 한청련과 민족학교에 대한 노태우 일당의 중상모략이 전 회원이었던 박태훈씨의 구속으로 까지 이어지자 한청련은 9월에 대표위원회를 소집하여 노태우 일당의 탄압에 정면대응하기로 결정하고 즉각 실천에 옮겼다.

먼저 강력한 규탄성명을 조국의『말』지를 통해 발표하고 각 지역에서 국제평화대행진과 미주평화행진 보고대회 및 노태우 일당의 중상모략 폭로대회를 개최하였다. 10월 초부터 22일 동 안 뉴욕 UN 본부 앞에서 ‘’평화협정 체결 촉구와 유엔 분리가입 저지 그리고 문규현 신부와 임수경 학생의 석방을 위한 단식농성과 외교활동을 결연한 자세로 전개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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