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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15-6년만의 망명허가2019-01-09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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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만의 망명 허가


81년에 시애틀 이민국에 정치 망명을 신청한 후 몇 년을 기다려도 재판이 열리지 않기에 나는 주위와 상의하여 86년에 변호사를 샌프란시스코의 진보적인 변호사인 마크 밴더후트로 바꾸었다. 변호사 비용은 할부로 했고 북가주에 거주하시는 이만영 선생님이 도움을 주셨다. 그 변호사를 통해 나의 망명 신청을 샌프란시스코 이민국으로 옮겨 제출했다. 그리고 변호사의 요청을 받고 광주에 연락해서 나의 정치 망명 허가 탄원서를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윤영규 선생님,조비오 신부님,강신석 목사님, 문병란 선생님 등 재야,종교계,학계 원로 30여 명이 연명으로 탄원서를 보내주셔서 변호사를 통해 법원에 제출했다. 그 후 나는 몇 가지 사업 활동에 매달려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변호사로부터 재판 날짜가 잡혔다는 연락이 왔다.

87년 4월 17일,나는 변호사와 함께 법정에 나갔다. 판사는 나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한 후 검사에게 국무성의 소견을 말하라고 했으나 검사는 소견이 없다고 답했다. 정치 망명 재판에 서는 이의제기 또는 반대 의견을 밝히는 국무성의 소견이 결정적 역할을 하는데 나의 경우에는 국무성에서 소견을 제시하지 않음으로써 나의 정치 망명 허가를 동의해버린 것이다. 국무성 의 소견이 없자 판사는 그 자리에서 나의 정치 망명 허가 판결을 내렸다.

실로 만 6년 만의 정치 망명 허가였다. 나는 코리언으로서는 최초로 미국 정부로부터 정치 망명 허가를 받은 사람이 되었다. 기쁘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한 착잡한 심정으로 법정을 나오며 생각했다.

 

“미국의 지배하에 있는 정권에 쫓겨 미국으로 도망 나와,대중 강연과 시위와 성명서와 전단 등으로 48년 이후의 우리 민족에 대한 미군의 범죄와 5.18 학살 배후조종을 규탄하고,조국에 주둔하는 미군의 철수와 배치한 핵무기의 철거와 작전지휘권의 반환 등을 주장하는 활동을 맹렬히 하고 있는 내가 미국 정부의 법적 보호를 받게 되었으니 도대체 이 나라는 어떻게 된 나라인가? 그나저나 미국 정부가 나의 망명을 허가하는 걸 보니 두환이도 끝났구나. 다음 정권은? 친미개량 정권?”

어쨌든 내가 정치 망명 허가를 받은 사실이 외신을 통해 나갔다. 한국일보,동아일보 등의 미국 현지 판에는 그 기사가 실렸다,그러나 조국의 언론들은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했다.

며칠 후 민족학교 식구들과 한청련 회원들이 나의 망명을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만리타국에 홀로 도망온 놈을 따뜻하게 보살펴주고 도와주신 분들에 대한 고마움에 감정이 복받쳐 올라 나도 모르게 울고 말았다. 김동건 선생님 내외분, 김상돈 장로님 내외분,김용성 박사님,정만수 선생님 내외분,최진환 박사님,전진호 형,이길주 이사님,홍기완,임소영…

나는 망명 허가를 받음으로써 미국 밖을 여행할 수 있는 여행증명서를 발급 받을 수 있게 되었고 신청만 하면 미국 영주권도 받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LA 한인회장 선거의 승리와 패배


87년 봄 조국에서 한창 직선제 개헌투쟁이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나는 LA에서 야심만만한 일을 하나 시작했다. 미주에서 우리 동포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LA의 한인회를 개혁하기 위해 동포 김모 씨를 한인회장 후보로 내세우고 선거운동을 시 작했던 것이다. 그분은 민족학교와 한청련에 우호적이며 후원 도 했고 인권 운동에도 참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인품도 괜찮은 사람이었다.

나는 그 분에게 세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당선되면 4.19와 5.18 기념행사를 한인회 주최로 해줄 것. 둘째,한청련 회원들이 한인회관에 자원봉사자로 나가 동포사회 봉사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해줄 것,마지막으로,선거 비용은 꼭 필요한 최저액만 쓰고 선거가 끝나면 반드시 언론을 통해 결산 공고를 할 것 등이었다. 그 분의 응낙을 받은 후 후보로 추대했다.

당시 미국 각지의 동포 집중 거주지에는 어디에나 한인회가 있었다. 그 한인회들은 필라델피아를 제외하고는 거의가 다 대사관과 영사관의 손아귀에 들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한인회장들과 임원들도 거의 전.노 일당의 지지자들이서 운동권에 대해 항상 비협조적이거나 적대적이었다.

나는 미주 최대 동포 거주지인 LA의 한인회를 우리가 추대한 후보를 당선시켜 우리가 주도하고,또 한인회의 공식적인 동포사회 봉사활동을 우리 회원들이 맡아서 헌신적으로 해 나가면,그리고 한인회 이름으로 4.19와 5.18 기념행사를 개최해 나가게 되면,IA 지역을 조국과 민족을 위한 거대한 해외운동의 거점으로 바꾸어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변화된 LA 한인회의 영향은 각 지역의 동포사회에 파급되어 타 지역 한인회도 서서히 한청련과 각 지역 마당집이 중심이 되어 주도해 나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일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승리할 자신이 있었다.

 

나는 73년 전남대학교 농과대학 3학년 재학 중에 친구 한 명을 농대 학생회장 후보로 내세우고 선거운동을 한 적이 있었다. 올바른 학생운동을 위해서는 학내 선거부정을 뿌리 뽑고 훌륭한 학생들이 학생회를 장악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뛰어들었다. 그때 나는 선거비용을 후보등록에 필요한 7백 원으로 정하고 후보로부터 절대로 더 이상 쓰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서 영향력 있는 학생들을 찾아다니며 함께할 것을 호소했다. 선거비용이 7백 원이라는 말에 대부분의 학생들은 미친 짓 않겠다며 자리를 차고 일어나 버렸다. 그러나 나는 뜻을 같이 하는 몇 명의 후배들과 함께 독심으로 밀고나갔다. 진심을 가지고 최선을 다했다. 결과는 우리들의 승리,무투표 당선이었다.

어쨌든 LA 한인회장 선거에서 윤 모라는 상대 후보는 평통자문위원 출신으로 영사관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고 있었고 돈이 많은 사람이었다. 우리 쪽 후보가 알려지고 민족학교와 한청련이 적극 밀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선거판은 서서히 민주 대 반민주,전두환 반대 세력 대 지지 세력의 대결구도로 바뀌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대로 우리를 겨냥한 추악한 반공소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규모와 강도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우리 쪽을 공산당이나 친북 세력으로 몰고 심지어 우리 쪽이 이기면 LA 한인회관에 붉은 깃발이 휘날릴 것이라는 등의 어처구니없는 내용의 유인물들이 뿌려졌다. 그리고 주간지 코리언 스트릿 저널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신문들은 윤 후보 편을 드는 기사를 써대기 시작했다. 후보들의 합동유세가 있던 날이었다. 우리 회원들이 풍물을 치며 행진하고 있을 때 윤 후보 쪽의 이사 후보 한 사람이 이렇게 큰 소리를 쳤다.

 

“저놈들 빨갱이가 확실해. 6.25때 중공군들이 인해전술을 쓸 때 꼭 저렇게 꽹과리를 쳤거든.”

 

정말 치졸하기 짝이 없는 반공소동이었다. 윤 후보 쪽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라스베이거스에 있던 동포 폭력배들까지 동원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유권자들을 매수해 엄청난 돈을 뿌렸다. 한밤중에도 동포들 집에 우리 쪽 후보 이름으로 전화를 걸어 불쾌하게 만드는 등 조국의 선거 운동에서 쓰였던 온갖 추악한 방법들까지도 총동원했다.

나는 광주와 서울로 연락해서 LA 한인회장 선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협조를 부탁해서 광주의 십여 개 운동단체들과 민주 통일 민중운동연합의 부의장이신 김승훈 신부님의 지지 격려의 글을 받아 선전 자료로 활용했다. 선거전을 철저하게 민주 대 반민주,반전두환과 친전두환의 대결구도로 몰아갔다.

선거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내려온 샌프란시스코 회원들과 LA 회원들은 나와 함께 우리 쪽 김 후보의 선거 사무실이 있는 모텔에서 자고 밥까지 해먹어 가며 최선을 다해 뛰었다. 각 지역 한청련도 격려의 글과 성금으로 지원하고 나섰고 방미 중이던 원동석 교수님(목포대 교수)도 반공소동에 분개하여 적극 협조해 주셨다. 약 한 달 동안 사연 많은 선거운동이 끝나고 투표 도 무사히 진행되었다. 개표 과정에서 말썽이 생겨 경찰이 출동하여 지켜보는 가운데 개표를 끝냈다.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 우리 쪽의 승리였다. 3백표 차이였다.

우리들은 환호했다. 해외 동포사회에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며 모두들 흥분했다. 그러나 환호가 채 끝나기도 전에 예상치 못한 사태가 발생했다. 투표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다는 등의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며 패배한 윤 후보 쪽에서 선거 무효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미국 내에서는 소수민족 사회 내부의 선거를 둘러싼 시비나 단체 간의 갈등에서 비롯된 소송이 제기되었을 경우에는 대부분의 경우 법원이 재판을 마냥 끌어버리는 방법을 써서 타협에 의한 자체 해결을 유도한다. 결국 양측의 변호사들만 재미보고 소송 당사자들은 돈과 시간만 낭비하게 되어 있다. 소송이 제기되자 LA 한인회는 기능이 마비되었다. 재판 승리에 자신이 있던 우리 쪽도 분노를 참으며 재판 결과를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조국에서 오신 임진택님의 창작판소리 ‘똥바다’의 순회공연과 유홍준 교수,김용태 선생의 ‘민중미술 슬라이드쇼’ 순회개최,8월 대회 개최,문병란 교수의 순회강연회 개최 등을 하느라고 바쁘게 뛰어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청천 벽력같은 사건이 발생했다. 우리가 당선시킨 김모 씨가 비밀리에 윤 후보 측과 협상을 했던 것이다. 한인 회장직은 자신이 차지하는 대신 이사장과 이사의 과반수를 윤 후보 측이 맡고, 또 자신은 윤 후보 측이 요구한 성명서를 발표하고 윤 후보 측은 성명서가 발표되자마자 소송을 취하한다는 밀약을 맺은 후 곧바로 성명서를 발표해 버린 것이었다. 그 성명서 앞으로는 사상이 의심스러운 일부 운동세력과 관계를 끊겠다는 내용이었다. 언론들은 그 일부 운동세력은 민족학교와 한청련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당선자 김모 씨는 온몸으로 뛰어 자신을 당선시킨 우리들과 지지해 준 동포들을 비열하게 배신해 버린 것이었다.

나와 회원들은 배신감과 허탈감으로 인해 치를 떨었다. 나는 김모 후보에 대한 판단을 잘못했던 것이고 상대편을 너무 얕잡아본 것을 인정하고 많은 반성을 했다. 우리의 6월 항쟁은 그렇게 승리한 듯 했다가 패배로 끝나버렸다.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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