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수언행록

 
 
 
제목38-대동정신2019-01-01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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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합수정신 


 로스앤젤레스에서 윤한봉이 연 최초의 마당집이 민족학교였다. 뉴욕 민권센터엔 전봉준과 김구와 장준하의 영정이 걸려 있었다. 두 가지 사실은 윤한봉의 이념이 민족주의였음을 증거하기에 충분하다. 또 북한을 북부조국, 남한을 남부조국이라 부르면서, 통일운동에 앞장 선 것을 보아도 그의 심장에 민족의 피가 뜨겁게 흐르고 있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윤한봉은 민족주의자였나? 나는 이 물음에 대해 긍정도 할 수 없고 부정도 할 수 없다. 귀국해 광주에 연 연구소의 이름도 민족미래연구소였다. 따라서 윤한봉이 민족주의자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는 얘기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 어느 민족주의자보다도 아니 그 어느 사회주의자보다도 국제연대 활동을 열렬히 추구한 이도 윤한봉이었다. 그래서 윤한봉이 민족주의자였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얘기다. 정승진의 구술은 합수정신의 실체에 한 발 더 다가선다.

 

사람들이 착각을 하는데 합수형님이 통일운동가 아니라니까요. 그 분은 소수와 약자를 위해서 일하시는 분이에요. ‘우리는 어디를 가더라도 거기에 있는 소수와 약자를 위해서 일을 해야 한다. 만약 미국에서 코리안이 다수가 되고 백인이 소수가 되면, 여기서 백인을 위해서 일을 해야 된다’고 했어요.

합수정신이 무엇이냐? 윤한봉은 자꾸만 빠져나간다. 당신의 실체는 뭐요? 이것이 아니요, 물으면 윤한봉은 삐긋이 웃으며 아니라고 한다. 당신의 실체는 저것이 아니요, 물으면 또 윤한봉은 삐긋이 웃으며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시각으로 합수정신을 규정하는 시도를 그만 두고, 거꾸로 합수가 그의 실천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추적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그의 삶을 관통한 광주민중항쟁에 대해서 합수는 어떻게 생각했는가 조사해 보자.
2004년 5월 18일, 윤한봉은 ‘5‧18 아카데미 특강’에서 ‘5월 정신’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생전에 행한 많은 강연들 중에서, 윤한봉의 사유를 잘 드러내주는 강연이었다. 시애틀에 도착한 1981년, 고개를 숙이고 담배를 피우며 고민했던 것도 다 이 ‘5월 정신’을 정식화하기 위한 숙려가 아니었을까? 그는 이렇게 서두를 꺼냈다.


 “5‧18항쟁을 기념하는 사람들은 5‧18항쟁의 정신을 정확히 정립해야 합니다. 이 정신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으면 한 차례 기념행사를 치르고 할 일이 없는 거지요. 무엇을 계승발전 시켜야 하는가요? 올바른 계승을 위해서도 5‧18 정신이 무엇인지 정확한 정립이 필요합니다. 흔히 5‧18항쟁의 정신을 ‘민주, 인권, 평화’라고 하는데요, ‘민주, 인권, 평화’는 보편적 가치입니다. 보편적 가치를 가지고 5‧18 정신을 규정하면 사실은 아무것도 규정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5‧18 정신이 ‘민주, 인권, 평화’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5‧18 정신이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아무나 생각하지 못한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누구나 빠지기 쉬운 사유의 게으름을 윤한봉은 죽비로 후려치듯 우리를 내리쳤다. 우리 모두 ‘민주, 인권, 평화’라는 좋은 말에 취해 있을 때, 윤한봉은 ‘5‧18 정신’이 무엇인지, 정면으로 묻고 깊이 사색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5‧18 정신’은 항쟁정신과 대동정신이라고 강연의 서두를 열었다. “학살만행은 분노를 촉발시켰고 분노는 저항의 정신, 항쟁의 정신으로 이어졌습니다. 저는 정신적 뒷받침 없이는 위대한 항쟁을 할 수 없었다고 봅니다.”
이어 그는 ‘무엇이 그토록 도덕적인 항쟁을 하도록 만들었을까요?’라고 물으면서 또 하나의 정신은 대동정신이라고 제시했다. “‘먼저 가신님들과 같이 우리 모두 다 죽읍시다.’ 이런 비장한 구호를 외쳤어요. ‘같이 죽자’고 울면서 싸우는 거예요. 서로 음식을 나누고, 솥을 걸고, 피를 나누었죠. 이 정신이 대동정신이었습니다. 대동정신은 세상 사람을 다 한 가족처럼 생각하는 정신이 대동정신입니다.“
그날 광주 시민들의 마음에 전류처럼 흐르고 있었던 이 ‘항쟁정신과 ’대동정신‘에 대해 나는 한참을 두고 생각했다. 윤한봉의 정식은 기존의 ’민주, 인권, 평화‘처럼 입에 발린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윤한봉의 정식이, 과연 그날 광주 시민들의 마음을 온전하게 대변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조심스런 탐색이 필요하다고 나는 본다.

 
어느 날이었다. 항쟁정신과 대동정신을 화두처럼 생각하던 어느 날, 나는 보았다. 항쟁정신과 대동정신은 광주민중항쟁의 정신이기 이전에, 윤한봉이 평생을 걸쳐 따라간 정신이지 않았던가? 유신 쿠테타의 소식을 듣고 윤한봉은 결의했다. ’국민을 버러지 취급하는 저 독재자, 나는 싸운다.‘ 백주대로에서 벌어진 공수부대의 몽둥이질을 용납하지 않은 광주 시민들처럼 윤한봉은 박정희의 유신 쿠테타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것이 투쟁에 나선 윤한봉의 첫 출발이었다. 광주민중의 항쟁은 돌이켜 보면 윤한봉의 저항, 그것의 확대판이었다.
대동정신이라…… ’세상 사람을 다 한 가족처럼 생각하는 정신‘은 이미 꼬마 윤한봉이 실천하던 정신 아니던가? 합수의 동료, 임경규의 회고에 귀를 기울여 보자.

합수형님이 양심 있는 해외청년들의 공동체, 대동 세계를 만든 것 같아요. 해외에 살면서 ‘양심 있게 살자. 바르게 살자. 우리뿐만 아니라 양심 있는 타민족하고도 한 형제가 되어서 살자.’ 매일 그렇게 말씀하셨거든요. 우리의 공동체 대동 세계를 만들고, 양심 있는 타민족과 한 형제가 되자. 그렇게 활동하셨어요.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또 보았다. 정승진은 말하고 있었다. “합수정신은 결국엔광주정신이에요. 감히 외람된 말씀을 드립니다만 5‧18 정신을 제대로 계승하려면 합수정신을 제대로 계승해야 되요.” 나는 그제야 시카고 마당집에서 본 구호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바르게 살자’와 ‘굳세게 살자’는 다름아닌 항쟁정신의 표어였다. 그리고 ‘더불어 살자’는 대동정신의 표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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