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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33-김포공항 인터뷰2019-01-01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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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귀국 후


31. 김포공항


비행기가 고국 땅 위에 들어섰다. 광대하고 거친 땅, 미국의 대지와는 전혀 다른, 아늑하고 부드러운 땅, 늘 푸르른 땅이었다.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김포공항에 도착하자 승무원이 윤한봉 일행만 먼저 내리게 했다. 순간 또 체포되는구나 싶었다. 각오한 일이었다. 담담하게 입국장에 들어섰다. 여기 저기서섬광이 터지기 시작했다.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기자들과 환영객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두 팔을 번쩍 들어 만세를 해주세요! 기자들이 소리를 질렀다. 윤한봉은 고개를 숙였다. 기자회견장에 서자 이번에는 성명서를 발표해 달라고 요청했다. 성명서 같은 것은 없었다.


나는 도망자다. 오월 광주는 명예가 아닌 멍에다. 퇴비처럼 짐꾼처럼 살아가겠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는 자신을 부끄러운 도망자라고 생각했다. 버스를 타고 광주에 내려간 그는 다음날 아침 망월동 묘지에 찾아갔다. 윤상원, 박관현의 묘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흐느껴 울었다.
한국은 놀랍도록 바뀌어 있었다. 승용차가 거리를 메웠고 도시마다 아파트와 빌딩이 즐비했다. 학생운동은 급속히 약화된 대신 노동운동이 비약적으로 성장해 있었다. 민주화는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다양한 부문에 여러 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세워지고 있었다. 돌아온 한국은 윤한봉이 그토록 꿈꾸며 그리워하던 나라가 아니었다. 본인의 회고다.

조국의 하늘은 변함이 없었고 고향산천도 여전히 아늑했다. 그러나 수많은 아파트들이 서 있었고, 차량들이 내뿜는 혼탁한 공기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세속에 물든 옛 동지들의 얼굴에서 나는 세월의 무상함을 느꼈다.

일주일만에 다시 로스앤젤레스로 돌아갔다. 윤한봉은 멀리 여행 다녀온 사람처럼 로스앤젤레스가 편안했다고 고백한다. 다시 못 볼 줄 알았던 회원들을 만나보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고, 민족학교에 들어가 앉으니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로스앤젤레스는 윤한봉에게 제2의 고향이었다.


석 달 후 8월 18일 영구 귀국할 때 그는 민족학교의 채소밭을 자기 손으로 다 뒤집어엎었다. 힘이 들거나 울고 싶을 때면 혼자서 조용히 풀을 뽑고 물을 주고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던 텃밭이었다. 정들었던 텃밭을 남김없이 다 뒤집어엎었다. 돌볼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망명허가를 해주었던 미 국무성 앞으로 감사의 말과 함께 영주권 탈퇴서도 제출했다.
하지만 한청련을 잊을 수는 없었다. 지역별로 열린 환송식에서, 눈물 흘리는회원들을 향해 윤한봉은 다짐했다.

해외운동이 나를 조국에 파견한 것으로 생각하고 항시 여러분을 생각하며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지난 12년 동안 한국의 동지들을 생각하며 살았다면, 이제 미국의 동지들을 생각하며 살겠다는 이야기였다.
 

32. 실망


귀국한 윤한봉은 제일 먼저 영문 모를 에너지가 온 사회에 꽉 차있음을 느꼈다. 윤한봉의 순결한 영혼에는 그 기운이 어지럽고 답답했다. 숨이 막혔다. 무엇인가? 그는 오랫동안 숙려했다. 그것은 탐욕과 경쟁에서 방출되는 에너지였다.  

1970년대의 광주는 소박한 사람들이 사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도시였다. 돌아온 광주는 예전의 광주가 아니었다. 사람들의 눈빛에서 탐욕의 기운이 뿜어 나오고 있었다. 모두가 강남의 졸부를 닮아가고 있었다. 졸부들의 그 천박한 문화를 광주도 따라가고 있었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모두들 이 탐욕과 경쟁의 문화에 적응해 나갔지만, 불쑥 돌아온 윤한봉에게는 충격이었다. 사람의 생명이 별것이 아닌 사회가 되어 버렸다. 그는 절망했다.

돌아온 나의 조국은 정신도 혼도 없는 나라, 원칙도 질서도 없는 나라, 꿈도 감동도 없는 나라, 악독하고 살벌한 나라, 약자와 가난한 자를 돕는 나라가 아니라 도리어 짓밟아 버리는, 무서운 나라로 변질되어 있었다.
 

무서운 경쟁 사회가 되어 버렸다. 문화와 정신은 도외시한 채 부와 권력과 명예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한도 끝도 없이 경쟁하는 사회, 그것도 최고와 일류와 일등을 목표로 한 무한 경쟁을 시도하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 더불어 살 줄도 모르고 자족할 줄도 모르고 참다운 긍지도 모르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
악독한 사회 살벌한 사회가 되어 버렸다. 약한 사람 가난한 사람을 동정하기는커녕 도리어 짓밟아 버리는 소름끼치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 돈 좀 벌어보려고 온 가난한 타민족 노동자들에게 하는 짓들을 볼 때마다, 피눈물 속에서 이를 갈며 살아가는 그 분들, 한을 품고 진저리를 치며 돌아가는 그분들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 볼 때마다 윤한봉은 부끄러웠고 괴로웠다. 일본이나 미국에서 돈 벌기 위해 불법 체류하고 있는 우리 동포들도 이렇게까지 악독한 취급은 당하지 않는데.
꿈과 감동이 없어져 버렸다. 꿈과 감동이 많아야 할 청소년들에게도 그것은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세탁기 속의 빨래처럼 학교와 학원에서 공부에 시달리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꿈이나 감동이 있을 턱이 없다.
거의 모두가 들떠 있고 조급해 있었다. 장기적 안목과 안정과 여유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모두들 오줌 맞은 개미떼 같이 갈피를 못 잡고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거의 모두가 ‘날 좀 보소' 체질로 변해 버렸다. 사치와 허영, 허세와 과시가 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심해져 버렸다. 모두가 ‘돈만 벌어’ 체질로 변해 버렸다. 가난은 경멸과 혐오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모두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우직하면서도 성실하고 신의 있는 그래서 남 괴롭힐 줄 모르는 곰바우는 만나 보기가 어려웠다.


 어떻게 이렇게 타락해 버렸을까? 영구 귀국할 목적으로 조국에 나갔다가 못 살고 다시 나와 버린 재미동포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했던 말들을 윤한봉은 그제사 이해하게 되었다.


“무서운 사회가 되었어.”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져 버렸어.”


 귀국 후 첫봄 윤한봉은 그렇게도 보고 싶었던 진달래를 보기 위해 시골로 찾아갔다. 진달래마저 옛 진달래가 아니었다. 그가 그리던 진달래는 초동들의 낫에 잘려 다보록한 진달래, 앉아서 꽃잎을 만지고 향기를 맡았던 진달래, 소박한 시골 처녀 같은 진달래였다. 그러나 그가 본 진달래는 부잣집 정원에 있는 화사한 꽃나무 같은 진달래, 세련된 도시 아가씨 같은 진달래로 변해 있었다.
I2년 망명생활 동안 그는 외롭고 힘들 때마다 5월 영령들을 생각하며 이겨내곤 했는데 돌아와 보니 5월 영령들은 모든 영광과 명예를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는 일부 인사들에 의해 앞이 가려진 채 말없이 누워 계시고 옛 동지들은 진달래처럼 거의가 다 변해 있었다. 변했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미국화 되었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변함 없는 전라도 촌놈 합수로 살다가 돌아가자고,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운동하다가 돌아가자고 그렇게 무수히 다짐하며 살다가 돌아와 보니 윤한봉은 ‘박물관에서 방금 나온 사람’, ‘깡통 안 찬 거지’, ‘상처 안 받은 사람’, ‘꿈을 먹고 사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는 12평짜리 아파트에 살았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정부가 공급하는 영구임대 아파트였다.미국에 가기 전이나, 미국에서 돌아온 후나 그의 생활은 똑같았다.
돌아온 윤한봉, 그는 일체의 직책을 거부했다. 동료들은 김대중에게 인사하러 가자고 권했다. 그 시절 김대중의 집에 간다는 것은 금뱃지를 다는 것을 뜻했다. 1994년 김남주의 장례식에 김대중이 조문하러 왔다. 윤한봉은 김대중과 맞절을 하며 인간적인 화해를 했다. 하지만 아무 관계를 맺지 않았다.

 

 인자 박석무 선배가 국회의원인데 김대중 씨 모시고 온다니까 나는 저 짝으로 숨어 부렀어. 근데 박석무선배가 ‘야 한봉아 김대중 씨 오셨다 인사드려.’ 하는 거야. 할 수 없이 넙죽 인사를 했지. ‘그동안 미국에서 불미스러운 점 있었지만 이해하시라고. 나도 마찬가지라고.’라고 말했어. 김대중 씨가 꼭 집에 한번 오라고 글더라고. 그러고 안 가버렸지.(웃음) 다들 그랬다고. 내가 김대중 씨 찾아가면 무조건 공천, 그럼 무조건 국회의원 된다는 거지. 내 가까운 초등학교 깨복쟁이 친구들이 그래. ‘저 모지리 굴러온 것을 왜 버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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