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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촌논 합수2019-01-01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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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촌놈


민족학교가 고립에서 벗어나 막 자리를 잡아가던 1983년 10월, 윤한봉은 ‘한국청년연합(Young Koreans United)’을 추진했다. 불과 두 달 만에 한청련의 결성식을 가졌다. 1984년 1월 1일의 일이다. 샌프란시스코의 한 노동조합 건물에서 결성식을 가졌다. 수십 명의 청년들이 참석했다. 민족학교의 학생들 십여 명과 시애틀의 청년들이 주축이었고, 소문을 듣고 민족학교를 찾아온 뉴욕과 시카고의 청년들도 합세했다.

시애틀의 이종록이 전해주는 회고담은 윤한봉과 한청련의 실체로 우리는 안내해준다.

제가 윤한봉에 관한 얘기를 처음 들은 건 1984년경이었습니다. 80년 광주사태 때 활약한 운동가 한명이 미국으로 밀항해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조금 신기했습니다. 밀항하면 일본인데 미국으로 밀항이라니, 그냥 무용담처럼 들렸습니다.명문 예일대를 다니는 친구로부터 윤한봉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미국 보스톤에서 윤한봉을 만났다고 합니다. 1984년 그 무렵 윤한봉은 미국의 주요도시를 헤집고 다닐 때였습니다. 처음 본 윤한봉은 꾀죄죄했고, 말도 아주 투박한 촌놈이었다고 합니다.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은 대단한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지요.


어느 날 그는 윤한봉과 밤샘토론을 하게 되었답니다. 그들은 밤새 싸웠다고 합니다. 그의 진솔한 고백입니다. 처음 논쟁을 시작할 때 그는 엄청 기세등등했다고 합니다. 논쟁을 거듭할수록 윤한봉의 그 투박한 말투에 점점 수그러들어 갔고, 이튿날 아침에는 완전히 굴복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친구는 보스톤 지역의 한청련을 결성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깨달았다고 합니다. 엘리트들은 사물을 지나치게 객관적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남의 일처럼 본 것이죠. 반면 윤한봉은 현실을 나의 일로 보았습니다. 문제의 밖에서가 아니라 문제의 중심에서 행동하고 실천하는 민중적 사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죠. 그것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윤한봉은 미국의 주요 도시를 다니면서 아는 척하는 젊은이들의 의식을 깨부수고 설득하여 한청련 조직을 꾸려나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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