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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18-건강이 나빠지다2019-01-09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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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이 나빠지다


87년부터 내 몸에 조금씩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허리가 안 좋아 가끔 고생을 한 것 빼고는 앓아누운 적이 없는 건강한 체질이었다. 그런데 87년부터는 1년에 한 두 번 씩 나하고는 전혀 인연이 없던 감기에 걸리기 시작하더니 88년부터는 이가 흔들리기 시작하고 또 자주 허리가 불거져 나와 반듯하게 서서 걷지 못하고 구부정하게 서서 걸어야 했다. 89년부터는 깊은 잠을 못자고 하룻밤에 대여섯 번씩 잠을 깨곤 했다. 특히 89년 말부터는,허리가 한번 뒤로 불거져 나왔다하면 며칠 지나면 저절로 다시 들어가곤 하던 예전과 달리,한 두 달 동안 계속 그 상태를 유지해 나를 괴롭혔고,나 스스로 생각해봐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자주 신경질과 화를 내게 되었다.

그렇게 몸이 나빠지자 겁이 난 나는 90년 말을 기해 그 즐기던 담배도 끊어 버렸다. 할 일이 많은데 이러다가 폐인이 되는 것은 아닐까? 건강한 몸으로 조국에 돌아가야 하는데… 그러나 나는 회원들의 정성스런 보살핌과 정효정 씨와 김정주 선생님의 헌신적인 치료 덕분에 92년부터는 건강을 되찾게 되었다. 그렇지만 회복되었어도 그전처럼 밤새워 이야기하기가 쉽지 않을 정도의 건강이었다.


조국 운동에 대한 연대와 지원


한청련과 한겨레는 국제 외교 연대운동을 벌이는 한편 조국 운동에 대한 연대활동과 지원활동 또한 어려움 속에서도 헌신적으로 해나갔다. 85년이 되자 광주에서 연락이 왔다. 전국차원의 ‘5`18 광주 민중혁명 기념사업 및 위령탑 건립추진위원회’(5추위)가 결성 되어 모금운동을 시작했으니 미국에서도 호응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때는 조직역량도 아주 약하고 재정적으로 허덕이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한청련은 총력을 다해 모금운동을 펴기로 결의 하고 뜻을 같이 하는 동포들과 함께 조국의 그것과 같은 이름 의 추진위원회를 LA, 북가주,시카고,뉴욕,필라델피아 5개 지역에 구성했다. 그리고 1년 동안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많지는 않았지만 당시의 우리 처지나 역량으로는 대단한 액수인 2천8백만 원(약 3만5천 불)을 모아 전액을 조국의 5추위에 보냈다. 당시의 모금활동 때 LA 지역에서는 김수남 교수(조선대 교수)가 몇 개월간 직장까지 쉬면서 모금활동을 해 많은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또 86년의 조국의 직선제 개헌을 위한 서명운동에 연대해 뜻 있는 동포들과 함께 7개 지역에 민주개헌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서면 접수활동을 펴 한 달 만에 1만1천 명의 서명을 받아 조국으로 보냈다. 또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규탄투쟁에 연대해 뉴욕에서 5일간의 단식농성을 전개하고 전두환 정권 영구집권 음모분쇄를 위한 투쟁에 연대해서는 LA에서 10일간의 단식농성을 전개했다.

88년 조국의 백기완 선생님이 주도한 민족통일 마당집 한돌 쌓기 운동에 호응해 뜻을 같이 하는 동포들과 함께 캐나다 토론토를 포함한 10개 지역에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1년 동안 모금운동을 전개해 미주운동 사상 최대 액수인 7천만 원(약 8만5천 불)을 송금했다. 조국의 ‘국토순례대행진과 8.15 남북청년학생회담’,‘제1차 범민족대회’와 ‘한총련 출범식’에는 각각 두 명씩 대표를 파견했다.

피코 코리아 노조 대표단이 못 받은 임금을 받기 위해 미국에 와 피코 본사를 상대로 투쟁할 때와 미국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후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에 왔을 때 함께 농성과 시위를 하고 대표단 지원을 위한 모금운동을 펴는 활동도 했다. 재미동포가 사주인 조국의 US Magnetics사의 노조투쟁에 연대하여 LA에 있는 본사 앞에서 시위도 하고 결정적인 정보를 노조에 제공하는 등의 활동을 펴 투쟁을 성공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전교조 대표단의 북미주 방문 활동도 다각도로 지원하였다.

또 조국의 정치범들에 대한 옥바라지를 계속하는 한편 문규현 신부와 임수경 학생의 석방을 촉구하기 위해 워싱턴 포스트 지에 광고를 게재하고 김근태씨,김현장-김영애씨 부부,고현주씨,흥성담씨의 석방을 위해 두 차례에 걸쳐 10여 명의 미국 상 하의원들과 수십 명의 각계 지도자들에게 호소하여 석방탄원서를 노 정권에게 보내는 등 정치범 석방운동을 폈다. 조국의 ‘국가보안법 철폐와 장기수 석방을 위한 운동’에 연대하여 뜻을 같이하는 동포들과 함께 국가보안법 철폐와 양심수 석방을 위한 미주본부를 결성한 후 연대단식과 시위 등을 하였다. 조국의 평화운동을 위해 재정지원도 하고 각종 시청각 자료들도 보내는 등 조국운동에 대한 다양한 연대활동과 지원활동을 꾸준히 계속해 나갔다.

 

 

“거지들 모임 같다.”


나는 조국에서 운동을 할 때 뼈저리게 느꼈던 운동자금과 재정안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말로 할 짓 못할 짓 다 했다. 나는 운동자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운동가나 운동조직의 자세부터 바로 잡혀야 한다는 것이 평소의 생각이었다. 그에 따라 맨 먼저 회원들에게 헌신적인 참된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기본적인 자기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정도의 재산과 소득을 빼고는 운동자금으로 다 써야 한다는 것,그렇게 할 때만이 대중들의 후원을 떳떳하게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생기고 또 운동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것,운동가나 운동조직의 의식 수준이나,자세,규모,사업,활동 내용에 비추어 운동자금이 너무 적으면 운동의 발전이 없고 너무 많으면 운동이 타락하거나 내실이 없어지게 된다는 것을 누누이 강조했다. 또 운동조직은 자급자족의 원칙을 굳게 지켜 최소한 기본적인 운영자금을 성원들 스스로 마련하고 그 외의 자금은 대중의 후원을 받아 해결하되 절대로 사심이 담긴 조건을 단 후원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헌신적 자세로 올바르게 운동을 해 가면 대중들의 후원은 필연적이라는 것,단 1불을 후원금으로 받았을 때도 그 후원금을 내신 분은 그 1불을 조국과 민족을 위해 알차게 써달라고 우리들에게 위탁했다고 생각하여 책임감을 가지고 알차게 써야 하고 공개,합법운동을 하고 있는 만큼 꼭 결산서를 보내 결과를 보고해야 한다는 것도 강조했다.


내가 조국에서 운동할 때 가진 것도 없으면서 재산목록을 작성한 후 꼭 필요한 속옷,고무신,등을 포함한 20여 가지의 물건들만 남기고 나머지 것들은 동지들에게 다 주어버렸는데 그 때 나의 재산목록 1호는 손목시계였고 2호는 만년필이었다는 이야기와 운동자금 마련을 위해 동지들과 함께 빙과도 팔고 월부 책장사도 하고 포장마차를 운영하기도 했었다는 이야기 따위를 들려준 후 소득증대와 소비절약을 구호처럼 되풀이했다. 각 지역 마당집과 한청련,한겨레 회원들은 운동자금 마련을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했다. 깡통과 중고품 수집 판 매,판화제작 판매,마당집과 집회 시위장에서의 도서 자료 판매와 같은 기본적인 수익사업 외에도 일감을 받아와서 옷에 단춧구멍 뚫어주기, 부품 조립해주기,인쇄물 분류해주기도 하고 축제나 옥외 행사장에서 김치나 불고기 같은 우리 음식 판매, 발렌타인 날이나 어버이날의 길거리 꽃 판매,연말의 크리스마스 장식용 나무 판매도 해나갔으며 심지어 LA 한청련 회원들은 집단으로 영화 촬영장의 엑스트라로 나가기까지 했다.


수익사업 중 가장 고생이 많았던 것은 크리스마스 장식용 나무 판매사업이었다. 한청련,한겨레는 2년에 걸쳐 나무 판매를 해 2,400만 원(3만 불)을 벌었는데 다른 수익사업은 지역사업 이었지만 이것은 연합사업이었다. 많은 인력이 필요하고 11월 하순부터 크리스마스까지 한 달간을 하루 24시간씩 통째로 매 달려야 하는 참으로 고달픈 수익사업이었다. 각 지역에서 파견된 회원들과 일부 뉴욕 회원들은 뉴욕의 맨해튼 중심가 목 좋은 곳을 몇 군데 골라잡은 후,받아 온 나무들을 인도 한쪽에 쭉 늘어 세워 놓고 혹독한 추위 속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대소변도 제대로 못 보면서 가정집에 배달도 하고 훔쳐 달아나는 사람 추격도 하고 밤새워 보초를 서기도 하는 고생을 하며 팔았다. 나머지 뉴욕 회원들 또한 한 달 동안 판매하는 회원들에 게 끼니마다 따뜻한 국물이 있는 식사를 마련하여 갖다 주고 가끔 교대도 해주는 고생을 했다.


한청련은 재정안정을 위해 회원들에게 매월 내는 회비 외에도 고통 받는 조국운동가들을 생각하며 한 달에 두 끼씩 굶은 후 두 끼 값을 내게 하고,1년에 24시간씩 특별노동을 한 후 그 시간을 최저임금으로 계산해 돈을 내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87년부터는 남부조국 운동 지원을 위한 ‘황토기금’을 설립해 모든 회원들이 연초에 스스로 약정한 1인 1일 1불 이상씩 기금을 내도록 했다. 그것도 부족해 LA같은 지역에서는 담배 피우는 회원들에게 ‘신명세’ (남 생각 않고 담배피우며 신명을 내는 데 대한 벌금) 라 하여 매월 10불씩 내게 하는 등 점차 회원들의 기본적인 부담감을 늘려나갔다. 한청련,한겨레 회원들은 또한 조직에서 특별한 사업 활동을 할 때나 조국운동 지원을 위해 동포사회를 상대로 모금운동을 할 때,또는 특별한 손님이 와서 접대비가 많이 들어갈 때도 기부금을 내고 마당집에도 정기적으로 기부금을 내는 등 자신들의 재산과 소득에 비해 굉장히 많은 돈을 자발적으로 내놓았다.


한청련,한겨레는 의사와 같은 전문 직종이나 야채가게 같은 자영업을 하는 소득이 괜찮은 소수의 회원들과,저임금과 단순 노동으로 빈곤한 생활을 하는 다수의 회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마당집 상근을 위해 직장을 포기한 회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좋은 직장에 있거나 사업을 하던 회원들도 조직의 필요에 의해 타 지역으로 이사를 가기도 하고 조직의 사업 활동 때문에 가끔 직장을 쉬거나 영업을 태만하게 하는 바람에 소득이 줄어들게 되었다. 게다가 각종 부담금과 기부금까지 내야 해서 회원들은 점점 더 가난해져 갈 수밖에 없었다. 회원들은 좋은 자동차는 말할 것도 없고 쓸 만한 가구 나 전자제품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하게 되고 옷도 거의 못 사 입었다. 가끔 조국에서 나온 회원들의 가족, 친지,친척들은 그 렇게 가난하고 검소하게 대충 살아가는 회원들의 생활 모습을 살펴보고 ‘거지들 모임 같다.’느니 하면서 화를 내거나 빈정거리며 안쓰러워했다. 조국에서 나온 운동가들도 ‘이런 정도인 줄은 몰랐다.’며 놀라곤 했다. 한청련,한겨레도 조직적 차원에서 사업 활동을 할 때마다 비용을 줄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해방의 소리’ 순회공연이나 세계인권대회 참가를 위해 회원들을 유럽에 파견할 때도 밑반찬과 취사 장비를 가지고 밥을 해먹도록 했다. 여러 명의 회원들이 타 지역을 가야할 때도 비행기 값을 아끼기 위해 15시간 안팎의 거리는 자동차로 가게 했다. 마당집이나 행사장에 필요한 집기나 시설들도 가능한 한 회원들이 직접 만들어 쓰게 했다. 한청련,한겨레가 경비절감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가를 보여주는 예를 하나만 더 들어보겠다.


‘8월 대회’와 ‘10월 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마땅한 대회 장소를 구하는 문제였다. 우리들은 회의장과 숙소를 따로 쓰고 밥도 사먹어야 하는 호텔이나 야영장 같은 곳의 대회는 아예 꿈도 안 꾸었다. 2백여 명이 3일 동안 직접 해먹을 음식물을 손수 준비하고 직접 가져간 침구로 대회장 바닥에서 잠까지 잘 수 있는 사용료가 아주 싼 건물을 찾았다. 그러나 미국사회에서는 그런 식의 대회는 상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 조건에 맞는 건물을 구하기가 참으로 힘들었다. 그래도 언제나 우리는 끈질긴 노력 끝에 재정이 어려운 교회 같은 곳을 빌려 미국인 형제들의 표현을 빌자면 ‘집 없는 사람들의 회의’를 성공적으로 치러 내곤 했다. 돈을 아끼기 위한 우리의 노력 중 기억에 남는 일화가 하나 있다. 가끔 LA에서는 동포 운동단체 대표들이나 명망가들이 모여 회의를 하곤 했는데 회의장은 항상 식당이었다. 회의가 끝나면 참석자들이 음식 값으로 10불씩 내야 했다. 나도 그런 회의에 몇 차례 참석했는데 의미도 없는 회의에 갔다가 10불씩 을 내고 오는 것이 아까워서 회원들과 상의해 다음부터 그런 회의에 나가면 음식을 먹지 않는 대신 돈을 안내고 그냥 나오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결정한 후 그런 회의가 또 있어서 유선모,김한경 회원과 함께 나갔다. 모두들 맛있게 먹고 있을 때 우리 셋은 먹고 왔다면서 음식에는 손도 안대고 나오는 침을 몰래 삼키며 우두커니 앉아 있어야 했다. 괴롭기도 하고 슬퍼지기도 해 혼이 났다. 그 후에도 우리들은 몇 차례 그렇게 버티다가 도저히 안 되겠기에 방침을 바꿔 그 다음 회의 때부터는 사정없이 먹어버렸다. 그렇게 우리들이 운동자금을 마련하고 비용을 줄이기 위해 별짓을 다하고 있던 86년 초에 단비가 오듯 조국의 김지하 형님으로부터 난초 그림 18장이 왔다. 그 난초들을 하나에 평균 160만원씩 받고 팔아 얼마나 긴요하게 썼는지 모른다. 여하튼 시간이 흐르면서 각 지역 마당집과 한청련,한겨레는 늘어가는 동포들의 후원 덕분에 만성적인 재정난을 서서히 극복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회원들은 여전히 ‘거지’같이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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