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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19-굳세게 살자2019-01-01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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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굳세게 살자


윤한봉은 아이디어 상자였다. 언제나 기발한 아이디어를 쏟아냈다. 민족학교가 고립되면서 이사들도 문을 닫는 것 아닌가 생각할 때였다. 윤한봉은 활로를 찾아 나섰다.

1983년 5월 하순, 로스앤젤레스 프레스클럽에서는 수백 명의 교포가 모였다. 특이한 강연회였다. 광주항쟁 3주년 기념 강연이었고, 강사는 윤한봉이었다. 강사가 연단에 올랐을 때, 사람들은 의아해 했다. 저 청년이 문제의 윤한봉이라고? 지난 2년 동안 한인사회에서 파문을 일으켜온 문제의 인물, 어떤 이는 북한의 공작원이라 했고, 어떤 이는 안기부 요원이라고도 했던 문제의 젊은이, 그의 모습은 예상과 다르게 너무 소박했다. 두 눈은 매섭게 반짝였으나, 입가의 미소는 수줍었고, 옷차림은 허술했다. 연설은 우렁차지 않았다. 정치가의 선동적인 연설을 예상했던 기대와는 달리 그의 음성은 너무 여렸다.


최초의 대중연설이었다. 원고도 없었다. 방청객의 다수는 그에 대해 의심을 품은 사람들이었다. 강사는 깊숙이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하지만 청중들은 여전히 굳은 표정이었다. 뭔가 말꼬투리를 잡아내겠다는 도전적인 태도였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강연은 시작했다. 시간이 가면서 흥미를 더해갔다. 윤한봉은 먼저 자신의 밀항 과정을 밝혔다. 현재 정치망명을 신청했고 아직 판결을 받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어 광주항쟁의 진상을 소상히 전했다. 마지막으로 전두환 정권의 타도를 위해 동포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줄 것을 주문했다. 이 강연으로 악소문은 조금 해소되었다. 이렇게 민족학교를 널리 알린 후 윤한봉은 그 특유의 수완을 발휘했다. 수익사업이다. 여기저기서 동양화와 서양화, 붓글씨를 모았다. 1970년대 저항시인으로 유명했던 김지하가 난초 수묵화를 수십 장 보내주었다. 홍기완의 훌륭한 목공 솜씨로 표구를 했다.


윤한봉은 열정적으로 책을 모았다. 미국에서는 한국어 책을 찾기가 어려웠다. 어쩌다 살만한 책이 나와도 살 돈이 없었다. 어렵사리 책을 구해도 겨우 한 권이었다. 민족학교 학생들은 학습을 하기 위해 필요한 부분을 복사했다. 어떤 책은 통째로 90부나 복사한 적도 있었다. 어려서부터 기발한 농담을 하기로 유명했던 윤한봉은 지옥에 갈 죄의 목록을 작성해 유포했다. ‘술을 강제로 권하는 죄’, ‘소설책의 재미있는 부분을 찢어 버린 죄’, 여기에다가 책에 관한 죄를 신설했다. ‘책을 개인적으로 소유하는 죄’도 지옥에 갈 죄에 집어넣었다. 이런 농담을 하면서 좋은 책은 다 내놓으라고 협박을 하고 다녔다.


학생 모집이 큰 문제였다. 윤한봉은 역사 강좌를 전담했으나 학생이 없었다. 홍기완은 태권도 강좌를 열었고, 전지호는 문학 강좌를 열었다. 좀처럼 학생은 늘지 않았다. 강좌가 있는 날이면 윤한봉은 하루 종일 안절부절 못했다. 시작 시간이 가까워지면 건물 앞에 나가 담배를 피우곤 했다. 조바심 때문이었다. 새 학생이 오지 않나 들어오는 차들을 유심히 살피곤 했다.

 

하루는 ‘우리 노래 부르기’ 강좌를 열었다. 주최 측인 4명 외에는 단 한 명의 학생도 참가하지 않았다. 네 사람은 어색한 표정으로 둘러앉았다. 동요에서부터 민요와 가곡까지, 알고 있는 모든 노래를 목이 아프도록 불렀다. 창립 반년이 지나자 하나둘씩 청년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민족학교에 찾아온 청년들은 윤한봉에게 홀딱 빠졌다. 윤한봉은 숨기는 것이 없었다. 몇 시간이고 혼신을 다해 열변을 토했다. 소탈하고 수줍은 얼굴 그대로였다.

열댓 살 어린 후배가 오더라도 자기를 선생님이라 부르지 못하게 했다. 형이라 부르게 했다. 자신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찾아온 청년들은 그의 이런 소탈한 모습에 반해 버렸다. 청년들은 돌아가 자신의 친구를 데려오는 전도사가 되었다. 학생들이 늘어나면서, 고립되었던 민족학교는 한인운동의 새로운 세력으로성장하기 시작했다.


1983년 가을 윤한봉에게 조국으로부터 두 종류의 흙이 왔다. ‘잊지 말라’는 부탁과 함께 광주 동지들이 망월묘역의 흙을 보내왔고 이철용이 서울 꼬방 동네의 흙을 보내왔다. 한봉은 흙을 받은 날 밤 혼자서 조국을 떠나온 이후 처음 대하는 조국 땅을 만져 보고 냄새를 맡으며 ‘그래, 잊지 말자’고 다짐을 했다. 나는 그 흙들을 유리그릇에 담아 민족학교 한쪽 선반에 모셔놓은 5월 영령 위패 앞에 나란히 놓아두었다. 그 후에는 한라산의 돌과 백두산의 돌을 구해 그 옆에 나란히 놓아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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