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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6-동지애2019-01-01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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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따뜻한 밥


농민들과 가까워지다 보니 새로운 일을 맡게 되었다. 1978년 11월이었다. 정부의 미곡정책 실패에 항의하는 농민대회를 지원하게 되었다. 농민 대회는 추곡수매가 인상을 위한 투쟁방침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가톨릭농민회가 주최하여 전국에서 800여 명이 집결했다. 광주 계림동 성당에서 2박 3일간 열렸다. 처음 농민회에서 윤한봉에게 부탁한 것은 참석자들의 숙소 마련이었다. 준비된 돈은 빤하니 싼 곳을 얻어야 했다. 계림동엔 허름한 여인숙이 많았다. 윤한봉은 모든 여인숙을 뒤져서 방을 잡아 잠자리를 분배해 주었다. 숙소를 배정한 후, 더 해줄 일이 있느냐고 물으니 도시락을 해올 식당을 소개해 달라고 했다. 8백 명의 여덟 끼니였다. 순간 윤한봉의 뇌리에 떠오른 생각은 11월의 추위에 차가운 도시락을 먹이면 안 된다는 거였다.

 

날도 차가운디 고생하는 농민들에게 따뜻한 밥을 먹여야제, 어떻게 도시락을 먹여요? 내가 밥을 해줄게요. 재료비만 주면 내가 따뜻한 밥을 해 줄 테니 걱정 마쇼. 어이없는 제안이었다. “한봉 씨, 밥이나 지을 줄 아요? 팔백 명이면 솥이 몇 개 필요한 줄 아쇼? 그릇 숟가락, 젓가락은 또 어딨소? 우리 행사에서 제일 어려운 부분이 식사요. 식사 시간 못 맞추면 프로그램을 진행하지 못해요. 어떻게 책임지려구……” 모두들 반대했지만 윤한봉 한 사람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식사시간에 일 분, 일 초도 늦지 않게 따뜻한 국과 밥을 제공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지난 투쟁 때 보여 주었던 그의 정확한 실천력을 농민들은 부인할 수 없었다. “윤한봉 씨라면 믿을 수 있응께 한 번 맡겨보제!” 그것은 힘든 일이었다. 우선 800개의 밥그릇과 국그릇, 수저와 젓가락, 국자와 주걱을 구해야 했다. 쌀을 나르는 것은 물론 온갖 국거리와 김치 재료를 실어 나르는 것도 큰일이었다. 윤한봉은 필요한 식기도구의 목록을 뽑았다. 시장에 가서 빌린 다음 손수 손수레로 성당까지 끌고 왔다. 처음부터 끝까지 손에서 물이 마를 새 없이 설거지를 한 것은 윤한봉이었다. 이 대동의 잔치판, 윤한봉의 구술을 듣자. 윤한봉은 동료들을 이렇게 설득했다.

농민운동과 여성운동, 청년운동의 연대차원에서 이번에 우리가 따뜻한 밥과 국을 맛있게 끓여줘야 한다. 그런데서 신뢰가 싹트는 거다. 시위한다고 같이 악쓰고 그런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 깊은 신뢰는 이런데서 오는 거니까 일하자. 어려운 만큼 의미가 큰 거 아니냐, 그러니까 같이 하자. 마당을 파고 솥단지를 얹자. 솥단지는 내가 구한다. 솥단지 빌려오면 될 거 아니냐. 제재소에 가면 목재 빼내고 남은 피죽이 많이 있다. 고거 리아카로 실어 나르면 되지 않느냐. 고놈 때면 된다. 그릇을 어디서 구해? 대인시장 같은데 가면 수저 젓가락 국그릇 밥그릇 전부 빌려준다. 


그래갖고 괭이로 성당 마당에다 파고 솥단지하고 국솥 걸고, 하여간에 난리를 꾸몄어. 그릇 씻을 때 내가 앉아서 행구고 그때 43명이 총 동원이 됐어. 국통 들고 나르다가 손이 빠져갖고 엄지발가락 빠져브렀제. 이른 겨울이 찾아와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 데다 성당 마당에는 눈까지 내렸다. 장작불을 때서 여덟 끼니를 보급하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8백 명이 한꺼번에 밥을 먹을 공간이 없었다. 매 끼니마다 식사를 마치기까지 두 시간이 걸렸다. 한 번도 시간을 어겨본 적이 없었다. 

일이 끝난 건 아니었다. 마지막 뒷정리까지 다 하고 깨끗이 닦은 식기도구들을 시장에 돌려주었다. 식기 도구들은 이삿짐만큼이나 높았다. 후배들이 바퀴가 터질 듯 하는 손수레를 직접 끌고 힘겹게 성당을 나서고 있었다. 추위에 몸을 떨며 지키고 서있던 형사들이 뒷전에서 혀를 찼다. 윤경자는 회고한다.

 

마지막까지 계속 물 묻히고 있었던 사람은 오빠야 남자 중에서는. 끝까지 같이 설거지 해주고 그 대회를 그렇게 치렀다고. 마지막에 정리까지 해서 짐을 구루마 끌고 나가는 걸 보고 경찰이 저 지독한 놈이라고 얘기했대.

쌀 생산자 대회를 지원하는 윤한봉의 가슴은 농민들의 투쟁을 돕고자하는 일념으로 불탔다. 깊은 신뢰는 악쓴다고 시위한다고 생기는 게 아니라, 어려움에 처한 이웃과 동고동락하는 과정에서 나온다는 윤한봉의 말이 가슴에 다가온다. 말로 하는 운동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운동의 전범을 그는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그와 함께 쌀 생산자 대회를 도운 윤한봉의 지인들, 광주의 운동권 식구들이 총 43명이었다. 윤한봉은 43명이라고 하는 이름 없는 무리의 리더였다. 그는 명령을 하지 않았고 설득을 했다. 불을 때고, 설거지를 하고, 마지막 식기류를 돌려주는 그 순간까지 모든 일의 선두에 서서 솔선수범했다. 윤한봉은 몸으로 규율을 세우는 운동의 새로운 풍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윤한봉에게 헌신과 봉사는 삶의 기본이었다. 모든 활동은 봉사였다. 하지만 그의 활동은 봉사로 끝나지 않았다. 그가 제안하고 주도하는 모든 활동은 조직을 만들어내고 조직을 단련시키는 용광로였다. 조직은 투쟁의 무기였고, 투쟁은 조직을 제련하는 과정이었다. 쌀 생산자 대회를 거쳐 송백회가 단련되어가고 있었다, 그 송백회가 1980년 5월 도청의 주먹밥을 주도했다.


6. 옥중의 죄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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